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이신 예수님
<위키 백과사전>은 신랑(新郞)을 “결혼식에서 아내가 될 사람과 결혼한 남성”으로 정의합니다. 민중서관이 발간한 <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신랑은 “갓 결혼한 남자” 혹은 “결혼하여 새서방이 될 남자”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신랑 개념’을 처녀 총각들과 관련하여 사용할 때는 큰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는 주 예수님이 믿는 이들의 ‘신랑’(뉨프히오스, 3566)이심을 강하게 암시하는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침례 요한이 “신부를 얻는 사람은 신랑이지만, 곁에 서서 듣는 신랑의 친구도 신랑의 음성을 듣고 크게 기뻐합니다”(요3:29)라고 할 때 신랑은 주 예수님을, 신랑의 친구는 침례 요한 자신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열처녀 비유’(마 25장)에서 처녀들이 기다리던 신랑은 문맥상 재림하실 주 예수님이십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에 견주어 말씀하셨습니다.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슬퍼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들이 올 것인데, 그 때는 금식할 것입니다(마9:15).
남녀관계와는 달리, 이처럼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을 신랑과 신부관계로 보는 시각은 매우 독특하고 심오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위 인용 외에도 성경 여러 곳에서 더 발견됩니다.
성경근거
사54:5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사62:5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렘3:14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렘31:32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호2:19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고후11:2 내가 여러분을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순수한 처녀로 드리려고 약혼시켰기 때문입니다.
계19:7:” ..어린양의 결혼 날이 다가왔고, 그분의 아내도 자신을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계21:9-10 : “어린양의 아내를 보여 드리겠습니다...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
그렇다면 신부인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을 신랑으로 대우 해 드리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요? 두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과 복종의 관계
신랑이신 주님은 아내인 교회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신부인 우리는 모든 일에서 그러한 신랑에게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엡5:24). 사랑은 문제가 없건만 우리의 복종이 늘 문제입니다.
머리와 몸의 관계
신랑이신 주님은 아내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엡5:23). 우리는 그분의 몸입니다. 정상적인 몸이 그러하듯이, 몸인 우리는 늘 머리이신 신랑의 공급과 보호와 제한아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적용
동방예의지국이던 대한민국의 이혼률이 OECD 국가들 중 1위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성격 차이, 경제 문제 등 여러 이혼 사유가 있겠지만, 몸이 머리를 무시한 것이 근본원인입니다. 즉 결혼식 때 쓴 ‘면사포’의 의미인 ‘나는 이제 머리가 없고, 이후로는 남편이 내 머리다’(창24: 65)라는 원칙이 깨진 데 있습니다. 더 깊이 본다면, 남편들이 자신들의 참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고후11:3). 따라서 이 음란하고 패역한 시대를 함께 사는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이 <신랑의 머리되심> 문제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울러 그리스도인들의 결혼 생활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비결은 참 신랑이신 주 예수님께서 신랑 대접을 제대로 받으시는 데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참 신랑’ 이신 주님이 안 계시면, 이 땅 위의 모든 신랑들은 다 일종의 ‘껍데기 신랑들’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