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영적 체험의 과정은 몇 단계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펜 루이스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네 층으로 나눈 적이 있다. 첫째는 중생층, 둘째는 부흥층, 세째는 십자가의 길의 층, 네째는 영적 싸움의 층이다. 마담 귀용은 그녀의 책에서 "내적인 노정"에 대하여, 하나님이 사람의 생명을 전진케 하는 세 단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로 하나님은 기쁨과 누림으로 사람들을 전진케 하고, 둘째로 하나님은 박탈을 통해 사람들을 전진케 하며, 세째로 하나님은 순전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전진케 하신다.
생명의 단계마다 시작과 과정과 완성이 있다. 구원받고 거듭나서 완전한 사람으로 자라는 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기간을 정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 기간이 개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은 뒤 하나님께 향하는 마음이 아주 강하고, 헌신도 절대적이고, 자기를 철저히 처리하고 무섭도록 전진을 추구한다. 그 사람은 기꺼이 자기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오직 그리스도를 얻는 것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취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특별한 긍휼을 받은 자들이다. 이러한 사람은 속의 영적인 눈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빨리 열리고 영적인 참된 것을 만질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무리들에게 있어서는 거듭나서 성숙에 이르는 시기가 비교적 남보다 빠르다. 그렇지 않으면 고린도의 성도들처럼 구원받은 연령에 의하면 마땅히 영적인 것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만 바울이 말한 것처럼 여전히 밥을 먹을 수 없고 젖만 먹을 수 있는 갓난 아이들이다. 그들 가운데는 당을 짓는 것과 분쟁과 각양 육에 속한 일들이 많았다. 바울은 히브리 신자들에게 대해서 똑같은 책망을 했다. 그들이 배운 때가 오래므로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했다. 그 신자들은 오랫동안 자라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성장의 빠름과 느림이 영적 연령의 길고 짧음을 결정한다. 특별한 긍휼을 받아 강한 마음으로 주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빨리 자라고, 세상을 사랑하고 육신을 좇고 영적인 일을 임의로 다루는 사람들은 느리게 자란다.
이제 정상적인 성장이 있는 사람들의 체험을 네 단계로 나누어 보겠다. 첫째는 구원의 단계, 둘째는 내적 싸움의 단계, 세째는 굴복의 단계, 네째는 조화의 단계이다. 마지막 단계에 있는 사람은 그에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고, 자신을 잃고 범사에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고 하나님과 일치되고 동일하고 합일된다. 그러므로 이 단계는 영적 생명의 최고의 단계이다. 보통 그리스도인의 영적 노정은 대부분 첫째 단계와 둘째 단계 안에 있다. 세번째 단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소수이고 네번째 단계 안에 있는 사람은 이 세상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 극히 희박하다.
내가 이 단계의 상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멀리서 보고 말한 것이고, 내가 이 고상한 생명 안에 이미 들어간 것이 아니니 여러분은 내 말을 발람의 당나귀가 사람의 말을 한 것으로 생각하기 바란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자 교회의 영적 생명이 어릴 때 하나님은 은사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직 자기의 것이 되지 않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 즉 말씀 전하는 은사를 허락하고 일으키신다. 교회의 영적 수준이 높아질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말한 것이 그 사람의 어떠함이고 그 사람이 아는 것이 그가 체험한 바인 사람을 일으키사 말씀의 사역을 세우신다. 이제 첫째 단계를 먼저 말하겠다.
1. 구원의 단계
물론 사람이 처음 구원받을 때 밖의 표현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속에 전에 없었던 보배, 생명을 얻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한면으론 자기의 죄를 봄으로 크게 자책하고 통회하고 미워하고 괴로워한다. 그러나 또 한면으로 그가 새로 만난 구원을 참으로 기뻐하며 안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있고, 심지어 어떤 때는 미친 사람같이 즐거워하고 뛰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를 미쳤다고 말할 것이다. 사실 그는 미친 것이 아니라 속에 보화를 얻은 것이다.
그 사람은 한면으로 자신의 그렇게 나쁜 죄가 사함 받은 것을 보았고, 또 한면으로는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죄사함 받아 지옥에 내려가게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한 그 사랑을 보고 참으로 놀라와서 믿을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확실히 그 사람 안에는 생명이 있고 확실히 생명이 그의 안에 더해졌다. 그러한 기쁨은 태어난 후로 처음 갖는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우주의 보화인 영생을 얻었는데 어찌 미친 듯이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때 그 사람은 죄악을 아주 미워하고 세상도 싫어한다. 세상의 모든 영화와 부귀와 명예와 이익과 지위를 배설물로 여긴다. 이때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복음 전하는 자가 되고 싶고, 마음 속으로 어느 날엔가 주를 위하여 순교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그에게는 하늘과 땅 사이에 주님 외에는 사모할 자가 없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매우 단순하다. 이 때에는 그에게 있어서 기도나 성경 읽는 것이나 복음 전하는 것이 극히 쉬운 일이다. 그는 몇 시간 동안 기도할 수 있고 그렇게 해도 부족하다고 느낀다. 하루에 성경을 십여 장씩 읽을 수 있으며, 마음 속에서는 더 읽으려고 한다. 죄인을 볼 때마다 다른 할 말이 없고 즉시 하나님의 구원을 말해 줄 수 있다. 그의 속은 바람이 가득찬 공과 같아, 복음 전할 기회가 없거나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곧 터질 것만 같다. 그는 참으로 새로 받은 은혜를 세상 모든 죄인에게 알려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가 성도나 죄인에게 편지를 쓸 때 그 중심은 그가 받은 은혜에 있다.
이 시기에 그는 어떤 그리스도인을 보거나 누가 그리스도인인줄 알면 자기의 가까운 식구를 만난 것보다 더 가깝게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그를 사랑하게 된다. 구원받은 사람과 대화를 할 때에는 시간을 계산하지 않는다. 그의 형제가 영원히 그와 함께 있어 영적인 일을 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속에 주님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아주 갈급해 있고, 연장한 형제를 만나면 항상 질문할 것이 있으며, 영적 서적에 대해서도 심히 사모한다. 할 수만 있다면 천하의 모든 영적 서적을 사서 배불리 먹고자 한다. 주님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도 매우 강하다. 마음 속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영광의 얼굴을 보기를 바라기 때문에 주님이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빨리 돌아오시기를 바란다. 그가 주님이 돌아오시기를 바라는 것은 세상이 그를 너무 고통스럽게 하여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일을 하면서도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바로 그 때 구름 가운데서 주님과 만나기를 바란다. 오, 구원의 이 초기 단계에서도 최고도에 달한 상태는 생명이 최고봉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하늘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시기에서는 이기는 것이 극히 쉬운 일이고 실패하기가 더 어려운 것 같다. 이것은 구원받은 후의 가장 좋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농도는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매우 짙고 강렬하며,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비교적 담담하다.
그러나 달이 항상 둥그럴 수 없고 꽃도 항상 싱싱할 수 없다. 이렇게 좋은 상태는 계속적으로 지속될 수 없고 변하지 않을 수도 없다. 어떤 사람은 한두 달 동안 지속되고, 어떤 사람은 반 년이나 일 년, 더 길면 수 년간 지속된다. 그러나 항상 계속될 수 없고 내려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상태가 지난 후 두번째 단계의 생활을 경험할 것이다. 이 단계를 가리켜 내적 싸움의 단계라고 한다.
2. 내적 싸움의 단계
이것은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육체와 성령의 싸움이고 성령과 육체의 싸움이다. 이 단계의 체험은 길고도 고통스럽다. 이러한 경우에 당신은 주님을 믿지 않을 때보다 못하다고 말할 때가 많을 것이다. 주님을 믿지 않을 때는 속이 평온하고 아무일 없었는데 주님을 믿은 후에 도리어 귀찮게 되고, 마음 속에서 하려는 일이나 추구하려는 것이 항상 자신도 모르는 것(사실 이것이 바로 생명이다)의 간섭과 반대를 당하게 되고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본래는 소설을 보거나 영화를 보아도 마음이 매우 평안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못하다. 본래는 세상의 글과 그림과 골동품을 사랑해도 마음 속이 평안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그 이유는 기묘한 어떤 것이 당신을 간섭하고(물론 어떤 그리스도인의 상태는 비 정상적이어서 속이 마비될 정도로 타락한다. 그 때는 글이나 그림을 좋아해도 느낌이 없고 연극을 볼지라도 느낌이 없다. 이러한 비 정상적인 신자는 이미 어두움에 빠졌기 때문에 광야에서 쓰러진 이스라엘 사람처럼 결코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없고 영적 노정에서 성장할 길이 없다. 이러한 사람들은 참된 영적 일을 이해할 수 없다.) 반대하고 당신으로 하여금 불안을 느끼게 한다. 만일 당신이 속의 이 느낌을 순종한다면 평강을 가질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불안할 것이다.
이럴 때 당신 속에서는 내적인 싸움이 시작된다. 그 이유는 당신 속에 절대적으로 다른 두 생명, 즉 아담으로부터 온 타락한 생명과 하나님으로부터 온 거룩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타락한 생명은 육체 안에 있고 거룩한 생명은 성령 안에 있다. 성령과 육체는 불과 물이 영원히 합할 수 없는 것처럼 서로 거스리고 절대로 조화될 수 없다. 우리는 육체 안에 있는 아담의 생명을 천연적인 생명이라고 칭할 수 있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타락할 때 마귀로부터 온 독이 이미 그의 사람 안에 넣어졌다. 그 때의 사람은 이미 하나님이 지으실 때의 사람이 아닌(창세기 1장 31절에서 하나님이 그가 지은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다고 하신 데에는 물론 사람도 포함된다.) 마귀의 아들로 변한 사람이다(요 8:44).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 속에는 절대적으로 다른 두 극단의 생명이 있다. 하나는 지옥으로 부터 온 마귀가 그의 아버지인 생명이고, 또 하나는 하늘로 부터 온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인 생명이다. 육신 안에 있는 생명은 극도로 부패하고 범죄하며 간사하고 더럽다. 이 생명은 곧 마귀요, 마귀 자신과 다름 없다. 마귀가 악한 것처럼 이 생명도 악하고 귀신보다 조금도 좋은 점이 없다. 성령 안에 있는 생명은 지극히 거룩하며 사랑스러우며 선하며 영광스럽다. 이 생명은 곧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다. 하나님이 아름답고 선하시며 완전하신 것 같이 이 생명도 아름답고 선하고 완전하다. 왜냐하면 이 생명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 속에 극도로 다른 두 생명이 있는데 어떻게 싸우지 않겠는가? 천연적인 생명에 성품과 경향과 애호가 있듯이, 하나님의 생명에도 성품과 경향과 애호가 있다. 전자의 경향은 죄악과 세상을 사랑한다. 후자의 경향은 선한 것과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천연적인 생명이 죄악과 세상 안에서 그 성품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생명이 곧 일어나 싸우게 된다. 결국 내적 싸움은 일어났다가 멈췄다가 평안을 갖지 못하며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육체가 강할 때에는 상태가 나빠지고 성령이 강할 때에는 상태가 좋아지는 파도같은 생활을 한다. 금방 화를 내다가 금방 죄를 자복한다. 금방 육체를 좇고 세상을 사랑하다가, 금방 또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러 간다. 잠깐 동안 천당의 생활을 하다가 곧 지옥의 생활을 하게 된다. 자주 탄식하고 결심하지만 선을 행하려는 원함은 있으나 행하는 것은 없다.
한 가지 잘못을 지적함
나는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일을 말해야 한다고 느낀다. 그것은 사람들의 한가지 큰 잘못은, 자신의 육체가 절대적으로 부패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람은 육체에 대하여 여전히 소망을 갖고 실망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에게 많은 후회(물론 후회는 좋은 것이지만)와 결심과 개선하려는 방법이 있다는 것은 그가 육체에 대하여 아직도 소망을 버리지 않았고 거절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는 "오늘은 내가 실패했지만 내일은 성공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지 사실은 그가 승리와 아주 멀리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오, 하나님은 당신이 당신의 육체가 절대적으로 부패한 것임을 알기를 원하신다. 당신은 이에 대하여 철저히 보고 완전히 소망을 잃는 데 이르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계속 실패하게 하고, 궁지에 빠지게 하고, 스스로 구할 수 없는 절망에 이르게 하실 수밖에 없다. 그때에 가서야 하나님의 구원이 오게 된다.
하나님의 구원과 우리의 처리
내적 전쟁의 단계에서는 우리에게 각양각색의 실패와 처리와 체험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처리는 머리가 아플 때 머리를 치료하고, 다리가 아플 때 다리를 치료하는 식의 처리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붓글씨나 그림을 아주 좋아한다면, 어느 날 당신 속에서 용납할 수 없고 평강이 없을 것이다. 그때 당신은 그런 일을 처리하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이 기꺼이 그것을 내려놓지 않을 때 아마 당신은 어떤 이유를 대면서, "붓글씨와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도 아니다. 고상한 문화인의 멋진 일이고 사람의 성품과 기질을 도야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을 좋아해서 안 될 것이 무엇이냐?"고 말할 것이다. 당신은 자기의 이유만을 말하지만 성령은 당신과 따지지 않는다(물론 성령은 더 높고 좋은, 당신이 깨닫지 못한 이치를 가지고 있다). 그분은 다만 당신이 순종할 때까지 당신에게 불안한 느낌을 준다. 당신이 붓글씨 쓰는 것과 그림을 철저히 다룰 때 비로소 평강과 안식이 있게 된다.
당신이 그것을 처리하고 순종할지라도 얼마 안 가서 자기도 모르게 또 돌이나 조각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느낌이 있어 처음보다는 쉽게 처리하지만 얼마 안 가서 또 다른 골동품을 사랑하게 된다. 당신이 백가지 일을 처리해도 여전히 백 한가지 째의 일이 닥치게 된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하여는 잠시 후에 답변하기로 하고 먼저 이와 비슷한 일을 한가지 더 말해 주겠다. 어떤 사람은 물건을 애호하고, 어떤 사람은 사람을 애호하고 어떤 사람은 일 또는 사업을 애호한다. 특별히 자매들은 자기와 성격이 맞는 친구들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 안에 있는 것이다. 자매들은 자기 속의 이러한 우정이 육체 안에 있는 것임을 느낄 때 곧 처리하려고 나선다. 그러나 이러한 처리는 물건을 처리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물건은 죽은 것이기 때문에 당신의 임의로 내려놓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산 존재이기 때문에, 당신이 내려놓을지라도 그 대상자가 당신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로 당신이 어렵게 하나를 내려놓으면 얼마 안가서 또 다른 자매와 우정이 발생하게 되고 이 우정 또한 육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에게는 또 한번의 처리가 필요하게 된다. 당신이 열 사람, 스무 사람과의 관계를 처리할지라도 당신으로 하여금 육체의 우정 안으로 빠지게 하는 뿌리와 경향과 힘과 욕망은 여전히 당신 안에 남아 있는 것이다.
사람의 어려움
이러한 일들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사람의 어려움은 그 일의 열매만을 처리할 줄 알뿐 그 뿌리를 처리할 줄 모르고, 그 결과를 처리할 줄 알뿐 그 원인을 처리할 줄을 모르는 데 있다. 이것은 머리가 아플 때 머리를 치료하고, 다리가 아플 때 다리를 치료하고, 그 병의 근원을 알지 못한 채 대중 요법만을 쓰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한 가지 일의 처리나 부분적인 것의 처리를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처리도 천연적인 생명을 의탁하고 양육하고 유지케 함을 제하기 때문에 여전히 큰 이익이 있고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한가지 일만을 처리하는 사람은 병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는, 중요한 지식이 결핍된 사람이다. 병의 뿌리는 속의 요구와 욕망에 있다. 만일 그 사람이 병의 뿌리가 자기 안에 있음을 보고 한번 하나님에게 심하게 기본적인 다룸을 받는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기본적인 다룸이란 무엇인가
여기에는 두가지 방법, 즉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이 있다. 소극적인 방법은 어느 날 하나님이 강렬한 빛으로 사람을 비추어, 야곱의 환도뼈가 주님에게 만진 바 되어서 강한 부분이 약하게 된 것처럼, 사람의 타고난 생명의 강한 부분을 만지는 것이다. 야곱은 환도뼈가 주님께 만진 바 되기 전에는 매우 억세었다. 심지어 하나님이 그와 씨름을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것이 참으로 우리 속에서 육체가 성령을 이기는 실상이다. 그러나 환도뼈가 만진 바 되어 근육이 경직될 때에는 힘을 잃게 되고 위축되어 힘을 쓸 수 없게 된다. 그때부터는 절뚝발이가 되어 걸을 때 절뚝거린다.
하나님의 기본적인 다룸을 받은 사람도 이와 같이 된다. 어떤 사람은 성질을 낼 때 큰 소리를 지르고, 그런 짓을 이삼 일 동안 계속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에게 만진 바 된 사람은 자기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을 당할 때 한면으로는 화를 내지만 한면으로는 속에서 위축되어 버린다. 속에 힘이 없게 된다. 그 사람은 이전의 자기 힘이 어디로 갔는가를 모르게 된다. 오, 이것이 육체에서 십자가가 역사한 표시이다. 이러한 사람은 축복 받은 사람이며 기본적인 다룸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은 축복 받은 사람이며 기본적인 다룸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에게는 부분적인 처리가 있는가 더 없는가? 절대적으로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부분적인 다룸이 적어졌고 쉽게 처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길가의 마른 나무와 같다. 어떤 때에는 작은 가지가 자라나지만 그 가지들은 크게 자라지 못하고 쉽게 메마른다.
적극적인 방법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속사람-영-을 강건케 하도록 구하는 것이다. 이 속사람이 바로 우리의 영이다. 이 영이 성령에 의해 충만될 때 강하게 된다. 영이 강할 때 그리스도의 성품이 영으로부터 나와서 사람의 전 존재를 다스리게 되며, 이러므로 천연적인 성품을 이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천연적인 생명이 세상을 사랑할 때 당신이 성령에 충만 된다면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와서 자연히 세상을 거절할 것이다. 이러한 거절은 강요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전에 당신의 눈길을 빼앗아간 찬란한 것들과 당신의 감정을 견디지 못하게 하던 것들이 이제는 담담하고 무색한 것으로 변해 버렸고 당신의 마음을 빼앗아 가는 능력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세상과 물건 자체가 변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성품이 변한 것이다.
한가지 예를 들면 더 분명해질 것이다. 만일 천평의 좌편에 한 근씩 되는 성경을 영권 올려 놓는다면 도합 열 근일 것이다. 그리고 우편에는 한 근짜리 추 다섯 개를 올려 놓는다면 천평이 죄편으로 기울 것이다. 이 천평의 균형을 이루게 하려면 두가지 방법 뿐이다. 하나는 죄편에 있는 성경을 다섯 권을 내려 놓은 것이다. 그러면 양편이 다 다섯 근이 되어 천평의 균형이 잡힐 것이다. 또 하나는 추 다섯 개를 더하여 양편이 다 열 근이 되어 균형잡히게 하는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이 쓰신 소극적인 방법으로서 육체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고, 후자는 하나님이 쓰신 적극적인 방법으로서 영의 능력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다 좋다. 체험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앞의 방법에 의해 어려움을 통과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뒤의 방법에 의해 어려움을 통과하게 된다.
여기에서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크신 분이며 사람을 이끄실 때에는 사람의 필요에 따라서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작은 존재이므로 체험도 적다. 사람들은 자주 자기 개인의 체험을 다른 사람 앞에 두고 남의 행동의 표준을 삼으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잘못에 빠져 있다(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자신이 구원받을 때 통회하며 눈물을 흘렸다면 다른 사람이 주님을 믿을 때 통회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과오에 빠지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어떤 연약함을 이겼을 때 큰 소리로 외쳤다면 다른 사람도 큰 소리로 외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고 가르치는 과오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틀린 것이다).
삽입하는 말
내가 말하는 소극적인 방법과 적극적인 방법에 대하여 삽입하는 말을 하겠다. 어떤 경우 이 양면을 꼭 그렇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우리의 영적인 체험은 천연계의 사물과 비슷한 데가 있다. 예를 들어, 나무 잎사귀의 신진대사에서 오래된 잎사귀가 떨어져서 새 잎사귀가 나오는 것인가, 새 잎사귀가 속에서 밀어내는 능력으로 오래된 잎사귀가 떨어지는 것인가? 일곱 여덟 살 된 아이들에게는 이갈이의 체험이 있다. 젖니가 먼저 떨어져서 새 이가 나오는 것인가, 새 이에게 젖니를 밀어 떨어뜨리는 능력이 있는 것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체험에서도 우리의 혼 생명을 제하고 하나님의 생명에게 지위를 주는 십자가가 먼저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생명에 혼 생명을 이기는 능력이 있는 것인가? (주님의 체험에서는 십자가가 우선이고 부활이 그 다음이다. 우리의 체험에서는 부활이 먼저이고 십자가가 다음이다.) 그러면 대체 어떤 것이 원인이고 어떤 것이 결과인가? 우리의 체험에 따른다면 나 개인은 부활한 생명이 천연적인 생명을 배제하는 것으로 믿는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후 천연적인 생명이 나올 때마다 부활한 생명은 항상 그 천연적인 것으로부터 나온 것을 간섭하고 심판하며 정죄하고 제해버라려고 하기 때문이다.
3. 굴복의 단계
사람들은 기본적인 다룸을 거친 후에 굴복의 단계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기본적인 타격을 거치거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속사람이 강해진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게 굴복하게 되며 주님 발 앞에서 말을 듣는 사람이 되도록 연습하기 시작한다. 이때에 주님은 그 사람 속에서 점차적으로 그를 장악하며 왕노릇 하며 그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 이것을 영적 실제 안에서의 천국이 이 사람 속에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주님을 대할 때, 마치 종이 주인의 손을 주시하는 것처럼 순종을 배우며 속생명의 빛을 좇아 행한다. 여기서 이 사람은 오늘의 비췸 안에 사는 것이 무엇이며 주님을 좇아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 사람의 생각은 다른 것들보다 영적인 일을 더 주의한다. 이러한 사람은 영을 좇는 것이 무엇이며 영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안다. 그의 속의 영적인 눈도 갈수록 밝아지고 과거에 보지 못했던 많은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영에서 나온 것과 영에서 나오지 않은 것을 분별할 줄 안다. 그의 영적인 통찰력도 갈수록 강해지며 영과 혼의 분리되는 체험도 갈수록 분명해진다. 그의 드림이 이전보다 더 철저하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보다 더 강렬하다(느낌 안에서가 아닌 의지의 실제 안에서이다). 주님을 추구하는 마음이 전보다 더하고 그리스도를 얻는 것을 참으로 가장 고상한 것으로 여기며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
여기서 그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기묘한 창조를 보거나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아서가 아니고, 심지어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아는 데서 온 것도 아니다. 그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이러한 것들보다 더 진보된 것으로서, 영의 직감으로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이며, 사시고 내주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안에 거하고 계심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 그의 안에서 표현되는 것도 느낀다. 여기에서 그는 큰 비밀인, 그의 영광의 소망이 되는,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깨닫게 된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되었다는 것과 하나님이 자기 안에 거하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는 속에 있는 기름부음의 가르침을 따라 행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거할 줄도 안다.
또한 그의 마음은 관대하고 넓어지기 시작한다. 이전에 손을 놓으려고 하지 않던 많은 일들을 내려놓게 되며 이전에 사사건건 참견하던 것이 없어진다. 그 사람은 분량이 커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간증할 수 있으며 이 사랑보다 더 큰 것이 없음을 안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는 역사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음을 알고 하나님처럼 크게 되고 하나님처럼 좋아지고 하나님처럼 완전하게 된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항상 기쁨과 평강으로 충만하다. 그는 무한한 하나님께서 그를 무한량하게 구원하실 것을 안다. 그는 자주 자신을 미워하고 자신이 완전히 없어지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깊은 죽음을 누린다. 이러한 사람이 말할 때에는 항상 기름부음이 충만하며 목마른 자의 필요를 해결해 줄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지극히 크지만 그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느끼고, 자신은 여전히 할 수 없음을 알고 감히 속에서 자랑하지 않으며 자신에 대하여 여전히 알고 있다.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거나 높일 때 그는 생각 속에서 그러한 것들을 거절하며 감히 주님의 영광을 훔쳐가지 않기를 배운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선물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하나님 자신만을 사랑하고 하나님 자신을 안다. 이전에 그는 일하는 것을 좋아했으나 이제는 일할 욕심이 없고 조용히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에게는 모든 것을 고려하지 않고 주님만을 원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그는 감히 "주여, 당신이 나에게 내려놓으시라는 것을 내가 원치 않는 것이 있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다. 이러한 질문은 철저히 주님을 원하는 사람이라야 감히 할 수 있는, 많은 사람이 감히 하지 못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많은 약점이 있고, 과오가 있으며, 아직 사랑 안에서 완전치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단순하지 못하고 어린 아이처럼 순결하지 못하고 복잡하다고 느껴진다. 감추인 자아가 아직 완전히 제하여 지지 않았다고 느끼며, 자아가 절대로 없다고 간증하지 못한다. 그는 마음 속으로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려고 하지만 사실상 여전히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다고 느끼고, 아직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상태의 귀한 것을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완전한 경지에 이르려면 아직 먼 거리에 있다.
4. 조화의 단계
사람의 생명이 굴복의 단계에 도달하면 날마다 주를 좇기를 배우고 주님의 기쁨을 구하게 된다. 이제 성숙은 시간 문제다. 그가 계속 오늘의 비췸 안에 살고 생명의 빛 가운데 행하며 더욱더 자신을 하나님 앞에 잃게 되면 점차적으로 조화의 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화음(和音)은 음악 용어로써 두 가지 이상의 악기가 동시에 연주될 때 조화를 이루는 소리가 나고 혼잡함과 혼란이 없음을 뜻한다. 하나님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각종 일에서 하나님과 일치하며 하나됨을 뜻한다. 여러 해 동안 주님을 알고 주님을 좇아 행하기를 배웠기 때문에 그의 혼은 계속적으로 주님의 생명의 배양과 옮겨 부음과 침투를 받음으로 새로와져 변화되었다. 그가 받은 배양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베양이기 때문에 변화하여 그리스도를 닮게 된다.
사람은 독립적으로 주장을 내세우고, 의견을 발표하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동시에 그의 주장이 곧 하나님의 주장이며, 그의 의견이 곧 하나님의 의견이며, 그의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그가 천연적인 생명을 잃었거나 그의 천영적인 생명이 죽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의 안에 이미 세워졌고 그는 이미 변하여 그리스도를 닮게 되었다(천영적인 생명이 타격을 받을 때 하나님은 이 질그릇을 깨뜨리시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게 무너뜨리신다. 일단 사람이 철저히 부서지고 죽을 때 하나님의 생명은 사람 속에 완전히 세워지며, 이 때에는 질그릇이 보배로 변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범사에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어 하나되며 하나님과 일치된다. 그는 하나님과 둘이자 하나이고, 하나이자 둘이다. 우리는 이러한 혼 속에 하나님이 연합되고 그리스도의 성격(제 2의 성격)이 발전됐다고 말할 수 있다.
여러분은 옛날 부엌의 벽을 본 적이 있는가... 벽은 본래 흰색이었으나 계속 연기가 덧입혀져 검은색으로 변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생명의 배양을 받은 사람도 그리스도를 닮게 된다. 여기에서 여러분에게 한가지 예화를 들려주겠다. 정부의 한 요인인 유명한 서예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에게서 글을 배워 서예를 하는 조카가 있었다. 여러 해 동안 배우는 과정에서 이 조카는 자기 외삼촌이 쓴 글과 똑같은 글을 쓰게 되었다. 후에 어떤 사람이 요인에게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는 자기 조카에게 쓰라고 하고, 조카가 쓴 다음 자기의 이름으로 서명을 하고 자기가 쓴 것으로 인정했다.
조화의 단계 안에 있는 사람도 이러하다. 주장하는 바가 사람에게서 나왔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주장이라고 말씀하시고, 의견이 사람에게서 나왔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의견이라고 말씀하신다. 고린도 전서 7장에서 바울은 처녀에 대하여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라고 말했지만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라고 말했다. 마지막에 가서 그는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말했다. 위 문장을 보면 분명 주의 명령이 없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또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왔다고 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 사람의 의견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형제는 고린도 전서 7장을 사람의 생명의 최고의 장이라고 말했다. 오, 이 사람은 하나님에게 인정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구약의 모세와 신약의 바울은 하나님이 특별히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오, 이러한 사람은 많지 않다.
더욱 분명한 이해를 위해 바이올린을 배우는 일에 관한 예를 들어 주겠다. 바이올린을 처음 배울 때에는 머리가 모든 것의 주(主)가 되고 손은 계속 머리의 뜻을 따른다. 물론 머리의 뜻을 긴밀히 따르지만 듣기에 생소하고 좋지 않다. 그러나 5년, 10년을 배운 후에는 머리는 다른 일을 생각할 수 있고 손은 자동적으로 켤 수 있고 듣기에 아주 좋은 음색이 된다. 이렇게 된 것은 손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조화의 단계 안에 있는 사람은 손의 익숙해짐과 같다.
그러므로 굴복의 단계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좇아 행하지만, 조화의 단계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의 동역을 허락하고 하나님이 안심하실 수 있다. 굴복의 단계에 있을 때에는 주님은 주인이고 나는 종이다. 지금은 주님이 내가 주장하는 것을 허락하는 동시에 그분이 주인이 된다는 것을 여전히 인정하신다. 본래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몸에서 살았지만,(이 때 혼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표현하는 그릇이고 몸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표현하는 도구이다.) 이제는 그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아내는 것이다. 본래는 주님이 주체였지만, 이제 주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주체가 되게 하신다.
이러한 사람은 생명의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렀고 그 안에서 사랑이 온전하여졌고 두려움도 없다. 그는 어린 아이같이 절대적이며 단순하다. 그에게는 책망할 것이 없고, 더 바랄 것이 없고, 지극히 평온하고 고요하며, 절대로 환경에 다투지 않고, 고통과 즐거움을 똑같이 달콤하게 느낀다. 그에게는 자신이 없다. 그는 하나님이 모든 것이라고 느끼고 하나님 외에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낀다. 마치 큰 바다 속에 자신을 잃은 물방울처럼, 하나님과 그, 그와 하나님은 하나되었다. 그것이 영적 생명의 최고의 단계이다. 또한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의 가장 높은 단계이고 질그릇이 보배로 변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걸작이요 하나님의 역사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한 것은 여전히 이생의 일, 즉 혼이 변하여 주를 담는 것을 가리킨다. 장래의 어느 날 우리의 몸도 변하여 주님의 영광의 몸과 같게 된다(빌 3:21).
그러나 영적 생명의 최고 단계를 전하는 사람을 결코 그 단계의 생명에 이른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다. 그렇지 않다. 그 사람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큰 긍휼이 필요하다. 이 사람은 마치 높은 산 위에서 멀리 앞길을 바라보며 이 길의 종점이 어떠어떠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가 말하는 것은 자기가 목적지에 도달해서 체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발람의 당나귀가 한 번 사람의 말을 해 보았지만 사람이 아닌 것처럼 최고의 체험을 말하더라도 그가 마한 것이 그 사람의 어떠함은 아닐 수 있다.
유성화
[열두 광주리 가득히12, "영적 생명의 단계",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