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상이 없으면 이단?
성경진리토론방
, 2002-12-18 , 조회수 (387) , 추천 (0) , 스크랩 (0)
출처: http://www.rpress.or.kr/way-board/way-board.cgi?db=notice&j=v&no=1564.1&pg=1




십자가상, 까운과 후두, 복음송 문제에 대한 답변

이름 : 답변    번호 : 1564.1
게시일 : 2002/12/14 (토) PM 00:18:27    조회 : 79 


윤광원 님의 질문은 참으로 반가운 질문입니다.
총회의 결의사항임에도 불구하고 합신교단 내에서도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이 문의로 인해 조금이라도 생각할 여지가 주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1. 십자가 상의 금지는 개혁교회 안에서는 너무나 당연시되었습니다. 교회 내부 뿐만 아니라 교회 외부까지 말입니다. 카톨릭처럼 어떤 상들이 예배의 대상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왕하18:1-4에 비춰보면, 모세 당시의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에 주어진 불뱀을 하나님께서 놋뱀(혹은 구리뱀)으로 제거하셨는데, 그 놋뱀이 히스기야 시대까지 분향되어 왔고, 히스기야는 그리스도로까지 예표된(요3:14) 그 놋뱀을 산산조각내었습니다. 그 산산조각난 놋조각을 이름하여 '느후스단'이라고 합니다. 이런 히스기야의 개혁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뜻한 바에 제한되고 머물지 않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불법이며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약 칠 팔백년 동안 당연시 되어 왔다는 것도 성경 앞에서는 강력이 될 수 없고, 느후스단만 기다릴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합신교단도 많은 고민을 해야 될 줄 압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죽으신 이유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기 위한 것이었지(벧전2:24), 놋뱀 분향하듯이 십자가를 떠받들라는 의도는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더 근원적인면에서는 그의 죽음은 영원 전에 택하신 택자들만을 위한 죽음이셨으며, 또한 어거스틴이 이미 말하였고 도르트회의에 참여한 고마루스 또한 밝힌 것처럼 그렇게 죽으신 분은 인성을 취하신 성자이실지라도, 구속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의 사역입니다.

  아울러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뜻 외에는 그 어디에도 원인을 젼혀 두지 않는 예정은 택자와 유기자의 결정 뿐만 아니라 구원의 서정과 그리스도까지 수단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도 복음의 핵심이 아닙니다. 이런 정신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도르트회의의 결정 내용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성경을 따라 말하고 있는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근원적이며 본질적인 내용은 묻어두고 단지 십자가 상의 금지 여부에만 예민성이 발동되는 것은 현 교회의 가난함이며 비참함인 것입니다.



2. 성직자 까운을 입거나 그 까운의 후드 착용은 목회자 스스로 어떤 권위의 표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우기 최근에 어느 노회는 목사 안수식에서 착복식까지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의 칠성례와 달리 저희는 세례와 성찬만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참된 성례로 말하며, 오히려 카톨릭의 나머지 다섯 가지 성례는 칼빈이 이미 그의 기독교강요 초판(1536)에서부터 언급했듯이 '거짓 성례'라고 말합니다. 그 거짓 성례 중에 성직자의 임직과 관련된 '서품 성사'가 있는데, 현재 본 교단도 이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것도 느후스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의식법 및 제사법의 폐지에도 불구하고 그런 형태의 그림자로 권위를 유지하려는 마음이 제거되지 않는 한 '거짓 선지자'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목사의 섬김의 방식은 말씀으로 섬기는 것이지 까운과 후두와 흰장갑으로 으름장을 놓는 것이 아닙니다. 교황을 교회의 머리로 고백하는 카톨릭과 달리 저희는 교회의 유일한 왕과 머리로서 그리스도만을 성경을 따라 말하지, 거기에 덧붙여 목사까지 함께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께서 맡기신 바는 등 뒤로 던지고, 목사라는 명찰을 단 권위만 유지하려는 것은 장로의 유전과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헛된 경배에 지나지 않습니다(마15:1ff). 만일 목사에게 권세가 있다면 다만 수종적 권세만 있을 뿐입니다.



3. 공예배 때 복음성가 금지는 본 교단 내에서도 모든 교회가 동일하게 지키고 있는 사항은 아닙니다. 이는 경배와 찬양의 물결과 윌로우크릭 교회나 새들백 교회의 본을 따르는 구도자 중심의 열린예배가 일부 교회에서 긍정적으로 수용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공예배 뿐만 아니라 가정예배와 직장에서의 여가 시간에도 시편을 불렀습니다. 특히 칼빈이 제네바교회로 다시 가게 되었을 때 그가 시의회에 요구조건으로 내세운 것 중 하나가 시편을 노래하는 것에 대한 허락이었습니다. 이것이 개혁교회 내에서 중시된 역설적인 증거는 개혁교회가 대적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할 때 그들로부터 시편을 부르는 것을 금하도록 강요된 것입니다. 그만큼 시편송은 개혁의 성격과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실된 마음으로 작사 작곡 편곡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참되며 높은 고백은 있을 수 없습니다. 더 좋은 정도가 아니라 가장 좋은 찬양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말씀보다 하나님 자신을 더 잘 드러내는 고백이 우리로부터 가능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것이 시대에 뒤쳐져 보이고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의 것 외에 다른 것을 제물로 드리려는 것은 악취나는 배설물이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호통을 들어야만 했던 베드로의 열심과 진심(?)에 불과합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복음송 혹은 CCM  뿐만 아니라 현재의 찬송가에 대해서도 심각한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오랜 세월 정착된 것이 무게가 될 수 없는 것은 앞서 말한 느후스단의 예로 충분할 줄 압니다.


  그리고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통해서도 재차 밝혔던 것처럼 아타나시우스의 견해를 따라 시편을 부르되 음정도 인간의 기교를 부리거나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이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4. 지면 관계상 마치면서

  성경이 말하는 가장 좋은 것으로 개혁되지 않는 이상 늘 부패의 길은 교회의 발꿈치를 무는 친구로 와 있게 됩니다.




> 윤광원 님이 쓰신 글입니다.
>  평소에 별 생각없이 받아들였던 사항 중에 합신총회 결의사항에서 금지한 사항들은 저로서는 금지한 이유가 무엇인지 무척 궁금합니다.
>  저로서는 합신총회가 가장 성경적이고 장로교 전통에 어느교단보다도 충실하다고 보기 때문에 비록 타교단이지만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합신총회의 결의사항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합니다. 

> 1. 예배당내 십자가나 십자가에 달린 형상을 만들어 붙이는 것을 금하는 근거 (43, 44, 67, 69, 86회 총회 결의사항),
>  2. 성직자 까운, 성직자까운후드를 금하는 근거(67, 69, 86회 총회 결의사항)
>  3. 예배 중 복음성가 금지 등에 대하여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  합신총회 관계자 되시는 목사님, 또는 아시는 분은 힘드시더라도 꼭 대답해 주세요. 합신 게시판에 올렸으나  한 달이 넘도록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