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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02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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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본 토론에 직접 관련이 없는 성경구절을 가지고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아서 제가 그냥 토론글 1번을 썼습니다.
광야님이 저의 아래 글을 토대로 반론 글을 써주시면 되겠습니다.
반론 글에서는 누가복음 16장 본문해석에 너무 마음을 쓰시기 보다는 눅16:9에서 언급된 '영원한 처소'가 어떻게해서 계21;2, 9-10 또는 다른 부분이 언급한 새예루살렘인지를 입증하시는데 초점을 두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것은 토론의 효율성을 위해 드리는 말씀이니 다른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6:9로 영원 안의 새 예루살렘을 설명하긴 무리임
(지방)교회 측은 계21:2, 9-10 등이 말하는 ‘새 예루살렘’을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인 "영적 유기체" 즉 "오늘날의 교회의 최종완성"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인 교회가 부르심 받아 나온 사람들 자체를 의미하며 그들이 예배드리는 공간인 예배당은 엄밀히 말해 교회가 아니다 라고 믿습니다. 즉 에베소서1:23, 마16:18 등이 말하는 "교회개념"에 "예배당 건물"을 포함시키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광야님은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인 영적 유기체임과 동시에 사람들이 실제로 문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장롱이 있는 안방, 경기도에 있는 남한산성 또는 분당시의 60평 아파트 같은 실제 주거 공간(성(city) 안에 있는 집들) 개념도 있다면서 (지방)교회측의 새예루살렘관에 이의를 제기함과 아울러 토론을 제안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근거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라고 한 눅16:9를 제시하셨습니다.
또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은 재물을 이용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1) 열심히 복음 전한 결과(그 조건을 충족시킨 댓가로) 영원한 처소에 들어가고 2) 그 영원한 처소 안에서 자기가 복음 전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청지기 직분을 수행할 길을 얻는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눅16장의 이 단락은 복음 전하라는 말이고, 상이나 보상이 아닌 주님이 나중에 계산하러 오셨을 때 회계하는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이에 대해 반론해 보겠습니다.
만일 눅16:9에서 언급된 ‘영원한 처소’가 광야님의 주장처럼 불의의 청지기가 자기 재물을 다 허비하여 열심히 복음 전한 댓가로 들어가는 주거 공간이라고 하신다면, 저는 이것이 영원 안에 있는 새 예루살렘과는 다른 개념임을 한 가지 논점만으로 입증해 드리겠습니다.
만일 광야님이 제 주장을 성경적으로 반증하지 못하시면 자신의 주장근거로 제시하신 눅16:9은 미련 없이 내려 놓으시고 보다 더 확고한 근거구절을 기초로 새 예루살렘 토론을 이어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 눅16:9의 ‘영원한 처소’는 계 21:2, 9-10이 말하는 ‘새 예루살렘’은 아니다.
보편적인 이해에 의하면 최소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임이 분명한 사람들은 다 계21:2, 9-10의 새 예루살렘의 구성원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님의 논리에 의하면 눅16:9에서 말하는 '영원한 처소'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귄 사람들’만 들어가는 곳이 됨으로 참되게 거듭났지만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지 못한 분들’은 제외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이 말하는 '새 예루살렘'과 눅16:9가 말하는 '영원한 처소'는 그 '구성원(또는 참여) 범위'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솔직히 참되게 거듭났더라도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 재물 쏟아부어 친구를 사귀는 사람들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 때 광야님의 논리대로라면 눅16:9의 조건을 충족 못시킨 대다수의 거듭난 믿는 이들은 ‘영원한 처소’에는 못 들어가고, 새 예루살렘에도 참여 못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한 편 만일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귄 사람들이 당당하게 ‘영원한 처소’에 들어가지만 거듭난 후 설사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지 못한 사람들’도 역시 ‘영원한 처소’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더 말이 안 됩니다.
이것을 좀더 실감나도록 다음과 같은 예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저 남쪽의 한 낙도에 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6학년 아이들에게 ‘야 너희들 중에서 오늘부터 1년 동안 부모님께 용돈 받은 돈을 자기를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않고 전액 친구들을 위해서 쓰는 사람은 졸업 때 서울에 있는 청와대 구경시켜 주겠다고 합시다. 1년만 꾹 참고 용돈을 친구들을 위해 쓰기만 하면 뉴스에서나 보던 청와대도 들어가고 잘하면 대통령 할아버지도 만날 수 있다니 이 정도면 아이들에게 동기유발이 될 만 합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선생님! 용돈이 아예 없는 사람은요?' 라고 질문을 하고, 또 다른 아이는 '선생님! 너무해요. 몇 명 되지도 않는데 6학년 아이들은 다 청와대 데려가 주세요'라고 했다고 칩시다. 이에 대해 선생님이 ’좋다 6학년 아이들은 다 청와대 데려간다 . 그 대신 처음 조건대로 1년 동안 부모님께 용돈 받은 돈 전액을 자기를 위해 쓰지 않고 친구들을 위해서 쓰는 사람은 졸업 때 청와대 구경 진짜 시켜 주겠다. 알았냐? ‘ 했다면 어떻습니까?
이것이 선생님이 셈(회계)을 바로 하신 것입니까? 용돈으로 친구 돌봐도 청와대 가고, 안 돌봐도 청와대 간다면 선생님은 셈을 제대로 하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반대로 일부를 낙도에 떨구어 놓고, 자기 용돈으로 친구 돌 본 아이들만 청와대 들어가게 할 것이면서도 6학년 아이들은 다 청와대 간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선생님이 사실과 다른 거짓말을 한 것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눅16:9의 ‘영원한 처소’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등 어떤 조건을 이행한 사람만 들어가는지, 아니면 거듭났으면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많이 못 사귀었어도(복음 열심히 못 전해도) 들어가는지에 대해서 광야님은 스스로 파 놓으신 모순에 빠져 계십니다. 왕국 보상 개념을 부인하심으로 스스로 빠진 어려움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2. 누가복음 16장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해석에 모순이 많습니다.
광야님이 눅 16장의 비유를 해석하시려고 여러 역본들의 해석도 참조하시고 나름대로 열심으로 성경본문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참 귀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중심요점 만 붙잡아 우리의 실생활에 적용해야 할 이 단락의 ‘비유’를 너무 세세히 그것도 일관성없이 설명하시다가 스스로의 모순에 빠지셨습니다.
이것은 제가 보기에 새 예루살렘 토론과 직접관련이 없음으로 깊이 다루진 않겠습니다. 그러나 광야님이 ‘상과 보상 문제가 아니라 회계문제다’ ‘흔히 지방교회가 말하는 왕국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니다’ 등등 자신의 해석을 토대로 (지방)교회 해석을 비판하셨기에 약간만 광야님의 성경해석 방식의 모순점을 지적해 보겠습니다.
1) 광야님은 불의의 재물로 복음을 전하고- 그 댓가로 청지기 직분을 수행하게되고, 그 시기는 주님이 나중에 계산하러 오실 때 이고, 그 때 부끄럼 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즉 불의한 청지기가 재산을 허비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주인이 나타나서 ‘네 보던 일을 셈하라.’고 했고(2절), 그 말을 들은 청지기가 빚 진자를 불러다가 소위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일을 한 것은 그 후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3-7). 즉 본문에는 셈이 먼저 있고 그후에 친구 사귐이 있는데, 광야님은 친구 사귐 후에 주림 재림 시 셈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적어도 시점이해에서는 본문과 정반대의 해석입니다.
또한 광야님 주장대로 해석하여... 어떤 사람이 거듭난 청지기였으되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못 사귀어 주님 재림 시 부끄러움 당했다면 어찌되는지요? (광야님은 지난 글에서 부끄러움 당하지 말아야 함을 아주 강조하셨지요) 이 사람들도 눅16:9의 '영원한 처소'에 들어가나요? 아니면 못 들어가나요? 광야님의 눅16장 해석과 적용은 많은 부분이 이 처럼 무리가 있으십니다.
2) 광야님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귄 사람들을 빚 탕감 받은 사람들(친구들, 복음 받은 자들)이 영원한 처소 안에서 청지기로 써준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단락의 성경본문 어디에도 복음 받은 친구들이 복음 전해준 사람들을 청지기로 써준다고 말한 부분이 없습니다. 그냥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정도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안에 있는 영원한 새 예루살렘 안에서 누가 누구를 청지기로 써준다는 말씀이신지.... 이미 그 때는 양 측 다 복음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상태일 것입니다. 본문의 청지기가 1) 주인의 물질적인 재산 관리하는 역할이었고 2)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역할도 재물을 써서 죄인들이나 이웃 지체들을 주님께 이끄는 역할이었는데 그렇다면 영원가운데 있는 그 날에 가서도 주인(주님)이 화폐가 필요하고, 또 복음전 할 죄인이 남아 있게 되나요? 어떤 청지기직분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씀입니까? 그리고 그 성경근거는요?
위와 같은 모순점들과 의문들이 제기되는 것은 광야님이 비유에 대해 무리하게 해석을 시도한 결과에서 온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광야님이 저의 위 1번 항목에 대해 반론해 주시든지 아니면 눅16:9를 일단 포기하시고 새 예루살렘을 직접 언급하는 다른 성경구절을 가지고 새예루살렘이 '되는 것'(to be)인지 되기도 하고 수원성 들어가듯이 들어가기도(to go) 하는 곳인지에 대한 본격적인 토론에 임하셨으면 합니다.
주님이 광야님에게 넘치는 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눅 16:9를 중심으로 한 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대한 윗트니스 리 형제님의 해석은 누가복음 라이프스타디 (보급판) I 298-308 쪽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10쪽 분량을 여기에 다 소개하긴 무리입니다.
요점은 이 비유는 주님의 청지기들인 "거듭난 믿는 이들"(눅12:42, 고전4:1-2, 벧전4:10)이 재물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좆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300쪽). 물론 여기에 복음전파가 포함되겠지만 복음전파만으로 한정되지도 않습니다. 또한 '영원한 처소' 관련 언급은 지난 번에 소개드렸듯이 이런 일은 오는 천년왕국 시대에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305쪽).
한 가지 주의 할 것은 (지방)교회 측이 천년왕국이라고 할 때 그것을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자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등에 의하면 천년왕국은 여전히 "회복된" 옛 하늘 옛 땅을 배경으로 이뤄지는 왕국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지구 공간 안에 "교회인 성도들"(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 살고 있지만 이 "지구 전체"가 교회이거나 "예배당"이 교회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천년왕국 안에 새예루살렘의 실제를 갖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천년왕국 자체가 새예루살렘은 아닙니다.
심지어 이것은 게시록 21:1에 나오는 새 하늘 새 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새 예루살렘은 새 하늘 새 땅을 "배경으로 하여" 존재하는 하나님과 사람의 완전한 연합이되 새 하늘 새 땅까지 포함하여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혼동하시면 안 될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분들의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는 "성도들"도 교회이고 성도들이 예배드리는 "예배당"도 교회다 라는 사상은 죄송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콘크리트 예배당이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일부가 된다는 발상은 우리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광야님도 이 부분에 혹시 오해가 있지는 않으신지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