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교통 안에 삶―영광스런 중재(仲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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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gene , 2012-05-23 , 조회수 (2918) , 추천 (0) , 스크랩 (0)

(2) 영광스런 중재

 

이 메시지에서 우리는 창세기에 뿌려진 신성한 계시의 또 하나의 씨, 곧 중재의 씨를 보기로 하자. 창세기의 전반부 열 일곱 장에는 중재에 관한 기록이 없다. 비록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위해 중재했다고 볼 수 있으나 이것에 관한 기록이 없다. 성경에서 중재에 관한 첫번째 분명한 기록은 창세기 18장에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첫번째 중재자였음을 본다. 중재에 관한 이 기록은 단지 씨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어느 정도의 발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18장에는 중재에 관한 이야기가 있을 뿐 아니라 중재의 기본 원칙에 관한 분명한 계시가 있다. 성경에서 중재는 중대한 일이다.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의 경륜은 성취될 수 없다. 오늘날 신성하고 왕 같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뛰어난 사역은 중재의 사역이다. 로마서 8장 34절과 히브리서 7장 25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중재(개역 성경에서는 간구임 : 역자 주)하신다고 말한다. 이 중재가 심히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메시지 전체를 사용하여 주로 중재의 기본 원칙을 상고해 볼 것이다.


(a)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중재의 첫번째 기본 원칙은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18:17, 20-21). 하나님의 눈에서 계수되는 중재는 오직 그분의 계시에 따른 것들뿐이다. 이것은 합당한 중재가 우리에 의해 시작되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그분에 의해 시작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창세기 18장에 분명하게 묘사되었다. 아브라함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롯을 걱정하며 하늘 보좌에 계신 분에게 롯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아니다. 아브라함이 장막문에 앉아서 정오의 더위를 식히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그에게 오셨다. 하나님께서 위엄과 영광으로 아브라함에게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자기를 방문한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처음에는 몰랐다.

 

결국 아브라함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편안했으며 친한 친구처럼 하나님과 대화했다. 이 대화는 분명히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을 것인데 이는 음식을 준비하고 먹는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두 천사가 떠나려고 할 때 아브라함은 작별 인사를 하지 않고 안내를 했으며 아마 그분들과 함께 꽤 먼 거리를 걸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시험의 하나님이심을 본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지만 가끔 우리를 시험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며 우리의 가장 깊은 속까지도 아시지만 가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를 시험하심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나오게 하신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오신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겠는가? 분명 그분은 음식을 잡수시러 오신 것이 아니고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확증하러 오신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은 중재자를 찾으러 아브라함에게 오셨다. 하늘 보좌에서 하나님은 악한 성인 소돔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성 안에 자기의 백성인 롯이 있음을 결코 잊지 않으셨다. 롯 자신도 소돔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 수 있었겠는가?

 

그분은 롯을 위해 중재할 사람을 찾으셔야 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아브라함처럼 롯과 관계되고 하나님과 긴밀히 연결된 사람이 없음을 아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중재자를 찾기 위한 목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중재할 중재자가 없으면 하나님은 어떤 일도 하실 수 없다. 하나님께는 신성한 원칙이 있다. 그것들 중의 하나는, 중재가 없을 때 그분은 어떤 사람도 구원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중재를 통해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그러한 중재가 있을 때를 기다리며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분과 쉽게 대화하고 롯을 위해 중재할 수 있도록 사람의 모양으로 방문하셨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는 친근한 친구처럼 하나님과 대화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방문하신 목적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갈망을 따라 롯을 위해 중재하는 부담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장막문에 여러 시간 동안 머물면서 그와 많은 대화를 하셨지만 중재자를 얻기 위해 오신 그분의 목적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가끔 이렇게 행동한다. 가령 당신을 위해 어떤 형제가 어떤 일을 해 주기를 원한다 하자. 만일 당신이 현명하다면 즉시 그에게 가서 당신이 원하는 일을 하라고 그에게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먼저 여러 가지 일에 대해 그와 이야기하며 그의 마음을 살필 것이다. 돌아갈 때 그 형제가 문까지 따라 나오거나 길에까지 전송할 경우 당신은 그에게 자신을 열고 당신의 원함을 그에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머뭇거리며, 『오늘 저녁 집회에서 만납시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의 마음이 너무 차가우며 당신이 원하는 일에 대해 흥미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좀더 오래 형제님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자신을 그에게 열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오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환영했으며 물과 좋은 음식을 대접했다.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과 잡수시는 동안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대화하셨지만 오신 목적을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오직 하나님께서 일어나서 장막을 떠나시고 아브라함이 동행하며 전송하고 두 천사가 떠났을 때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그분의 의도를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그들과 동행할 때 주님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8:17)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사랑스런 친구이자 부르심받은 자인 아브라함에게 그분의 의도를 숨기실 수 없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머물 때, 두 천사가 소돔을 향해 떠난 뒤에도 그분 앞에 그대로 서 있을 때(18:22), 하나님은 자신을 그에게 여셨다. 하나님은 직선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여시지 않고 암시하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아, 나는 지금 소돔을 멸망시키겠다. 그런데 롯이 거기에 있어서 걱정이 된다. 나는 네가 롯을 위해 중재해 주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간단한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18:20-21). 비록 하나님은 롯에 대해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소돔에 관해 말씀하신 그분의 의도는 롯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두 친구는 롯에 대해 대화했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롯에 대해 비밀한 방법, 암시하는 방법으로 대화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관심이 롯에게 있음을 알았으며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롯을 위해 중재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도를 알았듯이 하나님도 아브라함의 의도를 아셨다.

 

중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갑자기, 기적적으로, 「오순절 같은」 방법으로 온다고 생각지 말라.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그러한 계시를 받기 위해서 우리는 긴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우리는 갈대아 우르로부터 많은 곳을 통과하여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근처의 장막문에 와야 한다. 처음에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그를 부르셨다. 그 당시에 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계시를 받기 위해 준비되지도 않았고 자격도 없었다. 그는 하나님과의 친근한 교통 안에 있지 않았다. 심지어 그돌라오멜과 다른 왕들에게 약탈을 당한 후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친근한 대화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5장과 16장에서 우리는, 비록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추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많은 부분이 여전히 육 안에 있음을 본다.

 

17장에서 그는 할례를 받고 끝났으며 그의 이름은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 다음 18장에서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나 하늘과 땅의 소유자나 엘샤다이가 아닌, 친한 친구와 함께 음식을 즐기기 위한 사람으로 오셨다. 그 당시에 하나님은 그분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얻으셨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행했던 영광스런 중재는 땅에 있는 사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했던 기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두 친구 사이의 인간적인 대화였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어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의 형체를 입고 아브라함과 대화하셨다. 결국 그분은 자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아브라함에게 드러내셨다. 그러나 그들은 두 사람의 친구처럼 계속해서 대화했다. 이런 상태에 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그분의 갈망에 관한 계시를 받을 준비가 되었으며 받을 자격이 있게 되었다. 중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음의 갈망을 보여 주심에 따른 그분과의 친밀한 대화이다. 이것이 중재의 첫번째 원칙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음의 갈망을 사람에게 계시하시려면 사람이 준비되어야 한다. 비록 수백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에 속하지만 준비되고 단련되고 훈련되고 할례받고 끝난 사람은 극소수이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똑같지는 않지만 가끔 비슷한 체험을 한다. 우리는 기꺼이 자신을 버리고 육을 거절했다. 그럴 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사람 친구처럼 우리에게 오셨다. 우리는 그분께 기도하지 않았으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우리는 친한 친구처럼 그분과 대화했다.

 

중재의 첫번째 기본 원칙-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에서 나오는 친근한 계시에 따른 것이어야 함-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긴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우리는 처리받고 할례받고 끝나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하나님과 친근한 교통을 할 수 있도록 준비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셨듯이 신성한 수준이 아닌 사람의 수준에서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 가령 오늘 하나님이 이런 모양으로 당신에게 오시고 당신은 그분께 음식을 대접하며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대화한다고 가정하자. 이렇게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은 얼마나 좋을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과 이러한 교통을 가질 때 우리에게는 전능하시고 위엄 있는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느낌이 없고 다만 한 사람과 대화한다는 느낌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에 따른 중재의 의미이다. 이 중재는 항상 친근하고 비밀하며 암시하는 방법으로 행해진다.


(b) 외관상으로는 소돔을 위한 것이지만 실지로는 롯을 위한 것임

 

하나님께서 마음에 있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보여 주셨을 때 아브라함은 즉시 그 의미를 이해했다. 외관상으로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해 중재했지만 실지로는 롯을 위해 중재했다.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18:23). 여기에 롯이 암시된다. 아브라함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주여, 당신이 멸하시려는 악한 성인 소돔 안에 의인이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 의인과 함께 다른 의인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롯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셨지만 아브라함은 이해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도 롯의 이름을 하나님께 언급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아셨다. 그들은 비밀한 방법으로 서로 대화했다. 제 삼자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랐지만 그들은 친근한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서로 이해했다. 아브라함이 사실상 롯을 위해 중재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그 증거가 19장 29절에 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보내셨더라』. 하나님은 롯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을 생각하셨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롯을 소돔에서 구출하심으로써 아브라함의 중재에 응답하셨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18장에 있는 아브라함의 중재는 사실상 소돔 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롯을 위한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롯을 위한 아브라함의 중재는 신약 시대의 교회 안에 있는 중재와 같다. 아브라함의 시대에 땅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두 혈통-아브라함의 혈통과 롯의 혈통-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의 한 부분인 롯의 혈통은 악한 성인 소돔으로 흘러들어 갔다. 이와같이 교회 사람들 중 일부는 세상으로 흘러 들어갔다. 아브라함이 소돔으로 흘러들어간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중재했듯이 우리는 세상으로 흘러들어간 형제 자매들을 위해 중재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중재는 교회 생활 안에 있는 중재와 비슷한 첫번째의 것이었다.


(c)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합당한 중재는 모두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오는 계시를 따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따른 것이어야 한다. 중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 아니다. 내가 이미 지적했듯이, 하나님은 롯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셨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외적인 말씀을 따라 중재하지 않고 하나님의 내적인 마음의 의도를 따라 중재했다. 합당한 중재는 항상 하나님의 마음을 만진다. 아브라함이 중재하는 동안 하나님은 매우 기쁘셨으며 속으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 『이 땅에서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을 찾은 것은 얼마나 좋은가!』

 

다시 말하거니와 합당한 중재는 항상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하나님의 방문에 의해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깊은 느낌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수행할 중재를 시작하실 때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기를 배워야 한다. 만일 그분이 가시려고 하면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물며, 『주여, 나는 당신의 임재를 잃기 싫습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여기에 머물기 원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당신이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물 때 그분의 마음은 열릴 것이며 그분의 갈망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갑자기 주님과 작별하지 않고 어느 정도 그분과 동행했음을 보았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매우 인간적이심을 보여준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문다면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을 만큼 인간적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음으로 인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나는 이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지 않았으며 그분은 나의 임재를 떠나지 않으셨다. 그러한 머무름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분의 마음을 내게 열어 주셨으며 합당한 중재가 나왔다.

 

중재는 다만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친근한 대화이다. 18장에서 아브라함은 기도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의 수준에 계신 친근한 친구와 대화했으며,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은 마치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이 당신의 길입니까? 저는 당신이 이렇게 하셔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 안에 오십 명의 의인이 있을지 모릅니다.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는 오십 명의 의인으로 인해 그 성을 용서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것은 대화였다.

 

그런 다음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18:25)라고 말했다. 이것은 주님께 대한 강한 요청이었다. 당신은 하나님께 이렇게 요청하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사람의 수준에 계신 하나님과의 친근한 교통 안에 들어가서 그분의 마음의 갈망을 알 때 당신은 그분께 강청하며, 『주여, 이것이 당신의 길입니까?』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기도하거나 애걸하는 것이 아니고 극히 친근한 대화 중에서 하나님께 강청하는 것이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18:26)고 대답하셨다. 중재의 기본 원칙은 기도하거나 애걸하는 것이 아니라 강청하는 대화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강청하기를 원하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강청했을 때 그분은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나는 땅에 있는 사람 중에서 내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기도하거나 요구하거나 애걸하지 않고 내게 강청한다. 나의 친한 친구가 강청했기 때문에 나는 그의 말대로 실행해야만 한다. 이제 나는 나 혼자 롯을 염려하지 않는다.』 당신은 강청하는 식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이러한 중재를 체험한 적이 있는가? 당신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는가? 『주여, 이렇게 행하시는 것이 당신의 길입니까?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는 것이 당신의 길입니까? 절대로 불가합니다!』 이것이 참된 중재이다.

 

27절부터 32절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계속해서, 그 성이 용서받을 수 있는 의인의 수에 대해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을 본다. 주님께서,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고 말씀하신 후에 아브라함은 오십 의인 중에 다섯이 부족하면 그 성을 멸하시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주님은,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다. 「45」라는 숫자를 아브라함 아닌 주님이 말씀하셨다. 주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사십 오(45)도 좋으나 나는 거기에서 그만큼을 찾을 수 없다.』

 

그런 다음 아브라함은 사십 인에 대해 물었고 주님은, 『사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다. 아브라함이 삼십 인을 말했을 때 주님은 삼십 인을 찾으면 소돔을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아브라함은 이십 인으로 감했고 또 다시 주님은 이십 인을 위하여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은 최저의 숫자를 가지고 여섯번째의 제안을 했다. 그는 주님께, 만일 거기서 십 인의 의인을 찾으면 그 성을 용서하시겠느냐고 물었다. 하나님은 십 인으로 인해서도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의인의 수를 오십 인에서 십 인으로 줄이면서 주님께 여섯 번의 제안을 했다. 그후 그에게는 일곱번째의 제안을 할 부담이 없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임재에 의해 인도받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십 인의 의인을 위하여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을 때(18:32), 그는 실망했다. 롯에게는 아내가 있었고 결혼하지 않은 두 딸과 결혼한 몇 명의 딸들과 사위들이 있었다. 아브라함의 계산에 의하면, 사위들이 포함된 경우 롯의 가족에는 최소한 열 명의 식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소돔 성 안에 의인이 열 명도 없음을 알았을 때 아브라함은 놀랐고 실망했다.


(d) 하나님의 의로운 길을 따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강청한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길을 따른 것이었다(18:23-25). 아브라함은 주님께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온 땅의 심판자이십니다. 당신은 이렇게 행하시겠습니까? 이것은 당신의 의로운 길이 아닙니다.』 합당한 중재는 하나님의 사랑을 따른 것이 아니고 그분의 은혜를 따른 것도 아니며 오직 그분의 의를 따른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최강의 요청은, 『하나님, 당신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십니까?』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렇게 말한다면 하나님은 아마, 『그렇다. 나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내게 달린 것이다. 내가 기쁘면 사랑하지만 기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 나의 행동이 뭐가 잘못되었느냐?』

 

우리는 이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 당신은 의로운 분이 아니십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따라 그분께 강청한다면 하나님은, 『나는 분명히 의롭다.』라고 대답하실 것이다. 그분은 결코, 『내가 즐거우면 의롭지만 즐겁지 않으면 결코 의롭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어떤 것인가! 하나님은 사랑이나 은혜보다 의에 더욱 묶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따라 그분께 강청해야 한다. 하나님께는 사랑하고 은혜를 나타내야 할 의무가 없지만 의로우셔야 할 책임이 있다.

 

의만큼 하나님을 견고하게 묶는 것은 없다. 모든 훌륭한 중재자들은, 하나님을 효과적으로 묶는 길이 그분의 의를 따라 강청하는 것임을 안다. 우리는, 『당신은 온 땅을 그렇게 심판하시겠습니까?』라고 말해야 하며 그럴 때 하나님은, 『아니다. 나는 의롭기 때문에 결코 그렇게 하지 않겠다. 그러나 너는 내가 그 성을 의롭게 여길 수 있는 숫자를 내게 말해야 한다. 만일 네가 그 숫자를 말해 준다면 나도 정당해지고 의롭게 될 것이다. 나는 결코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합당한 중재는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애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의로운 길을 따라 그분께 강청하는 것이다.

 

나는 주의 회복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중재 안으로 인도되리라 믿는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방문하기 위해 사람의 수준으로 내려오셨을 때 그분은 한 명의 중재자를 찾고 계셨다. 오늘날 하나님은 개인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체의 사람을 찾기 위해서 또 다시 사람의 수준으로 내려오셨다. 나는 오래지 않아 이 땅에 아브라함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임재 안에서 강청하는 중재를 하는 사람이 있게 되리라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여, 당신은 신약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약속하시기를 당신이 시작하신 선한 일을 이루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브라함은 울지 않고 롯을 위해 소돔을 용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하나님께 강청했다. 그분은 우리의 우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강청하는 중재를 듣기 원하신다.


(e) 하나님의 갈망을 표현함

 

아브라함의 중재는 롯을 위한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에 대한 반향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중재했기 때문에 그의 중재는 자연히 하나님의 갈망을 표현했다. 합당한 중재는 항상 하나님의 갈망을 표현한다. 이것이 중재의 또 하나의 원칙이다. 만일 우리의 중재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 안에 있는 그분의 계시에서 시작된다면 우리가 중재할 때 하는 모든 말은 그분의 갈망의 표현이 될 것이며 그분의 의도의 반향이 될 것이다. 참된 중재는 우리의 갈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갈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도를 따라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가 성취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f) 하나님의 뜻을 수행함

 

또한 중재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야 한다. 비록 하나님께 롯을 구출할 뜻이 있었지만 아브라함의 중재가 없었다면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수행할 길이 없으셨을 것이다. 합당한 중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길을 예비한다. 그것은 하늘에 속한 기관차를 위한 철로를 놓는다. 하나님은 롯을 소돔에서 구출하기를 갈망하셨으나 그 방법을 찾으셔야 했다. 그래서 그분은 아브라함이 롯을 위해 중재해 주기를 바라시고 그를 방문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마음에 극히 친근했으므로 하나님은 그분의 마음을 그에게 여실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즉시 강청하는 중재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반향(反響)했다. 이 중재는 하나님의 갈망의 표현이었으며 그분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교회 생활에서 이러한 강청하는 중재가 긴급하게 필요하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메시지들은 그분의 뜻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이 라이프 스타디에서 우리는 단지 성경의 가르침만을 주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주의 회복을 위해서 주님의 현재의 말씀을 해방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이 메시지를 읽은 후에 강한 메아리가 주의 회복 전체에 울려 퍼져서 사랑스런 수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며 참된 중재의 온전한 깨달음 안으로 인도되기를 바란다. 이제부터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따라 그분께 강청하는 중재를 하기 위해 우리의 영을 사용하기 바란다.

 

우리는 그분의 마음의 갈망이 그분의 백성을 악한 성에서 구출하는 것, 즉 오늘날의 롯을 정죄의 상태로부터 구출하는 것임을 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심히 가까와서 그분과 친밀하게 교통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며 영광스런 중재 안에서 그분의 마음의 갈망을 그분께 반향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메시지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중재가 매우 효과적이었음을 보겠다. 19장 27절부터 29절까지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여전히 하나님의 마음과 함께 있었음을 본다.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롯을 깊이 염려하며 성을 바라보았다. 19장 29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보내셨음」을 분명히 본다. 이런 효과 있는 중재가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 가운데 더욱더 깨달아지고 실행되기 바란다.


(g) 주께서 말씀을 마치실 때까지

 

18장은 아브라함의 말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끝난다. 33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여기의 기록은 아브라함의 중재의 기록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그의 말을 마쳤다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말씀을 마치셨다고 말한다. 합당한 중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이다. 외관상으로는 우리가 말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말 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셨다고 말하는 이 구절을 좋아한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기도할 때 말을 다 하면 『아멘!』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의 아멘은 『안녕히 가세요.』를 뜻한다. 나는 그분이 내게 말씀을 끝마치기도 전에 수백 번이나 주님께 『안녕히 가세요.』라고 말했음을 간증할 수 있다. 나는 일정한 시간 동안 기도하고 『아멘.』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안녕히 가세요.』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내 영의 깊은 속에서 나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심을 느꼈다. 『뭘 하고 있느냐? 내 말은 끝나지 않았다. 너는 몇 분 더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어떠냐?』 우리 중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체험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아멘」 곧 「안녕히 가세요」는 너무 빠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끝날 때까지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물러야 한다. 우리의 중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말해야 한다.


위트니스 리
[창세기 라이프 스타디 Ⅱ, "창세기 51",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