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날짜를 계산하라
믿는이들
Eugene , 2012-06-05 , 조회수 (6845) , 추천 (1) , 스크랩 (1)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6-17).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욜 2:25).

 

시편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향해 드린 한 기도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우리의 지난 날들을 계산한다면 며칠, 혹은 몇 년인가를 쉽게 계산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그의 눈으로 계산하신다면 계산되는 날도 있고 계산될 수 없는 날도 있다.

 

우리의 세상에서의 날짜에는 한계가 있다. 이 한계 있는 날들 가운데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루가 하루로 계산되고 일년이 일년으로 계산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실로 주의해야 할 문제이다.


 

창세기 4장과 5장에는 두 가지 계보가 나온다. 4장의 것은 가인의 계보와 5장의 것은 셋의 계보이다. 이 두 계보가 기록된 방법은 각각 다르다. 가인의 계보는 매우 간단하여 그의 자손들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셋의 계보는 매우 세밀하여 각각 몇 살에 누구를 낳고 몇 살까지 살았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고 대대로 나이가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이 두 계보를 자세히 살펴 볼 때 하나님이 어떠한 원칙으로 우리의 나이를 계산하는지를 알 수 있다.

 

가인의 계보가 간단한 것은 하나님께 득죄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하나님과 교통이 없기 때문이다. 셋의 계보가 세밀한 것은 셋이 아벨의 대표로서 하나님이 열납하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날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는 상태에 따라 계산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와 허물 가운데 죽었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날짜는 계산되지 않는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과 교통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의 영적 날짜는 시작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출 12:2)고 하셨다. 정월은 그 해의 시작이요, 날짜의 시작으로 계산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달부터 유월절에 양을 잡고 애굽을 떠나 바로의 손에서 해방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로 그 달을 정월로 삼게 하신 것이다. 그 달로부터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시작한 것이다.

 

형제 자매여, 당신의 영적 역사(歷史)는 얼마나 되는가? 어떤 사람은 나이가 많아 오십 세, 육십 세가 되었지만 영적 나이는 일 년, 혹은 일 개월밖에 안 된다. 영적 날짜는 당신이 거듭난 날로부터 시작된다. 당신이 주님의 구원을 받은 그날이 바로 당신의 영적 역사의 시작인 것이다. 그날 이전은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나이로 계산될 수 없다.

 

또한 우리가 주님을 믿은 후의 일 년이 반드시 일 년으로 계산될 수는 없다. 당신이 주님을 믿은 후 오 년이 흘렀어도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반드시 다섯 살 먹은 그리스도인으로 계산되는 것은 아니다. 바꾸어 말해서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어떤 날은 하나님 앞에 있는 날로 계산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 어떤 날들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허송 세월한, 계산할 수 없는 날들이기 때문이다. 또 성경에서 어떤 날들은 하나님이 기록하셨다. 이러한 것은 모두 우리의 경계가 된다. 아래에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몇 가지를 근거삼아 이 공과를 배우기로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온 때부터 솔로몬이 처음으로 성전을 건축한 때까지 몇 년이 경과했는가? 사도행전 13장 18절에서부터 22절까지에서 말하기를 『광야에서 약 사십 년 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약 사백 오십 년 간)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 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라고 했다(다윗이 왕 노릇 한 것은 사십 년이다-삼하 5:4). 이렇게 하면 애굽에서 나온 때부터 솔로몬이 왕 노릇 한 지 사 년이 되어 처음으로 성전을 건축한 때까지는 몇 년이 되는가? 사십 년에 사백 오십 년을 더하면 사백 구십 년이요, 사백 구십 년에 다시 사십 년을 두 번 더하면 오백 칠십 년이 된다. 오백 칠십 년에 다시 솔로몬이 전(殿) 건축하기 전의 삼 년을 더하면 모두 오백 칠십 삼 년이 된다.

 

그러나 열왕기 상 6장 1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 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사 년 시브월 곧 이 월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고 했다. 여기에서 말한 것은 오백 칠십 삼 년이 아닌 사백 팔십 년이니 구십 삼 년이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큰 햇수의 차이가 있을까? 사도행전의 기록이 잘못되었을까, 아니면 열왕기 상의 기록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다. 두 군데의 기록이 다 잘못되지 않았다. 이 두 군데의 햇수가 다른 것은 그 가운데 영적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볼 때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 중에서 광야의 사십 년이 틀리지 않았고 다윗의 사십 년도 틀리지 않았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하기 전의 삼 년인 것도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그 사백 오십 년이다. 열왕기 상을 사도행전과 비교해 볼 때 구십 삼 년이 적게 기록되어 있다. 이 구십 삼 년은 어디로 갔는가?

 

우리가 사사기를 살펴볼 때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으니 그것은 곧 이 햇수 동안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 족속에게 몇 차례 핍박을 받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핍박받은 햇수가 모두 몇 년인가를 보기로 한다.

 

사사기 3장 8절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을 섬겼더니』라고 했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일 첫번째 받은 핍박으로서 모두 팔 년이었다.

 

또 3장 14절에서는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십팔 년을 섬기니라』고 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두번째 받은 핍박이었고 모두 십 팔 년이었다.

 

4장 2절과 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는데 그 군대 장관은 이방 하로셋에 거하는 시스라요 야빈 왕은 철병거 구백 승이 있어서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 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고 했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세번째로 받은 핍박으로서 모두 이십 년이었다.

 

6장 1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라고 나와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네번째 받은 핍박으로 모두 칠 년이었다.

 

다시 13장 1절을 더 보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섯번째로 받은 핍박으로 이번에는 블렛셋 사람을 사십 년 간 섬긴 것이다.

 

이상 다섯 차례의 이방 족속의 핍박은 모두 몇 년인가? 팔 년에 십 팔 년을 더하고, 이십 년을 더하고, 칠 년을 더하고, 또 사십 년을 더하면 전부 몇년인가? 남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구십 삼 년이다. 이것이 열왕기 상과 사도행전의 기록의 차이를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역사를 말하고 있었으므로 구십 삼 년을 계산해 넣었으나 열왕기 상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상태를 주의하였으므로 구십 삼 년을 계산하지 않고 사백 팔십 년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구십 삼 년에는 큰 의의가 있다. 이 햇수는 유실된 햇수들이다. 아, 언제든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유를 잃고 이방을 섬기고 사사가 없었을 때에는 햇수를 계산할 수 없었던 때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속하여 애굽에서 구출되어 나왔지만 그들이 대적의 손 아래에서 종이 되어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길 수 없었을 때에는 다 계산되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 외의 것을 섬길 때 그들의 햇수는 유실된 것이요 하나님이 계산치 않으시는 것이다.

 

형제 자매여, 우리는 마땅히 계산해야 한다. 구원받은 후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계산될 수 있는 날이 며칠이나 되는가? 당신이 주님을 믿은 지 십 년 혹은 팔 년이 지났는데 당신이 이 지나간 연대 중에서 허송세월한 날들은 얼마나 되는가? 지나간 날들 중에서 몇 퍼센트가 빠지는가?

 

아, 우리는 많은 날들을 허송 세월했다! 하나님 앞에 계산될 수 있는 날들이 과연 몇 년이나 될지, 다 합해서 사 년이나 될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의 뜻대로 보낸 날들, 하나님을 떠난 날들, 실패한 날들, 타락된 날들은 모두 하나님이 보시기에 계산하실 수 없는 날들이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보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몇 년 동안 허송세월한 날들이 얼마나 되는가를. 아, 하나님과 교제를 잃은 시간은 모두 계산될 수 없는 시간들이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여, 우리는 단 일 초라도 아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조금씩 흩어져 있는 잃어버린 날들을 얼마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를 간 노정을 볼 때 우리는 시간의 낭비가 얼마나 엄숙한 일인가를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을 나온 후 삼개월 만에 시내산에 도착했다(출 19:1). 그들은 시내 산에서 거한 지 십개월이 되는 날, 곧 애굽에서 떠난 지 이 년 이개월 이십일 되는 날에 시내산을 떠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기업을 주시기로 약속한 땅으로 갔다(민 10:11-12).

 

신명기 1장 2절에서 『호렙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에 까지 열 하룻 길이었더라』고 했다. 가데스 바네아는 가나안 땅의 변경에 있었으며 가나안은 그들이 시내산을 출발하여 열 하룻 길을 걸으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데스 바네아에 와서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후 그들은 광야에서 삼십 팔 년 동안을 방황했고 그들의 자손 때에서야 비로소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다.

 

이 방황은 너무도 길었다! 삼 년, 오 년이 아닌 삼십 팔 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었다. 이 년이면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 땅을 삼십 팔 년이나 허비한 후에야 들어간 것이다. 우리의 영적 길에서도 얼마나 많은 세월을 낭비하는지 모른다. 닷새면 해결될 문제가 어떤 사람에게서는 사오 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이 광야에서 방황하여 많은 날들을 허비한 것과 같다. 이 손실은 참으로 큰 것이다. 우리는 이 일을 가벼이 넘기지 말아야 한다.


 

아브라함의 일에서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 있다. 그의 일생의 역사에서 어떤 날은 계산되었으나 어떤 날은 계산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곧 우르)에 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어떻게 하였던가(행 7:2-3)?

 

그가 그 말씀을 듣지 않으려 하니 속에 평안이 없었고, 온전히 다 들으려 하니 그 자신에게 못마땅했다. 그러므로 그는 반만 순종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친척을 떠나라 하셨으나 그는 친척을 데리고 떠났다. 단 한사람만 데리고 간 것이 아니었다. 그의 조카 롯도 같이 갔고 그의 아버지도 같이 갔다.

 

하나님의 뜻은 원래 그가 가나안에 가는 것이었으나 그는 하란에 머물고 있었다(창 11:31). 이러한 상태가 바로 철저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상태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차가와지라 하면 뜨거워지는 듯 하나 막상 뜨거워지라 하면 또 그것도 그에게서 볼 수 없다. 이와같이 아브라함도 갈대아 우르는 떠났으나 가나안 땅에는 아직 들어가지 않고 있으니 그는 중도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죽은 후 하나님은 그를 다시 불렀다(창 12:1). 이번에는 하나님이 그를 하란에서 불렀다. 하나님의 뜻은 요동치 않는다. 하나님은 한 번 정하시면 반드시 이룬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가나안 땅에 가게 하시는 뜻은 아브라함이 하란에 머무름으로 인하여 변경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첫번째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 아브라함은 반만 순종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다시 불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순종하여 하란에서 나왔을 때, 성경에서는 즉시 그의 나이가 그 당시 칠십 오 세임을 기록하고 있다(창 12:4). 그가 우르에 있었을 때의 나이도 기록되지 않았다(창 12:4). 그가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섰을 때 비로소 그가 칠십 오 세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그의 다른 연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던 날들은 도중에 머무르는 날들이요, 잃어버린 날들이요, 이런 날들을 하나님은 기억지 않으신다. 형제 자매여 우리는 우리의 지난 날을 회고해 볼 때 얼마나 많은 날들을 잃어 버렸는지 모른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란에서의 날들은 모두 하나님이 기억지 않는다는 것이다. 허다한 날들을 우리는 제멋대로 행하고, 게으르고 안일하게, 지체하며 보냈다. 이것은 모두 하란에서의 날들이며 모두 계산되지 않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축복을 받으려면 반드시 하란을 떠나야 했다. 아브라함이 칠십 오 세가 되던 그 해, 곧 하란을 떠난 그 해를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고 하나님이 기록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아브라함의 잃어버린 날들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그가 아들을 낳을 때에도 손실이 있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셨으나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의 제의에 따라 아내의 여종 하갈을 첩으로 삼아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한 것이다.

 

그 후 하갈은 한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의 육의 힘으로 낳은 것이요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기 16장의 마지막에 기록된 그의 나이 팔십 육 세와 17장의 처음에 기록된 그의 나이 구십 구 세 사이에 십 삼 년이라는 공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13년 동안에는 그가 한 일이 한 가지도 기록되지 않았고, 그는 한 번도 제단을 쌓지 않았고, 하나님이 그에게 한 번도 나타나시지 않았고, 새로운 계시와 약속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한 날들은 다 공백의 날들이요, 다 날짜가 없는 날들이다. 그러한 날들은 곧 이스마엘이 자라나는 날들이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아브라함의 이러한 날들은 헛되이 보낸 유실된 날들이라는 것이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지나간 이 몇 년 가운데에서 새로운 빛과 새로운 말씀이 있는가? 이 몇 년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라도 당신의 손을 거쳐 구원을 받은 사람이 있는가? 이 몇 년 가운데에서 당신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았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새로운 확신을 가졌는가? 당신은 하나님께 새로이 바친 일이 있는가? 만일 당신에게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이 날들은 모두 잃어버린 날들이다.

 

어느 나이 많은 자매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마땅히 하루를 하루로 써야 한다. 이것이 상을 얻는 길이다.』 때때로 우리는 열흘을 다 합해도 하루가 되지 못하니, 얼마나 가련한 일인가! 형제 자매여, 우리는 매일매일 참된 그리스도인 노릇을 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허송 세월하여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짓고, 자기 뜻대로 행한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것은 다 세월을 낭비하고 허비하는 것이며 너무도 유감스런 것이다.

 

성경에서는 왜 아브라함의 구십 구 세를 기록했을까? 그것은 바로 그가 그 해에 할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할례를 받은 지 일 년이 지난 후에 그는 이삭을 낳았다. 할례의 뜻은 곧 육을 제하는 것이다. 우리가 육체 가운데 행할 때의 날들은 헛되이 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부터 육에 속한 모든 것들을 버리고 자신을 온전히 제단에 바쳐 다시는 헛된 날들을 보내지 말아야 한다. 오십 년 중에서 사십 구 년을 버리는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한다. 헛된 생활을 한 것이 얼마며 남은 시간은 얼마인지 우리 계산해 보자. 우리가 매일매일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린다면, 매일매일 우리의 날짜를 주의해야 한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주님은 하나의 비유로 말씀하셨다. 한 주인이 여러 차례 품꾼을 불러 포도원 안에 들어가 일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글자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놀고 섰다」는 것이다.

 

이 주인은 『또 제 삼 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제 십 일 시에도 나가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에 섰느뇨...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말했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고 서 있지 말고 일하라시는 것이다. 이 비유가 또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정해진 일의 범위-포도원-가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바빠서 시간이 조금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당신은 어디에서 바쁜가? 만일 당신이 포도원 안에서 일하고 있지 않다면 놀고 서 있는 사람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당신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생활하지 못하면 당신이 얼마만큼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보시기에 놀고 서 있는 것이다. 또 당신이 영적 일을 하기에 바쁘다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에게 『너는 어찌하여 놀고 여기 섰느뇨? 포도원 외의 일은 모두 내 것이 아니다.』고 말하신다. 당신은 매우 바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한가한 것이다.

 

포도원 안에서의 일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다. 포도원 안에서 당신이 하는 일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다. 포도원 안에서 당신이 하는 일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요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당신이 하는 일이 만일 하나님의 뜻 밖의 것이라면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놀고 서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 주인이 제 십 일시까지 여전히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고 했다. 이 「종일」은 사람의 일생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한가히 서 있는가, 아니면 포도원 안에서 일하고 있는가? 당신은 오해하지 말라. 이 말은 당신이 직업을 버리고 전도하라는 말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반드시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포도원 안에서 일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한다는 뜻이다.

 

포도원 안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있다. 땅을 파는 일도 있고, 씨 뿌리는 일도 있으며, 수리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다 포도원 안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정한 어떤 사람처럼 일해야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특정한 어떤 일만이 하나님의 일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오직 포도원 안에서 보낸 시간만이 계산되는 것이다.

 

형제 자매여, 당신이 구원받은 지 삼 년, 오 년, 혹은 십 년, 이십 년이 지났으나 당신이 하나님을 위해 보낸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분명히 당신은 많은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를 위해서 했는가? 당신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한 것만이 좋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에게 직업을 버리고 복음만을 전적으로 전하시라는 것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전적으로 복음을 전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날 수도 있다. 문제는 모두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어떠한가에 있다. 이러므로 절대적으로 바치는 것이 필요하다. 구원받은 날로부터 지금까지 당신에게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면 당신은 이 일생을 다 서서 놀아 버린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편지하기를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1-2)고 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첫번째로 복음을 전한 때부터 고린도에 편지를 쓴 때까지에는 대충 몇 년이 흘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이 자라지 못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인 노릇한 것이 몇 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바울의 뜻은 오직 그들이 마땅히 자라야 했는데 자라지 못한 것은 그들이 세월을 허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마땅히 강하고, 힘있고, 밥을 먹어야 할 터인데 세월을 허비했기 때문에 여전히 육에 속한 어린아이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땅히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길을 걸어간 경험이 있어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 있어야 할 터인데 그들은 지금까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노릇한 지는 몇 년이 되었으나 여전히 어린아이이므로 바울은 이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느낀 것이다.

 

형제 자매여, 당신이 만일 『나는 구원받은 지 몇 년 안 되었으니까 어린아이인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당신의 일생의 날 수는 얼마인가?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날 수는 얼마인가? 만일 당신이 주님을 믿은 지 십 년, 팔 년이 지났는데도 태어날 때와 똑같이 여전히 육에 속하여, 여전히 어린아이라면 당신은 이미 많은 날들을 허비한 것이다.

 

아, 형제 자매여, 우리는 세상에서 얼마나 사는가? 칠십 년! 팔십 년! 아, 짧은 날들 가운데서 구원받기 전의 날들을 제하면 또 얼마나 남는가? 형제 자매여, 당신은 당신의 날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남았는가를 알고 있는가? 당신이 이미 육십 년을 살았다면 하나님은 『너는 내 앞에서의 생활이 십 년도 채 남지 않았다.』고 하시리라. 당신이 오십 년을 살았다면 하나님은 또 『너는 내 앞에서의 날들이 역시 며칠 안 남았다.』고 말씀하시리라. 만일 당신이 많은 날들을 허비하여 보냈다면 그것은 너무도 가련한 일이다.


 

형제 자매여, 우리는 우리가 헛되이 보낸 날들을 생각할 때 정말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위를 주신 것이니 그것은 곧 요엘서 2장 25절에서 하신 말씀, 황충이 먹은 햇수대로 우리에게 갚아 주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 드리자. 하나님에게는 항상 길이 있다. 당신이 이미 육십 세가 되었고, 삼 사십 년을 헛되게 보냈다 하자. 당신은 이제 『아, 기회는 이미 다 지나갔다. 나의 가장 왕성하던 날들은 이미 황충이 먹어버렸다. 잃어버린 날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테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고 탄식할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자. 하나님은 황충이 먹은 날들을 우리에게 갚아 주신다. 우리가 허비한 십 년 중에서 계산될 날이 하루 밖에 없다 해도 그러나 우리가 세월을 아끼면 하루가 천 년이 될 수 있다. 다윗이 말하기를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 즉...』(시 84:10)라고 했다. 하늘의 날짜는 24시간을 하루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산법은 다르다. 우리의 봉사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일 때에는 하루가 많은 날이 될 수 있다.

 

전에 한 청년이 죄악에 빠져 있다가 얼마 후 폐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어느 나이 많은 하나님의 종이 말씀을 전하기를, 주 예수께서 이미 그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으니 회개하라고 했다. 그는 그의 죄를 자복하고 주 예수를 그의 구주로 영접했다. 이 청년이 처음에 복음을 들었을 때는 『나는 이 같은 죄인인데 주님이 사해 주실 수 있을까?』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다. 그의 마음은 기쁘고 평안했다.

 

며칠 후 그 나이 많은 하나님의 종이 다시 그를 만나러 왔을 때 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을 보고 물었다. 『왜 이러오? 사단이 당신을 시험치 않기를!』 그는 말했다. 『아닙니다. 나는 내 죄가 이미 사해진 것을 압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근심하고 있습니까?』 그는 근심스런 얼굴로 말했다. 『나의 세상에서의 날들은 다 지나갔습니다. 내가 주님을 만날 때 무엇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나는 가지고 갈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내가 빈 손으로 우리 주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원래 그는 이러한 까닭으로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그 나이 많은 분은 그에게 말했다. 『형제여, 괜찮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 말로 제목을 잡아 찬송가를 짓겠습니다. 사람들이 이 찬송가로 인해 감동을 받아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 상(賞)을 모두 당신에게 돌리기를 원합니다.』 이 찬송가가 바로 「빈 손 들고서 주님 얼굴 어찌 대할 수 있는가」(한국복음서원 찬송 668장)이다.

 

이 찬송가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열심을 내어 주님을 위해 일했다. 이 청년이 비록 그의 일생 중 많은 날들을 허비했으나 그가 임종시에 가졌던, 주님을 위하는 그 마음으로써 주님은 그의 원하는 것을 이루신 것이다.

 

형제 자매여, 우리 모두 자기의 날짜를 계산하자! 우리는 잃어버린 날들을 보상받아 우리의 하루가 천 년이 되게 하자. 우리의 걸음걸음이 모두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기를 원한다.


워치만 니
[워치만 니 전집 제 2집 18권, "자기의 날짜를 계산하라", 한국복음서원]


2012-08-30 16:24:32   추천
귀한 자료 담아갑니다. 감사^^
littleman
2013-10-02 17:29:34   추천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