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태론, 삼신론 논쟁 (5)
성경진리토론방
, 2002-12-20 , 조회수 (379) , 추천 (0) , 스크랩 (0)

번호: 3042 등록일: 2001.07.27 이름: 성도 조회: 51
한가지님 아래 글에 대한 님의 평가/질문에 대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아래 글은 장로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신 이 동근 목사님이 운영하시는 홈페이지인 http://new-jerusalem.org/mean.htm 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님은 최00 목사와 100퍼센트 동일한 삼위일체관을 갖고 계시다고 함으로 질문드립니다. 아래 글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특히 아래 글이 인용한 내용에서도 보듯이 어거스틴은 '영(성령)을 성부의 영은 성자의 영이며 성령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님이 지지하시는 최00 목사는 아버지가 한영, 아들은 다른 영, 성령은 또 다른 영이라고 주장함으로 어거스틴과는 정 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아래 주장들에 대해서도 평가해 주시지요.



3) 신학적 해석의 모순

지금과 같은 신학적 해석 방법으로는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은 신비가 아닌 모순으로 만들게 되는 결과만을 가져온다. '예수는 성령이다'라는 등식을 통하여 신학적 해석의 모순을 몇 가지 논증하고자 한다.(이하는 위 이동근 목사님의 홈페이지 글 내용을 가치판단을 배제한 채 가져 온 것입니다.)


(지금부터 인용 시작)

성서적으로 '예수는 성령이다'의 고찰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다 "주는 영이시다"라고 선포하고 있다.(고후3:17) 또 공동번역에서는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다. 이미 성경을 이탈하면서 까지 무리하게 교리를 세우려고 해서는 안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성경이 최우선과 중심이 되어야만 한다는 원칙을 잊어서는 안된다.



삼위의 통일성에서 '예수는 성령이다'의 고찰

위격인 각각의 개체로써는 절대 따로따로 생각해서는 안되며 개체만을 가지고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 그러나 통일성(일체)안에서는 서로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주장하는 삼위일체의 원칙이다.("한위격으로도 모든 분을 의미할 수 있다"라고 1권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물을 비유로 설명을 하자면 물로 형성이 되지 않은 각각의 개체로써는 '물은 물이며 산소는 산소이고 수소는 수소이다'라는 것만이 성립되지만 이것이 결합하여 물로 형성(통일)된 다음에는 각각 개체로써의 산소, 수소가 아니라 이미 산소는 물이고 수소도 물이다 라는 것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통일성 안에서는 삼위 중 하나가 전부를 대표할 수 있다. 곧 성부는 성자이며 성령이다. 성자는 성령이며 성부이다. 성령은 성부이며 성자이다 라는 등식이 성립이 되며 표현될 수 있다. 이러한 등식이 성립될 수 없다면 그것은 통일성(일체, 본질)이 아니다. 통일성 안에서는 삼위께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기에 '예수는 성령이다'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성령이다'라는 것이 신학적으로는 성립이 될 수 없는 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즉 각각의 위격의 관계에서 위격 단독만을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아래의 그림과 같이 삼위의 통일된 위격 안에서의 위격을 해석하는지의 차이인 것이다.



신학에서는 각각의 위격만을 가지고 해석하고자 한다.

한 위격으로만 생각하면 절대 성부는 성부이며, 성자는 성자이고 성령은 성령인 것이다.(설명상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여기에서 신학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많은 오해가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주장은 각각의 위격과 동일성 안에서의 통일된 위격을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위격으로만 보면 '예수는 성령이다'가 절대 성립될 수 없지만 통일성안에서는 얼마든지 '예수는 성령이다'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다.


위에서도 물로 설명했듯이 각각의 개체인 수소와 산소가 물로 이미 형성된 뒤에는(통일성) 산소는 물이며, 수소도 물이며 물도 물이 되는 것처럼. 삼위의 통일성안에서는 성부=성자=성령, 성자=성부=성령, 성령=성부=성자가 되는 것이며 성부, 성자, 성령은 불사하시며 동일하신 일체이며 한 분의 위격으로 모든 분을 포함할 수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주장은 위격을 따로따로 해석하려는 것에 대하여 엄격히 성부, 성자, 성령을 한 통일된 일체로 볼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곧 '하나는 셋이며 또한 셋은 하나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셋이 하나가 된 통일된 위격은 이제 하나가 아니라 나머지 둘도 포함되어 있으며 하나만으로도 둘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다.(위의 그림참조)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상징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사상의 핵심인 통일성(oneness), 동등(equality), 본질(Substantia), 일체인 것이다.


신학에서 해석하는 것과 같이 위격만을 가지고 해석한다면 그것은 어거스틴의 통일성 전체를 송두리째 뒤집어서 모순 투성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것은 곧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모순과 궤변으로 만들고 파괴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동일성에서의 '예수는 성령이다' 의 고찰

동일성이란 '같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동일성의 의미는 성부, 성자, 성령이 동일하다는 것으로 이것은 성부=성자=성령의 등식이 성립된다. 그러므로 '예수는 성령이다'가 성립되는 것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출생이 아니라 발출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공동적 발출(Procession) 했다고 주장한다.

성령의 발출은 시간 밖에서 이해해야 된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출생(발생 Generation)한다. 성령은 주로 성부로부터 발출(나오심 Procession) 되는데 성령은 성부가 시간의 간격없이 성부, 성자 두 분으로부터 공통적으로 출생이 아니라 발출시킨다.


여기에서 '예수는 성령이다' 라고 하면 잘못된 것으로 알고 오해를 하고 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공통적 발출이다. 그러기에 성령이 예수와 동등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출생된 것이 아니라 발출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쉽게 설명하자면 한국내의 미국대사관은 미국정부에서 한국으로 미국정부를 대신해서 행정 업무를 보기 위하여 파견 보낸(발출) 것이다. 미국 대사관은 한국의 영토 안에 있지만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곳이기 때문에 미국 정부와 같이 미국 영토로써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한국내의 미국 영토인 것이다. 미국이 없는 미국 대사관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독자적인 성령 혼자만의 성령이 아니라 성령은 이미 삼위의 대표로써 예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성령이다'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주의 영에 대한 '예수는 성령이다'의 고찰

어거스틴은 '영(성령)을 성부의 영은 성자의 영이며 성령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예수는 성령이다'라고 한다면 신학적 삼위일체에는 위배이다. 신학이 삼위일체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는 영이시며, 주의 영은 성령이다'라고 한다면 신학적 삼위일체에 전혀 훼손하지 않는 해석이라고 할 것이다. 또는 '예수는 영이시고(고후3:17) 예수의 영은 성령이다'라고 해도 삼위일체를 훼손하지도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는 성령이다'와 '예수님의 영은 성령이다'(또는 '주의 영은 성령이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해석상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도 없는 똑같은 말이다.


성부의 영은 성자의 영이며 성령이다 라는 성서적 표현 만큼 삼위일체를 완전하게 극복하고 함축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이미 이 안에 성부는 성령이시며 예수는 성령이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시며 예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하늘나라인 의와 희락과 평강으로 함께 한 작용으로 역사되고 있다. 성경을 무리하게 해석하면서까지 교리를 세우려고 해서는 안된다. 예수는 성령이 안된다고 주장한다면 첫째, 성경의 위배이며 두 번째, 어거스틴의 20여년간의 노작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파괴 행위인 것이다.



신학을 향한 충고


'예수는 성령이다'라고 하면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양태론(Modalismus)을 운운하며 이단이라고 매도하는 성급하고 극단적인 편견은 버려야 한다. 만약 이러한 편견을 버리지 않는다면 결국 어거스틴도 양태론자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그 이유는 신학자들이 너무 잘 알고들 있을 것이다. 항상 그래왔던 것 처럼 삼위일체가 자신들의 주장만으로 또 다시 악용되거나 남용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만 한다

(이상 인용 긑)




자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드립니다. 사실은 아래 내용이 최00 목사가 삼신론자가 되던지 (지방)교회 삼위일체가 양태론이 되든지를 결정하는 핵심쟁점입니다. 그러므로 최00목사 삼신론 토론은 많이 할 것도 없습니다. 서로 간에 아래 내용만 정확히 따져 보면 될 것입니다.




) 최00 목사는 우리측과의 공개토론내용을 지상중계 한 '교회와 신앙'(발행인: 최삼경) 97년 6월 호에서

'한 하나님 속에 두분 하나님이 들어 있다면 결국 서로 교제하고 대화할 필요가 없다....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면케 해 달라'고 기도 하셨다. 무슨 뜻인가? 한 인격 예수님 하나님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들어 있다면...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 속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질문1) 최00 목사가 위 글에서 '한 하나님 속에 두분 하나님이 들어 있다면...' '한 인격 예수님 하나님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들어 있다면....'이라는 표현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질문2) ...'이것이' 바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라는 위 문장에서 '이것은'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질문3) 요한복음 14:10-11, 20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 하십니까?



참고로 (지방)교회측 삼위일체는 지상 사역시의 예수님 안에 영원히 구별되시지만 분리되지 않으시는 아버지, 성령 하나님이 상호내재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 최 목사의 표현을 문장 그대로 읽는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 안에는 아버지나 성령은 안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야 말로 한 장면에 대해 정 반대의 주장이 대립되고 있습니다. 만일 최00 목사의 주장대로 예수님 안에 아버지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한 예수님은 거짓말을 하고 계신 것이며 최목사 앞에 양태론자로 낙인찍히기 딱 알맞는 주장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 3자들이 볼 때는 예수님을 양태론자로 정죄하는 최00 목사의 신론이 틀렸으며 분리된 세 하나님들을 주장하는 삼신론 이단사상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