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약학 연구소(
http://my.dreamwiz.com/qhj99/korean.html )에서 가져왔습니다.
작성자 : 신현우
본문: 누가복음 6:1-5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 하였느냐 5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본문의 전후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본문 직전에 우리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눅 5:38)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복음은 낡은 부대 즉 낡은 유대인들의 전통에 조화될 수 없고 이에 적합한 새로운 전통을 요청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이 낡은 전통에 부딪힐 때는 마치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 부대에 담기면 그 부대를 터뜨리듯이 그 낡은 전통을 부숴뜨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낡은 전통 중에 하나가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전통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어떻게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전통을 부수어뜨리는지 보여줍니다.
본문의 뒤에는 예수께서 열두제자를 택하는 장면이 이어지고 (눅 6:12-16) 허다한 무리가 예수께로 나아오는 장면(눅 6:17-19)과 예수님의 평지 설교가 이어집니다 (눅 6:20-29). 그리하여 예수님의 유대 안식일 전통 개혁은 12 제자로 대표되는 새이스라엘의 창조와 그들에게 담길 새포도주인 평지 설교를 준비하는 역할을 합니다.
본문은 옛 이스라엘을 새 이스라엘로 변화시키는 예수님의 종교개혁의 정신을 보여줍니다. 종교개혁하면 우리는 칼빈이나 루터를 생각하지만, 이러한 종교개혁은 옛 기독교를 새 기독교로 개혁한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종교개혁은 옛 유대교를 새 유대교로 개혁한 근원적인 종교개혁입니다.
이제 어떻게 예수께서 옛 유대교를 새 유대교로 개혁하셨는지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서 비벼 먹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했습니다. 그들의 전통에 의하면 이러한 행위는 추수에 해당하고 추수는 안식일에 하지 못할 노동에 해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리새 전통은 구약 안식일법을 엄격하게 적용한 것인데, 무자비하게 엄격하고 세부적이어서 이 전통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안식일은 본래 애굽에서 쉬지 못하고 매일 중노동에 시달리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선물로서 그들이 정기적으로 쉴 수 있게 보장하신 자비로운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비의 법을 바리새 전통은 무자비한 짐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 전통을 개혁하여 안식일법의 본래의 정신을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바리새 전통을 어긴 제자들의 행위를 변호하심으로써 바리새 전통의 규범성을 부정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위를 "하지 못할 일"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이 심지어 율법에 따라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은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바리새 전통에 따라 하지 못할 일을 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하는 사람은 구약 율법에 따라 하지 못할 일을 한 다윗을 더더구나 비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다윗을 비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더욱더 비판받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반율법적 행위를 비판하지 못하고 오히려 옹호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반전통적 행위에 대해서는 쌍심지를 켜고 비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불공정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공정성은 자기들의 전통을 남에게 부과하고, 자기들이 백성들의 지도자로서 행세하려는 바리새인들의 교권추구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 전통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임을 분명히 하시며, 바리새 전통을 어긴 제자들의 행위를 변호하십니다. 오늘날도 개혁은 절대화된 전통을 상대화하며, 절대화된 전통에 의해 정죄된 자들을 변호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절대화된 전통은 그 전통 뒤에 있는 소수의 전통주의자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로서 존재하며, 이러한 전통을 거부한 사람들을 정죄하는 무기로 사용됩니다. 신학도 많은 경우에 이러한 전통으로 작용합니다. 심지어 칼빈이나 루터의 개혁신학 마저도 예수님의 참 제자들을 핍박하는 교권주의자들의 도구로 오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모든 전통을 상대화하지 않으면 우리는 전통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학들과 전통들을 상대화하고, 직접 예수님을 성경을 통해 만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되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전통으로 정죄된 자들을 변호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억울하게 바리새 전통에 의해 정죄된 제자들을 변호한 예수님을 본받는 길입니다. 우리는 또한 자기들의 전통을 강요하며 남을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이 실제로 권력 앞에서는 입을 다물고 다만 약자들에게만 무거운 짐을 지우는 자들임을 폭로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할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현대판 바리새인들에게 미움을 사고 핍박을 당할 수밖에 없지만,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인자의 날과 연관시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인자의 날이란 인자 예수께서 재림하는 심판의 날입니다 (눅 17:26-37). 이 날은 마침내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땅에 도래하는 완성의 날입니다. 이 날은 완전한 안식을 가져오는 날입니다. 그리하여 안식일은 완전한 종말의 안식의 예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의 주인이신 인자는 또한 이 완전한 종말의 안식을 예표하는 안식일에도 주인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마지막 인자의 날에 가져올 하나님 나라의 안식을 미리 가져다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이삭을 먹을 수 있게 허락하십니다. 참된 안식이 있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는 질병이나 굶주림이 없을 것이므로, 안식일에도 역시 질병이나 굶주림이 합당치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하시고자 과감하게 바리새 안식일 전통을 부수어 뜨리신 것입니다. 이처럼 개혁은 종말론적 미래를 현재에 미리 맛보게 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현재에 이미와 있는 하나님 나라는 이에 합당하지 않는 묵은 전통들을 부수어 뜨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통을 파괴하는 하나님 나라의 힘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개인의 묵은 죄성에 젖은 습관을 고치고, 교회와 사회의 부패한 전통을 개혁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는 이 날에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 먹을 수 있게 허락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율법에 따라 먹지 못할 거룩한 떡을 먹을 수 있었다면,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단지 바리새 전통에 따라 안식일에 먹지 못할 밀이삭을 먹을 수 있게 더더구나 허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권한이 없는 다윗이 진설병을 먹을 수 있었다면, 안식일에 대해 권한이 있는 예수님께서는 더구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이삭을 먹게 허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또한 다윗의 주인이십니다. 시편 110편에서 다윗은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눅 20:44에서 이점을 지적하십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이 자손이 되겠느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면,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라기보다 다윗의 주인 것입니다. 다윗의 주는 다윗보다 더 큰 분입니다. 이렇게 다윗보다 더 큰 분이 본문에서 다윗과 비교되고 있습니다. 다윗이 제사장외에는 먹지 못할 거룩한 떡을 먹고 함께 있는 자들에게도 줄 수 있었다면, 다윗의 주이신 예수님은 얼마든지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이삭을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과 함께 있는 무리가 율법을 어기고도 면죄를 받았다면, 다윗의 주이신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찌 한낱 바리새 전통을 어기고 면죄를 받지 못하겠습니까?
다윗의 주이시면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바리새 전통 개혁은 따라서 합리적일 뿐 아니라 합법적 권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예수님의 개혁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자기들의 전통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리새 전통 무오의 잣대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재고, 정죄한 것입니다. 눅 6:11은 그들이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주, 안식일의 주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자기들의 안식일 전통을 어길 것이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였고, 그래서, 예수님은 메시야가 아니라고 단정하고 감히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자기들의 전통을 절대화하고 우상화하는 태도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리새 전통을 잘 개혁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판 바리새인들이 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통으로 예수님을 심판하고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늘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께서 주인이심을 명심하고 우리의 신학이나 전통으로 예수님을 판단하기 보다는 예수님에 의해 우리의 신학과 전통이 판단받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개혁신학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신학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을 대항하여 높아진 모든 신학과 사상과 전통은 심판을 받고 그 발아래 무릎을 꿇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무오"를 "예수무오"로 이해하기보다는 "우리교단의 교리적 입장의 무오"로 해석해서 남을 정죄하는 무기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들이야말로 현대판 바리새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과 자기들의 전통을 동일시함으로 자기들의 전통을 절대화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마치 율법과 바리새 전통을 동일시함으로 바리새 전통이 무오한 것처럼 간주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이 전통에 입각해서 비판한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판 바리새인들은 신학논쟁을 하는 신학자들 가운데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한 바리새인들이 될 위험 속에 있습니다. 오직 성경을 외치며 낡은 전통을 개혁한 개혁교회에 그동안 많은 전통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전통들이 어느새 권위를 행사하며 개혁교회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규범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교회처럼 성경 + 전통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전통의 눈으로 성경을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직 성경"이란 구호은 "오직 우리들의 전통을 통해 이해된 성경"으로 왜곡되어 쓰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현대판 바리새주의인 것입니다. 우리 개혁교회의 전통도 예수님의 종교개혁정신에 의해 거듭나지 않으면, 결국 바리새 전통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 전통 뒤에는 예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무릎꿇는 대신 우리의 생각을 주장하는 아집이 숨어 있습니다. 인본주의적 아집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적 자아가 말씀 앞에서 산산히 부수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참다운 경건을 배우지 못하고 바리새적 외식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적 외식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지 않는 마음에서 기초합니다.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해도 참으로 내 생각보다 예수님의 생각이 항상 옳다는 마음이 없는 고백은 바리새적 신앙고백에 불과한 것이며 결국 예수님을 핍박하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려고 다메섹을 향하여 가는 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사도로 변화된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극적 변화는 오직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체험이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야만 합니다. 그 때 우리의 반역적이고 무가치한 인생은 사도바울의 삶처럼 아름답고 값지게 바뀌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우리의 영혼은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계속 갈급해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개혁자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영혼은 참된 회개를 체험하고 죄악의 사슬에서 풀려나 자유와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