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배와 질그릇
생명
Eugene , 2012-05-27 , 조회수 (2495) , 추천 (0) , 스크랩 (1)

성경 : 고린도 후서 1:8-9, 17, 2:2上, 3上, 4, 3:1, 3:5, 4:8-10, 5:4, 5: 16, 6:8-10, 7:5-6, 10:1上, 10:8, 10:10-11, 11:5-6, 12:7-9, 12:10下, 10:4

 

고린도 후서 안의 바울

 

우리가 만일 위의 성경 구절들을 잘 읽었다면, 자연히 이 책 안에 마치 두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한면으로 당신은 바울 자신을 보고, 또 한면으로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울을 볼 것이다. 당신이 만일 1장부터 13장까지를 계속하여 읽는다면, 그의 말이 한결같으며 모두 한 원칙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몇 마디로 바울이 이 책에서 제기한 것을 요약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4장에서 말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이다.

 

1장에서는 이 보배가 질그릇 안에 놓여 있음을 본다. 3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한면으로 우리에게 질그릇을 보여주며 또 한면으로는, 보배를 보여준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이 구절을 읽은 후에 하나님이 그분의 빛으로 우리를 비추실 때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일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질그릇은 보배의 빛을 막을 수 없으며 질그릇은 보배의 힘을 매장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종전에 말한 적이 있지만, 신약 전체에서 고린도 후서와 같이 그러한 사람을 언급한 다른 책이 없다. 많은 서신에서 당신이 보는 것은 교리나 진리나 계시이다. 많은 서신에서 당신은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린도 후서는 신약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하여 그분 자신의 계시를 전수시킨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유일한 책이다. 만일 고린도 후서가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바울이라는 사람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가 이룬 일만을 알 뿐 영원히 이 사역을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린도 후서가 있어야 비로소 그의 사역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역을 인식하며, 또한 이 사람을 인식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하나의 질그릇임을 본다.


이상 가운데의 그리스도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머릿 속에 하나의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이 있어서 그러한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을 힘을 다하여 추구해 간다. 우리가 만일 이상하는 그 그리스도의 모양에 도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바로 완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 나는 이상적인 완전한 사람을 가지고 있으며,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표준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 이상적인 표준에 도달할 수 있으면 완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 만일 완전한 사람이라면. 그는 하루종일 웃어야만 한다. 만일 한 시라도 그가 눈물을 흘린다면, 그는 승리하지 않았으며 크게 실패했고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만일 완전하다면, 반드시 그의 용기는 대단히 크고 어떤 일이든지 관계없이 무서워 하지 않으며, 어떤 일에 관계없이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가 어떤 일에 있어서 두려워 한다면, 그는 믿음이 없고 주님을 의뢰하지 않으며 완전치 않다고 말하겠다.

 

이러한 것은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마땅히 조금도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가 만일 근심한다면, 그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 이러한 일은 여러분에게 많이 말할 필요가 없다. 형제 자매들 속에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내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을 나무라지 않는다.


바울은 한 사람이다

 

어느 날 고린도 후서를 읽을 때, 나는 바울이 마음 속에 근심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읽고 『바울도 근심하였는가?』라고 물었다. 또 그가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말하는 것을 읽고 나는, 『바울도 울었는가?』라고 물었다. 그가 마음이 고생스럽고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것을 읽고 나는, 『바울도 고생스러워 하고 고통스러워 했는가?』라고 물었다. 그가 환난을 너무 심하게 받아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말할 때 나는, 『바울도 절망하였는가?』라고 물었다. 더 읽어 내려 갈 때에 보게 된 많은 부분은 이제까지 내가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바울과 같은 사람에게도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지금까지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 때부터 나는 그리스도인이 다른 류의 천사가 아님을 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이러한 류의 천사를 땅에 놓으시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내가 한 가지 보기 시작한 것은 바울은 우리에게서 아주 가까우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이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그를 인식하며 하나의 사람이라는 것을 본다.


보배는 질그릇 안으로부터 드러난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머리 속에 하나의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기억할 것은 그것은 당신이 만든 것일 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인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도 그런 그리스도인은 원치 않으신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질그릇을 만난다. 그러나 특별한 점은 바로 이 질그릇 안에 보배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 보배는 질그릇을 감추며 이 보배는 질그릇 안으로부터 뚜렷이 드러난다. 이것을 기독교라고 부르며 이것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여기에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두려워 하지만, 그러나 그는 또한 강하다. 그는 마음 속에 괴로워 하지만, 그러나 앙망한다. 그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오히려 싸이지 않는다. 그는 비록 핍박을 받았지만, 여전히 버린바 되고 끊어진 바 되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의 모양은 거꾸러 뜨림을 당했지만 오히려 그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다. 그가 연약한 것을 보지만 그는 『내가 연약할 때가 곧 강함이라』고 말한다. 그의 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것을 보지만 그는,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그는 악한 이름이 있지만, 또한 아름다운 이름이 있으며 사람을 속이는 것 같이 보이지만, 오히려 참되다. 그는 무명한 자 같으나 오히려 유명한 자이다. 그는 죽은 자 같으나 오히려 살았다. 그는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오히려 죽음을 당하지 아니하였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오히려 항상 기뻐한다. 그는 가난한 자 같으나, 오히려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한다. 그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오히려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이것이 그리스도인이요 이것이 또한 기독교이다.

 

무엇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가? 이는 바로 그의 몸에 하나의 조화의 모순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의 생명이 있어서 그 생명 안에 오묘함을 설명할 수 없는 영적인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이 모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어떤 한 무리의 사람들은 질그릇이 없고 단지 보배만 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은 만일 질그릇이 있다면, 아무 소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의 사상은 이 양극단 안에 있다. 모든 것이 보배이거나 모든 것이 이상적이기 쉽다. 또한 질그릇이 있다면 조금도 소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질그릇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 보배가 질그릇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질그릇이 있으면 조금도 소망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배가 질그릇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약함에서 나타남

 

사도는 여기에서 그의 육체에 하나의 가시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가시가 무엇인지 모르며 다만 이 가시가 바울을 연약하게 했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그는 이것을 위하여 주님께 세 번 간구하였고 주님이 이 가시를 옮기시기를 원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뜻은, 『이 가시가 네 몸에서 비록 너로 약하게 하지만 그러나 나의 능력은 사람의 약함 위에 완전히 나타난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능력이 어떻게 연약한 자에게서 완전히 나타날 수 있는가? 『나의 능력이 너를 덮었다』. 혹은 『나의 능력이 너의 연약함을 숨겼고 너의 연약함을 가졌다』고 그분은 말씀하신다. 당신에게 말하거니와, 이것이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연약함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주님의 능력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주님의 능력이 사람의 약함에 나타나는 것이다. 기독교는 땅 위에 새로운 종류의 천사, 이상한 천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나는 한때 몹시 심한 병이 들었었다. 두 달 동안 세 차례 엑스 레이(X-ray)를 찍었는데 모두 좋지 않았다. 나는 기도하고 또 믿었으며 하나님이 나의 병을 치료해 주시기를 바랬다. 몇 차례 나의 상태는 평소보다 좋아졌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나는 화가 났다. 내가 화낸 이유는 바로 『지금은 비록 내 몸이 건강하고 힘도 좋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대하시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 병의 뿌리는 여전히 내게 있어서 나는 어느 때라도 쓰러질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은 내게 잠시 힘을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생각했다. 내 속에서는 병드는 것을 싫어했다.

 

어느 날 나는 성경을 읽다가 고린도 후서의 이 부분에 이르게 되었다. 성경은 바울이 자신의 가시를 위해 주님께 세 번 간구했으나 하나님은 동의하지 않으시고, 치료도 하지 않으신다고 말하고 있었다. 주님은 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 하셨다. 가시가 있음으로 주님은 은혜를 더하시고, 연약함이 있음으로 능력을 더하신다. 나는 이것이 기독교임을 본다. 침상에 누워 있을 때, 나는 하나님이 내게 좀더 분명히 보여주시기를 구했다. 그때 내 속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있었다. 십 척의 물에 잠기는 배가 있는데, 십 척 깊이의 물이 있어야만 비로소 빨리 달릴 수 있다. 그러나 강바닥으로부터 오 척 높이로 솟아올라 있는 암초가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 간구하여, 『주여, 만일 허락하신다면 이 암초를 내게서 옮기셔서 십 척의 물에 잠기는 이 배가 빨리 지나갈 수 있게 하소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돌을 네게서 옮기랴, 아니면 물 오 척을 더 불어나게 해주랴?』고 말씀하셨다. 나는, 『물이 오 척 더 불어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날부터 나는 많은 일들이 지나갔음을 시인한다. 나는 시험을 받지 않게 되었다고는 감히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 일에서 하나님은 그 외에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시 말하거니와, 기독교는 암초를 옮겨버리는 것이 아니라 물이 오 척 높이로 더 불어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어려움과 시험과 연약함이 있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이 오늘날 우리 몸에서 하시는 일은 소극적인 방면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요, 적극적인 방면에서 우리에게 터무니 없이 능력을 주시는 것도 아니다. 모든 능력은 연약함 가운데서 나타나며, 모든 보배는 질그릇 안에 있다.


영적인 모순(矛盾) 생활

 

그러므로 나는 여기에서 그의 질그릇에 주님의 보배가 나타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그의 질그릇이 너무 형편없는 그리스도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하겠다. 당신이 얼마나 연약한 지에 관계없이 주님의 보배는 여기서 나타날 것임을 명심하라. 그러므로 영적인 모순 생활은 바울에게 있었고, 또한 우리에게도 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바울을 어떻게 말했는지 아는가? 그들은, 『그의 말은 시원치 않고 궤계로 사람을 사로잡고, 그의 용모는 약하며, 그의 생각은 신뢰할만 하지 않아서 갑자기 예 했다가 갑자기 아니라고 한다.』고 말했다. 그가 쓴 편지는 힘이 있으면서 중하며 사람으로 근심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모순은 하나님의 보배가 질그릇 안에 놓여서 정말 아름답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배가 질그릇에 없다면 보기에 좋지 않다. 여기에 한 사람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주님은 그의 몸에서 빛을 발하며, 그의 몸에서 번성하신다. 그는 계속해서 기뻐하지 않으며, 또한 계속해서 슬퍼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그는 근심 속에서 항상 기뻐한다.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이것이 기독교이다. 기독교의 특징은 여기에 있다. 눈물이 흐르지만, 얼굴에 또한 미소가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바울보다 더 영적이어서 단지 찬미만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계속해서 근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괴롭지 않은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은 줄곧 근심하고 괴로워만 한다. 이 모두 보배가 그들의 몸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여기에 한 사람이 있어 주 예수는 그의 몸으로부터 통과될 수 있으시다. 나는 일찍이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자녀를 본 적이 있다. 그를 볼 때에 즉시 그가 누구이며 어떠한 사람인가를 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주님 앞에서 어떤 류의 사람인지도 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조금도 그의 질그릇을 볼 수 없다. 때로 우리 눈은 계속해서 사람의 질그릇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사람을 볼 때, 이 질그릇 안의 보배를 볼 수 있다.

 

나는 일찍이 주 안에 있는 한 자매를 만났는데, 그녀는 성격이 아주 급하고, 일을 아주 빨리 하며, 말도 아주 빠르고, 편지를 쓰는 것도 아주 빨랐다. 그러나 그녀의 휴지통에는 부치지 않은 일백여 통의 편지가 있었다. 편지를 쓰고자 하면서 또한 편지가 쓰레기통 안에 있다는 것은 보배가 질그릇 안에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두 가지가 모두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녀를 볼 때 그녀를 안다. 그녀는 본래 이러한 사람이지만, 그녀의 몸에서 주님을 본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고난을 받고 시험을 받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이 풍부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보배가 질그릇 안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갈망하시는 것이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기 바란다. 어떤 형제는 내게, 『나는 무슨 까닭에 이렇게 연약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연약함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으며 강해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하나님이 이 보배를 우리 안에 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으로 꾸며서 이 질그릇을 수리하여 어떤 어조나 모양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당신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당신의 질그릇 안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내 가정의 식구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는 내 병을 위해 기도하고 어떤 일을 위해 기도합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일이 어떻게 되었나요?』라고 묻는다. 그들은, 『나는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의 병을 즉시 치료하실 것을 믿으며, 하나님이 반드시 나의 자녀를 구원하실 것을 믿으며, 나의 남편이 구원얻을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반드시 얻을 것에 대해 조금도 의심이 없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얼마 후에 그들의 병은 아직 그대로이며, 자녀도 아직 회개하지 않았고, 남편도 아직 회개하지 않았으며 어려움이 여전히 있음을 볼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왜냐하면 그 믿음은 천사에게 있는 것이지, 질그릇 속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추상적이며 너무 좋다. 세상에 그렇게 큰 믿음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형제는 내게, 『나는 지금 하나님을 믿기를 배웁니다. 이 믿음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는 감히 말하지 않습니다. 옳건 그르건 나는 관계치 않으며 나는 여전히 맞다고 믿습니다. 나는 어제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나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압니다. 그러나 무슨 까닭에 오늘 아침에 일어날 때 나는 의심하기 시작하여 또 기도하러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제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방금 걸어갈 때 길에서 또 의심이 생기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이 의심하는 것은 조금도 중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믿음은 의심이 죽일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솔직히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진실한 믿음은 의심 안에 둘 때 더욱 좋아보인다. 여러분은 이 말을 의심하라는 것으로 생각하여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사람의 질그릇과 하나님의 보배가 함께 있다는 데에 있다.

 

전에 교회는 악한 자들의 손에서 베드로를 벗어나게 해주사 그를 구원하시기를 기도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 베드로가 돌아와 문을 두드리자 그들은, 『이것은 아마 베드로의 혼이 돌아온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분은 보았는가? 이것이 믿음이며, 진실한 믿음이며, 하나님이 들으실 수 있는 믿음이다. 그 사람의 연약함이 여전히 그 안에 있지만, 그러나 사람의 연약함이 숨겨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오늘날 어떤 사람의 믿음은 마리아나 마가의 그 식구들보다도 더 크려고 하여 매우 확신 있게 하나님이 반드시 천사를 보내실 것을 믿으며, 하나님은 반드시 모든 감옥의 문을 여실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마치 바람이 불자마자 베드로가 문을 두드렸고, 비가 때리자 또 한번 베드로가 문을 두드렸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는 너무 믿었다. 그러나 결코 일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정직히 말하거니와, 그러한 그리스도인은 단지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며, 속임받는 그러한 무리의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사람은, 기독교는 질그릇이 없는 것이 아니며, 보배가 질그릇 안에서 나타나는 것임을 알 것이다. 의심하는 것은 미워해야 하며, 그 의심은 죄이다. 질그릇으로부터 나온 것은 열납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질그릇이 아니며 보배를 질그릇 안에 넣었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기도하고 확신이 있다고 느끼며,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것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강할 그 때가 의심할 때이다. 하나님의 음성이 가장 분명할 그때가 또한 마귀의 음성을 들을 때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당신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미를 돌릴 때,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다. 이 믿음은 변할 수 없다. 당신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보배가 질그릇 안에서 항상 밝히 드러날 수 있고 그 영광을 나타낼 수 있음을 보아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행위는 사람이 한 것이며, 보배의 나타남이 아니다. 사람이 하는 것, 사람이 위장하는 것은 행위이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확신할 그때에 도리어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강할 그때에 도리어 나는 할 수 없음을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용감할 그때에 도리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당신이 진실로 즐거울 그때에 동시에 여기에 일이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일종의 모순은 질그릇 안에 보배가 있음을 증명한다.


사람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특별히 감사해야 할 것은 어떠한 연약함도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 속에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생각은, 근심이 있으면 반드시 기쁨이 없다는 것이고, 눈물이 있으면 반드시 찬미할 수 없다는 것이며, 연약함은 반드시 능력이 없다는 것이며,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면 묶인다는 것이며, 거꾸러뜨려지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며, 의심하면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나는 여기에서 큰 소리로 이런 일은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로 어떠한 경지에 이르러 모든 인간에 속한 것들은 단지 보배를 숨긴 하나님의 질그릇이 되게 하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람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보배를 매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절망을 만날 때마다 낙심해서는 안 된다. 나는 비록 어떤 것을 할 수 없지만 적극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아갈 때, 그것은 더욱 밝게 드러날 것이며 더욱 좋고 더욱 영광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기도하고 의심하며 끝났다고 느낀다. 그러나 만일 믿음으로 나아온다면 비록 그런 의심이 여전히 있을지라도 믿음은 보배로 더욱 크게 나타날 수 있고, 더욱 영광스럽게 나타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추상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질그릇 안에 하나님의 보배는 밝히 나타날 수 있다. 이 영적인 모순이 그리스도인의 보배로운 점이다. 이 영적인 모순 안에서 우리는 생활할 수 있다. 바로 이 영적인 모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계속하여 이 길을 걸어간다면, 당신은 더욱더 당신 안의 모순이 얼마나 큰가를 찾아낼 것이다. 당신 내면의 갈라진 부분, 그 격리된 심연은 갈수록 커질 것이다. 보배의 나타남은 날이 갈수록 더 깊어지지만 질그릇은 여전히 질그릇임을 깨달을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좋은가! 당신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인내를 주신 것을 좋게 본다. 그러나 본래 그 사람은 침묵을 지키는 사람일 뿐이므로 당신은 지나치게 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본래 머뭇거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당신이 지나치게 보아 하나님이 그에게 겸손을 주셨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본래 천연적으로 연약하고 무능한 사람인데 당신이 지나치게 보아 하나님이 그에게 온유함을 주셨다고 그를 너무 좋게 본다. 또 어떤 사람은 천연적으로 강한 자인데 당신이 지나치게 봄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그 안데 있다고 하며 너무 좋게 평가한다.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여기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모른다.

 

질그릇은 어떤 종류의 질그릇이든 보배를 넣을 수 있다. 그러나 질그릇은 여전히 질그릇이며 질그릇으로 충만한 것이다. 모든 연약한 사람은 스스로, 『이 질그릇 안에는 흙으로 충만하며 나는 특별히 그릇이어서 아무 소망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도 낙심할 필요가 없고 괴로워 할 필요가 없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그러한 영적이고 강하고 엄한 것은 우리 몸에서 여전히 능력을 나타낼 것이다. 왜냐하면 보배는 이 질그릇 안에서 더욱더 밝게 빛날 것이며 더욱더 크게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하다면 당신은 이 보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게 된다.

 

형제 자매들이여, 모든 문제는 적극적인 방면에 있다. 소극적인 것을 주의하는 사람은 우매한 사람이다. 주님은 각 사람의 몸에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실 수 있다. 보배가 당신 몸에서 나타날 때 많은 사람들은 알 것이다.


워치만 니
[일곱 광주리 가득히 11, "보배와 질그릇",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