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호 책자-비양심적인 본문 인용, 천주교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
성경진리토론방
, 2003-01-12 , 조회수 (341) , 추천 (0) , 스크랩 (0)


반박 7: 기독교계 관련 글의 비양심적인 본문 인용 비판에 대한 반박


말이란 '아'와 '어'가 다릅니다. 누구 말이든 순수하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왜곡시키기로 작정하고 내용을 비틀기 시작하면 저자의 의도와 다른 메시지가 전달되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원세호님과 그 문하생들은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윗트니스 리의 글의 앞 뒤를 자르고 "기독교인들을 화나게 할 부분만" 의도적으로 가져와 부각시킴으로 윗트니스 리를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근거 없이 모함하고 공격하는 인물로 묘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의 의미를 왜곡시킨 것이며 비양심적인 처사입니다. 왜 그런지를 이제 보겠습니다.

1. (원세호님책자) ' 2. 오늘 날 기독교는 분열, 혼돈, 허위, 전통으로 가득 찼고 헛된 것을 믿는 기독교로 바벨론과 같은 상황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오랫동안 마늘 방안에 있어 왔기 때문에 그들 주변에 꽉 차 있는 마늘 냄새를 더 이상 감지하지 못한다. 매일 매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다 생각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우상들을 숭배하고 있다. 오늘 날 기독교는 분열과 혼돈으로 가득 차 있을 뿐 아니라 우상들로 가득하다. 더욱이 기독교는 전통으로 충만하다. 전통은 허위요, 허위는 공허하다, 허위는 또한 일종의 우상 숭배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뭔가 헛된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두 가지 주된 변명은 혼돈이 있는 분열과 우상숭배이다. 이 두 가지 원칙은 오늘날의 기독교에 적용해 본다면 기독교의 상황이 정확히 바벨론과 같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 음녀로부터 나와서 예루살렘 곧 교회로 돌아와야 한다"( 3. P. 103, 13-23줄).

==(반박) 위 말만 들으면 독자들은 윗트니스 리가 기독교인들을 근거 없이 모함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원세호님이 인용하신 윗트니스 리 책인 '성경의 핵심'을 자세히 보면 그렇지가 않음을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문제의 대목에서 윗트니스 리는 창세기 11장, 계시록17-18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벨론'과 새예루살렘을 대비하여 성경을 해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바벨론을 '분열과 혼돈' 그리고 '우상숭배'로 특징지워 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콘스탄틴 대제 이후 천주교와 개신교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원하든 원치 않든 '분열과 혼돈과 우상숭배'가 소위 기독교계 안에 있음을 자신의 체험과 '두 바벨론'이라는 책자기록을 근거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계 안에 분열과 혼돈과 심지어 각종 우상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원세호님과 그 문하생들이 잘라 인용한 위 본문의 앞 단락들을 일부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런 추가 인용들은 윗트니스 리가 할 일없이 기독교계나 비판하고 있는 무지막지한 사람이 아니라 근거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바벨론은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첫 번째 의미는 그것이 혼돈을 야기시키는 분열과 관계 있다는 것이다(창11장). ... 오순절날 교회는 하나였다. 그러나 교회는 거듭 거듭 분열되어 왔고 이 분열들은 혼돈을 야기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상황이다. 기독교는 혼돈을 초래하는 분열로 가득하다. 최근에 나는 택사스주 달라스 시에 소위 교회들이 이천 개 이상 있다고 들었다. 이 어떠한 분열과 혼돈인가! 이것은 "바벨론"(분열과 혼돈이라는 뜻임)이다(위 책 100쪽).

'4세기 이후로 기독교는 바벨론주의로 마취되어 왔다. 그 때로부터 기독교는 바벨론주의 약물에 중독되어 왔다. 오늘날의 상황이 분열로 가득 찬 상황이라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오순절 날에는 분열이 없었다. 그대신 오직 그리스도, 그영, 생명만 있었을 뿐이다. 침례교회도, 감리교회도, 루터 교회도 없었다. 크리스마스도, 산타클로스도, 크리스마스 양말도 없었다. 오순절날에 그 분위기는 순수했고 그 공기는 신선했다. 그러나 '마늘'을 기독교안으로 가져온 콘스탄틴 대제 이후로 이교주의가 기어들어오기 시작했다(101쪽).

'계시록 17장에서 밝혀진 큰 바벨론도 역시 우상들과 땅에 속한 가증한 것들로 가득차 있다(계17:5). 천주교회는 우상숭배로 가득차 있다. 나는 천주교회를 직접 연구하기 위하여 마닐라에 있는 큰 성당을 방문한 적이 있다. 바로 입구 앞에 큰 형상 곧 예수의 우상이 하나있었다. 내가 그것을 우상이라고 말하자 누군가가 그것은 우상이 아니라 예수라고 답변했다....그 때 나는 '이 우상이 예수라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라고 말했다(102쪽).

'아마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잘 생긴 미남으로 묘사한 그림을 잘 알 것이다. 많은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이 그 그림을 집에 갖고 있다. 그러나 그 그림은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의 우상이다. 1936년, 중국에서 나는 귀신들린 한 젊은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 ...결국 그녀는 자기 집에 예수님의 그림이 있는데 그것에 경배하는 것이 자기의 습관이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그 그림을 불태우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어떻게 내가 믿는 예수님을 불태울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은 예수님이 아니고 우상입니다' 라고 말해 주었다. 그녀가 그림을 불태우자 귀신이 그녀에게서 떠나갔다(103쪽).



바로 위 에피소드 뒤에 원세호님과 그 문하생들이 인용한 위 단락이 이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윗트니스 리는 성경기록(창11장, 계17-18장), 자신의 직접 체험들(마닐라 천주교 성당, 불교사원, 예수님 초상화로 인한 귀신들린 사건 등), 그리고 '두 바벨론'이라는 책자 내용을 근거로 위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에서 떠나서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의 말은 소위 말하는 '지방교회'로 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문맥의 참된 의미는 '분열과 혼합과 우상이 없었던 오순절당시의 교회' 또는 에베소서1:23등이 계시하는 '성경이 계시하는 교회'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밑도 끝도 없이 문맥의 중간을 뚝 잘라서 큰 글씨로 써서 마치 윗트니스 리가 무턱대고 기독교를 욕하는 것처럼 왜곡시키는 것은 부당하며 비양심적인 처사입니다.

현 기독교계 안에 "분열"과 "혼동"과 "우상숭배"-예수님 초상화가 우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어떤 분에게는 충격적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통상 볼수 있는 잘생긴 미남 얼굴의 예수님 초상화는 출처가 불분명하며 이사야 52:14, 53:1-3 등의 성경말씀 내용과도 다릅니다.-가 있다는 지적은 뼈아픈 말이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누가 누구를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있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 그렇게도 비난받을 일인지 냉정하게 생각해 볼 일입니다.





반박 8: 천주교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반박함


원세호님과 그 문하생들은 정직하지 않거나 부실한 내용파악의 상태에서 위 책을 썼다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 단락의 맨 뒤에서 원세호님은 "기성기독교를 그토록 업신여기는 것을 보면서 웟치만 니가 1924년 복주 교회에서 출교당한 것과 1927년 이후 교파 교단에서 초청 받은 일이 없는 사실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도 남는다. 왜 출교 되었을까? 그것은 말이 그렇지 심각한 사건이다.(40. p. 71, 5-6줄, p. 72, 14-15줄)"라고 말함으로 '웟치만 니 출교' 이유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한껏 부풀리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정직한 사람들이라면 자신들이 인용한 대목 앞뒤에서 자세히 적혀있는 '웟치만니의 출교의 배경과 사유-목사안수에 대한 입장차이-'를 못 보았다고 거짓말하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 쪽에 걸쳐 설명된 이러한 '웟치만 니 출교' 원인을 보지도 못하고 '(지방)교회 주장과 성경적 변증서' 책을 썼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책이 '영적인 부실공사 날림공사' 였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어찌보든지 '웟치만니 출교'를 대단한 사건인양 부풀리는 이 책 저자의 의도는 정당하지 않습니다.

이 분들은 출교 사건만 아셨지, 추후 출교한 장본인들이 회개하고 다시 웟치만니 사역을 받아들였고, 웟치만니는 출교당한 오랜 세월동안 자신을 쫒아 냈던 형제들에게 필요한 집회소 건축 기금을 마련하고 있었던 가슴 뭉클한 뒷 이야기는 모르고 계십니다. 주관적인 십자가의 체험을 알고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를 귀히 여기는 사람들은 자신을 쫒아냈다고 해서 다른 교파를 차리거나 독자적인 예배당을 개척하지 않습니다.



이제 윗트니스 리의 책자본문의 문맥과 달리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뒤틀리게 소개한 부분들을 계속해서 폭로시키고 바로 잡아 보겠습니다.


1. (원세호님책자) 3. 기독교의 어미는 천주교이고 무서운 혼합체이며 간교한 것으로 불태워 질 것이다. "오늘 날 기독교계에는 두 무리의 것들이 적에 의해 연합되어 있다. 한 면에는 금과 보석과 진주가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또 한 면에는 가증한 물건, 음행, 더러운 것이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몹시 싫어하시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 두 무리로 무서운 혼합체를 만들었다, 간교한 것은 기독교계가 새 예루살렘의 자료들로 두루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꾸미고 있는 것들 속에 있는 실체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분별하는 분명한 이상을 가지고 나타난 것에 따라 판단하지 말고 핵심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기독교계에는 밖으로는 금과 보석과 진주가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가증한 물건과 음행과 더러운 것이 있다. 이 두 범주는 한 사람, 한 여인, 한 악한 여인 안에 연합되어 있다"(48. P. 210, 하 1-9줄).( 위 내용은 윗트니스 리의 '그리스도냐 종교냐'라는 책자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최근에 판매되는 2판 1쇄에는 210쪽이 아니라 226쪽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원세호님은 천주교에 대한 태도가 이중적이십니다. 이 분은 적어도 천주교에 대해서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고 계십니다.


즉 원세호님은 한면으로는 (지방)교회가 천주교 체계에 대해 '기독교의 어미는 천주교이고 무서운 혼합체이며 간교한 것으로 불태워 질 것이다.'라고 했다며 (지방)교회가 기성 기독교를 업신여긴다고 노여워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저서인 '천주교회란?'이란 소책자(국제신학연구소,1987년)에서는 원세호님도 다음과 같이 천주교가 비복음적이고, 비성경적이고, 교리의 오류가 많다며 맹공격하고 계십니다. 즉 원세호님도 천주교회를 개신교와 다른 무리들로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천주교가 500년을 내려오면서 교리적으로 오류가 증가되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종교개혁 당시의 천주교교리가 수정된 바가 전혀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복음과 비교하여 거짓된 것을 구별하여 참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위 책 머리말)'.

위 말은 원세호님 보기에도 천주교 안에 교리의 오류가 증가되고 있고, 종교개혁 당시와 비교해 볼 때 수정된 것이 없고, 복음과 다른 거짓된 것이 있다는 지적이십니다.

심지어는 천주교와 점점 비슷해져 가는 개신교들을 다음과 같이 호되게 나무라며 자신은 개신교는 참이지만 천주교가 비 복음적인 단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500년이 경과한 오늘날 기독교계는 부담없이 천주교회가 기독교라고 인정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천주교에 대한 그것 보다도 개신교도들의 복음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인 것이다. 만일에 천주교가 하나님이 인정하는 기독교중에 하나라면 반면에 장로교파나 루터교파나 감리교파등은 모두가 잘못된 교파일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필자는 ...개신교에 관하여 참을 인정하고 있으며 천주교에 대해서는 ...복음적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위 책, 9쪽).

계속 인용하겠지만 원세호님은 위 자신의 책에서 천주교의 오류와 비성경적인 항목들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윗트니스 리가 마 13장의 여인과 계17장의 큰 성 바벨론을 로마천주교체계로 해석하는 대목을 가지고는 기성기독교를 업신여긴다고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공개질의 합니다. 천주교가 기성 정통기독교 중 하나입니까? 아니면 비 복음적이고 종교개혁을 할만한 이유가 있는 그런 단체입니까? 원세호님과 그 문하생들은 자신들의 천주교를 대하는 입장이 대체 무엇인지를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밝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은 말과 행동에 일관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방)교회 주장과 성경적 변증서' 책자에서는 태도와 말의 이중성이 도처에서 발견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