고린도 전서 11장은 여자가 수건을 쓰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래 글은 여자가 굳이 수건 쓸 필요없고 긴 머리면 족하다는
주장에 대한 이견입니다. 핵심 신앙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나 균형잡힌 인식을 위해 소개합니다.
출처
http://www.antioch.co.kr/Antioch/MessageBoard/View.aspx?MessageBoardID=613글쓴이 정00
제 목 여자의 너울과 하나님의 영광
여자의 너울과 하나님의 영광
형제님! 좋은 말씀과 격려를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꾸벅 ^^*
저는 2월22일에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24일부터는 셀교회(가정교회)수련회에 참여케 됩니다. 형제님말씀처럼 중국교회를 경험하는 것이 성경에서 구현되는 교회를 목도하는 좋은 기회일텐데 중국교회를 저도 한 번 경험해 보고 싶군요. 항상 제가 선 자리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그에 순종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형제님께서 너울에 대해 일일이 답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기대치도 못했는데..^^*
저는 교회에서 자매들이 너울(covering)을 덮는 것과 구원받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공중모임에서 덮는 여자의 너울에는 단순한 "풍습" 그 이상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질서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고린도전서 11장을 묵상해왔지만 이 부분에서 계시되는 진리에 대해서는 성령안에서 아주 분명하게 확신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박만수 형제님께서 해석하시는 것이 다르다 할지라도 이 부분이 저희들의 하나됨을 갈라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다만 안티오크 게시판이 항상 변론의 장(場)이 되기보다는 서로에게 삶의 유익이 삶가운데 이루어지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이며 눈에 보여지고 손으로 만져지는 성령의 역사가 나누어질 수 있기만을 바랍니다.
요새 저녁에 오면 지쳐있는데다가 기도하고 말씀 좀 묵상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밥하고, 배가 불러오는 아내챙겨주고, - 입덫이 심해서 밥냄새조차도 싫어하니 여간 고생이 아닙니다 ㅜㅜ - 컴퓨터 앞에 앉아 이렇게 짬내서 토닥토닥 글쓰기가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닙니다. 새벽일찍 일어나야 하니깐 11쯤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하니깐요. 게다가 형제님과 글을 주고 받을 땐 더더욱 글을 꼼꼼하게 써야 하거든요. - 지금 귀여운 아내를 옆방에 재우고 이제야 글을 씁니다. ^^*
그래서 다만 짧은 글로만 교제하고 추천글을 링크해 놓을께요. 여자의 너울에 관한 부분은 시간이 허락 되는대로 다시금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 형제님께 고마운 마음입니다.
먼저, 형제님께서 여자의 머리덮는 문제를 단순히 머리스타일 문제로 다루신 것에 대해 약간 의아스럽습니다...^^; 고전 11:5-6만 자세히 보더라도 이미 그것은 단순히 머리의 길이를 다룬 머리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분명히 머리를 덮느냐 안덮느냐(머리길이가 짧냐 안짧냐가 아니라)에 대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답니다. 물론 머리스타일문제도 있지만, 그것은 바울이 원래 말하고자 핵심논지가 아닙니다(5절 하단 as if구문 주의!). 대부분의 주석서들도 이 부분이 여자의 너울문제를 다루는 것이라는 점에 일치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현재의 교회가 지켜야 할 규례인가 아니면 단순한 풍습인가에 대해서만 이견이 있을 뿐입니다. 참고로 영어로는 cover가 "덮다"라는 말이지만, 한글용례상 국어는 너울을 "쓴다"고 표현하기 때문에 개역성경이 그렇게 번역한 것 같습니다.
두 번째, 형제님께서 주님의 만찬과 침례만을 교회의 유일한 규례로 보셨지만, 여자가 너울로 머리를 덮는 것도 교회의 규례에 속합니다. 고전 11:2에서 규례에 대하여 언급한 후 곧장 너울문제가 다루어집니다. 잘 보십시오. 고전 11장 첫부분에서 교회의 규례에 대해 언급한 후 여자의 너울덮는 문제와 주님의 만찬이 "함께" 다루어지고 있답니다.
세 번째, 여자가 너울로 덮고 공중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이교도 관습이라고 말씀하셔서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남녀 공히 공중모임 때 머리에 너울을 덮었으며, 출애굽당시의 유다인들도 썼습니다(레 10:6). 반대로 헬라인들은 남녀모두 공히 공중모임 때 너울을 머리에 덮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공중모임에서 여자가 머리에 너울을 덮는 것은 이교도 풍습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네 번째, 고전 11:16의 "such custom"은 "이러한 풍습"보다는 "그러한 풍습"으로 번역함이 더욱 합당하다고 봅니다. 한글개역, 권위역, 흠정역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한글성경(한글킹제임스, 표준새번역, 현대인, 현대어, 공동번역 등)들이 "그러한 풍습"으로 이해하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이 부분에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고전 11장의 문맥을 보면 지금 바울은 시종일관 여자가 교회의 공중모임에서 머리에 너울을 덮을 것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such custom"은 바로 바울의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풍습, 즉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덮지 않는 풍습을 말합니다. 만약 "이러한 풍습"으로 번역하게 되면 바울의 고전 11:1-15까지 전개되는 논지와 마지막 결론인 16절이 상충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각설하고, 제가 일일이 글을 쓰기 보다는 그런대로 잘 정리된 글을 발췌하겠습니다. 출처는 이귀우형제님의 홈페이지입니다(
http://www.geocities.com/gwlee.geo/covering1.htm)
박만수 형제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빚진 자 올림. 꾸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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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너울과 하나님의 영광
Woman's Head Covering & The Glory of God
-Dr. Peter H.L. Wee 지음
1. 서론
(1) 너울 쓰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
(2) 너울에 관한 지지
2. 고린도전서의 개관
(1) 용어 - "영광"과 "영화롭게 하다"
(2)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과 하나님의 영광
3. 너 울
(1) 너울을 쓰는 규례의 중요성
(2) 하나님의 영광.
(3) 창조와 출생에 있어서의 평등성과 상호의존성
(4) 너울의 중요성
(5) 여자의 개인적인 영광
(6) 규례가 확립되다(The Custom Established)
(7) 요약.
4. 실제적인 적용에 대하여
(1) 여자들에 관하여
(2) 남자들에 대하여
(3) 장로들에 대하여
5. 결 론
1. 서 론
신약성경 중에는 사람들이 무시하고 소홀히 여기고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한 부분이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부분의 말씀이 불러일으킬 논쟁을 피하자는 것이고, 또 일부는 현대 시대와는 무관한 구절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이 부분이 남성에 대해 여성의 종속과 열등함을 내포하고 있다는 이유로 거부할지도 모른다. 어떤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이 부분을 자주 다루기 보다는 이 부분의 말씀을 피하거나 오늘날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싶어한다. 또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의 실효성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성경에 없어서는 안될 한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 안에 있는 매우 중요한 목적을 위해 성령의 감화로 사도 바울이 옮겨 쓴 것이다.
이는 고린도전서 11:1-16의 말씀을 말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함이라"(디모데후서 3:16).
우리가 이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 부분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의깊게 상고하고, 분명한 결론을 짓는 것이 올바르고 적절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바울이 가진 남성 우월주의에 대한 하나의 불합리한 예로 여기거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한정된 낡은 규례 또는, 진보된 현대의 기계 문명시대에서는 버려져야 할 지역적이고도 구시대적이며 일시적인 관습으로 여겨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많은 교회들에서, 자매들은 만찬예배와 기도모임 그리고 기타 집회들에서 이 명령을 따라 그들의 머리에 너울을 쓰고 , 형제들은 머리에 쓰지않는 이 신약의 원리가 실천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에는 그렇게 행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순종하여 이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높이 칭찬할 만한 일이다.
(1) 너울 쓰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
교회들 중에는 자매들이 너울을 쓰는 것을 격려하지 않고 또 간접적으로 쓰는 것을 반대하는 곳이 있다. 그 이유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고대의 관습
사람들은 "이 부분의 말씀은 사도 바울 시대의 고린도 여자들에게만 적용이 된다는 생각이다. 당시에 정숙한 여인들은 머리와 얼굴을 가리고 다닌 반면, 매춘부와 같이 평판이 나쁜 여자들은 머리와 얼굴을 가리지 않고 다녔다는 말이 있다. 올바른 사회적 관습을 준수하고 불신자들을 거슬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리스도인 여인들은 예배와 기도를 위한 모임에서 그들의 머리에 써야만 했다! 그러므로 너울에 관한 명령은 지금 그 관행이 사라졌듯이 현대 그리스도인 여성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찾아보아도 고린도전서 말씀에서는 이런 이유가 제시된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다만 인간적인 관점에서 편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의 소유자는 주님이 이루신 영적이고 전체적인 변화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여성과 믿지않는 여성 사이의 단순한 외형상의 차이점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2) 너울의 성격
너울이란 머리와 얼굴, 심지어 온 몸을 완전히 가리는 베일을 가리킨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만일 한 여자가 있는데 몸 전체를 가리는 베일을 하지 않고 머리만 가렸다면 그녀는 말씀의 요구에 따르지 않은 것이며 아예 쓰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주제와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다. 너울은 하나의 상징물이며 상징물이란 반드시 일정한 규격에 반드시 맞추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3) 개인적인 신념
이는 교회 안에 있는 자매들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문제라는 생각이다. 만일 그들이 머리를 가릴 필요를 확신한다면 아무쪼록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라. 그렇지 않다면 머리를 가리지 않은 대로 두라! 즉 그들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 말씀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대신 우리의 신학 논리에 맞는 말씀을 선택하는 위험성을 보게 된다. 이렇게 성경 말씀을 임의적으로 선택하는 것과 자신이 믿기에 따라야 할 말씀이라고 따로 구분짓는 행위, 그리고 그릇된 부분이라고 판단하며 거부하는 행위는 과거의 두 가지 과오를 떠올리게 한다.
AD 2세기에 마르키온(Marcion)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대로 성경을 해부하였다. 그는 누가가 집필한 부분과 몇몇 바울 서신서들을 남겨두고 다른 모든 성경은 버렸다. 그럴 때 성경은 한 개인의 판단력의 지배를 받게 되고 한 개인의 판단력은 성경을 지배하고 성경 위에 올라서게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재판관이 되는 것이다 !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떠오른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사사기 21:25).
4) 바울이 한 언급의 명백한 모순성
15절에서 사도 바울은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여자의 긴 머리가 이미 쓰는 것을 대신한다고 말하면서 왜 6절에서는 또 너울을 써야 한다고 언급하는가? 이는 불필요한 말이며 바울의 말은 모순적이라는 주장이다. 이 문제는 성경 말씀 자체를 자세히 상고해 볼 때 그 해답을 얻게 될 것이다.
5) 여성의 종속과 복종의 문제
이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본문에서는 결혼한 여성만을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결혼한 자매들만이 그들의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혼하지 않은 자매는 너울을 쓸 필요가 없다. 남성우월주의와 지배주의, 그리고 모든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복종에 대한 명백한 암시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혐오감을 안겨주며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관념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멀리하는 것이 마땅하다. 만일 너울을 쓰는 행위가 함축하고 있는 것이 모든 여성은 나이의 노소관계나 영적인 성숙도에 관계없이 모든 남성에 대하여 복종해야 하는 것이라면, 여성들이 그들에게 놓인 이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이해할 만 하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이 남성우월주의나 아내로서의 복종, 그리고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일반적으로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된다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보다는 좀더 고귀한 목적이 본문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이밖에도 너울을 쓰는 것에 대한 반대 주장들이 있지만 성경은 분명한 해답을 지니고 있다.
(2) 너울에 관한 지지
한편으로, 여자들의 너울을 쓰는 문제에 대해 지지하는 많은 글들이 특히 지역교회의 형제 자매들에 의해 씌어졌다. 그러나 보통 대부분 그 주제에 관해 매우 간략하게 다루고 있을 뿐이며 그것도 "창조질서, 구속질서, 교회질서"의 테두리 안에 그치고 있다.
대개의 경우, 너울을 쓰지 않는 것은 주님의 명령을 거스리는 것이라는 생각만으로 충분한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모호하고 때로 불충분하다. 그래서 어떤 이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너울에 관한 문제를 좀더 상세히 다루어주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들은 너울의 문제를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의 표현으로 다루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 미혼 여성들은 너울 쓰는 것을 거부할지도 모른다. 또 불신 남편을 둔 자매들은 너울의 필요를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너울의 문제를 자매들의 분별과 기분, 또는 취향에 따르도록 내버려둔 교회들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신실함을 구별 짓는 징표) 하나님의 말씀을 줄곧 순종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해왔다. 그러나 나는 그 불순종의 명확한 이유를 지적해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에 관한 많은 주해서들 -W. E. 바인이나 F. F. 부르스, 레온 모리스, 매튜 헨리 그리고 윌리암 바클레이- 과 여러 사전과 책들을 살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이 모호하기만 하였다.
최근에 들어, 나는 너울을 쓰는 규례(practice)에 관한 여러 교회들의 상이한 태도에 대해 더욱 흥미를 갖게 되었고, 그러면서 많은 주해서에서 다루고 있는 것처럼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의 문제나 매춘부와 정숙한 부녀를 구분 짓는 지역적 관습의 문제로 단순히 취급될 성격의 말씀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그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어찌하여 여자는 너울을 써야 하고 남자들은 쓰지 말아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너무도 명백하게 말하고 있으며, 성령의 명령을 받아들일지 거부할 지의 여부를 개인의 분별에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 말씀은 모든 하나님의 교회, 모든 모임이 중요한 하나의 진리를 가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명령에 순종하도록 주신 말씀이다. 나는 평범한 생각대로 그 명령이 여성이나 아내 된 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결혼 여부를 떠나 모든 남자와 여자에게 하신 명령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 목적은 7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너울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이나 남편들의 아내에 대한 지배와 상관이 없으며, "교회질서"나 그밖에 제시되었던 다른 모호한 이유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났다는 창조질서와 간접적인 연관이 있다. 남자들은 그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말고 여자들은 머리에 쓰도록 말씀하신 명령은 하나님의 영광에 가장 중요한 관련이 있다 .
논쟁의 여지가 많은 이 장은 고린도전서의 나머지 부분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으며 확실히 연관이 있다. 여기에서 잠시 고린도전서 전체 서신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2. 고린도전서의 개관
많은 주해학자들은 고린도전서에 대해 설명하기를, 매우 어려운 서신서라고 말한다. 사도바울이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심히 다양한데다, 그 범위가 넓고 서로 연관이 없으며 내용이 다른 주제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로마서에는 "하나님의 의"라는 주제가 전체 말씀을 실처럼 묶어주고 있고, 빌립보서에서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가장 눈에 뜨인다. 모두 다른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는 고린도전서에 대하여 굳이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행실"이 여러 다양한 표현들 가운데 가장 적절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10:31 말씀에 근거하여, 나는 "그리스도인의 행실 중의 하나님의 영광"이 고린도전서의 주제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인의 행실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그 서신서에서 바울에 의해 제기된 모든 산만한 문제들을 묶어주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완성으로서 믿는 자의 부활의 영광을 클라이맥스에서 다루고 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 각자의 삶의 모습, 심지어 그들의 잘못된 행위와 습관들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공동체적 삶에 나타난 문제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다룬 후에 더욱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1) 용어 - "영광"과 "영화롭게 하다"
"영광"과 " 영화롭게 하다"의 단어들은 두 개의 그리스 단어를 번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먼저, doxa라는 단어는 하나의 영어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여러 의미를 갖고 있다. Doxa는 "밝음, 광채, 찬란함, 웅장함, 명성, 유명함, 명예"를 의미하지만 glory라는 단어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동사는 doxazo (I glorify)이다. 이는 고린도전서 2:7,8; 6:20;10:31; 11:7,15; 15:40,41,43 절에서 사용되었다.
"glory"로 번역된 두번째 단어는 실제로 "스스로 영광을 취하다" 또는 "자랑"의 의미가 있다. 그 단어는 "I glory" 또는 "I boast"의 뜻을 갖고 있는 kauchaomai이다. 이는 고린도전서 1:29,31; 3:21; 4:7; 5:6; 9:15,16 절에서 사용되었다.
이 self-glory 와 유사한 단어는 자만하다(I puff up)의 의미를 갖고 있는 physioo이다.
- "오만한", "자랑하는", "자만한", "거만하다"의 뜻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 이는 고전 4:6,18,19; 5:2; 8:1; 13:4에 쓰인다.
이 세 단어들은 고린도전서 말씀 전체에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첫번째는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영광을 연상케 하며 나머지 단어들은 스스로 영광을 취하다, 자랑, 또는 거만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2)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과 하나님의 영광
오늘날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처럼 고린도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광을 위하고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사는 죄를 범하였는데 이것이 그들의 모든 분쟁과 부도덕한 행위의 뿌리였다. 그들은 대부분 최근에 이방의 헬라 문화적 배경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인간의 재능과 업적- 인간적 지도력, 인간의 지혜와 지성, 지식, 이해력과 말재간, 과시욕-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은 영적인 미성숙과 세속성의 증거였으며 따라서 그들이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받았지만 이 은사들 또한 오용되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과 많은 은사들에 대해 감사를 나타내면서 편지의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 그는 고린도 성도들이 그의 가르침을 청종하는 것을 칭찬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가 전해들은 그들의 문제들에 대해 다루기 시작한다.
그들의 분파주의와 단지 인간에 지나지 않는 지도자를 추종하여 숭배하는 문제를 훈계하면서, 바울은 다음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1:29).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1:31).
다음으로 인간의 지혜와 지식 , 웅변술 등을 높이는 문제를 다루면서, 바울은 말하기를 인간의 말재주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의 영광이라"(2:7)하며,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무지가 이 세대의 관원들로 하여금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였다" (2:8)고 말한다. 하나님의 일들을 깨닫게 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가 아닌 성령이시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의 육신에 속한 것과 사역(Christian service)에 대한 부적당하고 잘못된 개념에 대하여 쓰면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3:16)과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3:21)는 말씀을 상기시키고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공력에 따른 상과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계속하여 말하기를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말라"(4:6)고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받은 것 가운데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4:7) 바울은 여기에서 비웃는 어조를 더하여 그들의 " 교만함"을 경고하고 있다(4:18,19). 이어서 성적인 부도덕, 특히 간음과 결혼의 문란함에 대하여, 바울은 그들이 이방인보다도 못한 행동을 하면서도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통한히 여기지 아니한다."(5:2)고 꾸짖고 있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왜냐하면 적은 누룩(=악)이 온 덩어리에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5:6).
서로 송사하는 문제에 대하여, 믿는 자로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형제를 세상 법정에 송사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를 지적한다. 그리고 또한 결혼의 신성함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그는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6:19,20) 사실을 반복하여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는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6:20).
그는 결혼관계에 대하여 상세히 진술하며, 우리가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7:23)고 강조하는데, 그 안에는 우리가 사람을 영화롭게 하지말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뜻이 다시 한번 담겨있다.
우상의 제물에 있어서 약한 양심을 지닌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는 것을 두고, 바울은 그들 사이의 지식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하기를 교만하여지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인도하라고 말한다(8:1).
바울은 이제 그 자신의 사명으로 화제를 돌린다. 그는 그들 수준으로 낮아져 전적으로 당연한 논리적 사고에 호소하면서,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다"(9:15,16)고 단호하게 말한다. 바울은 구약의 예를 들어, 고린도 성도들이 출애굽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경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죄악들에 - 악을 즐기는 것, 우상숭배, 간음과 성적 부도덕, 하나님을 원망함 - 대한 하나님의 훈련을 열거하였다. 그리고 믿는 자들이 자만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 있다. -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12). 바울은 주의 만찬상에서의 분열을 언급하고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어서 분쟁을 일으키는 것에 대하여 거듭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권고에 다가선다.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
자, 이제 우리가 토론할 장에 도달하였다.
성도 각 개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제까지 고려한 후에,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삶에 대해 말한다. - 예배와 기도 모임, 주의 만찬에의 참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에서의 영적인 은사의 활용(11-12장 ), 그리고 모든 은사들 간의 형평을 유지시키는 것으로 "오래참고 온유하며 투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자신의 유익을 구치않는"(13:4,5) 사랑이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병을 치료하는 약이라고 말하며 영적인 은사의 사용에 있어서 교만하지 않을 것에 대해 주의를 주고 있다.
- 마지막으로, 바울은 부활에 대하여 그리고 부활한 우리 몸의 비길데 없는 영광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마무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절정인 것이다.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다"(15:41-42). 그는 58절에서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 우리의 선행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자.
3. 너 울
자, 이제부터는 고린도전서 11:1-16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권면을 받아왔다. 따라서 예배나 기도를 위해 모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우리에게 준 숙제이다.
배경은, 주의 만찬으로 주께 경배드리고 기념하기 위해 모인 성도들의 모임이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천사들이 믿는 자들이 드리는 예배의 증인으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그곳은 무질서하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기도하고 말하며 머리를 덮지않은 반면에, 몇 사람의 남자들은 기도하고 말하는 중에도 머리에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바울 시대의 관습들에 대하여 주목해 보자. 유대의 남자들과 여자들은 기도할 때에 모두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였다. 로마의 남자들과 여자들도 또한 머리에 썼다. 헬라인 남자들과 여자들은 아마 유대인처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만큼, 머리에 쓰지않고 기도하고 제사를 드렸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는 구원받은 유대인과 로마인, 그리고 헬라인들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직면하였던 상황을 설명해준다. 바울은 여기에서 타락한 남자들과 여자들로 구성된 교회가 왜 그 시대의 관습을 뛰어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교회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이었다. 그 안에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는 교회가 생겨난 지 이미 30년이 지난 때였다. 그는 다만 그 당시의 교회에 이미 익숙한 한 규례를 글로 써서 재차 반복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각지의 모임들 가운데에서 단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 규례를 상기시키고 있다. 고린도인들은 종종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위규범을 무시하고 그릇 행하였던 것처럼, 이 규례를 또한 무시하고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대인과 로마인 그리고 헬라인과 달리 그리스도인은 그것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였기 때문에 그 규례를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바울은 그 문제를 택하여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천사들 앞에서 어떻게 질서있게 예배드리고 찬양해야 할지 설명하였다.
여기에서 잠시 멈추고, 사람들이 본문 말씀을 읽을 때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보자. 아마 바울이 그의 노력을 다해 여자들에게 머리에 쓰도록 지시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남자들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않고 있으며 따라서 남자들은 그 명령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체 단락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바울이 여자들만을 택하여 너울을 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 바울은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모두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들 모두가 분명한 목적을 위해 주님으로부터 온 그 쌍을 이룬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남자는 그의 머리에 써서는 안되고 여자는 반드시 머리에 써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가 제시한 두가지 문제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
1. 왜 너울을 써야 하는가?
2. 왜 여자는 머리에 쓰고 남자들은 쓰지않는가 ?
(1) 너울을 쓰는 규례의 중요성
그러면 그 사도가 어떻게 설명과 논리를 전개하는지 살펴보자. 첫 번째로 다음을 보자.
1) 너울의 근거 - 주님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이 서신서의 가르침에 대하여 나옴직한 모든 반대 의견들을 예견하고, 다른 서신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 짧은 어구를 그의 인사말 안에 적어넣었다. 진실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영원의 주님께서는 우리 20세기의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이(Laodicean sprit) 믿는 자들까지도 고린도전서의 중요성과 가치를, 특별히 너울의 문제에 있어서 의심하도록 이끌 것이라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보이지만 엄청난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짧은 구절이 고린도전서 1장 2절의 사도의 인사말 안에 적절하게 삽입되어 있는 것이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또 각 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이 짧은 문구 하나만으로도 이 서신서의 가르침에 대한 즉각적이고 자발적이며 겸손한 순종이 일어났어야 했다. 그것은 거의 2000년 동안 이루어졌으나 자유신학이 신앙을 고백한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자, 진정한 교회의 성도들까지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로마서는 로마인들을 대상으로 씌어진 것이지만, 우리는 그 가르침이 시대를 초월하여 각 처에 흩어져있는 모든 신자들에게 구속력이 있으며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라고 받아들인다.
고린도후서는 아가야에 있는 모임에 쓴 것이고,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에, 빌립보서는 빌립보에 쓴 것으로 바울의 다른 서신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서신서들 안에 어떤 내용이 있든지 그것이 모든 시대의 모든 모임들에 관련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사실 그 안에 그런 지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특별히 "각 처에서"라고 주목할 만한 어구를 사용했지만 그 반응은 의심과 불신, 그리고 거부였다. 즉, 고린도전서가 모든 믿는 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것에 대한 거부요, 바울이 단지 고린도 교회만을 교훈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들을 위해 쓴 것 이라는 사실에 대한 반대이다. 사람들은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며 하나님의 교회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른 서신서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각 처에서"라는 특별한 언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 서신서가 전 교회시대를 거치면서 각처의 모든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 의해 읽혀지고, 그 말씀을 따라 행동하였고, 순종하며 그대로 따라 실행되었다는 사실보다 이 서신서가 고린도 성도들에게만 제한되거나 한정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은 없다. 아무도 제외되거나 면제되지 않았다. 시간은 이 서신서에 담겨있는 진리들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교회 시대 동안 모든 교회는 그 서신서의 영감있는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하였고, 그것을 쓰게 하신 주님은 그분의 가르침에 주의하지 않는 것에 결코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 말씀의 적용의 보편성에 대하여, 그 누구도 의심하거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거부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또 전 교회역사 시대의 모든 믿는 자들이 고린도전서에 있는 바울의 가르침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은 그의 서신의 말미에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전 14:37)고 단호하고 명백하게 덧붙여 언급하고 있다.
애찬(愛餐)이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 안에서의 은사(恩師)의 활용에 대한 것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1장의 너울에 대한 것과 14장의 남자와 여자의 다른 역할에 대한 가르침도 주님의 명령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들 중에 누가 감히 이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들 중에 누가 감히 그것에 반대하거나 저항하거나 이를 업신여기거나 부정할 것인가? 누가 감히 그것에 불순종할 것인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이 명령들을 내리신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주님 , 바로 그분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고전 3:12-15; 고후 5:10; 롬 14:10). 내가 오랫동안 이 중요한 진리에 대하여 의심하고 불신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온 몸이 떨려온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이끌어준 형제에게 매우 감사한다.
11장에서 14장에 걸쳐서 바울은 너울 문제와 교회 회중의 다른 측면들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서두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11:1)고 말하며, 그의 가르침을 시작한다.
많은 주해학자들은 이 절을, 뒤따라오는 절들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지않고, 그 이전의 단락에 이어진 절로 본다. 이것은 아마도 새로운 주제를 시작할 때 사용하는 "Now"라는 영어 부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2절의 "Now"로 옮겨진 헬라 접속사는, 3절의 "But"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Arndt와 Gingrich는 연결을 위한 간단한 접속사가 요구될 때, 그 말은 "and"로도 번역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 접속사는 번역하는 사람에 따라 "now"나 "but"나 "and"로 다양하게 옮겨질 수 있다. 따라서 2절에서 "Now"대신 "And"로 옮긴다면 우리는 1절의 바울의 언급 이면에 있는 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 말씀은 앞의 부분 즉 1:1-10:33의 말씀과 뒷부분의 11:2-16장까지 말씀을 연결하는 것이다. 그 말씀은 나뉘어진 양쪽에 모두 해당하는 말씀이며 사도 바울의 권위의 근원을 나타내고 있다.
"본받는다"는 단어는 다른 사람이 행하는 것을 그대로 행한다는 의미이며,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다. 즉, 그의 가르침과 행한 것을 따르라는 말이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권위에 대하여 짚고 넘어가고자 하였다.
그는 그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다. 우리가 이에서 알 수 있다.
- 사도란 최고의 모범이시며 궁극적인 권위요, 아멘(계 3:14)이신 유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따르는 자라는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그로 하여금 열 두 서신서를 쓰도록 지시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쓰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가 고린도전서라고 알고 있는 서신서를 쓰게 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그 말씀에 따랐을 것이다. 만약 주님께서 너울에 관한 말씀을 쓰게 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또한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기록, 즉 모든 성경의 권위는 우리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구주이시며 주님으로서, 그의 구속하신 교회에 행하도록 말씀하시고 그분의 명령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순종을 기대하실 만한 권리를 지니신 궁극적인 권세자이시다.
만일 바울의 권위가 그 자신이 스스로 세운 권위라면, 우리는 그것에 조금도 주의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 (사도적 권위가 여전히 성도들에게 구속력이 있지만).
그러나 주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것이며, 주님의 최고 권위를 거부하는 것은 가장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울에 관한 교훈이 얼마나 절대적이며,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결코 무시하거나 불순종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2) 주님으로부터 온 계시와 영감
바울은 너울을 쓰는 규례에 대한 이유를 아직 다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계시와 영감에 대한 문제를 꺼낸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2).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분의 최고의 권위로 명하셨을 뿐 아니라 특별히 바울에게 그것을 나타내시고 그것을 바울에게 위임하셔서 모든 신자들에게 전하게 하셨다. 다른 사도들이 주님에게서 직접 교훈을 받았던 것처럼.
바울이 상세히 설명하고자 하였던 교리들과 규례들은 그가 받은 것들이며, 여러 해 동안 그가 가르치고 설명해왔던 것이다. 그는 이 가르침들을 어떻게 받았는가?
그는 여러 곳에서 "나타내신" 그리고 "계시", "알게하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 갈 1:12,16; 2:2; 고후 12:7; 엡 3:3,5; 골 1:26,27.
고린도전서와 다른 서신서에서 바울이 쓴 세 개의 특별한 단어들을 더 살펴보자.
1. "유전" - 고전 11:2 ; 살후 2:15, 3:16
2. "받은" - 고전 11:23, 15:3 ; 갈 1:12
3. "전한" - 고전 11:23, 15:5 ; 유3
"유전"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paradosis) "전하여지거나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로 "법령"(고전11:2)으로도 또한 옮길 수 있다. 그것은 "전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paradidomi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다.
그 전달하게 한 주체는 사람이거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우리 주님은 "장로들의 유전"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사람들의 유전을 유대인들은 맹목적으로 따랐다. 그러나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그 단어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 그분을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주 예수님으로부터 모든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이 가르침들을 교회에 전달하였다.그는 그보다 앞선 다른 사도나 그 누구에게서 교훈을 받았던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직접 그 교훈들을 받았다. 이 경우에 사용된 "받다"의 헬라어는 "paralambano"이다. 그것은 "다른 이로부터 받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이다. 너울에 관한 것 뿐 아니라 주의 만찬(고전 11:23)과 부활에 관한 진리(고전 15:3)에 관하여 또한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충성스러운 사도로서 그는 근본적으로 주님께서 전해주신 (paradosis from paradidomi = tradition) 가르침과 교훈들을 전달하고 전하였다 (paradidomi).
이로인해 1장에서부터 15장에 걸친 내용들은 모두 계시로 바울이 주 예수님께 받은 것이며, 성령님의 감동하심 아래 우리를 교훈하시기 위해 쓰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중요한 교리 - 즉 주님의 권위, 그분의 명령, 계시 그리고 성령의 영감 -가 이 너울을 쓰는 의식에 담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3) 머리됨의 인식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신다는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구원의 문제를 떠올리게 할 뿐 아니라, 그 문제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다음이 두 번째로 복종의 문제이다.
가. 머리됨과 구원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3)"
참된 그리스도인 -거듭난 신자- 이 아닌 사람이 과연 주 예수님을 머리 - 즉 만물의 머리, 교회의 머리, 가정의 머리, 남자의 머리- 로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없다. 불신자에게는 결코 그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주님과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가 주 예수님 앞에 엎드리며 그를 머리로서 인정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용서와 평안을 깨달은 사람, 갈보리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오직 진실로 구원받은 사람만이 그분이 머리가 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울은 구원에 관한 가르침을 암시적으로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반드시 그 가르침을 요구하며 갖고 있는 것이다! 구속받고 구원받은 사람은 그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기쁨으로 그 분의 머리되심을 인정한다. 따라서 너울과 그리스도의 머리되심과의 밀접한 관련성 때문에 정녕 구원 받은 사람은 그 의식에 관한 주님의 명령에 기쁨으로 순종하게 된다. 그렇게 하므로 그가 주님께 구원받은 사람이며, 주님께 속하였고, 교회의 머리요 남자의 머리로 주님을 높임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결코 너울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론이 타당하지 않겠는가? 너울을 쓰지 않는 사람은 주 예수님을 머리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을 구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면, 비록 주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할지 모르지만 머리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 것이다! 너울에 관한 말씀을 따르지 않는 형제나 자매는 위험하게도 이런 상황에 근접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면, 너울의 규례를 따르는 형제나 자매는 (남자는 머리에 쓰지 않고 여자는 머리에 쓰는 것) 그분의 권위, 계시, 영감과 구속 사역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위의 가르침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그리스도를 거스리는 세상의 사상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이때, 특히 오늘날의 사회에서 너울의 규례는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이며, 또한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
나. 머리됨과 복종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비록 세 분의 인격이 본질이 같고 모두 동등하시지만, 질서유지를 위해 머리됨과 복종의 체계가 있어야만 하셨다. 이에 세 분의 인격이 모두 본체가 같고 동등하며 영존하시지만 아버지는 아들 위에 계시고 아들은 성령 위에 계신다. 아들은 아버지께 복종하고 (믿는 자 안에 내재하는) 성령은 아들에게 복종하신다.
우리 주 예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주 예수님은 사람의 머리가 되신다. 사람은 주 예수님께 복종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는,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며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여야 한다. 이를 "창조질서"라고 부르는데 그 안에서 남자는 여자보다 먼저 창조되었다. 따라서 남자 뒤에 창조된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ㄱ) "남자"와 "여자"- 어원 상의 고찰
복종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에 앞서 "남자"와 "여자"라는 단어를 살펴보도록 하자. 헬라어 aner는 "여자"와 구별되는 "남자", 또는 "아내"와 구별되는 "남편"의 의미가 있다. gune는 "여자"또는 "아내"를 의미한다.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그 단어들을 서로 달리 번역하기도 하며, 같은 성경에서도 다르게 옮겨놓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번역성경에서는 그 단어들을 "남편" 또는 "아내"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 경우, 아내된 자들만이 머리에 쓰고 남편된 사람들은 머리에 쓰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에는 결혼하지 않은 남자들과 여자들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암시가 있다. 그러나 너울의 목적을 살펴볼 때 그것이 아니라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들이 바울의 권고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aner와 gune의 좀 더 정확한 번역은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모든 부분에 걸쳐 "남자"와 "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ㄴ) 종속에 관한 의문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고 그 다음으로 하와가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창조질서상 남자는 여자보다 먼저이고, 여자 위에 위치한다. 그리고 이 경우, 여자는 남자 뒤에 있어 남자보다는 하위의 위치에 있다. 그러나 세상의 군대조직과는 달리, 이것은 여자가 남자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창조의 우선 순위와 별개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다.
ㄱ. 하위는 열등함과 다르다.
본문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고 가리킬 만한 구절이 전혀 없다. 해부학적 , 생리적, 정신적 , 지적, 사회적, 도덕적, 영적인 면에서. 비교를 유도하는 근거가 전혀 없다. 둘은 서로 다르지만 서로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다른 한 쪽이 없다면 불완전할 뿐 아니다 이 둘은 상호의 존적이다. 한 사람이 부족한 것을 다른 한 쪽이 공급한다. 비록 창조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우선적인 위치와 권위를 갖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는 남자라고 하여 본성적인 우월을 주장할 수 없다. 하나님은 남자를, 앞장서서 일반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지도자로 만드셨다. 따라서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복종은 여자가 열등하다거나 종이나 노예 , 종속물과 같이 남자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들이 아버지께 복종하나 그분과 동등할 뿐더러, 신성에 있어 하나님으로서의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것처럼,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나 그와 동등하며 인간으로서 같은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다. 복종은 열등함의 동의어가 아니다.
ㄴ. 하위가 복종은 아니다.
하위와 복종 사이에는 다른 점이 있다.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이유는 창조 때문이며 가정에 있어서는 가정의 질서를 위해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곳에는 하나의 머리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가 다른 남자나, 다른 여자의 남편에게도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비록 창조질서 상으로 남자보다 하위에 있으나, 다른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아버지 외의 다른 기혼 또는 미혼의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명령이 없다. 그러나 아버지와 자식으로서의 관계에 있어서는 순종해야 하는 명령이 정하여져 있다.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한다 할지라도 미혼여자로 하여금 가족의 테두리 밖에 있는 다른 남자에게 복종하도록 요구할 수는 없다. 하위란 단지 창조의 확정된 불변의 사실로서 여자가 남자보다 나중에 지음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종은 오직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아내가 자발적으로 남편에게 하는 것이며 , 이때 남편은 그의 아내를 지배할 것을 주장하거나, 그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상호간의 순종이 있어야 한다(엡 5:21-33; 골 3:18,19; 벧전 3:1,5,6).
아내로서 남편에게 복종 또는 순종해야 한다는 가정 질서의 문제를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가 남자보다 하위에 있다는 창조의 질서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중요한 문제이다. 권위, 계시, 영감, 순종, 머리됨, 하위의 원리들을 세워온 바울은 계속하여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너울의 규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
(2) 하나님의 영광
(남자들은 머리에 쓰지 않고 여자들은 머리에 쓰는 이유들)
바울은 이제 다음 질문에 답변한다.
- 왜 남자들은 머리에 쓰지 않고 여자들은 써야만 하는가?
1) 남자의 쓰지않은 머리가 상징하는 것들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4) 여기에서 "머리에 쓰는 것"이란 단어를 주목하는 것이 좋겠다. 4절의 이 부분은 헬라어로 kata kephales echon 인데 이것의 문자적으로 "머리 위를 덮어 씌우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덮는 것이 있음을 미루어 추측할 수 있다. 너울과 관계된 모든 절에서 명사 "베일(veil)"은 사용되지 않고 분사나 다른 말을 쓰고 있다.
현재 수동형 분사
Akatakalupto = 벗고 (uncovered 5절)
Akatakalupton = 쓰지 않고(uncovered 13절)
현재 수동태
Katakaluptetai = 쓰지 ( 않거든) (is covered 6절)
현재 명령형 수동태
Katakaluptetho = 쓸지니라 (let (her) be covered 6절)
현재 수동형 부정사
katakaluptesthai = 쓰지 (말아야) (to be covered 7절)
15절에서만 너울(veil)이 언급되었다 하지만 전혀 다른 용어이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것은 peribolaiou 와는 다른 구인 (veil 대신) peribolaion이다. 여기에서는 덮는 것으로 주신 여자의 긴 머리를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이 베일이 온몸을 덮는 것이어서 여자의 긴 머리는 온 몸을 덮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여자는 머리에 써야 했고(5,6,13), 남자는 머리에 쓰지 않아야 하며(4,7), 여자의 머리는 쓰는 것이나 베일을 대신하여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15).
4절의 바울의 말은 머리에 쓰고 기도를 하였던 유대 남자나 로마 남자들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헬라 남자들은 비록 그 이유를 알지 못하였어도 곧 잠자코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인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남자의 머리를 가리는 것은 그의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머리"는 형이상학적 의미에서의 남자의 머리되신 주 예수님을 의미할 수도 있고, 단순히 해부학상의 머리를 의미할 수도 있다. 둘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다. 머리되신 주님을 욕되게 할 수도 있고 그 자신의 머리를 욕되게 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유대남자나 로마 남자는 그들의 오랜 관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 했다. 그 이유에 대하여 곧 설명하겠다.
2) 여자의 쓴 머리가 상징하는 것들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5)
히브리인 여성이나 로마 여성은 이 말씀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헬라인 중에 개심한 여성은 몇 가지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룩한 말씀의 인도하심에 따라 모든 사람이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하였다.
바울은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
첫째는, 여러 사람들이 모인 모임 안에서 말하고 기도하는 여자들이 있었다는 것과, 둘째로, 너울의 문제이다.
그는 좀더 당면한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에 너울에 관하여 먼저 다루고 , 나중에 예배에 참여하는 것에 대하여 전하면서, 예배나 기도 모임에서 기도하고 말하는 여자들에 관한 문제를 취급한다(고전 14:34,35). 거기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모인 성도들의 회중에서 여자는 잠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5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 여자들이 기도하고 예언하는 문제에 관하여 다만 넌지시 말하고 있을 뿐 나중에 가서야 비로소 이 문제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절에서 여자들이 소리를 내어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을 바울이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여자가 교회에서 기도할 때는 잠잠하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교회에서 일반적이고 적절한 행동인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대해서 고린도인들은 소리를 낼 수 있다고 틀린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기도할 때 여자들은 머리에 써야 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만일 머리에 쓰지 않는 여자가 있다면 머리를 깎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머리를 깎거나 미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 주장은 피할 여지가 없이 분명하다.
바울이 남자와 여자에게 말하고 있는 내용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유대교와 이방 종교의 관습과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교회에 의해 준수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3)너울의 목적
가. 영광의 표현
7절에서 바울은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이 절은 매우 중요한 절이며 본문 전체를 이해하는데 있어 핵심요절이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이것이 너울을 쓰는 목적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하나님의 교회에 의해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서로 다른 인종의 남자와 여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상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두시기에 기뻐하신 유일한 실체이다.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 외에는 어떤 집단도 따로 선택하신 적이 없다.
주님은 이사야 42:8에서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누구도 그의 영광을 반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신(히 1:3) 우리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바로 직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그분의 교회에 위탁하셨다.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4,5,6,10,22)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속받은 남자와 여자들,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그의 교회에 두기를 기뻐하셨다. 세상 가운데 있는 교회는 그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중요한 요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간증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한다는 설명 만으로는 너울을 써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불완전하다. 교회는 주 예수님의 피로 구속받았으나 여전히 죄에 빠지기 쉬운 연약한 인간들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인간의 타락한 영광이 교회에 존재하는 한, 교회는 완벽한 조직체가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반영하는 것은 교회의 정확한 위치가 아닐 것이다. 교회는 그 참된 본질 또한 반영해야 한다. 즉, 구속받았으나 타락한 인간의 영광을 말하는 것이다. 그 결과, 교회는 죄악되고 어두운 세상과 인간의 타락한 영광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책임과 특권을 갖게 된 유일한 도구가 되는 것이며, 이것은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기 위해 모인 모임에서 이루어진다.
나. 쓰지않은 남자의 머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어떻게 이것이 나타나는가? 남자의 쓰지 않은 머리는 가리워지지 않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여자의 쓴 머리는 인간의 타락한 영광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인간"이란 남자와 여자를 가리키는데 어떤 이는 이를 남자만으로 제한한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기에 머리에 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의 머리를 덮는다면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어 그의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야만 하며, 그것은 오직 교회를 통해서이다.
바울의 이 명령은 유대교와 로마의 이방종교에서 개종한 남자들에게 하나의 문제를 안겨주었다. 그들은 전에, 남자와 여자 모두가 머리에 쓰고 기도하는 종교적 관습을 행하였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복음이 북방의 대륙으로 전파되었을 때, 추운 지방에 살면서 보온용 모자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도 또한 문제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사람들 안에 내재하신 성령은 분명히 그들의 거부감을 다스리며 극복하시고, 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에 겸손히 복종하게 하셔서, 그들은 머리에 쓰지 않고 경배드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가 강조해야 하는 것은, 남자가 머리에 쓰지 않는 것이 그들이 여자보다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이요, 영광이며 그 영광을 나타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 여자의 쓴 머리는 인간의 타락한 영광을 반영한다.
여자에 관하여 바울은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바울은 여자가 남자의 형상이라고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다. 여자는 여러 면에서 남자의 동역자로서, 남자의 옆구리 갈비뼈에서 취하여 만들어졌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하와는 아담 안에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형상대로 남자를 창조하셨다고 할 때, 그 "형상"에는 여자가 또한 포함된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나, 태초에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기 때문에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여자는 남자의 영광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질서이다.
앞 장들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이 남자의 영광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1:29),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1:31),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3:21).
자, 이제 그는 말하기를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요 남자의 영광은 타락한 영광이므로 여자는 마땅히 이 타락한 영광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 머리에 써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최초의 조상이 하나님을 불순종하였을 때 타락(Fall)이 없었다면 여자들은 너울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이 있었기에, 남자의 영광은 훼파되었고 이것이 여자들의 덮여진 머리로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아담과 하와 모두 범죄하였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모두 타락하게 되었고, 여자의 너울은 남자와 여자 모두의 타락한 영광을 상징화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여자의 너울이 남자에 대한 여자의 복종 또는 순종의 상징이거나, 단순한 과거의 낡은 관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중요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그 진리란 구속받은 남자와 여자의 타락한 영광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는다면, 남자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한 위치에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만이 나타나고 남자의 영광은 철저히 가려져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조화로운 모습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모임 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남자의 쓰지 않은 머리를 통해 적절히 나타나게 되는 반면에, 여자가 쓴 너울은 인간의 타락한 영광을 보여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자와 여자는 영광을 드러내는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여자의 너울은 남녀 모두의 영광이 가리워진 것을 상징한다. 즉, 모든 인류의 타락한 영광이 여자의 머리에 쓰는 것에 의해 나타나고 묘사된다. 남녀 모두가 동일한 상징적 너울 아래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범죄하였고 구속받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일 때, 그곳에는 우리의 모임을 내려다보며 참관하는 천국의 천사들이 있다. 그들은 전 교회가 다음을 나타낼 때 기뻐한다.
* 남자의 쓰지않은 머리에 의해 상징되는, 밝히 드러나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 여자들의 머리를 덮은 너울로 묘사된, 구속받았으나 추락한 인간의 영광
4) 이유 - 창조질서
왜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나타내는가? "어찌하여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가? 여자는 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할 수 없고, 남자는 자신의 영광을 반영할 수 없는가?" 라고 이의를 제기할 만한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바울은 이에 대한 답변으로 창조질서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는 이미 3절에서 창조에 근거를 둔 이유를 언급하였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이제, 이 문제를 좀더 자세히 말하고 있다 .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뒤에 둘지니라"(8-10).
창조에 있어서, 남자(아담)는 여자(하와)보다 먼저 지음을 받았으며 하와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왔다. 따라서 아담이 하와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와가 아담에게 속한 것이다. 즉, 아담은 하와가 창조된 원천인 셈이다. 더 말하자면, 남자가 여자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돕는 자요, 동반자로서 창조된 것이다. 그들은 함께 상호보충하여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창조의 질서와 목적, 그리고 남자가 머리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 보다 남자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고 남자 위에 계신 하나님의 권위의 상징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 바로 여자인 것이다. exousia라는 단어는 권력이나 특권의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주로 "권위"의 의미를 갖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 단어를 여자 각자의 권위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 남편의 권위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타락한 인간 위에 계신 하나님의 권위로 생각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말씀은 이 권위가 여자의 머리 위에 있다고 명백히 말씀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여자가 무엇을 머리에 쓴다고 말하고 있는가? 너울, 바로 그것이다! 권위는 너울이다. 그것은 여자 각 사람의 권위나 남자의 권위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며 이 권위는 인간 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자는 인간 위에 있는 하나님의 권세의 상징으로서 그 머리 위에 이 너울을 써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 아래 있는 인간의 타락한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을 구별하여야 한다.
(3) 창조와 출생에 있어서의 평등성과 상호의존성
"아, 이것은 분명히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고,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군요"라고 누군가 분명히 이야기할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미리 예견하고 11절과 12절에서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주 안에서 남자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바울은 남녀가 주 안에서 상호 의존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비록 창조에 있어서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나, 출생에 있어서는 모든 남자가 여자로부터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여자 없이 지상에 남자가 존재할 수 없고, 첫 번째 사람, 아담 없이는 지상에 여자가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상호관계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 하나님만이 지상에 우리가 존재하게 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며,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상호보완적이다.
(4) 너울의 중요성
너울의 목적을 설명하고 나서 , 바울은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13).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 대답은 분명히 "아니오!"이다.
다음의 상황들이 함축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자:
1) 남자는 머리에 쓰고 여자는 쓰지않음.
2) 남자는 머리에 쓰고 여자도 머리에 씀.
3) 남자는 머리에 쓰지않고 여자도 쓰지않음.
4) 남자는 머리에 쓰지않고 여자는 머리에 씀.
1) 남자는 머리에 쓰고 여자는 쓰지않음.
예배를 드릴 때 목사는 머리에 모자를 쓰고 , 그 회중의 여자들 가운데 소수는 머리에 쓰고 대부분은 쓰지않는 종교 단체가 있다.
앞에 있는 내용을 이해하였다면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부인하거나 축소시키고 인간의 영광을 높이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은 비성경적이며 불경과 혼동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 또 다른 함축된 의미가 담겨있음을 곧 알게 될 것이다.
2) 남자도 머리에 쓰고 여자도 머리에 씀.
이 경우 인간의 영광은 타락한 후의 올바른 위치에 있으나, 하나님의 영광 또한 경홀히 여겨지고 타락한 인간의 영광과 동일시된 채로 똑같이 취급되고 있다. 이것도 역시 비성경적이며 결과적으로 불경과 혼동을 낳게 된다.
3) 남자도 머리에 쓰지않고 여자도 쓰지않음.
하나님의 영광은 인정하나, 죄를 범하여 추락한 인간의 영광은 부인하는 것이다. 인간의 영광을 들어올려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많은 교회들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남자들은 머리에 쓰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정되고 나타난다.
여자들은 머리에 쓰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반영하기 때문에 이 영광도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한 수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비록 뜻하지는 않았지만 다음과 같이 계속 이어지는 부인을 범하게 되는 것을 본다.
ㄱ) 인간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못함을 부인함.
ㄴ) 타락을 부인함 -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인류가 범죄 하게 됨.
ㄷ)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부인함.
ㄹ)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을 부인함.
ㅁ) 십자가의 필요성을 부인함.
ㅂ) 우리의 구원을 부인함.
ㅅ ) 우리의 구속을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과 자비, 그리고 용서를 부인함.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수준으로 인간의 영광을 높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떻게 감히 이같은 생각을 눈꼽만큼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이렇게 행하는 교회가 있는 한, 우리는 그러한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이 비록 신중하지 않은 생각일 수 있지만, 그에 따른 결과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한 번 더 말하지만 그것은 불경스러움과 혼란이다.
4) 남자의 머리에는 쓰지않고 여자의 머리에는 씀.
이것이 온전히 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왜냐하면 완전하신 하나님 - 가려지지 않고 축소되지 않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께 구속받은 타락한 인간의 영광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교회로서 합당한 모습을 지니고 성경을 순종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고 인간의 영광은 가려지게 된다. 높임을 받으실 분은 인간이 아니라 오직 주님 한 분 뿐이시다. 이러한 자세로 함께 모여 예배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실추된(타락한) 영광,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베푸신 은혜를 증거하게 된다. 그럴 때,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의 말씀 -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너울에 관한 문제가 단순히 일시적 기분에 따라 결정을 하거나, 버려질 관습이나 의식이 아니라 너무나 중요한 분명한 진리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진리란 그리스도인의 모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임을 알 수 있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에 관하여 예민한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영광이 잘못 나타나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실망하게 될지 우리는 가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5) 여자의 개인적인 영광
바울은 이제 두 가지 사항을 더 말한다.
"긴 머리가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다고 하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이 나올 것을 예상하고서, 그는 설명하기를 긴 머리는 여자에게 중요하며, 그 이유는 그것이 여자의 개인적인 영광을 나타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14,15).
본성 자체가 남자의 긴 머리가 부끄러운 것임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남자가 머리를 기르도록 허락하신 특별한 상황이 있었다. 그것은 나실인(하나님께 구별된 자 - 민 6:2)의 경우였다. 나실인의 율법에 따르자면 (나실인은 남자와 여자 모두 될 수 있었다.) 그 자신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린 자는 남녀를 불문하고 그의 머리를 자르지 말아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본성과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기꺼이 감수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 한 분 안에서 그의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찾기 때문이었다. 나실인의 완전한 모범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긴 머리가 남자들에게는 수치스러운 것이지만, 여자들에게 있어서는 긴 머리가 여자 개인의 영광으로 주어졌다고 말한다. 따라서 여자 자신이 남자와 여자, 다시 말해서 모든 인류의 영광을 나타냄과 동시에,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그녀의 긴 머리에 개인의 영광이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드리는 동안 여자는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 그녀의 긴 머리는 그녀에게 영광이요 너울이고, 머리에 쓴 너울은 남자와 여자의 타락한 영광을 상징하게 된다 (여자 자신의 타락한 영광을, 그녀에게 영광이요 너울인 긴 머리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게 된다는 다른 견해도 있을 수 있다).
'베일(veil)'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peribolaion 이다. 그것은 '너울(head covering)' 이라고 쓰인 말과는 다르다 (너울은 헬라어로 kata kephales echon이다). 베일은 여자와 남자를 구별해 주는 것으로, 여자의 긴 머리는 비유적으로 여자의 베일이 되어 그녀를 남자와 구분하게 한다.
(6) 규례가 확립되다(The Custom Established)
마지막으로 바울은 변론을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을 그려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생기기 전부터 실행에 옮겨지지 않고 있어요. 그런데 왜, 우리가 지금 그것을 해야 합니까?".
16절은 다양하게 번역되어졌다.
" 하나님의 교회에는 다른 규례가 없다". 그리고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는 다른 규례를 요구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번역이 있다.
그 의미는 전부터 그 규례가 존재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순절 이전에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생겨나고,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타락된 영광과 주 예수 안에서의 구속의 계시가 발현하면서 이 계시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전에는 유대 사회나 로마나 그리스 사회에서도 이러한 관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은 그것을 규례로 행하여야 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을 성도들의 모임 안에서 나타내는 일에 있어서 "이 규례가 아닌 다른 규례나 방법이나 양식이 따로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7) 요약
너울의 중요성과 교회의 집회에서 모든 성도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그것을 준행하여야 하는 지, 바울이 그 교훈의 근거로 전하여 준 커다란 교리로부터 충분히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규례는 다음의 교리와 관련이 있으며 그것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권위, 그 말씀의 권위, 주님의 계시, 성령의 감동하심, 머리됨과 그것이 구원에 관하여 지니고 있는 내재적 의미들, 주님께 대한 복종과 순종, 하나님의 영광, 남자의 영광, 여자의 영광, 창조에 관한 사실, 남자와 여자의 평등과 상호의존성, 천사들, 그리고 주님의 명령에 대한 성도들의 순종.
너울을 쓰는 규례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겸손과 순종에 있어서 한 성도의 자발성을 나타내는 가장 간단한 증명이 되며, 최소한의 외적인 증거이고 표현이다. 그것은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 규례에 대하여 등한시하고 거부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키도록 명령하신 신약의 다른 진리와 규례에 대한 무시와 거부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장차 신약의 모든 진리들을 궁극적으로 거부하는 문을 여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발단이 될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우리 시대에서 볼 수 있다. 오늘날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고 , 교회 역사의 마지막 국면에 처해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가고 있는 바벨론주의의 그릇된 사상에 동화되어서 결국 커다란 음부에 던져지게 될 그 길에서 교회를 지켜주시기를 주님께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