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www.kts.ac.kr/wwwboard/wwwboardview.asp?id=2749&tablename=board&sp=&category=&mu=&qu=&no=0...끝마치면서 내가 하나 하고 싶은 말은 한국교회 정화를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자는 이기심과 자기 정리를 하지는 않고 좌우 눈치만 보는 기회주의자같이 비취면 바라는 목적을 이루어 내지 못할 것이다
최덕성 교수의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에 대한 박종칠 목사의 서평
최덕성,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서울: 본문과 현장사이, 2000, pp.1-612)에 대한 서평
전 교려신학대학원 교수 박종칠 목사
A. 지난 2003년 1월 14일, 총회 신학부의 신학 졸업생 사정 임무를 띄고 천안신대원에 갔을 때 최교수가 "하기오그래피와 역사관점"이라는 조그마한 자기 책을 주기에 부산으로 오는 차 중에 읽고, 위의 책명에 관한 글임을 알고 한 번 읽어 봐야겠다고 생각을 한 것은, 마침 고시부 실행위원회가 1월 28-29일에 열리는 졸업생 교육하는데 나에게는 "고신의 교단정신"에 대해 강의 한 시간을 해야 한다는 부탁을 하기에, 마침 이 책이 고신의 배태기에 관련된 것임을 알고 읽어 보게 된 것이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전 9:10)고 했으니, 교수생활을 그만 둔지 10년이 넘었기에 거저 생각하는 대로 글로 적어서 졸업생들에게 자기들이 배운 교수의 글을, 이전에 그곳에 가르쳤던 교수로서 지금은 교회일에 봉사하는 목사가 고신의 정체성에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최덕성 교수(Ph.D)는 참고목록을 제하고도 588페이지나 되는 비교적 큰 분량을 썼기에 교회일하는 목사가 단번에 읽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은 한국교인들, 특히 신사참배에 관련된 자들이며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이 책을 읽고 자기 성찰과 자기가 소속한 교회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응답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고신인들은 읽으므로서 과거 신앙선조들이 물려준 고귀한 전통을 확인하며 자긍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B. 책을 쓰는 자는 어떤 배경과 동기와 목적이 있기 마련인데 최교수는 1989년부터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교회사와 신조사에 관한 과목들을 가르치고, 책들(예컨대 "일본 기독교의 양심선언", "양심선언과 역사의식" 등)을 쓰는 가운데 한국교회사에 대한 어떤 확신된 사실들이 축적된 줄 안다. 일제시대에 한국교회는 공적으로 결의하여 "신사참배"라는 우상숭배의 배교의 죄를 지었다. 그것도 어찌할 수 없는 환경 때문이라는 타의에 의해서라는 면보다는, "자의적으로" 일본인들도 깜짝 놀랄 정도로 "솔선수범"해서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민족도 포함) 앞에서 천인공노할 큰 죄를 지었다.
그런데 광복 후에 한국 교회는 그 죄의 본질을 인정하고 참회고백을 하지 않은 것은 고사하고 도리어 수진수난 당하면서 신앙의 순전성을 지킨 자들을 오히려 온갖 나쁜 수식어로(예, 독선주의, 바리새주의, 율법주의 등...) 덮어 씌우고, 매장하는가하며, 일제의 앞잡이한 자들을 엉뚱하게 한국교회의 모본이며, 민족의 지도자로 둔갑시키는(p.550) "죄상가죄"(罪上加罪)하는 모습들을 본 것이다. 뿐더러 1990년대-최교수가 한참 학문활동을 할 즈음에-주기철 목사 증(syndrome)을 틈타 교회들(당회, 노회, 총회)이며 신학교수들에게서 "얼토당토"않은 발상들과 해석들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예컨대 통합측 노회, 총회의 "주목사 복권"이며 장신대의 주목사 복권사건(1997), 한부선 목사 해벌 사건(1950), 신사참배 취소 성명서
사건(1954), 한신대학의 역사날조(1990), 김수환 추기경의 안중근 교인권 회복선언(1994)등 이런 사건들은 쉽게 말해서 자기가 죄지어 놓고는 자기 스스로 용서하는 식의 뻔뻔스러운 "무치"일뿐 아니라, 우상숭배를 반대한 과거에 의인들을 파면한 결정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는 꼴이 되는 한국교회의 처사를 본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새로운 밀레니움을 맞이하여 세계교회는 성공적 미래를 맞기위해 나름대로 하나님과 피의자들에게 참회고백문과 사죄문을 발표하는-예컨대 독일교회 참회고백(1945.10.18), 일본기독교의 양심선언(1995), 심지어 블란스교회 추기경의 유대인에 대한 참회선언(1997), 바오로 II세의 교황의 직접 공적참회 선언(2000.3.5)- 것과는 반대로 한국교회는 "참회고백"은 하지 않은 채 의인들을 몰아내고, 분열을 조장하는 죄상가죄하는 일을 본 것이다.
또 하나 가증스러운 부조리 현상은 이런 근본적 참회고백으로 해결을 먼저 하지 않은 채, 자기들 과거 죄들을 덮기 위해 "사회참여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는 가소로움과, "기구적"교회 연합운동에 열을 올리는 한국교회의 작태를 본 것이다.
더욱이 최교수가 이 책을 쓰도록 한 언저리에는 같은 밥 속에서 녹을 먹고 사는 어떤 분들이 고신의 아름다운 전통을 왜곡하는 듯이 보이고, 오늘날 한국교회는 스스로 범죄한 것에 대해 과거사 반성도 없이 거저 기구적인 연합과 축제에 열을 올리는 일치운동에 고신까지도 덩달아 함께 동참하는 무치의 가관들을 보임에 최교수는 "거룩한 분노"를 내지 않을 수 없는 동기가 아닌가 싶다. 이런 몇 가지 동인들을 본 최교수는 아무래도 "역사 바로 세우기"(40장)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C. 한국교회사의 흐름에서 "고신정신"이 어떻게 자라왔는지를 알리려는 의도로 본인은 책의 내용을 많이 소개코져한다. 2-3장은 오늘에 사는 우리에게 현장감 있는 사건들-김홍도 목사 사건이며, 옷로비 사건, 한경직 목사 도덕적 양심선언-로서 시작한다. 최교수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도덕적 불감증의 전통은 일제시 저지른"배교, 우상숭배, 백귀난행(白鬼亂行), 민족배신, 비인도적 행위"같은 참회고백이나 역
사청산 없이 뒤틀린 가치관으로 흘러 온 "까닭"이며(p.33) 그나마 한경직목사가 템플턴상 수상시에 양심선언을 하셨지만 한국교회가 온갖 분탕질을 한 후의 일이라 "한국교회의 뒤틀린 가치관 바로 세우기에는 "너무 늦었다"(p.40)는 것이다.
4-10장에서는 한국교회(당회, 노회, 총회, 개인)가 저지른 일련의 사건들은 성경적, 교회치리적 헌법 전통에 따르기 보다는 로마교회 전통에 따른다는 것이다.
제 33회 총회시(1947.4) 신사참배 거부한 한부선 선교사가 호명거명시 "나는 이 총회의 회원이 아닙니다. 나는 치리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하는데 대해, 훗날(1950) 총회 특별 위원회 이름으로 "해벌통보"하는가 하며, 1957총회는 해벌 정당하다고 재 확인하며, 43총회(1958)는 "해벌 통지만으로써 다 되는 것이다"고 결론 지우는 것은 한국교회 총회가 자신들의 죄를 참회는 하지 않은 채 행정상의 미스
테이크만 본다는 것이다.
총회만이 아니라 개 당회도(순천중앙교회) 우상숭배 거부로 징역살이하는 탓으로 장기결석한 이유로 제명처분을 해 놓고는 광복이 되자 그 당회가 "복권시키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한 것도 같은 정신이다(4장).
서울 동노회가 중심이 돼서, 통합측 총회가 옛날 평양노회가 주기철 목사를 파면한 것(1939.12)을 목사복권시킨(1957.4)일이며, 한국 감리교회가 일제시 파면(?)했던 이용도목사를 복권시킨(1999.3.9)일들은 :
첫째, 일본신도교로 개종한 종교기구가 파면한 것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는 처사며
둘째, 조선장로교 헌법(1934) 권징조례-제 1장 1조 3절 치리 대상은 살아 있는 자를 대상으로 한다-에 어긋나며(5장)
셋째, "헌법"(1934)질서, 당해 치리회가 관장해야 한다-에 맞지 않다. 평양노회가 한 일은 서울 노회가 못한다(9장).
넷째는 이런 일들은 성경적 교훈을 따르기 보다는 "죽은자에 대한 치리"권을(6장) 로마 카톨릭의 베드로의 열쇠로서, 직분을 "작위"수여로 생각하는데서 기인한다.
다섯째는 "더러운 창녀"가 된 교회는 전통적 계승이 없으며 그 결정은 불복종 할 수 있다(8장).
그런데도 "제도적으로(법에) 얽매여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주목사의 아들 주광조 장로는 이 목사복권을 "덥석"(?) 받으므로 "자신의 아버지를 면직한 그 발상에 죽은 아버지를 다시 제물로 갖다 바친 셈이다"(p. 138)라고 하므로 한국 평신도의 개인이 "표류하는 순교정신"이 됐다(10장).
이런 어리석은 일을 하는 것은 교회(당회, 노회, 총회, 개인)만이 아니라 교회를 계도할 책임이 있는 신학교도 참회 고백없이 하기는 마찬가지다. 장신대학이 "제 19회 졸업생인 소양 주기철 목사의 성함"을 "교수회가 만장일치로 재등재키로 결의했다"고 함으로 목사복권식에 학생 복권식도 함께 성대히 행했다. 이미 졸업했고, 사자(死者)가 된, 그것도 주기철과는 아무런 역사적 계승도 없는-장신대는 황
민화의 주구노릇한 채필근 신학교와 스스로 연관된 것을 시인했다-(11장), 장신대가 일방적으로 주기철에 이렇게 "선심"(?)을 쓴 이유는 주기철을 이용하여 자파의 위상과 정통성을 높이려는 약삭빠른 재치일 것이다. 이런 많은 가당치 않은 몇 가지 의문이 있는데도(12장), "통합측 교단총회와 서울동노회, 장신대학 교수회, 주기철 기념사업회는 모두 주기철이 목숨을 걸고 싸웠고, 그의 아내 오정모가 배설물로 여긴 것을 붙잡으려고 애썼던" 것이다(p.183, 13장). 이런 것을 볼 때 과연 "정통성의 유전"이 무엇인지를 되씹게 된다. 그것은 기구적 계승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앙고백적 계승에 있는 것이다(14장).
그러니 "주기철 위한답시고 성대히 거행하는 행사는 실상 주기철의 정통신앙과 장로교신학과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교회-신앙공동체의 기초는 허물고 치리회의 질서를 위반한 사건이라고 한국교회의 죄책 고발자로 서 있는 것이다(15장).
지금까지는 한국교회가 주기철(수진수난성도들) 의미를 폄하시킨데 대해 장로교헌법(1934)에서 다루었다고 하면(물론 성경적 잣대는 포함돼 있지만), 16-22장은 신학교와 신학교수들이 저들의 신학적 시각의 차원에서 수진수난 성도들을 폄하시키는 이유들을 밝힌다.
장신대 교수들(이종성, 문희석)과 그 신학교신앙 노선(16-17장), 한신대학 교수들(김재준, 정하은)의 신학(18장)과 그 신학교의 역사날조(21장), 감신대 윤성범의 우상숭배 신학(19장)을 다룬다. 이들이 한결같이 수진수난 성도들의 수난과 순교는 폐쇠된 "근본주의라는 사상체계 때문이다", "사회적 책임을 하지 않는 피안적 신앙 때문이다", "신앙이 강한 자는 신사에 가담했다"등 기가 막혀 말이 안나오는 궤변을 듣게 된다. 정말 신학자라야만 이해할 수 있는 복장이 터지는 신학이다.
그리고 옥중성도들은 검사가 묻지도 않은 기독교 도리들을 소개하면서 형무소를 실천신학의 현장으로 보는 반면, 일제의 주구, 배신자들은 "애국활동"(독립활동)을 한 전과를 씻고자 사회참여(예컨대 일본 "신도교" 신학교육)에 열을 올리는
아이러니를 본다. 그들에게 양심의 참회고백은 찾아 볼 수 없다(22장).
23-28장은( pp.332-429) 광복 후에 총노회 차원에서 과거사 청산문제를 다룬다.
23-24장에서는 39회 총회(1954. 안동교회)시에 일어난 일련의 문제를 다룬다.
권연호 목사 재안으로 과거사 문제를 매듭짓기를 바랬으나 "총의"는 그 시벌안을 폐하기로 하고 "신사참배 교역자와 신학자와 혹은 선교사를 제명한 노회나 학교나 각 기관에 명하여 기록을 취소키로 가결"(39회 총회 기록, p.264, 최교수는 이 회록기록을 책에 써 넣어야 했다)했다. 이에 대해 취소성명서의 부당성 7가지를 최교수는 잘 지적해 준다(pp.341-347). 한국교회가 엄청난 과거 죄악에 대해 "취소성명"으로 매듭지으므로 인해, 모처럼 한국교회에 부흥을 통해 세워진 철저한 권징체계와 도덕성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몸의 근육이 풀어지므로 인해 온갖 질병이 한국교회에 생겼다는 진단이다(25장).
그래서 홍택기(27회 총회장) 청산방법은 "각인이 하나님과 직접 관계에서 해결할 성질의 것"으로만 하고는(이것이 한국교회에 널리 퍼져 있다-김재준, 민경배 등) 우리가 공적 죄인 만큼 공적 회개를 성경대로 하자고 하면 "독선주의", 헌법대로 하자면 "율법주의", 양심적으로 참회고백, 권징하자면,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를 몰각한 "바리새주의자"라고 적반하장격으로 덮어 씌우는 삶의 "슬기"가 아닌 "어거지" 풍토가 생긴 것이다(26항).
이러한 투쟁이 신랄하게 나타난 곳이 경남노회에서였다. 47회(마산 문창, 1945.11), 47회 임시(진해읍, 1946.7), 48회(진주 봉래동, 1946.12), 48회 임시(구포제일, 1947.3), 49회 임시(부산항서, 1947.9), 49회(부산 광복동, 1947.12), 50회(마산 문창, 1948.12), 51회(마산 문창, 1949.3)를 거치면서 경남노회 친일파들의 불참으로
말미암아 세속주의 교권주의자들은 제 갈 길로 가고, 거룩한 거룩터기 고신은 평신도들의 거센 항거의 도움으로 남게 된 것이다(27장). 그러나 문제는 친일파가 주름잡고 있는 중앙의 총회는 지방의 친일파들(경남)의 손을 들어주므로 인해 "민족사적으로 정통성을 갖지 못한 교회가 한국 기독교의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것이다"(p.429). 이는 물론 한국 세속 정치에서 친일파가 승리한 결과의 영향이 큰 것이다(28장)
29-32장은 고신파의 정체성을 그 배태 과정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반대파들이 자기 허물을 감추기 위해 남을 헐뜯는 식의 우물에 독 뿌리는 것에 항거하여
1) 고신파는 총회로부터 제거 당한 후에 불가피하게 설립된 교단이기에, 분리해
나가서 독자적인 교단을 세운 메이첸파 교단과는 그 존재 출발이 다르지만, 다만 신앙고백이 같고 신사참배 반대 때문에 옥고를 치룬 그런 신정(信情)으로 연결됐다(29장).
2) 중앙 친일파 총회가 지방 친일파 노회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고장난 도량 형기"와 같은데 고장난 그 저울 눈으로 만사를 보니 교회의 본질이 달라지니 그 눈이 밝도록 회개하자는 것이 고신의 입장이다(30장)
3) 고신은 끝까지 교회일치를 노력했지만 이교파를 창설, 조장할 의사가 없었던 것은 한부선, 이약신, 주남선, 한상동 등의 성명서를 보면 안다.
4) 고신파는 변질된 교회라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 개혁하고 일치를 도모한 사실을 무시한 채 고신을 3세기의 노바투스주의자, 도나투스주의자로 본다는 것은 범주착각이며 논점일탈의 오류라고 한다(31,32장).
마지막으로 최교수는 한국교회가 범죄한 죄과는 사회보다 못하고(33장), 감리교 감독으로 천주교회로 개종한 정춘수의 자기 숙청만도 못하면서(34장), 죄에 죄를 더하는(35장)가 하며, 착각을 해도 너무한 "유효준의 착종논리"(36장)는 민족을 한국으로 빗대어 말하지만 나라를 일본으로 여겨 변명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세계교회 양심선언에 비추어 보면 한국교회 죄악상은 더욱 드러난다(38장). 그러니 이
런 전통을 물려 받은 우리들은 '역사 바로세우기'를 해야 할 것이며(40장), 진정한 교회일치의 조건이 무엇인지(39장) 생각해야 할 때이다.
D. 오늘날 고신파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있는 차제에 이 책을 읽는 자는 우리가 물려받은 초기의 전통은 참으로 존귀로운 것임을 자각하면서 과거 수진수난 당한 우리 선조들이 끝까지 "진리에 살고 진리에 죽자"고 외쳤던 저들의 희생에 고마움을 느낀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서 "장자교단"임을 자부하면서도 대한의 전체교회 앞에서는 변두리처럼, 우리 교단의 서울의 모 두 교수는 대한 교회의 주류에 서 있고, 침묵하고 지내는 우리 목사님들은 주류에서 소외된 채 적극 참여 하지 않는다고 진단하고 있는 자도 있다(예컨데 2002년 어느 날 기독교보에 기재한 이성구교수의 글에서). 그러나 최교수는 우리가 역사적으로나, 신앙고백적으로 대한 교회의 정로(正路)에 서 있고 타교단들이나 신학교들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혀진 자료들을 발굴해서 날조되고 왜곡된 것임을 밝히고 우리가 주류임을 인식시키고 있다.
더욱이 돋보이는 것은 장신대, 한신대, 감신대 교수들이며 왜 우리 신앙선조들을 그토록 폄하하고 공격했는가를, 저들의 신신학, 칼바르트신학, 현실 참여주의신학, 심지어 '우상숭배의 신학'의 잣대로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장난 도량형기"로 보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학노선이 같지 않으니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을 들추어 낸 것은 최교수의 공적이라고 보아진다(16-21장).
교계 친일파들이 옥중성도들을 폄하시키면서 자신들은 사회참여를 적극적으로 하기도 하고, 정치와 유착하는가 하며, 광복 직후 서둘러 경남노회 재건을 한 것은, 저들이 과거에 친일행각으로 더럽혀진 이미지를 상쇄하기 위한 의식적 행위며, 살아남기 위한 계략이라는 것이다(p.316, 397. 이점에 최교수는 나의 글을 인용한다. 박종칠,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고려파의 의의", 부산: 고려신학대학원 학우회, 1984, p.35. 바로 그 다음에 김영재 교수의 글도 최교수가 인용하는데 나는 김교수의 독일어로 된 학위논문을 읽고 교수회에 그 독후감을 발표하였던 내용을 고신대학보, 1984. 5. 28. 2면에서 "고려파 태동의 바른 이해-민경배, 김영재 교수의 견해를 중심으로-"를 발표했다. 그 후 김교수의 글을 이근삼 교수 회갑논문집에 기고했던 "고려파의 정신사"에서 삽입하여 넣었던 것인데, 그후 이상규, 최덕성, 허순길 교수가 다 인용하는데 인용공유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옥중성도들은 세상에 대한 무명의 의지와 하나님에 대한 유명의 의지(p. 200)만 있을 뿐이다.
이런 친일파들의 죄과를 드러내는데는 다른 나라(특히 서양 교회) 사건들과 비교내지 대조하는 서술기법을 사용하므로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교회사 정보를 위해서 나열하겠다. 먼저 대조하여 죄악심도를 깊게 하는 것은:
1) 한국교회들은 위에 서술한 대로 죄상가죄(罪上加罪)하는 식으로 나아가는데 반하여 일본기독교회며 메이져학원의 참회고백(1995. 326f), 독일교회의 사죄고백(스튜트가르트, 1945)
2) 한경직목사의 제5공화국과의 유착태도와 엘살바도르의 로마 카토릭 사제 오스카 로메르는 군부에 협력하지 않으므로 살해 된 것(38)
3) 한국교회 1998년 베드로, 바울, 안드레셔츠 입는 운동과 청교도들의 1558년 로마식 가운(Vestment Debate)을 거부했다.
4) 한국교회의 직분서열개념은 공자에서 받은 것이지 칼빈의 만인제사장 직분 개념과는 다르다(기독교강요 V1.3.6)
5) 일제말기의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고 천조대신의 교회였다. 그 변질의 정도가 칼빈이 로마카토릭을 "더러운 창녀"라고 하면서도 교회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하는 것 보다 더 나쁘다(p.282) 등
그리고 일제의 한국교회와 서양교회를 비교하므로 그 출처가 로마 카토릭이나 세상보다 더 나쁘다는 것을 각인시켜 줄려고 한다:
1) 주기철목사 복직권은 김수환추기경의 죽은 안중근 교인권 회복이나, 로마카토릭이 죽어 무덤에 있는 위크리프를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이단자로 규정한 것이나, 갈릴레오에게 내린 저주를 철회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2) 배교하여 '더러운 창녀'가 한국교회에 전통적인 계승권이 없으니 불복종할 수 있다고 하는 근거를 칼빈의 교훈에서 찾는 것(기독교 강요 IV.1.2; 2.2; 2.3; 2.9 등)
3) 주기철 목사복직은 한국헌법 권징조례 6장 44에 해당노회가 치리하도록 되어 있는데 평양노회가 파면한 것을 서울동노회, 통합측 총회장 이름으로 복직한 것은 그 선례로 알렉산드리아 오리겐이 가이샤라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으므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되고, 제직되어 투르에서 살게 됐다.
4) 죄에 대한 공적고백의 특징으로 나타난 19C의 미국의 Charles Finney, 웨일즈의 Ivan Roberts 부흥운동과, 한국의 1907 대부흥과 고려신학교 경건회시간에 일어난 회개운동(1950. 4)으로 인해 권징이 철저히 시행되었다(참회고백에 대해서는 강요 III.4: 10-12, 권징에 대해서는 IV. 12:2-7) 한국 친일파는 이것을 마다했다(p.379).
5) 48회 경남노회에서 친일파가 득세하여 "다시는 신사참배 문제 거론치 않기로 하다"고 결정한 것과 인노센트 III세가 4차 레이터란 종교회의에서 개혁을 금지 시킨 일(p.408) 등
한국교회의 사건들과 세계 교회사건들을 대조 내지 비교시키므로서 한국교회의 죄악 심도의 눈높이를 다른 나라, 아니 로마카토릭, 아니 세상만도 못하는 모습을 보게하는 것이다.
과거사를 살펴보고 청산문제를 최교수는 집요하게 요구하는터에 한국교회와 신학교당사자들은 답을해야 하는 것이다. 장신대 교정에 세워진 "주기철 목사 순교기념비"에 대해서 최교수는 "아무리 생각해도 번지수가 잘못된, 엉뚱한 곳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p.228)에 대해 답변을 해야 할 것이며, 한신대학은 자기 역사날조에 대해 최교수가 학교당국의 설명을 듣고 싶다했으니 답을 내 놓아야 한다(pp.303-313)
한국교회가 "신사참배 결의 취소"(39회, 안동 총회시)에 대한 최교수의 7가지 죄상가죄하는 부당성에 대해서(pp.341-345)와 과거청산 30가지 과제를 한국교회에 던질 때(pp.580-588) 우리는 자기성찰과 답을 내놓아야 한다.
E. 이제 내가 본 최교수 글의 약점과 보완을 말하고 싶다. 고신이 배태되어, 여전히 한국교회 안에서 유산되지 않고 투쟁되어 가는 과정을 교회헌법적, 치리적, 또는 교권주의자들이 공격하는 역사적 흐름을 살폈지, 친일파들에 대항하여 공격하는 태아들의 힘찬 진짜 모습들에 대해서는, 봉우리처럼 우뚝서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짓역사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야경 비추이는 장신대의 전경과(p.149) 그
신학을 다루고, 고신에 대해 비평의 비수를 찌르는 한신대의 정경과(p. 283) 그 신학을 다루고, 반민족행위를 했던 감신대교정에 사람이 서 있는 모습과(p.529) 그 신학을 다루었다. 그러나 친일파 주구의 신학자들에 맞서 고려신학교의 초기의 불타는 정열의 신학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거창한 것 같이 보이지만 적막과 수심이 드리워져 있는 듯한 고려신학대학원 교정을 보이는가(p.158)!
친일파들이 노회나(경남), 총회나, 또는 개인(박형용 떠남)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노렸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최교수는 직시해야만 했다. 그것은 고려신학교 존재자체였던 것이다. 보따리 신학교에 무슨 건물이 탐이 났겠는가?! "그 신학"이였던 것이다. 최교수가 "참회고백과 과거사 청산 문제는 고려 신학교의 존립과 출옥성도들의 장로교단 내에서의 존립문제로 비화했다"(p.449)고 말할 때 겸손히 나의 글을 인용했어야 했다. 최교수가 나의 글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고려파의 의의" p.22에서 "이때부터 한국 장로교회는 신사참배문제 시비에서 고려신학교 존재에 대한 문제로 이전하게 되었다"(왜냐하면 이 아이디어는 최초로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친일파들에게는 신사참배 고발자=고려신학교 "그 신학"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 "그 신학"의 중심은 신론도, 기독론도 아닌 김재준의 성경 비평학에 반대하여 박윤선 변론자로 나타나는 축자 영감된 성경론이였다. 그 당시 온 평신도의 성명서나 교계 성명서의 그 첫항의 구호가 성경에 관한 것이다(1947. 1. 3의 교회 대표들, 1949. 8. 28-29. 경남신도대회, 1949. 8. 25-30. 기독청년 면려회 경남대회원) 그래서 박교수는 고려파가 생긴 통로의 특징들 몇 가지 중 그 첫 1항을 "고려신학교 확립을 통한 정통신학을 교회의 근간으로 삼으려는 목표"로 한다고 했다(나의 책 17). 친일파 신학자들의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고려파 성도들의 정통주의 신학옹립차원에서(특히 성경관) 부각되지 않고 단지 행정적, 치리적, 정치적, 도덕적 차원의 운동으로 주 안목으로 본다면 고신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고신의 최후보류는 성경관이다. 최교수도 이 점을 간접적으로 인정한다. "반세기 동안 다른 교단과의 차별성을 강조해 온 고신교단은 아이러니하게 여타의 교
단과 별다른바 없게 되었다"(p.371). 문맥적으로는 고신교회의 권징이완상태며 도덕성 상태가 다른 교단과 다른 바가 없다는 것이다(이후의 문장은 ecumenicity 문제를 말하므로 착종의 논리인지 강조의 혼돈인지 구분이 어렵다). 어쨌든 고신의 뿌리와 근간은 성경영감과 역사성을 믿는 것이다. 교회보다 신학교가 먼저 태동된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이 무너지면 고신의 근본 정체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최교수는 "반세기동안" 권징의 이완상태만 보고 고신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오늘날 무너지고 있음에도 무감각, 무책임으로 남느냐? 한상동목사를 분리주의자로 보는데는 "분노"를 지으면서, 이성구교수가 창세기의 역사성, 모세 오경 저작설을 부인하는 가하며, 아모스서의 편집설, 행위구원을 말하므로 고신 정체성의 가장핵심이 침해 당하고 있음에도 왜 이 책에서는 침묵하고 있는가?
최교수가 좋아서 John Leith의 말 "개혁주의 신학은 결코 교회의 존재를 교회정치에 의존시키지 않는다"고한(p.142) 정신은 어디로 갔으며 우리 선조들이 한탄한 말 "산에서 고기를 찾아야"하는 것인가?!
박교수가 1990년도에 교수회에서 이 문제를 제기 할 때에, 비록 신임교수이기도 했어도 같이 참석하여 내용을 알고 있음에도, 최교수가 그렇게 고신의 정체성을 이 책에서 드러내려고 했다면 왜 이 문제는 피해가고 있는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일제에 의해 더렵혀지지 않은 순수한 한국교회의 맥은 장로교 고신파에 연결되어 있다"(p.197)고 말 못한다. 친일파 사상에 맞서 초기 불타는 성경관
투쟁이 꽃 봉우리처럼 고신파에 있는데 왜 1,2장을 할애하지 않는가?! 적막한 천안교정삽화는 보이면서 말이다! 고신이 "가룟 유다 은전" 몇 푼 때문인지는 몰라도 고귀한 전통을 기구적 연합축제와 맞 바꾸는 현실을 최교수는 지적하면서 그 근원이 잘못된 성경관임을 왜 모르는가?!(39장)
또한 최교수는 "정통성과 유전"(14장)을 논하면서 에밀 부르너의 "전통이 없이는 복음이 없다"(p.192)와 칼 바르트의 말 "--- 종교적 이념이 지닌 정신과 철학을 수용하지 않고서 ---오직 성경만이 신빙성있게 말하도록 자신의 가르침에서 실제로 허용하는 성경연구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말을 인용도한다.
"W.C.C. 초대회장 화란 신학자 W.A.U. Hooft는 개혁주의 신학자였다". "C. Van Til이 바르트를 바르게 이해했는가 하는 것에는 의문이 있다" 등의 말을 하는데 최교수가 바르트 신학에 대한 어떠한 이해를 하고 있느냐에 대한 의구심이 난다(물론 필자도 잘 모른다). 단지 내가 관심하는 것은 초기 우리 고신파에는 박윤선 박사가 바르트신학에 반대하여 신앙고백적 신앙을 파수한 것이다. 물론 신학적 견해가 달라도 저들의 말을 인용은 할 수 있는데, 자기의 정통주의 사상에 용해되도록 하는 것은 문제 없지만 최교수가 우리 전통과 정통성을 드러내려함에 우리가 맞서 싸웠던 적들의 말을 좋은 것으로(사실 그 말들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인용하는 것은 번지수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 신학교 교수들이 이 바르트 신학을 갖고 수진수난자들의 순교를 폄하한다고 최교수가 논하지 않았던가! 또한 바르트적 변증법적인 사고 갖고는 우리의 신앙선조들의 항거와 순교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최교수도 인정할 것이다. 풍성한 수사적인 많은 지식을 표출하는 과정일수록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학문적으로 늘 헤아려야 한다. 미지였던 많은 지식정보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말하는가는 더욱 중요하다.
최교수는 "고신교단과 국경 밖의 만주 봉천교회는 참회고백행사를 가진 바 있다"(p.358)는 이 짤막한 이 말 한 마디로는 자기 책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교회의 죄악을 속하는 의식을 하는 고신의 정체성을 가장 핵심에서 빠뜨리고 있다.
최교수 자신은 배역한 한국교회가 진리를 거슬려 교권적 "총의"(24장)에 맞서 무섭게 고발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어려운 무거운 짐을 우리에게 제시하면서도(40장), 영적, 고백적 면에서 한국 교회의 대표적, 장자적 위치에서, 사크라멘트적인 제사장 기능을 행사한 일을 빠뜨려서는 안된다. 이런 무거운 짐들과 죄과는 최교수 "자신"이 참여하기 원하는"학술적" 토론만으로 해결될 성격이 아니라(p.586), 고신총회의 이런 제사장적 기능이 있었던 것 만으로도 그래도 오늘날 한국교회의 소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고신 제 1회 총노회 제 1차로 다룬 것이 이 문제였다. 그 내용을 소상히 밝혀야 한다. 최교수가 인용한 나의 책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고려파의 의의" pp.29-33에서 다루었다(사실 나는 이상규 교수로부터 장로교 사료편(1949-1954) 정홍식편 원본을 소개받고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고신학우회 요청으로 학술대회에서 위의 책명내용으로 발표한 것이
다. 1984. 아마 그 자료들을 읽고 그 의미를 드러내면서 미래에 고신파 이해에 의미 있는 자료를 제시한 자는 박교수가 처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내용을 기술해 주어야만 대한 교회사에서 제사장직 임무완수를 보게되고 고신의 정체성에 대한 긍지가 생긴다.
최교수는 여러 가지 삽화들과 그것에 대한 코멘트를 책에 삽입하여 자기 글이상의 의미를 상승시키는 효과들을 자아내는 지혜도 있다. 그 중에 나는 "광주시민 항쟁"(p.491), "장로교 총회장 노진현 목사와 감리교 김종필 감독"이 자유당 인물들 취임식에 참석하는 일(p.371), "장로교 통합측 총대들이 정치권력에 유착하는" 모습(p.513), "부정선거에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p.531), "부산시문화원 방화사건"(p.534), "광주사태의 모습"(p.536)들과 같은 한국 정치사에 관련된 것을 생각한다. 33장에서는 "민족정기 회복의 실패"를 기술한 이유는 "우리 사회의 과거사 청산의 실패와 한국교회의 과거사 청산의 실패를 비교하기 위한 것이다. 사회에서 친일파가 승리한 것처럼 교회에서도 친일파가 승리했다"(p.514)고 했다. 그러면서 580페이지에서 "북한(김일성)은 이데오로기적인 동기로 수행한 것이기는 하지만 광복과 더불어 민족 반역자들을 처단하고 역사 청산을 확실히 했다". 그리고는 "과거사는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민족적인 대과제인 통일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하는 말을 읽을 때에는 과거 청산이 어떤 의미에서인지는 40장에서 나타나지만 여기서는 섬뜩한 의미를 주면서 최교수가 반대하는 민족사관적인 입장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느낌마저 준다. 물론 최교수가 이런 사회, 정치적 배경을 알므로 인해 오늘의 한국사회며, 교회의 온갖 모순과 범죄현상의 윈인을 친일파 전통에서 찾는, 이 책의 방법론적 계기가 되었던 정도는 몰라도 그렇다고 어떤이들이 하듯이 친일파 전통이 우리 사회의 "원죄"이며 "첫 단추"라는(p.498) 사상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어느 사회에서든 교회가 강한 핍박 후 시대를 연구해 보면 비슷한 현상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비슷한 현상은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교회사와 세속사이 관심의 구분이 명확하지 못하면 혼돈을 준다. 요점은 세상
속에서 교회의 위치가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책 전체를 통해서 명확해 졌으면 하는 것이다.
나는 민경배씨의 치명적인 안목은 중생받지 못한 세상(민족)과 중생 단계를 거친 하나님의 백성(교회)과를 동일시하는 시각에서 사건들을 다룬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교수의 전체적인 의도는 신앙고백적인 공동체가 세상과 구분된다는 생각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혼돈을 주는 듯하면서 강조와 구분선이 약하다.
이런 점에서 나는 교회사 기술에 하나님 말씀의 언약적 구조 속에서(신명기 28장 등) 사물을 보는 것이 강조되었으면 한다. 최교수가 한국교회가 경험한 1907년 대부흥운동과, 6·25 전후의 회개운동들(주남선 노회 인사말 할 때, 고려신학교 경건회시, 9.28 수복 직전의 초량교회 부흥시-한상동 시무-를 거명하는데 그 당시 고신인들이 인도하는 모든 집회들에 일어났던 공통적인 현상들이지만, 고려 신학교 경건회시의 의미는 참회와 전도운동으로 연결되었다)을 씀에 고려신학교의 경건회 때 일어난 때를 "이른 봄 어느 날"(p.362)로 쓰는데, 이것은 한국교회와 우리 고신교단과 신학교가 존재하게된 정체성 이해에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50년 4월 경"이라는 날자는 명시를 해 주어야만 했다. 그래야 "우리로 하여금 환난(6·25)을 대비하도록 하신 귀한 섭리였음을 알게되었다"는 박윤선 박사의 말도 앞뒤가 이해가 되고 "기독공보"(1954.5.3)가 "교회가 분열되고 동족상잔이 전란이 일어난 까닭이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지 않은 데 있다"고 증언함으로(p.423)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결과들이 어떠함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1949년 초에 한상동 목사님이 "현하 대한교회에"서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쓰고 회개하지 않으면 여호와의 진노가 무섭게" 임할 것이라고 한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런 예감은 안 이숙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책에서 보면 5,6년 감옥살이에서 주님과 교제한 출옥한 성도들이 대한의 산천을 처음 대할 때 무언가 축 늘어져 있고 근심에 싸인 기운을 느꼈다고 한다. 이는 8·15 해방과 자유는 진리를 "위한" 것이지 대적하는 기회들이거나 진리를 "거슬릴" 때는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는 것이다. 나는 이성구교수와 그 학위논문이 그대로 우리 신학교 안에 존재하면 바로 최교수가 한탄하는 친일파 전통이 고신대학원 안에서 조차 다시 "온존"하는 것으로 본다. 이 문제에 대해서 만약 2003년도 총회에서 이 문제가 명확한 해결 없이 정치적 야합되어 "고신파 가롯 유다 은전" 나누기 식이 되면 고신파의 정체는 유실될 것이다. 요컨대 교회사 기술에 물론 우리가 교회 헌법적 헌정, 광범위한 자료정보적 스펙드럼, 치리적 과정, 도덕적 상식 사건을 보기도 해야겠지만 최교수가 그렇게 말하는 "신앙고백적"으로, 더 나아가서는 언약적 규정에 따라 평가하는 Calvin, Groen Van Prinster의 교회사 기술을 많이 습득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 말씀 빛에서 직접 논술할 때 헌법에 의한 추궁보다 더 호소력이 있다.
나는 교회사를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언제나 하나님께 우리 한국에 고신파 초창기에 부어주신 특별한 은총들과 역사들에 대해서 너무나 감사함을 느끼고 관심을 가지는 자이다. 그런데 요즈음 그 근본 기초를 무너뜨리면서 무치한 것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는데 한국교회가 배교해 왔던 죄악에 대해서 최교수가 학문적으로, 원리적으로, 그것도 넓은 자료들의 스펙트럼으로 살피는태도는 좋다. 이 결과로 한국교회에 진언과 요청을 하는 것은 객관적 면에서 성공하였다. 아마 이런 면을 참작하여 복음신학회 상을 최교수에게 주었다고 짐작된다. 그의 풍성한 자료지식의 상호연관, 같은 원리들을 적용하면서 다른 사안들을 다음 장에 연결시켜 가는 기법들도 조금은 식상하기 쉽지만 "과거사 청산"이라는 그의 주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남기는 여운이다.
그러나 그가 진정 어느 포커스에 맞추었는지? 다른 교단들에만 친일파 전통이 남아 있고 우리에게는 남아있지 않는지, 왜 중요한 문제는 피해가고 있는 것인지? (이 점에 이상규교수가 한상동 목사를 분리주의자라고 한 것에 대해 신문지상으로 공개사과 했다고 듣고 있으니 다음에 그 자료들을 참고해서 개인적 판단를 내리고 싶다) 그리고 중요한 고려신학대학원 태동의 신학적 의미와 우리 총회의 제사장적 기능을 빠뜨리고 그에 따른 한상동, 주남선, 박윤선 신학에 대해 서술하지 않으므로 해서 고신의 진짜 정체성이 결여된 점은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나 한국교회사의 한 주제-친일파 전통-에 대해서 이렇게 길게 쓰려고 했다면 많은 수고가 있었겠다. 끝마치면서 내가 하나하고 싶은 말은 한국교회 정화를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자는 이기심과 자기 정리를 하지는 않고 좌우 눈치만 보는 기회주의자같이 비취면 바라는 목적을 이루어 내지 못할 것이다. 바라기는 최교수가 바라는 한국교회의 진정한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과거 청산이 이루어지고, 고려 신학대학원 자체 안에 개혁운동들이 일어나서 주가 쓰시는 학교로 계속 남기 바란다. 고려신학대학원 안에 말씀이 개혁이 요청된다.
2003년 1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