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체험―헌신
체험
Eugene , 2012-05-24 , 조회수 (2610) , 추천 (0) , 스크랩 (0)

생명의 체험에 대한 두번째 단계는 일반적으로 헌신으로 시작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와 교통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전에 헌신하기까지 기다린다. 그러므로 영적 생명의 두번째 단계에서 처음으로 체험하는 것이 헌신이다.

 

정상적인 상태에 있어서 구원과 헌신 이 두 가지 체험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구원받은 사람은 헌신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일단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면 자신을 주님께 헌신한다. 헌신함 없이 구원받는 것은 아주 비정상적인 상태이다. 우리의 복음 사역이 강하게 되어, 사람들이 구원을 받자마자 즉시로 자신을 헌신하게 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헌신을 체험하는 데에는 다섯 가지의 중점이 있다. 그것은 헌신의 근거, 헌신의 동기, 헌신의 의미, 헌신의 목적, 헌신의 결과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중점은 헌신의 내용 전체를 다 포함한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점을 따라 헌신에 대한 체험을 알아보자.


Ⅰ. 헌신의 근거 - 하나님이 값으로 사심

 

첫번째 중점은 헌신의 근거이다. 우리는 무슨 근거 위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무슨 근거로 우리 자신을 그분께 헌신하라고 하시는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근거를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느 집으로 이사를 가서 거기에서 사는 것은 값을 치르고 그 집을 빌렸거나 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임대나 구매가 우리가 그곳에 사는 근거인 것이다. 어느 채권자가 어떤 이로부터 부채(빛) 상환을 위하여 조치를 취한다면 상대방이 그 채권자에게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부채는 채권자가 상환을 요구하는 근거이다.

 

우리 하나님은 가장 합법적인 분이시며 사리에 가장 밝은 분이시다.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은 합법적이며 근거 있는 것이다. 하나님도 우주 가운데서 대가를 치르지 않은 채 어떤 것을 얻으실 리 없으며 또한 어떤 근거 없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요구하실 리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그분께 헌신하라 하실 때에는 근거가 없을 리 없다. 이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에게는 아주 견고한 근거가 있다. 그것은 곧 자신이 값을 치르신 것이다. 그분은 이미 우리를 사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 자신을 그분에게 헌신하라고 요구하실 수 있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6장 20절은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헌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대가를 치르신 이러한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복음서원에 가서 진열해 놓은 수많은 책을 볼 수는 있어도 어느 것도 마음대로 취할 수는 없다. 이는 당신에게 그렇게 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2500 원을 지불하고 그 책 중 한 권을 구입한다면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책을 요구할 수도 있으며 그 책을 당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당신에게 값을 치른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헌신의 근거도 똑같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그분께 헌신하라고 요구하실 수 있는가?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사셨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근거(이유)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옳지 않은 말이다. 헌신은 그 근거가 하나님의 창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값으로 사신 것에 있다. 출애굽기 13장 2절에서 유월절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시기를,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고 하셨다. 이렇게 명하신 근거는 모든 초태생이 어린 양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구속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피로 사신 자들이었다.

 

값으로 사는 것은 소유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값으로 사셨을 때 소유권을 획득하셨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양도되어, 하나님께 속하도록 요구하는 근거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헌신의 근거는 하나님이 값으로 사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이 흘린 바로 그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사셨다(벧전 1:19). 이 보배로운 피는 얼마나 큰 「대가」(고전 6:20)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는 대가로 이 보배로운 피를 지불하시어 우리를 그분께 속하도록 하신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사셨는가를 알아보자.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사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사셨다고도 하며, 죄의 속박에서 우리를 사셨다고도 하고, 세상에서 우리를 사셨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진리와 부합되지 않는다. 어떤 것을 구입한다는 것은 원래의 소유권에 대한 합법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소유권을 취득하려면 구매라는 합법적인 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사탄의 권세와 죄의 속박과 세상의 탈취는 모두 합법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러한 것들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대가를 치뤄서 우리를 사탄과 죄와 세상으로부터 사실 필요가 없다. 사탄과 죄와 세상은 불법적인 수단으로 우리를 탈취하여 사로잡고 지배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의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이러한 것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이것은 구원에 관한 것이지 값으로 사는 면이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사셨는가? 갈라디아서 4장 5절에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율법 아래로부터 속량하셨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 아래에서 사셨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속량하셨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죄를 범하여 타락되고, 사탄과 죄와 세상에 빠져 이러한 것들의 포로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여 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 아래에서 이 율법에 매여 지내왔던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의 율법에 매인 바 된 사실은 모두 의로우며 합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분의 의로운 법 아래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려면 그분의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셔야 하는 것이다. 이 대가가 바로 그분의 아들이 흘린 보배로운 피이다. 이 피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켰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율법 아래에서 구속되었다. 이것이 곧 값으로 산 바 된 것이다.

 

우리는 구속함을 받은 후로 율법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더 이상 그 권세 아래 있지 않다. 이전에 우리는 율법에 속하여 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께 속했다. 우리에 대한 소유권이 율법에서 하나님의 손으로 넘겨졌다. 하나님은 이러한 권리이양의 근거에서 우리 자신을 그분께 헌신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값으로 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신 것이,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해야 하는 근거이다.

 

우리가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헌신하도록 인도하거나 우리 자신의 헌신을 시험해 보고자 할 때 이러한 헌신의 기초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를 하나님이 값으로 사셨으므로. 우리에게 대한 소유권이 하나님께로 이양되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손 안에 있지 않으며 더 이상 자신의 소유가 아니다. 우리가 헌신의 근거를 이렇게 깨닫는다면 우리의 헌신은 견실하고도 안정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에 대한 체험을 조사해 본다면, 대부분이 주님의 사랑에 사로잡혔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동기는 실로 선하며 온당하다. 그러나 우리가 다만 주님의 사랑에 매여서 주님께 헌신하려 한다면 이러한 헌신이 충분히 안정된 것이겠는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체험이 말해 준다. 그 이유는 사랑이 우리의 마음가짐과 마음의 갈망에 대한 내력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좋으면 사랑하고, 싫으면 사랑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사랑할 마음이 있으면 자신을 헌신하고, 내일 사랑할 마음이 없으면 자신을 헌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일 헌신이 순전히 사랑에 속한 것이라면, 충분히 안정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불안정된 마음가짐을 가진 만큼 헌신에 많은 변화가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헌신의 근거를 알아, 헌신이 값으로 산 것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 우리의 헌신은 견고하고도 안정될 것이다. 값으로 사는 것은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니라, 소유권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사시어 우리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좋든지 싫든지, 우리 자신을 헌신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중에 이미 자신들을 헌신한 많은 형제자매들이 실로 하나님께서 소유권을 가지고 계심을 알지 못하고 있음을 절실히 느낀다. 그러므로 우리는 돌아서서 이러한 공과를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헌신하는 것은 단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서만이 아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진정 우리를 소유할 권리를 가지고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항상 열광적인 일은 아니며 주님을 섬기는 일이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다. 우리 중에 수십 년 동안 주님을 섬겨온 자들은 주님을 섬기는 일이 때로는 실로 쉬운 일이 아니지만 속에서 강권함으로 달리 행하지 못하게 함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흔히 포기하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계심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를 하나님이 값으로 사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우리 자신을 헌신하여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서 사람들은 좋아하면 결혼하고 싫어지면 이혼한다. 그들은 소유권에 대한 어떤 인식이 없기 때문에 그들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의 헌신은 그러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참된 헌신은 하나님이 값으로 사신 것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하여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는 깨달음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우리의 기분이 좋든 나쁘든, 이 사실은 언제나 동일하다.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서서 우리의 헌신에 대하여 주님께 심판을 받을 때 주님에 대한 사랑의 근거 위에서나 헌신에 대한 갈망의 근거 위에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셨는가 사시지 않았는가 하는 사실의 근거 위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사신 바가 되었다면 자신을 헌신할 것 외에는 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헌신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언제나 이러한 근거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헌신의 근거에 대한 이러한 말씀을 대할 때 자신의 생각으로만 이해하고 마음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여전히 적합하지 못하다. 그렇게 하는 것은 헌신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이러한 근거를 실제적으로 체험할 필요가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 하나님과 다투게 될 때마다 그분 앞에 머리 숙여. 『주여. 저는 당신이 사신 노예입니다. 저에 대한 소유권을 당신이 값으로 사셨읍니다. 저는 이제 여기에서 당신의 권리를 선포합니다. 더우기 이 문제에 있어서 당신이 주가 되시어 저에 대하여 결정하소서.』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헌신의 위치를 벗어날 때마다 주인 빌레몬으로부터 도망한 노예 오네시모의 상태와 같은 반역의 상태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선택할 기회에 부딪힐 때마다, 우리 발 밑의 굳건한 반석 같은, 값으로 사신 이러한 헌신의 근거를 생각해야 한다. 그 위에 견고히 서라. 결코 그곳을 떠나려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신실하게 헌신을 체험한다면 실로 헌신의 근거를 붙잡고 있는 것이다.

 

순교당한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 시대에 번연은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대하시든 오직 하나님을 섬겨야 함을 표명했다. 번연은 자신이 단지 값으로 산 바 된 노예요 하나님께서 완전한 소유권을 가지고 계신 분임을 깨달았다.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다루시든지 아무 말 하지 않고 다만 섬겼을 뿐이다. 번연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헌신임을 알았다. 이 때문에 번연은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 모든 선택을 하시도록 했으며 하나님이 안배하신 것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했다. 죽음에 이르도록 번연은 헌신의 근거인 굳건한 반석 위에 서 있었다. 번연은 진정 하나님의 권리와 헌신의 근거를 안 자였다. 헌신의 근거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도 그러한 정도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Ⅱ. 헌신의 동기 - 하나님의 사랑

 

헌신의 동기는 헌신하는 사람의 마음에 관련된 것이다. 헌신을 잘 하려면 헌신의 근거를 깨달을 뿐 아니라 동기를 가져야 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값으로 산 바 되어 구속함을 받았다는 헌신의 근거를 알더라도 이러한 깨달음만으로는 그의 느낌을 불러 일으키거나 그의 마음을 움직여 기꺼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기에 충분하지 못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사신 것이 의자나 의복 같은 무생물이었다면 하나님은 그분 자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그러한 것들을 직접 처리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 구속하신 것은, 각자 생각이 있고 애정이 있고, 뜻(의지)이 있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얻기 원하시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기뻐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소유하실 합법적인 권리와 근거를 가지고 계실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시도록 할 마음이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헌신하기를 바라신다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셔야 한다. 우리 자신이 기꺼이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도록 사랑의 동기를 주셔야 한다.

 

헌신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성령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두루 뿌리실 때마다 우리는 자연히 사랑의 노예가 되어 기꺼이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이러한 헌신은 성경의 두 군데, 고린도 후서 5장 14절-15절과 로마서 12장 1절에 아주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고린도 후서 5장 14절-15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강권한다는 말의 원어는 홍수가 밀어닥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사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사랑하심은 우리에게 홍수가 밀려옴 같아서, 우리 자신을 기꺼이 하나님께 헌신하게 하며 그분을 위하여 살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한다. 여기에 언급된 자비하심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곳에서도 또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을을 움직이고자 한다. 그는 우리에게 사랑의 동기를 갖게 하여 우리 자신을 기꺼이 하나님께 산 제물로 헌신하게 한다. 이 두 구절을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이 헌신의 동기이다.

 

정상적인 헌신에 있어서 이러한 사랑의 동기가 아주 필요하다. 만일 우리의 헌신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하여 권리를 갖고 계신다는 헌신의 근거를 아는 데에만 있다면 이러한 헌신은 이유에만 근거를 두고 있을 뿐 달콤함과 강렬함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헌신할 때 동기가 되는 사랑이 있고 우리의 느낌이 하나님의 사랑을 접촉하게 된다면, 이러한 사랑의 강권함으로 우리 자신을 기꺼이 하나님께 헌신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에는 헌신이 달콤하고 강렬할 것이다.

 

남편과 아내의 결혼 관계가 적절한 사례이다. 만일 결혼 관계가 단지 권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그들의 삶이 달콤하거나 조화를 이루기가 어려울 것이다. 참된 결혼 관계는 권리에 근거를 둘 뿐 아니라 사랑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므로 남편과 하나 되어 함께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 참된 헌신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접촉하고 그분이 진정 사랑스러움을 보게 될 때 우리 자신을 그분께 헌신할 것이다. 이와같이 사랑에 기초를 둔 헌신이 비록 마음가짐에 따라 변하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강렬한 헌신은 강권하는 사랑의 결과이다. 주님의 사랑의 강권함을 받은 체험이 없는 자들은 위대하고 강렬한 헌신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은 아주 명백하다.

 

찬송가 101장 (The Stream Publishers 刊 Hymns, 한국복음서원 刊 교회찬송 127장) "모든 사람 대신 죽은 십자가의 주 생각할 때"를 보면 역시 주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헌신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 찬송에서는, 나를 구원한 그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이 사랑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자신 위해 살던 생활을 버린다. 또한 십자가 위에서 이마와 손과 발이 슬픔과 사랑과 피로 적셔져 있는 그분을 본다. 이 모든 것은 그분이 나를 사랑하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을 볼 때, 온 우주를 그분께 드린다 해도 여전히 부끄럽게 여겨지리라. 이는 그분의 사랑이 너무나 고귀하고 뛰어나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그분의 사랑에 보답하려 하다면 그것은 그분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심지어는 그 사랑을 더럽히는 셈이 된다. 그분의 사랑이 돈으로 살 수 없는 진주와 같은 데 비해서 나의 헌신은 더러운 넝마와도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께 전혀 값어치가 없다. 어느 날 그 영이 이 사랑을 우리 마음 전체에 부으실 때 우리 또한 이와 같이 강렬한 헌신을 할 수 있으리라.

 

우리가 자신을 헌신하고 헌신의 길에서 주님을 따른 후에도 주님의 달콤한 사랑을 맛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 사랑의 강권함을 필요로 한다. 헌신하는 길에서 어떤 사람은 자주 고통과 손실을 당한다. 주님의 사랑을 자주 맛보는 자들만이 고통받는 중에서도 달콤함을 찾을 수 있다. 일찌기 사도들은 멸시와 감금당함을 많이 겪었지만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영광스럽고 즐거운 것으로 여겼다. 이것은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겼기 때들이다(행 5:40-41).

 

역대의 순교자들이 죽음의 고통 당함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주님의 이름을 저버리지 않은 것도 그들이 주님의 달콤함을 맛보고 그분의 사랑의 강권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와 주님 사이의 사랑은 언제나 새로와야 한다. 사랑의 동기가 우리 안에 유지되어야 우리의 헌신과 봉사가 언제나 새롭고 달콤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안정되고 강한 헌신을 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 방면이 요구된다. 한 방면은 근거를 갖는 것, 즉 나 자신이 하나님의 사신 바 되어 하나님께 속하였으며 나 자신을 그분께 헌신해야 함을 깨닫는 것이요, 다른 한 방면은 동기를 갖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크며 이 사랑이 나를 강권하여 나 자신을 기꺼이 그분께 헌신하게 함을 깨닫는 것이다.


Ⅲ. 헌신의 의미 - 제물이 되는 것

 

헌신의 근거와 헌신의 동기를 알게 되면 기꺼이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면 헌신이란 무엇인가? 헌신의 의미는 무엇일까? 로마서 12장 1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한다. 이 구절을 보게 되면 헌신의 의미는 「제물」이 되는 것이다.

 

「제물이 되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물이란 무엇인가? 성경을 보면, 어떤 것을 그 원래의 위치와 용도에서 분리하여 하나님의 제단에 하나님을 위하여 특별히 올려놓을 때면 언제나 그것이 제물이 된다. 구약에서 사람들은 황소와 양을 제물로 드렸다. 그 원리는 이와같다. 황소는 원래 우리에 살며 밭을 갈고 짐 수레를 끄는 데 이용되었다. 이제 소를 우리에서 이끌어내어 제단 옆으로 끌어오면 위치가 바뀌게 된다. 그리고나서 죽여 제단 위에 올려놓아 불사르면 하나님께 달콤한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이것이 용도에 있어서의 변화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소는 제물이 된다.

 

그러므로 제물이란 바로 어떤 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하여 제단에 올려 놓음으로써 위치의 변화와 용도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 제물이 소든, 양이든, 고운 가루든, 기름이든, 일단 제물로 드려지면 드리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 결코 그 자신의 유익과 누림을 위해 쓰여질 수 없게 된다. 제단 위에 드려진 모든 제물은 하나님께 속하며 하나님의 사용과 누림을 위한 것이다. 그것을 올려 놓는 것, 즉 제물이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쓰시도록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려 할 때에도 역시 다음과 같은 두 방면이 있다. 하나는 위치가 바뀌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용도가 바뀌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헌신의 의미를 깨닫는다면 다른 이들의 헌신이 참된 헌신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을 헌신하였다고 말할 경우 우리는 그에게 그의 위치와 용도가 바뀌었는지를 물어볼 수 있다. 그가 만일 바뀌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제물이 아니요, 참된 헌신을 한 것도 아니다. 제물로 드려진 것은 다 위치와 용도가 바뀐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자신을 드린 자들은 완전히 자기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쓰시도록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

 

이러한 헌신은 선물을 주는 것과 유사하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을 줄 경우, 그 선물은 우리 손에서 다른 이의 손으로 위치가 바뀌게 된다. 그것을 결코 우리 것인양 쓸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을 위하여 쓰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실로 자신을 헌신하게 되는 날 우리의 위치도 바뀌게 된다. 이전에 우리는 자신의 손 안에 놓여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이전에 우리는 자신이 가고 싶은 길로 갔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제단 위에 놓여 있다. 동시에 우리의 용도도 역시 바뀌게 된다. 이전에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살며 세상을 향하여 나아갔지만 이제는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사람으로 분별되어 있다. 이러한 헌신만이 참된 헌신이다.

 

이와같이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게 되면 하나님의 식물(食物)이 되어 그분의 만족이 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예물 가운데 하나님이 쓰시기 위한 것으로는 금과 은과 보석과 각종 색실과 양털과 양가죽 등이 있었으며(출 25:2-7), 하나님께 식물로 드려진 것으로는 수송아지와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등이 번제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것을 번제물로 드리면 제단 위에서 불살라져 향기로운 냄새가 되어 하나님의 식물이 되었다(레 3:11). 하나님은 이러한 제물을 향기로운 냄새로 받으실 때 만족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제물을 예물로 드리는 것이 우리의 헌신의 예표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어 만족하실 식물(食物)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이다. 우리는 본래 이것 저것을 위하여 쓰이도록 되어 있던 요리되지 않은 쌀더미 속의 쌀과 같은 사람이다. 어느 날 하나님이 필요로 하셔서 우리는 본래의 쌀더미에서 분리되어, 과정을 거쳐 요리되어 하나님의 상-제단-위에 놓여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식물(食物)이 된 것이다. 이것이 제물이 되는 것의 의미요 헌신의 의미이다.

 

헌신의 의미는 자신을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이러할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을 제단 위에 올려놓아 하나님을 위한 제물이 된 것을 증거하는 우리의 실제적인 삶과 실제적인 체험이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진정으로 기꺼이 하나님의 식물이 되어 하나님의 만족이 되고자 하는가?

 

참된 헌신은 결코 하나님이 강제로 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무력으로 아무 것도 취하지 않으신다 모든 것을 사람이 자발적으로 바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의 헌신도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을 기꺼이 제단에 올려 놓고 감히 벗어나고자 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마음대로 행동하더라도 우리는 감히 멋대로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이들은 단 것과 쓴 것을 계산하며 선택하더라도 우리는 어려움에 부딪히더라도 감히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과 따지며 다투더라도 우리는 감히 한 마디 말도 해서는 안 된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속박되고 제한받는 데서 벗어나고자 하더라도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제한받고 기꺼이 하나님의 손 안에 갇히려 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이미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제단 위에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헌신된 사람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하나님 제게는 선택귄이 없읍니다. 저는 이미 제 자신을 당신께 헌신하였읍니다. 저는 당신의 손 안에 있읍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떤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표명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손 안에 놓여 실제로 하나님께 제물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것만이 참된 헌신의 의미이다.


Ⅳ. 헌신의 목적-하나님을 위해 일하기 위한 것

 

헌신의 의미는 제물이 되는 것이므로 드려진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헌신의 목적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도록 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려면 먼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하나님으로 일하시도록 한 자들만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도록 하는 데 이르러야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먼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도록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는 수고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에게 열납되지도 못할 것이며 아무리 부지런하고 오래 참아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도록 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일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하나님에게 열납될 수 없다. 「하시도록」이 근거요, 「위하여」는 결과이다. 우리가 「하시도록」하는 근거를 가질 때, 「위하여」라는 결과를 얼을 수 있다. 이것은 불변의 원칙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기 위한 것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하는 데 강세를 두어야 한다. 헌신의 목적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게 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구약에서 제물을 드리는 데 있어서도 역시 이러한 것을 밝히 나타내 보여 준다. 수송아지와 수양을 잡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릴 때 먼저 하나님의 철저한 역사, 즉 그것들을 불사르심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그러한 것들을 기뻐하시고 열납하실 때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만일 그 제물이 불살라지지 않았다면 날 것으로 악취가 낱 것이고 결코 하나님이 받으시지도 기뻐하시지도 않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헌신도 똑같다. 우리는 이미 자신을 드렸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게 하지 않고 그분을 위하여 일하러 나가서 직접 그분을 섬기려 한다면 그 일과 그 봉사는 날것이요 부적당하며 악취를 풍기게 될 것이다. 결코 하나님이 열납하시지도 않을 것이고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 앞에 다른 불을 분향했을 때.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불로 삼켜 버리셨다(레 10). 다른 불을 드린 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직접 일하는 원칙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처리함을 받지 않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계속 일하시도록 하지 않은 자가 하나님을 위하여 직접 일하고자 한다면 다른 불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날것이고 부적당하고 악취가 나서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또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사람을 크나큰 곤경에 빠지게 한다.

 

이러므로 우리는 많은 경우에, 한면으로는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또 한면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들을 하나님께 드릴 때 직접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고자 하거나 직접 하나님을 섬기고자 할까 참으로 두려워한다. 이러한 모든 일과 봉사는 위험한 것이다. 우리 중에서 주님의 사랑의 강권함을 받은 형제 자매들 백 명 가량이 자신을 주님께 헌신한다 할 때, 주님을 위하여 일하고자 하지만 주님으로 하여금 먼저 일하시도록 하지 않는다면 백 명 되는 이 사람들은 매일 다툴 것이다. 한 사람은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섬기고자 할 것이고, 또 한 사람은 하나님을 저런 식으로 섬기고자 할 것이다. 그 교회는 불가불 나뉘어지고 말 것이다.

 

오늘날 교회 중에서 혼란이 일어나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릴 때 그 사람의 목적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도록 하는 것을 모르거나 그것을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거나 자신을 주님께 헌신하지 알을 때에는 만사가 온화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주님께 헌신하는 자들이 있을 때에는 직접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고자 하여 많은 문제가 발생되고 많은 혼란이 생기게 된다.

 

실지로 성경을 읽는 데 있어서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도록 하지 않고 계속 타고난 두뇌만 사용하여 성경을 읽는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각각 읽고 해석할 때 마음대로 상상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보는 데 열심이 없을 때에는 그리 나쁘지 않으나, 일단 이러한 열심을 내게 되면, 엉뚱한 방향으로 읽어나가 이상하고 그릇된 많은 관념을 갖게 된다. 그의 열심은 좋으나 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읽는 것이 참으로 염려스런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체험하지 않고 직접 영적인 것들을 접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고자 하든지, 성경을 연구하든지, 복음을 전하든지, 교회를 감독하든지 간에 영적인 것들을 접하려면 먼저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역사하시도록 하여, 우리가 부서지고 다스림 받고 하나님께 징계를 받게 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우리는 영적인 것들을 접하게 되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안전하고, 더 이상 위험스럽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 대해 엄격하여,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 직접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인지 아니면 먼저 우리 안에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게 하는 것인지를 질문해 보아야 한다. 만일 우리 안에 먼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도록 할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려는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헌신한 다음에 먼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갈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제단 위에 올려져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하시어 우리를 태우시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태우는 역사가 있은 후에,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헌신, 이러한 봉사야말로 익은 것이요 부활에 속한 것이다. 이러 한 것은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헌신의 목적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 역사하시게 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Ⅴ. 헌신의 결과 - 우리의 장래를 포기하는 것

 

헌신의 결과는 우리가 사람과 사건과 사물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특히 우리의 장래를 포기하며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다. 이 문제도 역시 구약에서 예물을 드리는 것을 비추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소를 제물로 취하여 제단에 드리게 되면 그것은 즉시로 이전 모든 관계로부터 끊어지게 된다. 그 소는 주인과 소떼와 외양간으로부터 분리된다. 소가 불살라진 후에는 원래의 형태와 고기조차도 사라져 버린다. 가장 정선된 소의 모든 것들이 달콤한 냄새의 향기가 되어 하나님께 바쳐지며 남은 모든 것은 잿더미를 이룬다. 모든 것이 잘려지고 모든 것이 끝난다. 이것이 소를 하나님께 바친 결과이다.

 

우리가 하는 헌신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기 때문에 그 결과도 역시 동일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태워져서 재가 되어 모든 것이 끝나는 데까지 이른다. 만일 이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태워져 재가 되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드리는 헌신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몇몇 형제 자매들은 헌신을 한 다음에 어떠어떠한 사람이 되리라는 희망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장래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우리가 말하는 장래란 이 세상의 장래뿐 아니라 소위 그리스도인 세계의 장래도 포함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날 때부터 세상이 얼마나 우리를 유혹하며 거기에 장래의 소망을 두도록 하는지를 알고 있다. 심지어 소위 그리스도인의 세계까지도 우리를 유혹하며 거기에 장래의 소망을 두도록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유명한 설교자가 되고자 하며, 어떤 사람들은 세계적인 부흥사가 되고자 하며, 어떤 사람들은 신학 박사 학위를 얻고자 한다. 이 모든 것이 장래에 대한 소망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만일 우리가 빛을 보게 된다면 우리의 사역에 더 많은 열매를 기대하는 바램에도, 우리의 복음전도로 말미암아 더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었으면 하는 바램에도, 더 많은 형제 자매들을 인도하여 주님을 사랑하도록 하려는 바램에도, 우리 손으로 더 많은 지방 교회들이 건축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모든 바램-에도 우리의 장래를 건설하려는 많은 요소가 숨겨져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보면 시기한다. 다른 사람들이 성취하는 것을 보아도 우리의 마음이 동한다. 이 모든 것을 볼 때 우리가 여전히 자신의 장래에 대해 소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헌신한 사람에게는 이 모든 소망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헌신한 사람은 자신의 장래를 포기한 사람이다. 그는 세상에서의 장래도 포기하고 소위 영적인 장래도 포기한다.

 

그는 어떠한 것에도 자신을 위한 소망을 더 이상 갖지 않는다. 그의 모든 소망은 하나님 안에 있다. 그는 순수하고 단순하게 하나님의 손 안에서 산다.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이며 하나님이 그에게서 하기를 바라시는 것을 행한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그는 알지 못하며 관심하지도 않는다. 그는 오직 자신이 제물이며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알고 있을 따름이다. 제단은 그가 영원히 서 있는 곳이며, 잿더미가 영원한 결과이다. 그는 장래를 완전히 포기한 것이다.

 

이렇게 장래를 포기하는 것은 이미 어떠한 일이 발생하여 여러분의 장래의 소망을 짓밟아버린 후에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이 있기 전의 자원함이다. 그것은 여러분이 사업에 실패하기까지 기다려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실업자가 되거나 대학시힘에 떨어지거나 박사 학위를 얻지 못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포기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우리가 장래를 포기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득이 되는 사업운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훌륭한 직업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박사 학위가 여러분을 기다리지만 여러분이 기꺼이 주님을 위하여 그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진정 장래를 포기하는 것이다.

 

심지어 애굽의 온갖 영화가 여러분 앞에 놓여 있어도 여러분은 『잘 있거라, 나는 가나안으로 가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사탄은 계속해서 뒤에서 여러분을 부르며, 『제발 돌아와라. 여기 박사 학위도 있고 애굽의 궁정도 있다. 다 너를 위한 것이다. 이 얼마나 드문 기회냐?』 라고 말할 것이다. 이때 여러분이 그에게 직접 『사라지라. 이러한 것들은 나의 분것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러한 것이 참으로 장래를 포기하는 것이다.

 

오늘날 아주 슬픈 상황이 있다. 그것은 주님을 섬기는 많은이들이 그리스도인 세계에 대한 장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이 아주 심하게 타락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것은 그 사람의 원래의 헌신에는 잘못된 것이 없더라도 그가 제단에서 떠나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참으로 헌신한 사람은 그의 장래가 끝났음을 처음부터 안다. 만일 그가 여전히 장래를 갖기 원한다면 그는 교회에 올 필요가 없다. 그는 결코 어떠한 장래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는 그가 이미 제단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가끔 그가 곤경에 처하게 되어도 그에게 대단한 용기가 생기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이러한 어려움을 겪을 때 그가 여전히 제단에 놓여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음을 말해 준다. 때로는 그가 안락한 단계에 들어가나 오히려 약간의 두려움마저 느끼게 된다. 이것은 그가 제단을 벗어나 더 이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는 자주 자신에게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헌신의 결과는 무엇인가? 우리 모두는 제단 위에서 재가 되었는가? 우리는 모든 장래를 포기했는가 아니면 바라는 것을 간직하고 있는가?

 

우리 각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 헌신의 문제를 철저히 다루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는 헌신이 건전하지 못하다면 조만간에 우리의 봉사에나 우리의 영적 상태에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장래를 전망해 보는 유혹은 대단히 많으며 대단히 큰 것이다. 이러한 유혹은 특별한 은사를 받은 자들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외적으로 어느 정도 쓰임받는 자들에게 특히 심하다. 많은 문제와 환경과 유혹이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헌신을 잃어버리게 한다. 이러한 유혹을 이기는 오직 하나의 길은. 우리가 헌신하는 그날부터 우리의 장래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헌신한 후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 한다.

 

다비 (J.N. Darby)의 생애에서 우리는 그가 참된 헌신을 한 사람임을 보게 된다. 그는 지난 세기에 주님으로부터 크게 쓰임을 받았다. 그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 도움을 받았다. 그는 나이 들어서까지 여전히 주님과 함께 좁은 길을 걸었다. 그는 아주 놀라운 명성과 지위를 지닐 수 있었지만 그러한 것들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 때엔가 나이들었을 때 이탈리아로 사역하러 가서 아주 평범하고도 값싼 여인숙에서 밤을 지새웠다. 그는 피곤하여 양손에 그의 머리를 숙이고서 가냘프게 『예수님, 저의 십자가를 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당신을 따르나이다...』라는 찬송을 불렀다. 비록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어도 그에게는 불평도 후회도 없었으며 기뻐하며 이러한 찬송을 주님께 부를 수 있었다. 그의 일생을 이야기하는 글을 읽다가 이러한 시점에 이르렀을 때 나는 진실로 접한 것이 있었다. 그가 장래를 포기한 결과를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감동시켰다. 그는 나이 들었어도 그의 헌신은 낡지 않았다. 그의 헌신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새로웠다.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가 장래의 모든 전망을 포기하는 이러한 결과는 우리 안에서 항상 새롭게 유지되어야 한다. 우리의 헌신도 결코 낡은 것이 되지 않도록 하자. 만일 헌신이 낡아지면 우리가 자신을 헌신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우리는 항상 제단 위에 있는 재와같이 항상 전적으로 하나님의 누림을 위하며 항상 어떠한 장래도 갖지 않아야 한다.


맺는 말

 

헌신에 대한 다섯 가지 중점을 살펴보았으니 헌신에 대하여 꽤 밝아졌을 것이다. 진리의 관점에서 보면 헌신에 관한 교리가 이러한 다섯 가지 중점에 다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체험의 관점에서 보아도, 사람이 진실로 헌신하면 역시 이러한 다섯 가지 중점을 지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적하여 말할 수 있는 차이점이라면 어떤이들은 이러한 것들을 강하게 체험하였는데 또 어떤이들은 약하게 체험하고 어떤 이들은 더 분명하게 체험하나 또 어떤이들은 더 희미하게 체험한다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헌신에 대한 이러한 다섯 가지 관점은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우리의 공상이 아니다. 오히려 헌신한 사람의 실제적인 상태가 이러한 관점들을 나타내 보여 주고 명백하게 하는 우리의 토대인 것이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바는, 이러한 설명과 조사를 통해서 한편으로는 현재 이미 속 사람이 한 헌신이 발전하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강력하지 못한 헌신을 보여 주어 이로 말미암아 사람이 이러한 체험을 추구하여 계속해서 이 체험이 전진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단 한번의 체험으로 생명의 어떤 체험의 절정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추구해야만 우리의 체험이 점차 증가되어 충만하게 되며 성숙한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어떤 형제 자매들이 자신을 헌신했을지라도 단지 시작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헌신에 있어서 많은 체험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 추구하여, 이 일에 있어서 그들의 체험이 깊어져야 한다.

 

우리가 어떤 집에 들어가려 할 때에는 보통 어느 정도 걸어가야 그 집 현관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영적인 체험에 있어서는 정반대다. 먼저 현관 안으로 들어서야 걷기 시작한다. 영적인 생명의 모든 체험은 먼저 문 안으로 들어서서 시작을 위한 고비를 겪는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또 다른 거리를 걸어서 계속 더 추구하고 더 체험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어떤 사람들이 체험하는 위기는 과히 중하지 않고 약하기 때문에 여전히 계속 추구해 나간다. 또 한편으로 어떤 사람들은 강하고 중한 위기를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도 마찬가지로 계속 전진하며 더 깊은 헌신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헌신에 대한 다섯 가지 중점이 정상적으로 헌신을 체험하는 것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처음에는 그러한 점들이 이루어진 것 같지만 헌신에 대한 그의 체험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시작한 것에 불과 하다. 그것은 단지 문을 통과한 것이다. 아직도 그가 헌신의 길에서 걸어가야 할 먼길이 앞에 놓여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환경에서 우리의 헌신을 견고케 해야 하며 매사에 우리의 헌신을 실행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을 새로이 재헌신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헌신의 길로 곧장 나아갈 수 있다.

 

구약 시대에도 번제물을 아침 저녁으로 매일 드리게 했다. 매 안식일과 새로운 달마다 매 절기 동안에 특별한 번제물을 요구했다(민 28). 특별한 번제물은 큰 일이 있을 때에도 역시 필요로 했다(레 8:18, 28, 왕상 3:4, 15, 8:62-64). 예물 하나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예물은 매일 매 절기마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번제물은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예물 중의 하나이다. 이 때문에 놋 제단은 특별히 「번제단」이라고까지 불리워졌다. 이러한 예물을 빈번하게 드린 데서 나타내는 것은 우리도 나날이 새롭게 헌신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특별 집회나 특별한 행사에 임할 때 특별한 예물을 드려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되풀이 해서 자신을 헌신하면 헌신에 대한 체험이 우리 안에서 증가되어 익숙해 질 것이다.

 

우리 중 많은이들이 마담 기용의 자서전을 읽어 보았다. 그녀의 생애를 그린 글을 통하여, 그녀가 헌신에 있어서 확고부동한 자였으며 계속 전진해 나아간 자였음을 보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수년 동안 전진해 온 그녀에게 나타난 헌신에 대한 다섯 가지를 분명히 구분해 볼 수 있다.

 

그녀가 한 헌신의 토대는 바위처럼 견고한 것이었다. 그녀와 주님 사이에 논쟁이 있을 때면 그녀가 계속 서 있는 발 밑에 한 바위가 있었다. 그녀는 주님께 『주여, 당신은 저를 값으로 사셨읍니다!』라고 말했다.

 

그녀가 한 헌신의 동기는 마치 거세게 밀려오는 홍수와 같았다. 그래서 그녀의 헌신이 달콤하고 절대적일 수 있었다. 그녀의 자서전에서 그녀는 가끔 주님께 대한 결혼 서약을 새롭게 했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보여 주고 있는 바는 그녀의 속 사람이 계속해서 주님의 사랑을 접촉하고 주님의 사랑의 강권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혼 서약은 사랑이 최절정에 달했음을 표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그녀가 밟아온 길은 많은 고통을 당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것이 몹시도 달콤한 길이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고통이 달콤한 것으로 변한 것이다.

 

그녀가 한 헌신의 의미는 한층 더 분명했다. 그녀가 때로는 가정에서 남편의 시중을 들고 자녀를 돌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주님의 손에 머물고 있었다. 그녀는 일손을 거두고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내맡기려 했다. 그녀는 하나님께 『오 하나님, 만일 당신이 저를 쓰시며 치시며 누르시며 틀에 넣고자 하신다면 당신의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 당신이 저를 난도질하여 죽이신다 하더라도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 저는 저의 원대로 하기를 원치 않고 저를 당신께로 넘겨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특별한 점이 마담 기용에게 있어서 특히 분명하다.

 

그녀의 헌신의 목적은 전혀 혼합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참으로 헌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녀 안에서 역사하시게 하여 그녀를 새기시고 부수시고 짓누르시도록 한 자였다. 그렇게 하여 그녀의 역활이 온 방면으로 나타나 정오의 태양과 같이 빛났던 것이다. 그녀는 지난 3 세기 동안 많은 성도들에게 어느 누구보다 더 생명을 공급한 자였다. 그녀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녀 안에서 최대한으로 역사하시게 했기 때문에 최대한으로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었다. 그녀는 죽었지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녀를 통하여 도움을 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한 헌신의 결과는 한층 더 우리로 하나님을 경배케 한다. 그녀는 세상에서 성공한 것이 없었고 영적인 사역에 있어서도 전망 있는 성취가 없었다. 그녀는 자기가 곧 잿더미와 같다고 말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또 한편으로 우주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그녀는 아직도 달콤한 냄새를 내는 향기가 되어 하나님의 만족과 하나님의 백성의 기쁨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헌신의 체험은 실로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헌신에 관련된 이 모든 것들을 살펴 볼 때 우리는 헌신이 단지 생각으로 소유권을 알고 애정의 발로로 사랑하는 느낌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향한 우리 자신의 태도와 표현만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지적으로 말해서 헌신 그 자체가 생명의 일부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헌신은 생명의 주요 부분이다.

 

그러므로 헌신에 대한 체험은 실로 생명에 대한 체험인 것이다. 헌신에 대한 체험이 충만할 때 생명에 대한 사람의 체험이 충만하게 된다. 따라서 사람이 헌신에 대한 체험을 추구하면 생명 안에서 성장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헌신은 생명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 생명을 따라 이 생명 안에 삶으로써 생명의 율(律)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헌신에 대한 다섯 가지를 분명히 밝혀 줄 것이다.

 

우리가 먼저 자신을 헌신할 때 우리가 하게 되는 체험은 어머니 배 속에 있는 태아와 같아서 귀나 눈이나 입이나 코를 분간할 수 없다. 그러나 생명 안에서 성장함에 따라 헌신의 체험에 관련된 이 다섯 가지가 점차적으로 우리 안에서 형태를 이루게 된다. 그제서야 하나님이 우리를 값을 지불하고 사신 것과 우리의 모든 권리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실지로 느끼게 된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강권하시므로 우리는 그 사랑의 포로가 된다.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누림과 만족을 위해 제단에 올려진 제물이 된다. 그제야 하나님으로 하여금 철저히 역사 하시도록 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자들이 될 것이다. 우리의 장래는 사실 한줌의 재와 같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길들이 끊어질 것이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장래와 길이 되실 것이다. 그때에야 헌신에 대한 체험이 진정 성숙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함께 추구해 나아가기를 원한다.


위트니스 리
[생명의 체험(上), 제 3장 헌신,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