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를 구주와 생명으로 영접했는가?(토론글1)
성경진리토론방
, 2002-11-14 , 조회수 (385) , 추천 (0) , 스크랩 (0)

토론글1 : 요한 복음 1: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먼저 기독신문 게시판을 통해 제가 믿는 신앙을 소개드리고 또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도움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성 삼위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립니다. 저는 제가 붙잡은 어떤 것을 읽는 분들에게 강요하는 식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서로 배우고 서로 빛 아래서 교정 받는 마음자세로 이 토론에 임하고자 합니다. 믿음의 선배 되시는 분들께서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토론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1. 토론할 쟁점

  저의 관찰에 의하면, 세칭 (지방)교회 생활을 하는 '서로사랑님'이 성도들이 구주와 생명으로 영접한 분은 '성육신 하셨다가 죽고 부활하셔서 생명 주는 영이 되신 주 예수님 자신'(고전15:45)이라는 취지의 글을 이곳 게시판에서 올린바 있습니다. 그런데 장로교단 소속 목회자이신 안형식 목사님이 "주 예수님 본인"은 부활 전이고 후이고 사람 안에 직접 들어오신 적이 없으시다 며 위 주장을 비판하셨습니다. 더구나 안 목사님은 예수님이 사람 안에 들어오셨다면 '예수님이 찌그러지셨냐' 는 표현까지 쓰시면서 성도들 안에 주 예수님 본인은 안 계심을 거듭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러자 서로 사랑님은 그러면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라는 골1:27, '너희 생명 되신 그리스도'라는 골3:4,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는 줄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라는 고후13:5,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라는 요일5:12 말씀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과 함께 이번 토론의 대상이 된 5가지 질문을 안 목사님께 제기했습니다. 아직 답변이 없습니다.

  따라서 저와 안 목사님 쌍방은 결국 '우리가 영접한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예수님 본인은 제외되는가?'라는 성도들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을 점검해 가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토론은 어느 분의 지적처럼 다만 삼위일체 토론만이 아닙니다.


2. 요한복음 1:14 을 해석하는 두 가지 관점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이 과연 누구이신가에 대한 안 목사님과 서로사랑님 간의 첨예한 대립은 결국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과연 누구이신가'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점을 다루는 요1:14에 대한 바른 이해는 본격적인 토론 쟁점을 다루기 위한 첫 단추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14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라고 말합니다. 물론 앞서 어느 분도 지적하셨지만 여기서 '말씀(로고스)'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육신이 되신 것'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성육신 하신 것을 말합니다. 이 점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이 점에 다른 오해가 없기 원합니다.

  다만 요1:14에서의 성육신의 주체이신 '말씀'이 하나님이시지만, 이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 가운데 성육신 하셨는가에 대한 이해에는 다음 두 가지로 의견이 크게 엇갈립니다. 바로 여기에 본 토론의 핵심쟁점이 숨겨져 있습니다.


  1) 아버지와 성령 하나님을 떠나서 "아들하나님만" 성육신 하셨다는 견해(안0식 목사님)

  삼위간의 독립을 강조하여 아들 하나님이 이 땅위로 내려오실 때 다른 두 인격들(적어도 아버지 하나님)은 저 하늘에 따로 남아 계시고 아들 안에는 계시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이 관점을 따라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 본다면, 예수님은 삼위 중 한 분으로 다른 두 분과 저 하늘에 계시다가 아버지, 성령 하나님과 헤어져 홀로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홀로 죽고 부활하신 후 다시 원래 하늘에 남아 계시던 아버지 하나님 우편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톤 터치 하듯이 이 번엔 성령하나님만 이 땅에 보내시고 아버지와 아들하나님은 저 하늘 보좌에 그대로 남아 계십니다. 그러니 사람이 죽어서 저 하늘나라에 가기 전 까진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은 사람과는 멀리 멀리 떨어져 계시고 이 땅에 사는 사람은 고작 아버지와 아들은 안 계신 성령 하나님만 만나고 영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여기까지만 읽으신다면 독자 분들은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님이 성육신 하셨고, 인생을 사시고, 죽고 부활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고, 보혜사 성령님이 아버지와 아들의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오신 성경사실을 부인한다는 말이냐 라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물론 저는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무오 한 말씀으로 다 믿습니다. 따라서 위 성경사실도 확고한 믿음으로 아멘 합니다.

  다만 "또 다른 부분의 성경 말씀들"을 근거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되 홀로 오시지 않고 다른 인격들과 함께 오셨고 심지어 구별되면서도 서로 안에 계신 상태(상호내재, 페레코레이시스)로 오셨다고 믿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도 홀로 오시지 않고 아버지, 아들과 구별되나 상호 내재하신 상태로 오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즉 안형식 목사님의 경우는 성경의 한 면만을 붙잡으시나 저는 논리적으로 조화시킬 수는 없되 성경의 양면을 다 믿고 붙잡는 것입니다. 앞으로 계속 보겠지만 이 점이 쌍방의 근본적인 차이점입니다.

  양측 다 성경을 말합니다. 그러나 한 쪽은 성경의 한 면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다른 쪽의 성경을 부인하는 반면, 다른 쪽은 어찌 보면 모순된 듯해도 성경의 양면을 다 성경의 가르침으로 믿습니다. 이제 다음 항목에서 무엇이 성경의 또 다른 방면인지를 간략하게 보고자합니다.


2) 삼위는 "구별은 되나 분리되지 않으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심(마6:9)과 동시에 성육신 하신 아들하나님 안에 상호내재방식으로 계신다고 보는 견해(저와 서로 사랑님).

  앞으로의 저의 토론 글은 주로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룰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글의 분량을 감안해 볼 때 조금씩 나누어서 단계적으로 제시해드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1차 글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성경 구절들, 그리고 신학자들의 관점을 말미에 간략하게 소개 드림으로 첫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다음은 성육신 하신 아들 하나님 안에 아버지 하나님( 및 성령하나님)이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방식으로 상호내재 하신다는 증거들입니다.

(1) 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지 아니하느냐'.
(2) 요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인하여 나를 믿으라.
(3)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도 다 하나가 되어'
(4) 요8:16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시니라'
(5) 요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6) 골2:9 '그 안에는 신격(데오테토스(2320), Godhead)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여기 언급된 신격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의 관계는 뒤에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7) 요1:14, 아들하나님 자신이 성막자체라는 원문(스케노오(4637), tabernacled among us).

    이에 대한 두 분의 신학자의 의견을 소개드립니다.

  '요한복음 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에서 '거하매'는 보다 구체적으로 '장막을 치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데, 이 말은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육체가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우리와 만나시는 참 성막이심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는 성막에 임재하셨으나 이제 참 성막인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 임재하시게 되었다(요1:14,18, 골2:9)'.(이남종, 모세 오경에 나타난 그리스도, 서울; 새순출판사, 1992, 134쪽).
  ** 이남종 님은 총신대와 합동신학원을 졸업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여기(성막)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예표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 안에는 신성(신격)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God is in Christ).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죠오지 C 니드햄, 성막에 나타난 예표와 실체, 박영호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83-84쪽). **죠오지 C. 니드햄은 미국 보스톤 대학교 교수이십니다.

  (8) 로마서3:25의 '이 예수를...화해장소(원문)로 세우셨으니'라는 원문

  개역성경에서 '화해제물'로 번역된 '힐라스테리오스'(2435)는 동일한 단어가 히브리서9:5에서 '속죄소'로 번역된 것처럼 화해제물보다는 '화해장소'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70인 역은 출25:17의 속죄소(시은좌)라는 단어를 롬3:25에서 사용된 단어와 동일한 '힐라스테리오스'을 쓰고 있습니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신 주 예수님은 구약 성막의 실제요 또한 시은 좌의 실제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주 예수님으로 인해 '그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가 필요한 깊은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9) 아타나시우스의 견해 소개

  이제 교회역사상 일관되게 정통교부로 인정받고 있는 아타나시우스의 로고스에 대한 견해를 소개함으로 저의 본 토론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로고스 밖에는 성령이 없음으로 성령을 아들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성령께서는 아들에게서 결코 분리 할 수가 없다. 아들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는 것처럼 성령께서도 아들 안에 계시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피조물 일 수 없고 삼위일체이심을 아타나시우스는 주장한다.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을 결합하고 성령을 아들에게서 분할하지 않는다. 즉 분할 불가한 삼위일체이시다. 이와 관련하여 아타나시우스는 세 위격들(persons)의 상호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위일체께서 그런 동등과 단일의 관계로 계시는데, 누가 감히 성자와 성부를, 또는 성령과 성자를, 또는 성령과 성부를 나누려고 하는가?...따라서 우리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하나의 성화가 있음을 믿을 수 있다(후략)(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신학박사 논문시리즈 11),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106쪽).

  지금까지 다소 긴 글을 읽어주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저는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시는 정통 삼위일체'를 믿는 사람으로서 위 정통교부 아타나시우스의 말을 다시 인용함으로 저의 토론글을 닫고자 합니다.

  '누가 감히 성자와 성부를, 또는 성령과 성자를, 또는 성령과 성부를 나누려고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