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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10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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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글에서 계속 이어지는 글입니다.
광야님이 누가복음 16:9의 영원한 처소를 계시록의 그 새예루살렘이라고 주장하시려면 그 핵심쟁점이나 명쾌하게 제시하시면 족합니다. 여기서 ... 이단이야기가 왜 나오며, 윗트니스 리의 불의한 재판관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이런 식으로 자꾸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내시면 토론을 요청하신 광야님의 본인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할 뿐입니다.
광야님은 토론 본 내용에는 마음이 없고 틈 만나면 교묘하게 특정인을 공격하려는 두 마음의 사나이 라고 제가 단정 지으면서 그러한 단정도 사랑으로 한 것이라고 말이라고 한다면 아멘하시겠습니까? 불 필요한 것들을 만지지 마시고 " 순수하고 투명하게" 주어진 토론에만 집중하시기를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광야님의 이상한 논리, 억지주장들을 인용하고 간략하게 반박해 보겠습니다.
1. (광야님주장) "4. 누가복음 16장 9절에 관하여 (1) 누가복음 16장 9절에서, 영원한 처소에 들어가는 문제가 상이나 보상에 따라 갈 수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다면, 그 친구들이 그들의 처소에 들어가 있습니까? 그들은 도대체 어떤 일을 했기 때문입니까? 그들은 무슨 권리로 불의한 청지기를 받고 안 받을 수 있습니까?"(이하 본 토론에 직접 관련없는 불필요한말들은 생략함)
답변) 어찌 제가 할 질문을 광야님이 하십니까? 님의 글을 읽고 제가 하고 싶었던 질문들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1) 님은 지금 한 가지를 두고 이말 저말(횡설수설) 하고 계신 것을 알고나 계십니까? (영원한 처소에 관하여)라는 님의 앞 글에서는 보상개념을 인정하는 듯이 이야기 하시다가 이제 와서는 보상 개념을 거부하는 투로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또 복음친구들이 청지기로 쓸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한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심사(또는 회계)는 상 또는 벌을 염두에 둔 개념입니다. 광야님은 실제로는 자신도 회계의 결과 보상을 이야기하면서-비록 복음친구들이 심사한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시긴 하지만- (지방)교회측의 보상개념은 거부하려니까 이런 혼란스런 장면이 나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님의 앞글을 다시 인용해 드릴테니 본인의 두 글을 스스로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광야님주장) “결코 [불의의 재물로 사귐 받은 자들이] [먼저]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청지기 직분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충성하면, 나중에 그러한 일로 인해 그러한 일과 관련된 상이나 보상이 있을 수 있다는 이러한 관점은 신약 성경의 일관된 관점이 아닙니까? ”
앞글의 님의 주장(충성하면 나중에...상과 보상은 신약성경의 일관된 관점)과 지금의 님의 주장인 복음친구들이 불의한 청지기를 받고 안 받을 수 있는 심사권한이 있다는 주장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새예루살렘에 들어갔지만 청지기로 쓰임 못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 질문에 대해 반드시 다음 글에서 성경을 근거로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2) 광야님은 먼저 글에서는 불의한 청지기를 인정하고 안하고는 주님이 아니고 빚을 탕감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고 하셨지요? 그 내용을 여기에 인용합니다.
(광야님) “빚을 탕감 받은 사람들(친구들, 복음을 받아들인자들)이 영접한다, 즉 청지기로 써 준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것은 회계, 즉 셈하는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제 위 광야님의 주장을 근거로 다시 역으로 제가 질문합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일을 했기에, 그들은 무슨 권리로 불의한 청지기를 받고 안 받을 수 있습니까? 그들이 주님입니까?
3) 성경본문에서 불의한 청지기가 한 일을 광야님은 복음전파만으로 한정하여 해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광야님은 복음전파 할 때 죄인을 불러놓고 ‘기름 백말 빚진 자가 오면 오십으로 쓰라'(6절) 하시고, '밀 백 석 빚진 죄인이오면 팔십이라고 쓰라'(7절)는 식으로 복음을 전파하십니까?
그리고 광야님의 논리에 의하면 이런 식의 복음전파는 나중에 영원 안에서의 새예루살렘에서 복음친구들에 의해 청지기 직분을 인정받느냐 마느냐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인입니다.
자 그렇게 누가복음 16장 본문을 매끄럽고 일관디게 잘 해석하신다고 자부하시니 광야님이 아래 본문을 한 번 해석해 보시기 바랍니다.
(1) 눅16장에서의 '기름 백말'은 무엇입니까?
(2) 그것을 '오십이라고 쓰게 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3) '밀 백석'은 무엇입니까?
(4) '80이라고 쓴 것'은 무엇입니까?
(5) '밀'은 무엇이고 '기름'은 무엇입니까? 위 내용을 광야님이 실제로 전하시는 복음전파 내용과 연결시켜 상세하게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6) 만일 광야님이 자신이 소유하신 불의의 재물을 다 팔아서 갑돌이라는 죄인에게 위와 같은 복음을 전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갑돌이는 광야님으로부터 복음을 받은 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자신의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지는 못했다고 합시다. 이럴 경우에도 장차 새 예루살렘에서 '갑돌이'가 '광야님'의 청지기 직분 심사권을 행사해서 광야님을 청지기로 써 먹을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합니까?
위 질문은 님의 16:9의 영원한 처소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항목드입니다. 적당히 얼버무리지 마시고 꼭 성경을 근거하여 일일이 답변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비유는 서술문장과 달리 그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의미를 이해하고 실행하면 되는 것이지 광야님처럼 자구 하나 하나를 꼬치꼬치 해석하고 그것만을 근거로 어떤 교리를 세울만한 것은 아닙니다. 광야님은 이러한 일반적인 원칙을 무시한 채 자기 나름대로는 눅16장91-13절)을 완벽하게 해석한다고 자부하고 계신지 는 모르나 그런 자만이 바로 님이 스스로 파놓은 함정입니다. 이 발을 빼면 저 발이 다시 빠지는....
성경어디에도 주님도 제쳐놓고 복음 받은 자가 자기에게 복음 전한 자를 자기의 청지기로 써 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심사하고 결정한다는 교리를 뒷바침 하는 곳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광야님은 눅16:9에서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는 말만 가지고 ‘청지기 심사에 대한 전권’이 복음친구들에게 있다는 교리를 세우시겠다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사이비라는 소리를 들을만 합니다.
비슷한데 가짜가 바로 사이비 아니겠습니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믿는 이들의 구원받은 이후의 생활에 대한 심사와 판단은 광야님의 엉터리 주장처럼 “복음친구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엄중한 일은 우리를 심판하시는 주님이 친히 하실 것입니다(롬14:10, 고후5:10, 고전3: 13-15). 이런 성경 해석이 누가 들어도 공감이 가는 바른 교리요 진리입니다. 복음친구들을 주님보다 우위에 놓는 이상한 교리를 다른 곳에 가서는 전하지 마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광야님! 누가복음 16:9가 핵심입니다. 이에 대해 제가 앞글에서 한 말을 다시 한 번 잘 새겨보시기를 바랍니다.
“눅16:9 본문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라고 말합니다. 문맥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귄 결과 영원한 처소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즉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과 '영원한 처소에 들어가는 것'을 연결하는 접속사인 '히나'(2443)는 목적, 한정 또는 결과를 나타내는 ' in order that, so that'의 뜻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본문문맥은 광야님 주장처럼 '친구를 사귀든 안 사귀든 상관없이 다 영원한 처소에 들어간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위 눅 16:9 본문을 “장소에 들어가는 문제”로 해석하려면 일관되게 그렇게 주장하시고, 만일 이것을 “청지기 직분으로 받아 주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해석하려면 일관되게 그렇게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둘은 하늘과 땅처럼 다른 이야기입니다. 적당히 얼버무려서는 안됩니다.“
2.(광야님 주장) (2) 시점의 문제에 대하여
지체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지난 번에서도 지적했지만 1) 본문에서는 주인의 회계(셈)가 있은 후(2절), 청지기의 불의한 재물로 친구 사귀는 이야기가 나옴(5-7절)에도 광야님은 자신의 고정관념에 따라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귄 다음에 회계하는 것으로 이 대목을 풀고 계십니다. 엉터리 본문해석의 한 예입니다.] 이러한 말은, 지체님께서 상이나 보상 문제로만 생각하시고 또 지방 교회의 논리대로만 해석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참 기이한 현상입니다) 지체님께서는 회계를 한 수에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은 언제 일어날 일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이것 역시 ‘비유’에 대해 자꾸 자신이 알고 있는 교리를 대입하기 때문에 오는 혼란입니다. 그냥 본문 문맥을 있는 그대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상과 보상이나 지방교회 논리가 왜 나옵니까? 지방교회논리가 아니라 성경본문의 글의 흐름입니다. 자 본문의 흐름을 보십시다.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그 말을 듣고)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부끄럽구나 내가 할일을 알았도다...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졌느뇨 ...기름 백말이니이다...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본문을 그대로 읽어보시면 됩니다. ‘불의의 친구 사귐-회계-청지기 직분으로 받아 들여짐’ 구조는 님의 고정관념이지 본문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님의 눅 16장에 대한 짧은 논리전개와 해석에서도.... " 당장 회계는 주님이 하시지만 정작 청지기 직분 받고 안 받고에 대한 결정권은 주님은 쏙 빠지고 같은 피조물에 불과한 복음친구가 전권을 휘 둔다"는 모순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성경을 성경 그대로 읽으세요. 광야님이나 자꾸 자기 틀에 성경본문을 끼워 넣지 마시기 바랍니다.
3. (광야님주장) (3) 관련이 없다는 구절에 관하여
지체님께서는 이 곳의 '영원한 처소'가 새 예루살렘이 아니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계실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한 구절을 동원하여 해석을 길게 하고 반론을 요청하였습니다.
답변: 눅16:1-8이나, 10-13절을 아무리 잘 해석하셔도 지금까지의 광야님의 글 내용으로는 9절의 영원한 처소들이 들어가는 장소로서의 새 예루살렘이라는 입증에 실패하셨습니다.
오히려 제게 광야님은’기름 백말 가진자를 오십이라고 쓰라...‘는 이상한 복음이나 전파하는 분, 장차 청지기 직분을 인정하는 권한을 주님은 배제시킨 채 자신이 복음 전한 상대방이 갖는다는 사이비 교리를 주장하는 분으로 비추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눅16장 전체나 16:9 본문 어디에도 그런 사이비 사상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어떤 번역본”이 16:9의 ’영접한다‘라는 말을 ’청지기 직분을 인정한다‘라고 해석했다는 것만으로는 그런 사이비 교리를 세울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매우 우려될만한 접근방법입니다. 성경해석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4. (광야님주장) (4) 지체님께서 그렇게 천년 왕국의 새 예루살렘을 고집하신다면 다음 질문에 대해 잘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체님께서 주장하시는 천년 왕국 시의 새 예루살렘은, 영적인 실체일 뿐이지 '처소'의 개념은 없습니까? ... 계시록 3장의 새 예루살렘이라는 구절은 소위 천년 왕국의 새 예루살렘입니까, 아니면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예루살렘입니까? 그리고 둘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리고 본질상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답변: 계시록으로 질문이 넘어가신 것은 이제 누가복음 16:9에 대해서는 그만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이제 답변합니다. 천년왕국이든, 영원이든 새 예루살렘은 어린양의 신부이며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지 ‘수원성, 남한산성처럼 들어가 사는 어떤 물질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이 점은 제가 처음부터 수도 없이 말했습니다.
계 3:12의 새 예루살렘은 ‘이기는 자’를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거듭난 모든 성도가 계2-3장에서의 이기는 자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모든 구속받은 자들을 다 포함하는 영원 안에서의 새 예루살렘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윗트니스 리 형제님도 그의 회복역 각주에서 새 하늘 새 땅에서의 새 예루살렘은 모든 구속받은 자들의 일반적인 분깃이나 천년왕국에서의 새 예루살렘은 오직 이긴 성도들에 대한 보상이라는 점에서 둘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합당한 해석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새 예루살렘은 사람 안에 하나님이 연합된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시대인 지금도 우린 우리의 연합된 영 안(고전6:17)에서 그 실제를 맛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계시록 21장의 보좌, 생명강, 생명나무, 정금 길, 성전, 빛, 기초석, 성벽을 지금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거긴 밤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믿는이들이 이러한 비밀한 영의 세계의 실제를 떠나 자신의 자아와 육체의 생각을 따라 살므로 그 실제가 이미 영 안에 있으되 밖으로 나타남은 현저하게 부족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비록 소수이나 참되게 자기를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사는 성숙한 믿는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처럼 사람이로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삶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의 실제가 충만하고, 하나님의 생명과 인격의 표현이 충만하며, 비밀한 그리스도와의 봉한 샘의 부분이 풍성합니다. 이들이 이러한 실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에게 새 예루살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 새 이름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질적인 속성은 우리가 주님을 영접할 때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왔으며, 우리가 그리스도를 참된 양식으로 먹고 그분을 삶으로 우리 안에서 연속적으로 증가되고(골2:19), 확산되고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몸이 건축되는 과정이요(엡1:23), 어린양의 신부가 예비되는 과정입니다(엡5:25-27).
(광야님주장)PS : 이 토론이 무슨 공식 문서를 주고받는 것처럼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진리를 논하는 것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진리만이 우리를 생명과 자유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어떤 단체를 공격하거나 옹호하거나 변호하거나 하는 것이 진리의 궁극적 목적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솔직하거나 순수할 수 없습니다. 부족한 우리가 진리를 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과 사귐과 생명과 진리는 뗄 수가 없습니다.
... 요한 복음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답변: 누가 위와 같은 백번 천번 당연한 말에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전적으로 아멘입니다. 다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면 아직 주님의 음성에 대해 순종함이 더디고, 주님을 향한 사랑, 그리스도의 몸의 다른 지체들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저의 그릇의 좁음과 덜 변화됨입니다. 주님이 이런 토론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서 특히 제 안에서 먼저 어둠과 옛 것의 낡음과 아집과 교만과 눈 멀어 보지 못함을 제하고 치료하여 주시기를 앙망할 뿐입니다.
주여 우리 모두에게 어린양이신 당신의 신부로 단장되어 가고 있는 새예루살렘을 밝히 볼수 있는 시력을 주소서! 마음 눈을 밝혀 주소서! 가리운 수건을 걷어 주소서! 어둠의 세력을 잡은 자의 훼방하는 역사를 묶어 주소서! 우리의 생각을 혼미케 하여 주님의 영광의 공채를 보지 못하게 하는 자를 우리로 분별하게 하소서! 신부를 얻기를 갈망하시는 당신의 선한 기쁘심을 우리로 알게 하소서! 주님 이 토론을 몸의 머리이신 당신이 친히 주관하여 주소서! 영원토록 효능있는 어린양의 보혈 아래 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