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글 5-5, 광야님의 모순된 주장을 반박함(히11:8-10, 16)
성경진리토론방
, 2002-11-05 , 조회수 (333) , 추천 (0) , 스크랩 (0)
여전히 아래 글도 동일한 혼돈의 사고체계 가운데
쓰여진 글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영적인 실체'일 뿐 아니라
우주 공간 어디에 걸쳐있는 '물질적인 성'이라는 혼동의
극치가 빚어낸 진리의 혼잡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슷하나 다른 간교한 누룩을 주의하여 분별하고
단호하게 배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실체니 물질적인 성이니 하는 표현은  말 자체에서 혼동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말해서 믿는 "사람들"도 교회이고, 믿는 이들이 가서 예배드리는
"건물공간"도 교회라는 잘못된 관념의 연장으로 보시면 될 것입니다. 건물공간은
예배당일 뿐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위해서 이런 공간도 필요하긴 합니다.)

이런 간단한 분별조차 무시하시고
계속 무리한 주장을 반복하시는 광야님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제 광야님의 주장을 토대로 간략한 반박을
해보겠습니다.


4. 히브리서 11장 8-10절, 16절에 관하여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브리서11:8-10)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브리서11장16절)

-(광야님 주장)  ⑴ 히브리서를 쓸 당시에 [더 나은 본향]이 [하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성도를 위하여 [예비하신 성]입니다. 그리고 그 성은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이었습니다. [약속하신 땅에]서도 [우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성전은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은 과연 어떠한 곳입니까? 이것이 물리적이거나 물질적인 성이 아니고서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저의 반박 및 질문

  질문1) 만일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이 진짜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성이라면
땅에 있던 솔로몬 성전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는 돌로 만든 것인 반면 다른 하나는 돌보다는 고급 자재인 비싼 진주 보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차이입니까?

우리의 부활 이후에도 금과 보석이 그렇게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이 땅에다가 금과 보석으로 된 저택을 짓고 영화를 누렸던 과거 왕들과 부호들의 사치와 허영과 무엇이 다릅니까? 
아브라함이 진짜 순금과 보석으로 지어진 터가 있는 성에 살기를 사모했습니까? 그래서 지금 아브라함은 먼저 거기 가서 살고 있나요?

질문2) 히브리서를 쓸 당시에 이미 그 성이 완성되어 있었다면 왜 주님은 1900년이 지나는 지금까지 우리를 거기로 데려가지 않으실까요?


-(광야님 주장)

⑵ 우리가 어떤 영적인 연합만을 사모해야 합니까? 마땅히 들어가기를 사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황금성이나 대저택을 사모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중략) 성도라면 마땅히 하나님이 계신 곳에 들어가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이 그러했습니다. 우리도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들어가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저의 반박 및 질문

위 글은 광야님에게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 무엇인지에 대해
참된 빛과 인식이 없다는 것을 잘 폭로시켜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에 물질적인 집을 사모해야 한다는 말도
모순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광야님 안에는 안 계십니까?
하나님의 집인 교회 안에 충만하신 하나님은 광야님에겐
없으십니까? 그리스도의 몸을 얻기를 사모하시는
주님의 갈망을 참되게 만졌다면 바울처럼 유익하던 것 까지도
다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얻기만을 사모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고 한 바울의 가르침과 소망과 광야님의 주장은
너무나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가르침의 누룩이 광야님 안에
스며들어 진리를 투명하게 보는 눈이 흐려지신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처럼 우리가 장차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순금으로 된 1평 짜리 방 10개 정도는
분양 받을 것이라는 자의적 성경해석의 극치에는 이르지 않았으되
눈에 보이는 물질적 가치를 영원 안에서도 붙잡는 잘못된 사상은
광야님도 동일하십니다.

거듭난 성도들이 교회이고
그들이 들어가서 예배드리는 건물은 교회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배드리는 공간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논리를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되
새 하늘 새 땅이라는 공간적인 배경 가운데
존재합니다. 그러나 새 하늘 새 땅이 곧 새 예루살렘은 아닙니다.

이것이 그렇게 이해가 안 되는 말인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역시 영적인 일은 사람의 머리 좋은 것만으로는 다 알 수 없고 계시가 필요함을 또 보게 됩니다.

광야님, 아래 성경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여러 번 읽어서
물질적인 성전개념의 누룩을 씻어내시기를 진심으로 권해드립니다.

'너희도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0-22).

위 말씀을 광야님 해석대로 푼다면
예수님이 진짜 차가운 보석 덩어리 모퉁이 돌이 되어
광야님이 그렇게 들어가길 사모하시는 저 하늘 어디 거처가
되어 우리 데리러 오시지도 못하실 것입니다.
모퉁이 돌이 빠져 나오면 기둥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위 말씀은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를 만드는 재료가
'너희'인데 우리가 여기 이 땅에 남아 있으면
저 하늘 우주 공간 어디에 지어지는 집은 어떻게 완공이 될런지요?

이처럼 자극적인 표현을 통해서라도
광야님을 사로잡고 있는 물질적인 거처의 누룩과 비 진리가
벗겨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겸손하게 그분의
빛 비추심과 은혜 베푸심을
앙망하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은혜이신 삼일 하나님이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생명이 없는 것은 결코 생명있는 유기체를 산출할 수 없습니다.
이런 평범한 원칙을 무시하고
자꾸 무리한 주장을 고집하시니 ....

새예루살렘에 대해
바른 진리인식을 갖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의 최종목표가
무엇인지를 주 앞에서 곰곰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밤이 깊어 감으로 비 진리 심지어 이단적인
가르침이 진리인양 포장되어 참된 성도들조차도
미혹시키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