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그리스도의 십자가
믿는이들
Eugene , 2012-05-31 , 조회수 (4754) , 추천 (0) , 스크랩 (0)

앞 장에서 우리는 로마서 1장에서 8장까지가 두 부문, 즉 우리의 행위를 처리하는 피를 언급한 첫째 부문과 우리의 어떠함을 처리하는 십자가를 언급한 둘째 부문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에게는 피의 사함이 필요하고 또한 십자가의 구원하심도 필요하다. 앞에서 우리는 첫 부부문에 대해 개략적으로 말했었다. 이제 우리는 둘째 부문에 대해 말해보겠다. 우리가 두번째 부문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이 장들의 몇 가지 특징을 언급하고자 한다. 이 특징들은 이 두 부문이 주제와 강론에 있어서 다르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진일보적인 구분

 

전후반부 가운데 로마서 4장과 6장에서 부활의 두 방면이 언급되었다. 4장 25절은 주 예수의 부활을 우리의 의롭다 하심과 연관시켰다. 사도는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지위가 언급되었다. 그 반면에 6장 4절은 부활하심으로 새 생명을 우리에게 분배하여 우리로 거룩한 생활을 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그는 행위에 대해 말한 것이다.

 

또 이 부문에서 화평이라는 단어가 언급되었다. 5장에서 말한 하나님과 화목됨은 그분의 피를 인해 의롭다 함을 얻은 결과이다. 사도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5:1)라고 말한다. 이 말은 내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전에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되었다(5:10).

 

그러나 나는 곧 나 자신이 문제의 일대 원인인 것을 발견한다. 내 속에 여전히 불안함이 있는 것은 내 속에 나를 이끌어 범죄케 하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과는 화목되었지만 내 자신과는 화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 마음 속에서는 사실상 여전히 내전(內戰)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광경을 로마서 7장에서 분명히 우리에게 말해준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 안에 육과 영의 치명적인 충돌이 있다는 것을 본다. 그러나 이로부터 8장에서 말한바 영 안에서 행함으로써 갖게 되는 깊은 평강의 생활로 인도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다』(롬 8:6-7).

 

더 상세히 고찰하면, 우리는 전반부의 첫부문은 칭의의 문제를 다루고(3:4-6, 4:5, 25), 둘째 부문은 칭의에 이어지는 성화의 문제(6:19, 22)를 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 귀한 진리를 아는 것은 전체 이야기의 절반밖에 모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위치를 해결해줄 뿐이다. 우리가 앞으로 계속 전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행위 문제를 해결하는 등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심을 볼 것이다. 이 장들 안의 사상의 발전은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일에서 두번째 걸음은 항상 첫 걸음에 뒤따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첫걸음만 안다면 우리는 정상 이하의 그리스도인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 생활에 들어갈 수 있는가? 물론 이런 생활에 들어서는 필수 조건은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워진 기초가 있을지라도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전진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객관적으로 우리는 피가 우리의 범죄를 다룬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주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의 대치물로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 사함과 칭의와 화목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가서,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그분이 어떻게 우리 안의 죄의 본성을 처리하시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피는 능히 우리 죄들을 깨끗이 씻을 수 있지만 우리 「옛사람」을 씻을 수는 없다. 나의 이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한다. 피는 범죄를 처리하는 반면에 십자가는 죄인 자체를 처리한다.

 

로마서 1장부터 4장까지에서는 「죄인」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이 장들의 주제가 죄인이 아닌 사람이 범한 죄들이기 때문이다. 「죄인」이라는 단어는 5장에 가서야 나타나기 시작한다. 거기서 죄인을 어떻게 말했는지를 주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5장에서 죄인이 죄인으로 불리운 것은 그가 범한 죄 때문이 아니라 그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흔히 로마서 3장 23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는 말씀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그가 죄인임을 알려주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이 구절을 인용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증명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이 구절을 인용할 때 순서가 바뀌는 위험이 따른다.

 

로마서의 가르침은 우리가 범죄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범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죄인인 것은 범죄로 인함보다 출생으로 인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5장 19절에서 말한 바와 같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구성)된 것같이』.

 

우리는 어떻게 죄인이 되었는가? 아담의 불순종 때문이다. 우리가 죄인 된 것은 우리의 행한 것 때문이 아니라 아담이 행하고 이룬 것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지금 내가 영어를 한다고 해서 영국인 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사실 나는 중국인이다. 그러므로 3장은 우리의 행한 것-『다 죄를 범하였으매』를 주의하는 데로 인도한다. 그러나 우리가 죄인 된 것은 우리의 행한 것 때문이 아니다.

 

한번은 내가 어린아이들에게 『어떤 사람이 죄인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즉시 『범죄한 사람이 죄인이지요.』라고 답했다. 그렇다. 범죄한 사람이 죄인이다. 그러나 범죄는 그가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죄인 된 이유가 아니다. 범죄한 사람이 죄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범죄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그가 아담의 족속이라면 역시 죄인으로서 구속이 필요하다. 여러분은 내 말을 이해 하는가?

 

어떤 사람은 악한 죄인이고 어떤 사람은 선한 죄인이다. 어떤 사람은 도덕적인 죄인이고 어떤 사람은 패괴한 죄인이다. 어쨌든 그들은 모두 죄인인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점은 우리의 행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어떠함에 있다. 한 중국인이 미국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중국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중국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중국인인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으면 곧 그런 사람이다. 내가 죄인인 이유는 아담으로부터 출생했기 때문이다. 내가 죄인이 된 것은 나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혈통과 유전 때문이다. 내가 죄를 범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가 죄악의 종족에서 나왔기 때문에 범죄하는 것이다. 내가 범죄하는 이유는 내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것이 아주 악해도 우리 자신은 그렇게 악하지 않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사악하고 우리의 근원이 사악하다는 것을 재삼 보여주고자 하신다. 우리의 모든 문제의 근본은 우리가 죄인인 데 있다. 그리고 이 죄인은 반드시 처리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범죄를 처리해주는 것은 주님의 피이고 우리 자신을 처리해주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이다. 피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행함에서 사함을 얻게 하고,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어떠함에서 해방을 얻게 한다.


인간의 천성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서 5장 12절부터 21절까지를 보자.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은혜와 죄의 대비와 그리스도의 순종과 아담의 불순종이 서로 상반됨을 볼 수 있다. 로마서의 후반부(5:12-8:39)의 시작은 바로 이점을 말한다.

 

이제 이 구절들을 자세히 보기로 하자. 거기서의 논의는 한 결론으로 안내하는데, 그 결론이 우리의 한 걸음 전진된 묵상을 위한 기초가 된다. 그 결론은 무엇인가? 5장 19절 :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우선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시고 그런 다음 우리가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처음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의 행위만을 관심하고 우리의 존재를 별로 주의하지 않는다. 우리의 근심거리는 우리가 행한 것이지 우리의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어떤 면이 고쳐지기만 하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을 고치는 데 착수한다. 그러나 결과는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우리는 실망하여 우리의 문제가 밖의 행위에만 있지 않고, 우리의 내적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것을 점차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보려고 노력하지만, 우리 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가 겸손해보려고 하지만 우리 속에 겸손하기를 거부하는 어떤 것이 있다. 우리가 사랑해 보려고 하지만 우리 속에 남을 싫어하는 느낌이 있다. 우리가 겉으로 웃으면서 온유를 나타내려고 하지만 우리 속의 강팍함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우리가 겉에서 상황을 고쳐보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 속 깊숙히 그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때 우리는 주님 앞으로 나아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여, 이제 깨달았습니다! 나의 행한 것이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나 자체까지도 잘못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19절의 결론이 이제 우리에게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성질상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족속에 속한 죄인이다. 타락은 아담으로 하여금 성질상 기본적인 변화를 갖게 했다. 이로써 아담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죄인이 되었다. 우리가 외관상 이 족속의 공통점을 구비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내적 성품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는가? 바울은 『한 사람의 불순종함으로』라고 말했다. 이 점을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나의 성(姓)은 니( )이다. 이것은 중국의 아주 보편적인 성이다. 나는 어떻게 이 성을 갖게 되었는가? 이것은 내가 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중국의 성씨표를 찾아서 이 성을 택한 것이 아니다. 사실 내 성이 니씨인 것은 내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방법으로도 내 성을 바꿀 수 없다. 내가 니씨인 것은 내 부친이 니씨이기 때문이다. 내 부친이 니씨인 것은 내 조부께서 니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행동이 니씨 집안 사람 같아도 니씨이고 니씨 같지 않아도 여전히 내 성은 니이다. 내가 중화민국의 대통령같이 존귀하든 길거리의 거지같이 비천하든 내 성은 여전히 니이다. 내가 무엇을 하든 안 하든 내 성이 니라는 사실은 바꾸어 놓을 수 없다.

 

우리가 죄인인 것은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아담 때문이다. 나 개인이 범죄함으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아담이 범죄할 때 내가 이미 그의 안에 있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다. 나는 아담에게서 출생한 자이기 때문에 그의 일부분이다. 나는 이 사실을 바꿀 수 없고, 나의 행위를 개선함으로써 아담 밖에 있거나 다시 죄인이 되지 않게 할 수 없다.

 

중국에 있을 때 나는 아담 안에서 우리가 이미 범죄하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해서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모든 중국 사람은 황띠(중국어 발음을 딴 것임)가 그들의 조상인 것을 시인한다. 사천 년 전 그가 시유와 싸울 때 비록 적이 흉악했어도 황띠는 그와 싸워 이기고 그를 죽였다. 나중에 황띠는 중화민국을 세웠다. 그러므로 중국 민족은 사천 년 전 황띠에 의해 세워졌다. 만일 황띠가 적을 죽이지 못하고 반대로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면 오늘의 상황은 어찌 되었겠는가?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겠는가?』

 

그는 『나라는 사람은 있지도 않지요.』라고 말했다. 내가 말하기를, 『오, 아닙니다! 황띠는 그 사람대로 죽을 수 있고 당신은 당신대로 살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불가능합니다. 만일 황띠가 시유에게 살해되었다면 결코 나라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당신은 인간 생명의 일관성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생명은 아담으로부터 온 것이다. 만일 당신의 증조부가 세 살 때 죽었다면 당신은 어디에 있겠는가? 당신도 그의 안에서 죽은 것은 자명하다! 당신의 체험은 증조부의 체험에 달려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든 사람의 체험은 아담의 체험과 분리될 수 없다. 아무도 나는 에덴 동산에 있어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잠재적인 사실로 말한다면,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을 때 우리도 거기에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아담의 죄와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아담 안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그로부터 범죄로 인한 열매인 아담의 성품을 받았다. 바꾸어 말해서 죄인의 성품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아담으로 인해 존재하고 또 그의 생명과 성품에 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로부터 얻은 성품에도 죄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했듯이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행위에 있지 않고 우리의 유전에 있다. 우리의 혈통을 바꾼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길이 없다.

 

우리가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방향에 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이런 사태를 처리하신다.


아담 안에와 그리스도 안에

 

로마서 5장 12절부터 21절은 우리에게 아담에 관해 말해줄 뿐 아니라 주 예수에 관하여도 말한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19절). 아담 안에서 우리가 아담에게 속한 모든 것을 받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것을 받았다. 아담 안에와 그리스도 안에라는 두 마디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반복하여 말하는 것을 번거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의 예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유전과 종족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겠다.

 

이 예증은 히브리서에 있다. 여러분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이 서신의 앞 부분에서 멜기세덱이 레위보다 크다고 증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레위의 제사장 직분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는 먼저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이 레위의 제사장 직분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이유는 매우 단순한데, 이는 곧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히 7:14-17). 또 아론의 제사 직분은 자연히 레위의 반차를 따른 것이다. 만일 그가 멜기세덱이 레위보다 크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면 그는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런 뛰어난 방법으로 이 점을 증명하였다.

 

히브리서 7장에서 그는, 아브라함이 여러 왕들을 패배시키고 돌아올 때(창 14장) 노략물 중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고 또 그로부터 축복을 받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였으므로 레위는 멜기세덱보다 크지 못하다. 왜 그런가? 이는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칠 때 아브라함 안에 있는 이삭도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이고, 이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 안에 있는 야곱도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렸으며 따라서 아브라함 안에 있는 레위도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이다.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히 7:7). 그러므로 레위의 위치는 멜기세덱보다 낮고 아론의 제사 직분도 주 예수님의 제사 직분보다 낮다. 여러 왕들이 싸우고 있을 때 레위는 아직 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조상 아브라함 안에 있었고 또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이다(히 7:9-10).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의 의미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가정의 아비로서 온 집이 그의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가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릴 때 온 집도 그의 안에서 십분의 일을 드렸다. 그들이 개별적으로 드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아브라함 안에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드릴 때 그의 드림 안에 그의 후손들도 모두 포함된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우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 죄가 그로 말미암아 인류 안으로 들어왔고 또 사망이 죄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그날부터 죄가 왕 노릇 하여 사람을 죽여왔다. 그러나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있는데, 또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가 되게 하신 것이다. 죄가 많이 나타난 곳에 은혜를 넘치게 하셨다. 죄가 왕 노릇 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같이 은혜도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롬 5:19-21). 아담 안에서 우리는 절망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우리를 죄로부터의 해방을 실제적으로 체험하는 데 이끄신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6장의 시작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이 질문에 바울은 스스로 놀라면서 큰 소리로 『그럴 수 없느니라!』고 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그분의 자녀들이 거룩하지 않고 그들의 죄에 묶이는 것을 좋아하시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또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의 억압을 받지 않도록 우리를 위해 적절한 준비를 해주심을 인해 그분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여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우리가 죄인으로 출생하였는데 어떻게 죄의 유전을 끊을 수 있는가? 우리는 아담 안에서 출생했는데 어찌 아담에게서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주님의 보혈이 우리를 아담에게서 옮길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하겠다. 방법은 오직 하나이다. 우리가 출생으로 아담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오직 죽음으로써 거기서 나올 수 있다. 우리의 죄의 본성을 제하려면 우리의 생명을 제해야만 한다. 죄의 묶임이 출생으로 시작되었으므로 죄의 해방은 오직 죽음으로써만 가져올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바 죄에서 구원받는 길이다. 해방의 비결은 바로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롬 6:2)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죄스런 그들의 생명을 벗으려고 힘쓰고 노력하다가 죄의 생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럼 구원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구원의 길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죽이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를 처리하셨다는 것을 시인해야 하는 데 있다. 사도 바울의 이어진 말은 이 뜻을 설명해준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

 

만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우리를 처리하셨다면 그분 안에 있을 때 구원의 방법이 효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큰 문제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야만 가능하다. 사실상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길이 없다. 또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미 그분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힘으로 안 되는 일을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어 주셨다. 그분은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셨다.

 

고런도 전서 1장 30절의 말씀은 정말 좋다. 나는 이 구절이 신약에서 가장 좋은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사도는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고 말한다. 어떻게 그 안에 있게 되었는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일을 우리가 궁리하고 노력하도록 남겨두지 않은 것을 인해 하나님을 찬미하자. 하나님이 이미 계획하시고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가 들어가려고 계획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다.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미 완성하신 역사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많은 것들이 뒤따르게 된다. 우리가 인용한 히브리서 7장의 예증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아직 출생하지 않은 레위를 포함하여-다 아브라함 안에서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이다. 그들이 개별적으로 드린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드릴 때 그들이 아브라함 안에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드림 안에 그의 모든 자손이 포함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의 예표이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 모두가 죽었다. 그때 우리가 아직 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죽음은 개별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있기 때문에 또한 그분 안에서 죽은 것이다. 사도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고 말한다. 그분이 십자가 상에 못박혀 죽으실 때 우리도 못 박혀 죽은 것이다.

 

중국 향촌에서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흔히 간단한 비유로 심오한 진리를 설명한다. 한번은 한 작은 책을 들고서 종이 한 장을 그 책 속에 끼워 넣었다. 그러면서 향촌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 주목하십시오.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종이는 이 책과 완전히 다른 나름대로의 모양을 가졌습니다. 이제 이 종이가 내게 특별한 쓸모가 없어서 이 책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서 이제 이 책을 상해로 보낸다면 이 종이는 결국 어디에 있겠습니까? 책이 상해에 도착할 때 이 종이가 여전히 이 곳에 남아 있겠습니까? 이 종이와 이 책의 운명이 다르겠습니까? 그렇지 않은 것은 자명합니다! 비록 나는 이 책만 보냈지만 종이가 책 속에 넣어져 있기 때문에 책이 간 곳에 종이도 가게 됩니다. 가령 내가 이 책을 강에다 버린다면 종이도 강에 버려지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이 책을 물에서 건져낸다면 이 종이도 건져지는 것입니다. 이 종이가 책 안에 있기 때문에 이 책의 모든 체험을 이 종이는 동일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미 그리스도 안에 두셨기 때문에 그분이 그리스도에게 행하신 모든 일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 행해진 것이다. 우리는 그분과 같은 운명이다. 무릇 그분의 체험한 바를 우리도 체험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참예한다. 십자가 상에서 그분이 이미 못 박혔을진대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으실 필요가 있는가? 결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힐 때 우리도 못 박힌 것이다. 그분의 못 박히심이 과거의 사실이라면 우리의 못 박힘은 결코 장래의 일이 될 수 없다.

 

내가 여러분에게 도전하겠다. 여러분은 우리의 십자가에 못 박힘이 장래의 일이라고 말한 구절을 신약에서 하나도 찾을 수 없다. 헬라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말할 때 사용된 단어는 시간상 부정과거시제로 되어 있다(롬 6:6, 갈 2:20, 5:24, 6:14). 육신적으로 이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우리도 못 박혔다. 이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그분 안에 두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영원한 사실이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대표성과 포괄성

 

십자가 상에서 주 예수님이 죽고 그분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무죄한 그분의 생명으로 우리를 속죄하시고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만족케 하셨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이런 특권이 있다. 그분 외에는 구속 사업을 분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피를 흘렸다는 말씀이 없다. 이는 그분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구속 사업을 이루실 수 있고 어느 누구도 이것에 참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죽으심은 단지 피를 흘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또한 우리의 함께 죽음을 위한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고 그분의 죽음 안에 당신과 내가 포함되었다.

 

그는 자주 대신하여 죽었다는 말과 함께 죽었다는 말로 주님의 죽으심의 두 방면을 언급한다. 함께 죽었다는 것은 아주 좋은 말이다. 그러나 함께 죽었다는 말은 사람들에게 함께 죽은 사실이 우리 편에서 시작된 것으로 오해되기가 쉽다. 그래서 자신이 주님과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이 용어가 옳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응용에 있어서 너무 일러서는 안 된다. 먼저 주님이 나를 그의 죽음 안에 포함시킨 사실에서 시작하는 것이 낫다. 주님의 만유를 포함한 죽음이 나를 그분과 함께 죽은 위치에 두셨다. 이 말은 당신더러 그분과 함께 죽으러 감으로써 그의 죽음 안에 포함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포함시킨 것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신약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이 말씀은 참으로 귀하다고 느낀다.

 

주 예수님의 죽으심은 만유를 포함한다. 주 예수님의 부활도 만유를 포함한다. 고린도 전서 1장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보았다. 같은 서신 끝부분에서 우리는 이 사실에 관한 더 풍성한 의미를 볼 수 있다. 고린도 전서 15장 45절과 47절에는 주 예수님을 말하는 두 가지 현저한 명칭 혹은 칭호가 있다. 거기서 주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과 둘째 사람으로 불리웠다. 성경은 그분을 두번째 아담이라고 부르지 않고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른다. 또한 그분을 마지막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둘째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안에 극히 중요한 진리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구분을 주의해야 한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리스도는 인류의 총체이시고 둘째 사람으로서 그분은 새 족속의 머리이시다. 그러므로 여기에 두 연합이 있다. 하나는 그분의 죽음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의 부활에 관한 것이다. 첫째로 그분은 인류와 연합하여 마지막 아담이 되셨고, 역사적으로는 베들레램에서 시작되어 십자가와 무덤에서 종결되었다. 그분은 아담 안의 모든 것을 그분 자신 안에서 종결시키고 그런 다음 그것들을 심판과 사망으로 이끄셨다. 둘째로 그분은 둘째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분과 연합되었다. 이것은 부활로 시작되고 영원-끝없는 것을 말함-으로 종결된다. 그분의 죽음은 첫 사람을 제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적이 첫 사람에게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분은 죽음에서 부활하여 새 족속의 머리가 되셨다. 이 새 족속에게서 하나님의 목적이 온전히 실현될 것이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분은 마지막 아담의 신분으로 못박히셨다. 첫 사람 아담 안에 모든 것이 그분 위에 집합되어 제해졌다. 우리는 다 그 안에 포함되었다. 그분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옛 족속을 제하시고 둘째 사람으로서 새 족속을 이끌어오셨다. 그분은 그의 부활 안에서 둘째 사람이 되셨고 이 안에 우리도 포함되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고 말한다. 마지막 아담 안에서 우리는 죽었고 둘째 사람 안에서 우리는 살아났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를 아담에게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는 하나님의 권능이다.


워치만 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그리스도의 십자가",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