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체험
Eugene , 2012-05-24 , 조회수 (3834) , 추천 (0) , 스크랩 (0)

성경 : 출애굽기 3:6, 15, 16, 마태복음 22 : 31-32

 

I

 

고린도 전서 10장 11절은,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라고 말한다.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모두 우리로 경계하게 하고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겉으로 보기에는 차이가 있지만 원칙상으로는 똑같다. 전에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역사하는 원칙은 동일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또한 이방인 중에서도 그의 백성으로 사람들을 택하셨다(행 15:14). 성경은 우리가 성도와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한다(엡 2:19). 또한 우리가 참 유대인이라고 말한다(롬 2:29).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의 거울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방법에 대해 볼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온전케 하시며, 사람은 어떤 체험을 가져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서 이 문제를 볼 것이다.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각기의 위치가 있다.


II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두 개의 기점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하나는 아브라함이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의 부르심은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다. 또 하나의 기점은 이스라엘 나라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만민 중에서 그분에게 속한 백성이 되고 그분의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출 19: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확실히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고 또한 이스라엘 나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두 개의 기점 사이에서 하나님은 세 사람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얻으셨다 아브라함이 있고 이삭이 있고 야곱이 있은 후에라야 이스라엘 나라가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의 백성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나라의 기초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위에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없다면 이스라엘 나라도 없다. 만일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없다면 하나님의 백성도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체험과 이삭의 체험과 야곱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III

 

한 가지 기이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출 3:6)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고 신약에서 주 예수님도 이 말씀을 인용하셨다. 마태, 마가, 누가의 세 권의 복음서에 모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마 22:32, 막 12:26, 눅 20:37)는 말씀이 있다.

 

주 예수님은 또한 우리에게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것을 볼 때에』(눅 13:28)라고 하셨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마 8:1)라고 하셨다. 그분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오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을 언급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특별한 위치에 있고 이삭과 야곱도 특별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IV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왜 이런 특별한 위치에 있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무리를 택하여 그분의 이름 아래 두사 그들로 그분의 백성이 되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얻으심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으로서 아브라함이 반드시 가져야 할 체험 곧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체험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서 영적인 시작을 가지셔야 했고 아브라함에게 어떤 일을 이루셔야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체험을 갖게 하심으로써 이 특별한 체험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되도록 먼저 그에게 역사하셔야 했다.

 

이스라엘 나라의 기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위에 세워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실 뿐 아니라 이삭으로 하여금 특별한 체험을 갖게 하심으로써 이 체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되도록 먼저 이삭에게 역사하셔야 했고 또한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체험을 가짐으로써 이 체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되도록 먼저 야곱에게 역사하셔야 했다. 그들 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받은 다루심과 모든 체험이 전해 내려올 때 하나님은 비로소 백성을 얻으실 수 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모든 체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응당 가져야 할 체험들이다. 그들 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얻은 것들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얻어야 할 것들이다. 아브라함이 얻은 것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에 부족하다. 아브라함이 얻은 것에다 이삭이 얻은 것과 야곱이 얻은 것을 더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창 26:24). 이것은 하나님이 이삭에게 하신 말씀이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 28:13). 이것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신 말씀이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출 6:8).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세 사람의 기업 안으로 들어간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들 자신에게는 기업이 없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기업 안으로 들어갔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각각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특별한 위치를 갖고 있다. 그들 세 사람의 영적인 체험은 세 가지의 다른 영적 원칙을 대표한다. 이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야곱의 성분과 이삭의 성분이 있고 또한 아브라함의 성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성분들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자에게는 누구나 아브라함의 성분이 있어야 하고 이삭의 성분과 야곱의 성분이 있어야 한다.

 

무릇 참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조상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조상이 아브라함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이스마엘과 그의 자손들도 우리 조상이 아브라함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 조상이 아브라함과 이삭이라고 말하는 것도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에서도 이렇게 말할 줄 알고 에서의 자손도 이렇게 말할 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 조상이 아브라함이요, 이삭이요, 야곱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야곱까지 포함시켜야 굳게 설 수 있고 세 방면을 갖추어야 굳게 설 수 있다.


V

 

아브라함의 본명은 아브람이었으나 나중에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고쳐 주셨다. 이 두 이름에는 모두 「아브」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의 원뜻은 아버지이다. 아브라함 자신이 아버지였고 그가 배운 공과는 바로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아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일생은 바로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을 아는 공과를 배우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뜻은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말씀하셨다. 그는 내 「하나님」이 이제까지 일하시니 라고 말하지 않고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자요 유일한 발기인(發起人)이라는 뜻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고 오신 분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 5:19).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체험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일도 발기할 수 없고 또한 발기할 자격도 없다는 것을 보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창세기의 시작은 『태초에 하나님이...』 라고 말한다. 태초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비롯되었다.

 

오,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보여 주시는 그날은 당신에게 복된 날이 될 것이다. 그날 당신은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방법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자신을 조여매고 어떤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셨느냐를 물어야 한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체험이다.

 

그의 체험은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아브라함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한 것이다. 큰 강 유브라데 저쪽 편으로 아브라함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그를 얻고자 하셨기 때문에 그를 불러내셨다. 아브라함 자신은 이런 일을 생각조차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할렐루야! 그를 얻고자 하신 분은 하나님이었고 역사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아브라함 스스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겠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후에 그가 얻게 된 것이다. 사전에 그는 그것을 몰랐다. 그가 부르심을 받아 나올 때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조차도 몰랐다(히 11:8). 그는 고향을 떠나고서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이것이 아브라함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그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안다면 우리는 어떤 것에도 큰 확신을 갖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겠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오히려 주님이 원해야 할 수 있고,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결정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당신더러 우물쭈물하고 결단력이 없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의 뜻은, 당신 자신은 참으로 알지 못하고 아버지가 지시하셔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한 아들을 낳게 될 것을 몰랐다. 아들까지도 하나님이 주셔야 했다. 아브라함은 어떤 것도 발기할 수 없었다. 심지어 자기 아들을 얻는 것까지도 하나님이 그에게 주셔야 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았다. 이런 인식은 교리적인 인식이 아니다. 이런 인식은 참으로 하나님께 이끌리어 「내 자신이 근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유의 근원이시자 또한 나의 근원이시며, 그분이 없으면 시작이 없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이다. 만일 우리에게 이런 아브라함의 인식이 없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우리가 배워야 할 첫번째 공과는 바로 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것과 그분이 아버지 곧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VI

 

이삭에게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갈라디아서 4장은 이삭을 아들이라고 말한다. 이삭은 모든 것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창세기 11장부터 50장까지를 읽어볼 때,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이삭이 특별한 점이 없는 평범한 사람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아브라함 같지 않고 야곱 같지도 않다. 아브라함은 큰 강 저편에서 나온 사람으로서 창업한 사람이지만 이삭은 그렇지 않다. 이삭은 또한 야곱과 같이 많은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고 많은 고생을 하지도 않았다. 이삭은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을 누렸다. 비록 이삭도 몇 군데 우물을 팠지만 그 우물들도 전에 아버지가 파 놓았던 것들이었다.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창 26:18).

 

이삭이 우리에게 주는 공과는, 아버지께로부터 이어받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고전 4:7)라고 묻는다. 이것은 내게 있는 것 중에서 한 가지도 받지 않은 것이 없고 나의 모든 것을 아버지로부터 받았다는 말이다. 이것이 이삭이다.

 

오, 많은 사람이 아브라함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이삭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 노릇을 잘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이삭 노릇을 잘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이삭의 체험 없이 아브라함의 체험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삭의 체험만 있고 아브라함의 체험이 없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며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보아야 하고, 또한 우리는 아들로서 모든 것을 그분이 주신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아들 될 수 있는 생명도 그분으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받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구원도 다만 받은 것이요, 승리, 칭의, 성화도 다만 받은 것이다. 죄 사함도 해방도 다 받은 것이다. 받는 원칙이 바로 이삭의 원칙이다. 우리는 『할렐루야! 할렐루야!』라고 외쳐야 한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삭에게도 주셨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특별히 다른 것을 이삭에게 주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의 부친에게 준 것을 그에게 주셨다. 이것이 우리의 구출이요 우리를 해방시킨다.


VII

 

이제 우리는 야곱을 보기로 하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만유의 근원이심을 알고 우리의 모든 것이 다만 받은 것이라는 것까지도 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영접하지 않는 문제를 안고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받지 않을 때 우리가 공허해지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왜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왜 생명의 법으로 말미암아 이기려고 하지 않고 자기 의지로 이기려고 하는가? 이것은 아직 그에게 야곱과 야곱의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 원칙은 바로 육체의 활동이 남아 있고 혼의 능력과 천연적인 생명이 거기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교리적으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의 기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스스로 무엇을 시작하려고 하는가? 우리는 이삼 주간은 교리를 기억하고 있다가도 스스로 또 무엇을 시작한다. 이것은 여기에 야곱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승리에 관한 교리, 성결에 관한 교리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받기만 하면 된다고 말해주고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의 처리를 말해주지 않는다면 그 승리의 교리와 성결의 교리는 완전하지 않고 또한 실제적이지 못하다. 혼 생명을 만지지 못한 교리는 며칠 동안은 사람을 기쁘게 하나 그 후에는 끝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유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을 보는 동시에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이 활동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아들의 유익을 보고 아버지의 길을 순종하게 된다. 우리가 아들의 약속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여부와 아버지의 길을 갈 수 있는가의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가 성령의 통제를 받아들이는지, 천연적인 생명이 그분에 의해 만진 바 되었는지에 달려 있다. 이것이 우리가 야곱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야곱의 천연적인 특징은 바로 그의 총명이다. 그는 극도로 총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도 속일 수 있었으며, 그의 형을 속였고 아버지와 그의 외삼촌도 속였다. 그는 어떤 것이든 다 얻으려고 했고 어떤 것이든 다 해보고 어떤 것이든 다 이루려고 했다. 그는 그의 부친같이 아들이 되지 않았고 두 손이 빈 채로 외삼촌에게 갔다가 가득히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이 야곱이다.

 

야곱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아버지에 대해 말하고 이삭은 우리에게 아들에 대해 말하지만 야곱은 우리에게 성령에 대해 말한다. 야곱이라는 사람이 성령을 대표한다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체험이 성령의 역사를 대표한다는 말이다. 야곱의 일생 체험은 성령의 통제를 대표한다.

 

당신은 여기서 교활하고 계략이 많으며 남을 속이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또한 그 사람 안에서 성령이 한 단계 한 단계 그를 통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형의 발꿈치를 잡았지만 그는 여전히 동생으로 있었다. 그가 팥죽 한 그릇으로 그의 형을 속인 것은 사실이나 나중에 집을 떠난 사람은 그의 형이 아니라 그였다. 장자의 명분을 그가 탈취했지만 도망 다닌 사람은 그이지 그의 형이 아니다. 그가 아버지의 축복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밖에서 표류한 사람은 그이지 그의 형이 아니었다.

 

그가 외삼촌에게 가서 라헬을 취하였지만 라반이 그에게 먼저 준 사람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다. 이십 년 동안 그는 낮에는 더위를 견디고 밤에는 추위를 견뎌야 했다. 그는 참으로 고통스럽고 고생스러웠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의 통제요 총명한 사람이 받은 연단이다. 계산할 줄 아는 사람도 주님의 손에 의해 눌려질 것이고, 방법을 쓰는 사람도 주님의 손에 의해 눌려질 것이며, 천연적인 생명도 하나님에 의해 눌려져 나가야 한다. 야곱의 일생 체험은 우리에게 성령의 통제를 보여 준다.

 

혹 어떤 형제 자매들은 특별히 남보다 총명하고 생각을 잘하며 계획과 계략과 전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행함은 사람의 총명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한다(고후 1:12).

 

야곱은 항상 성령의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그의 총명이 통하지 않았다. 브니엘에서의 그 밤에 야곱은 가장 큰 공과를 배웠고 이것은 또한 일생 동안에 그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밤이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도 다룰 줄 알고 하나님도 다룰 줄 알며 어떤 일이든지 쉽게 통과하고 하나님을 만나도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의 환도뼈가 위골되어 절름발이가 될 줄이야!

 

환도뼈의 힘줄은 온 몸에서 가장 큰 힘줄이다. 야곱의 환도뼈가 하나님에 의해 만진 바 된 것은 그의 천연적인 생명의 가장 강한 부분이 하나님에 의해 만진 바 된 것이다. 그날부터 그는 절었다. 그가 다리를 절기 전에는 야곱이었으나 절은 후에는 이스라엘이 되었다! 그날부터는 그가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속임을 당했다. 전에는 그가 부친을 속였으나 그날부터 그의 아들이 그를 속였다. 이전 같았으면 총명한 야곱은 그의 아들이 자기를 속일 수 있다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그는 남을 속이기에 능하고 남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남을 속일수록 남을 믿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측정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달라졌다. 지금의 야곱은 과거의 야곱이 아니다. 그가 더 이상 자신의 총명을 의지하지 않았기에 그는 자기 아들에게 속임을 당할 수 있었다. 그는 많은 눈물을 흘렸고 그의 천연적인 능력은 하나님의 처리를 받았으며 하나님에 의해 제해졌다. 바로 이런 체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우리를 이끈다.

 

어느 날 하나님은 당신을 비추고 당신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간사하며 계략이 많은 사람인가를 보여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보여주실 때 당신은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의 빛은 당신을 죽일 것이다. 또한 당신 자신이 끝났다는 것과 굴복하며 하나님을 섬기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부터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통제이다.


VIII

 

총괄해서 말한다면,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우리가 자신을 의지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삭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가 받았을지라도 만일 성령의 통제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여전히 문제가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야곱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이다. 당신의 환도뼈의 힘줄이 끊어지고 당신의 천연적인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 처리를 받을 때 비로소 당신은 겸손한 사람, 두려워하고 떨면서 주님을 좇아가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 날이 될 때 당신은 방심하지 않고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을 것이다.

 

아, 우리는 얼마나 쉽게 주장을 내세우고 기도하지 않고도 말하고 일을 추진하는지! 또 얼마나 쉽게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지 않고서도 확신을 가지는지! 당신의 천연적인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 만진 바 되고 파괴되어 자신을 의지하여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되는 날 비로소 절름발이가 될 수 있다. 절름발이란 길을 걷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자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절름발이인 것을 안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이런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에 의해 이런 경지에까지 인도되지 못한 사람은 브니엘의 체험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방도가 있고 확신이 있으며 자신이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령의 통제를 받지 못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우리 눈을 열으사 우리에게 이 세 가지 체험의 관계를 보여주시기 바란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전일한 체험이고 또한 상호 보완적이다. 이 세 가지 중 한두 가지만 가질 때 굳게 서지 못한다. 이 세 가지 체험을 분명히 보아야만 하나님의 길에서 전진할 수 있다.


워치만 니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제 1장,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