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말씀대로 사는데서 오는 고난
성경진리토론방
, 2002-12-11 , 조회수 (427) , 추천 (0) , 스크랩 (0)
이 토론 공간 바로 몇 줄 밑에 보면 <한 흐름으로>라는 메뉴가 있습니다. 이 안에는 워치만니 형제님이 중국에서 기존의 선교사들이 전해준 교리와 실행 중 성경과 다른 부분들을 따르기를 그치고 성경적인 진리를 붙들고 실행한 항목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성경대로 믿고 따르는 삶은 즉시로 많은 반대와 비방과 저항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반대와 핍박이 공자를 따르는 유교도 등 이방인들이 아니라 기독교계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런 현상은 예수님 자신이나 초기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요15:18-20, 16:1-5).


아래 글은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자신이 성직자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싫어할 내용입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살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다시 한 번 자신의 관점을 점검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도 이곳에서 토론이 가능할 것입니다.





성직자와 평신도

기독교윤리실천협의회 건강교회운동본부에서 지난 1월 16일부터 28일까지 13일간 국내외 네티즌들을 상대로 "평신도와 성직자" 개념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였다. 설문 결과를 보면 응답자 13599명(남7521/여6078) 중에서 성직자는 "목회자들과 선교사"라고 한 사람이 8189명, "안수 받은 목사"라고 한 사람이 2865명, "복음 전파와 구제 사역의 전임 사역자들"이라고 한 사람이 1266명, "목회자들과 교회의 제직들"(장로, 집사, 권사 등)이라고 한 사람이 712명, 포괄적으로 "모든 기독교인들"이라고 한 사람이 566명이었다. 삶과 예배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사역들을 하라고 부름 받은 신자들은 모두가 성도이며 성직자라는 신약적 관점에서 보면 이 설문결과는 기독교 네티즌들의 의식이 여전히 성직자/평신도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웹스터 사전에서 "그리스도인의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성직 수임식에 의해 구별된 일단(一團)의 사람들"로 정의한 성직자(clergy)라는 용어는 원래 카톨릭 교회에서 평신도(laity)와 구별하는 말로서 사용하였다. 카톨릭에서는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주교단의 으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라는 교황(敎皇),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한 지방교회의 구심점이 되는 주교(主敎), 소명을 받아 주교를 도와 교구의 일정 지역을 담당하여 복음을 전하고 신자들을 돌보며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제(司祭), 사제로 서품되기 위한 입문서품 구실을 하는 부제(副祭) 등을 성직자라고 한다.


이에 비해 개신교에서는 성직자를 평신도의 지도자로 여겨 중히 여기기는 했으나 성속(聖俗)의 구별을 확실히 하는 카톨릭과 같이 계급화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개신교에서도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점차 카톨릭화 되어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성직자/평신도 이분법은 비성경적인 개념으로서 속사도시대(Post-Apostolic Period)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종교개혁기를 지나면서 개신교 내에서 상당 부분 폐기되었지만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특히 유교적 위계 문화에 길들여진 한국 기독교 안에 더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1. 성직자 개념의 역사

성직 개념의 기원은 구약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창세기 4장과 5장의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성직자였으며, 창세기 8장과 12장에서는 노아와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렸다. 이 때는 성직이 가장(家長) 혹은 족장에게 국한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 내에서 성직자를 세우셨으며, 출애굽기 28장에서는 성직자 계급이 더욱 좁혀져 오직 아론의 족속에서만 성직자를 세웠다. 그러나 이런 구약의 성직 전통은 결국 실패했다. 예수님께서 일하시던 때에 민족의 영적 지도자 역할을 했어야 할 대제사장(대성직자) 가야바는 위대한 대성직자이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오순절의 성령강림으로 교회시대가 시작된 후에는 얼마 동안이나마 새 언약 아래서의 새로운 성직자 개념이 확립되었다. 바울은 히브리서 7, 8, 9장에서 옛 언약이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해 새 언약으로 대체되었으며, 이제는 모든 성도가 직접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히10:9-10).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5절과 9절에서 모든 신자들을 가리켜 "거룩한 제사장", 혹은 "왕 같은 제사장"(royal priesthood)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새 언약의 축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진리를 분명히 선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시작된 지 오래지 않아 교회 내에는 세상적인 전통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요한삼서 8-11절에서 디오드레베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남용했다. 그는 요한과 다른 형제들을 모임으로 받아드리는 것을 거절했다(9절). 디오드레베는 악한 말로 그들을 헐뜯고, 그들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들까지 교회 밖으로 내어쫓았다(10절). 그래서 11절에서 요한은 디오드레베의 본(本)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교회의 계급화는 교회가 제도 교회로서 확립되기 시작한 4세기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주후 300년경에는 이미 조직화된 교회가 생겨났고, 325년 경에는 콘스탄틴 대제의 지지를 받으며 교회는 조직화, 세속화되었다. 500-600년경에 로마 카톨릭이 조직되면서부터 교회는 교황이라는 우두머리와 교황청이라는 사령부를 갖게 되었다. 교회는 점차 예수님께서 세우시겠다고 했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이상으로부터 멀어져 갔다(마16:18). 또한 교회의 신비에 대한 계시를 받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으로부터도 점차 멀어져 갔다(엡3:3-10).


중세교회의 계급화 된 모습으로부터 16, 17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카톨릭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리 벗어났음을 발견하고 개혁의 기치를 들었으며 잃어버린 복음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신교 운동도 시간이 지나면서 신약교회의 단순함으로 완전히 돌아가지는 못했다. 이들 역시 사람들의 주장을 따라 수많은 교파를 형성하였고 다시 다른 형태, 다른 이름으로 카톨릭의 성직자/평신도 이분법을 부활시켰다.



2. 성직자/평신도 이분법

그러면 이러한 특정한 계급, 혹은 평신도와 구별되는 존재로서의 성직자 제도가 갖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왜 진정한 교회와 온전한 복음의 회복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성직자/평신도 이분법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가?


첫째, 성직자/평신도 이분법은 교회 안에 종교적 계급 구조를 낳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살아서 움직이는 역동적인 유기체로서의 교회가 인간 조직의 계급제도로 대체된 것이다. 그 결과 많은 평신도들이 피동적인(inactive) 태도를 갖게 되었고, 성직자들만 일을 하게 되었다. 이는 성직자/평신도의 분리가 건전하지 않으며, 성경적 기초가 없음을 의미한다.


둘째, 성직자/평신도 이분법은 잘못된 우월감과 열등감을 만들기 때문이다. 평신도들은 자신이 하는 직업적인 일이 단지 먹고 살며 헌금하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한 것으로서의 가치만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일은 하나님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은 직업적인 일을 하나님을 믿는 것과 철저하게 분리하였다. 이에 비해 성직자들은 자신의 직만으로 이미 평신도들보다 더 거룩한 일에 종사한다는 특권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성직자/평신도 이분법은 종교개혁 정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John Stott)는 에베소서 강해를 하면서 16세기 종교개혁이 (여러 언어로 성경을 번역함으로) 성경은 사람들에게 돌려주었는데 성직을 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50%의 성공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목사만이 성직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성도들과 다른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중세적 사고이며 이미 수백 년 전에 밝히 드러난 말씀의 계시를 역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성직자/평신도 이분법은 평신도들을 게으르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분법으로 인해 평신도들이 담당할 수 있는 일을 위해서조차 유급 성직자를 고용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유급 성직자 제도의 뿌리는 사사기 17장 9절에서 18장 31절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은사를 상품화하는 소위 "고용된 성직자"(hireling) 개념을 볼 수 있다(벧후2:3).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당연한 의무를 신자들은 소위 성직자라고 하는 사역자들에게 돈을 지불하며 맡겨버리고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직자/평신도 이분법은 영적 삶을 세속적 삶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인간의 타락한 죄성에 기초한 세상적 체계이다. 성직자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재자와 제사장이 되면 모든 영적인 권위와 책임은 오로지 성직자의 전유물이 되며 평신도들은 나태해지게 마련이다.


넷째, 성직자라는 개념은 효과적인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신자들에게 주신 영적 은사의 다양성과 충분함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엡4:11; 고전12-14장; 롬12:20; 벧전4:10-11). 마땅히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은사가 있는 자들이 몸을 위한 수고를 거절하고 유급 사역자(성직자)를 고용하는 것은 그 은사를 주신 성령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교회가 성직자/평신도의 이원론적 오류에 빠졌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신자들이 자신의 은사를 따라 유급 사역자들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마음으로 사역을 하는가를 보면 된다. 만일 어떤 모임이나 단체가 그 조직에서 임명 혹은 안수 받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말씀 증거의 은사가 있는 사람을 강단에 세우려 하지 않다면 성직자/평신도의 이분법적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교단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을 강단에 세우지 않는 일부 교단의 행태는 그것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3. 그러면 성직자는 누구인가?

성직자나 평신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부터 모두 하나님께 부름 받은 거룩한 소명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롬1:6-7; 고전1:2; 고후1:1; 골1:2; 엡1:2; 빌1:1; 히3:1; 벧전2:21; 유1:1). 목사가 부르심, 즉 소명에 의해 헌신했다면 평신도들의 세상에서의 직업도 소명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신학교에 가기 전에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를 한다면 물리학과에 진학할지 여부를 알기 위해서도 동일한 금식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밴쿠버 윌링돈교회 뉴펠드(John Neufeld) 목사님의 지적처럼 "목사를 세우기 위해 안수가 필요하다면 택시 운전수가 되려는 사람도, 간호사가 되려는 사람도 안수가 필요하다". 어느 신학자의 표현대로 "목사가 교회에 파송된 성직자라면 평신도는 세상을 향해 파송된 성직자"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시대는 교회 안의 성직자인 목사의 역할보다는 세상 속의 성직자인 평신도의 사명이 더 중요하게 여겨져야 될 때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 내에서 돈을 받는 직업인으로서의 성직자는 많은데 진정으로 세상에서 "성직자"로 사는 평신도들이 적은 것이다.

한국교회는 수없이 많은 교회와 1천만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자랑하지만 결국 세상 속의 성직자로 소명감을 가진 평신도들이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한 사회는 변할 수 없다. 야고보가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한 것은 결국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책임 있는 성도가 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4. 결론적으로

교회와 관련된 일은 거룩하고 교회 밖에서의 일은 세속적이라는 사고에 근거한 성직자/평신도의 이분적 사고는 성직자들과 평신도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로 인해 성직자들은 평신도들과는 다르다는 특권의식을 누리게 되었고, 평신도들은 약간의 돈을 지불하여 "성직자"들을 고용함으로써 번거러운 "종교적 잡무"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평신도들은 종교적이 아닌 소위 "세상에서의 일"은 아무런 신앙적 제재를 받지 않고 세상의 기준을 따라 자기 마음대로 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평신도들은 "병신도들"이 되었다.


신약성경에서 부르심, 즉 소명을 받은 부류는 사도와(롬1:1; 고전1:1) 성도들뿐이다(위의 구절들). 사도시대는 요한을 마지막으로 종료되었다고 보면 오늘날 교회 내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성도들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입장에서 보면 목사나 그 외 교회 내에서의 여러 직분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구체적인 사역을 위해 필요할 때 세우는 직분일 뿐이다. 모든 성도들을 성직자라고 한다면 같은 차원에서 목사도 성직자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목사를 세우는 것은 집사나 장로, 주일학교 교사나 성가대원을 세우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목사는 설교를 하는 등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다른 직분들보다 영향력이 크고, 따라서 적절한 신학적 훈련이 필요하고, 좀 더 신중히 세워야 하는 것뿐이다.


목사만이 성직이라고 생각하면서 평신도들과 다른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청산해야 할 대표적인 중세적 잔재이다. 교회와 관련된 종교적인 일만이 거룩한 일이고 그 일을 하는 사람만이 성직자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시 중세로, 카톨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부르셔서 하나님을 섬기는 성직자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이 가슴 벅찬 사실을 내팽개치고 다시 어둠의 족쇄를 차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