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은혜를 앎―씨와 땅
생명
Eugene , 2012-05-23 , 조회수 (2652) , 추천 (0) , 스크랩 (0)

이 메시지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체험의 큰 전환점을 보겠다.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지금까지의 체험은 모두 외적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이 원하는 장소로 감으로써 그 부르심에 응답했다. 그것은 다 외적인 것이었다. 그 후 아브라함의 두번째 체험은 믿음으로 사는 것과 생계를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었다.

 

그가 믿음으로 살 때 직면한 첫번째 시험은 심한 기근이었다. 이 기근을 통해서 그는 먹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배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공이나 교육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생계를 염려한다. 생계라는 것은 오직 먹는 것, 곧 빵과 버터를 뜻한다. 성경과 인류 역사에서 하나님은 여러 번, 이 먹는 문제를 통하여 사람들을 통제하셨다. 교만하지 말라. 일단 하나님께서 당신의 식량 공급을 없앨 때 당신은 엎드려서,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라고 말할 것이다.

 

지난 메시지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장소에 도착한 후에 배운 첫번째 공과는 먹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었음을 보았다. 그는 이 시험에 실패하여 애굽으로 내려갔다. 애굽에서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공과를 배웠다. 그 공과를 배운 후에 그는 벧엘과 아이 사이의 땅으로 되돌아왔다. 그 직후에 동일한 한계, 곧 먹는 한계 안에 있는 또 다른 공과가 뒤따랐다.

 

그것은 롯의 목자와 아브라함의 목자가 다툰 것이었다. 이 목자들은 더 나은 생활, 곧 빵과 버터를 위해 서로 다투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빵과 버터를 가져가기를 원치 않았다. 아브라함은 첫번째 시험에서 하나님이 그의 일상 생활의 주권자이심을 배움으로써 두번째 시험에서는 승리했다. 아브라함은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요 천지의 주재이심을 알았다. 그는 자기를 부르신 분이 빵과 버터를 돌보신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이것들을 돌볼 필요가 없었다.

 

네 왕 대 다섯 왕의 전쟁도 역시 빵과 버터에 관계된다. 역사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전쟁은 다 이 문제를 위한 것이었다. 나라들간의 모든 전쟁은 오직 한 가지, 곧 빵과 버터를 위한 것이다. 창세기 14장 11절은, 네 왕과 다섯 왕의 전쟁이 이 목적을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은 네 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나가 싸워서 그들을 죽이고 양식을 되찾아왔다. 아브라함이 네 왕에게 승리한 후,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왔다(14:18). 이 떡은 비밀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얻기 위해 어떤 일을 하거나 싸울 필요가 없었다. 아브라함은 다만 싸워서 양식을 되찾아왔으며 그럴 때 멜기세덱이 떡을 가지고 왔다.

 

14장의 끝까지에 있는 아브라함의 모든 체험은 외적인 축복과 돌보심과 공급에 관련된 외적인 것들이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육축과 종들을 주심으로써 그를 외적으로 돌보셨다. 네 왕에 대한 승리도 외적인 것이다. 심지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가져온 것들도 외적인 것이다. 그 때까지 아브라함이 체험한 모든 것은 외적인 것이다. 이 말을 듣기 전에 당신은, 14장의 끝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체험의 절정에 있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렇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절정에 있었지만 그것은 기초 단계의 체험의 절정이었다. 15장 전에 아브라함이 체험한 모든 것은 기초적인 것이다. 15장의 서두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체험에 있어서 더 전진된 단계로 이끌기 위해 오셨다.


C.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은혜를 앎

 

15장 1절은,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 오셨을 때 아브라함은 여전히 기초 단계에 있었다. 아브라함이 왕들을 죽인 후에 그와 왕들의 백성들 사이에는 심각한 적대 관계가 형성되었다. 대적과 싸울 때 그는 담대하고 용감했다. 그러나 승리하고 집에 왔을 때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내가 무슨 일을 했지? 그들은 다시 쳐들어올 것이다. 그 때는 어떻게 하나? 우리는 겨우 삼백 십 팔 명이고 그들은 훨씬 더 많다.』

 

아브라함은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다. 믿음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담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할렐루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요 천지의 주재이신 분을 찬양합니다. 나는 그분께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승리하고 집회에서 할렐루야를 외친 후에 당신은 집에 와서 생각하기 시작한다. 『내가 무슨 일을 했지? 만일 대적이 다시 공격하면 어떻게 하나?』

 

15장 1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아브라함이 대적을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하나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보라, 두려워할 것 없다. 나는 네 방패다. 안심하라 나는 또한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

 

그 당시에 여전히 기초 단계에 있던 아브라함은 두 가지를 염려했다. 첫째는 그의 대적들이 다시 싸우러 오리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에게 아직 자녀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를 보라. 나는 늙었다. 아내를 보라. 기능이 거의 끝났다. 우리는 아직 자녀가 없다. 주여, 당신은 우리가 매년 늙어가고 있음을 모르십니까? 언제 우리에게 자녀를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이 두 가지를 염려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의도를 숨길 수 없다. 기회가 있으면 우리는 조만간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15장 2절에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라함이 주님께 한 다음 말은 별로 공손하지 않았다.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15:3).

 

아브라함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주여, 당신이 내게 자녀를 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내게는 자녀가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 당신은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왜 내게 자녀가 없습니까? 당신이 내게 자녀를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게 와서 당신은 당신이 나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내게 자녀가 없다면 당신이 내게 상급을 주심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집에서 길리운 자인 다메섹의 엘리에셀이 그의 후사라고 주님께 말했다. 다비(J.N. Darby)의 「새 번역 성경」의 각주는, 『집에서 길리운 자는 종들 중의 한 명을 뜻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엘리에셀이 다메섹에서 왔음을 나타낸다. 아마 아브라함이 다메섹을 통과할 때 거기에서 얻은 사람일 것이다.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절도 있게 응답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진흙탕 속을 통과하며 머뭇거렸다. 아브라함은 두 번의 죽음, 곧 형인 하란의 죽음과 아버지인 데라의 죽음을 맛보았다. 결국 아브라함은 더 이상 피할 수 없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다. 그는 롯을 데리고 두번째로 부르심을 받았던 하란을 떠나 엘리에셀을 얻은 곳인 다메섹을 통과했다.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분이 그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은 마치 이렇게 대답하는 것 같았다. 『주 하나님이여, 당신이 내게 자녀를 주지 않으셨으므로 내게는 자녀가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상속자, 내 집을 소유할 자는 내 종인 엘리에셀임에 틀림없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15:4)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롯을 주의하지 않는다. 나는 또한 이 사람도 주의하지 않는다. 네 종들 중 하나가 아닌, 네 자신에게서 태어날 자손이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15:5). 아브라함이 주님을 믿은 것은 이 순간이었다. 6절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주님에 의해 의로 여겨졌으며 이 때 아브라함은 의롭다하심을 받았다. 이것이 믿음에 의한 칭의이다.

 

아브라함이 자손을 얻은 것은 절대로 외적인 일이 아니라 전혀 내적인 일이다. 아브라함은 이 일을 외적으로 이루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엘리에셀은 그에게서 나온 자가 아니라 그의 밖에 있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 차이점을 보아야 한다. 오늘날 내적인 체험을 주의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외적인 체험을 주의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의 가르침은 대부분 창세기 14장의 마지막까지 나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며 논쟁할지 모른다. 『15장에 있는 것은 믿음에 의한 칭의가 아닙니까?』 그렇다. 그들에게 믿음에 의한 칭의가 있지만 그들은 이것까지도 외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브라함은 14장에서 하나님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요 천지의 주재이심을 믿었을 때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지 않으셨다. 어떤 믿음이 아브라함의 의로 여겨졌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낳을 수 있도록 그의 안으로 뭔가를 역사해 넣을 수 있음을 믿는 믿음이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매일의 필요와 매일의 양식을 공급하실 것을 믿는 것도 좋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귀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어떤 믿음이 귀한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낳기 위해 우리 안으로 그분 자신을 역사해 넣으실 수 있음을 믿는 믿음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외부적인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 믿음만을 주의한다. 그런 믿음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건강과 치료와 좋은 직업과 승진 등을 줄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믿음만을 가지고 있다. 이런 믿음은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그렇게 사랑스럽고 귀한 것은 아니다. 그분은 이런 믿음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시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시는 믿음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자손을 낳을 수 있도록 그의 안으로 뭔가를 역사해 넣으실 수 있음을 믿는 믿음이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에게 빵과 버터와 육축과 종들을 주실 것을 믿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안으로 뭔가를 역사해 넣으심으로써 자손을 낳을 수 있음을 믿었다.

 

당신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일상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신다고 믿는 믿음을 높이 평가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천지의 주재이신 분으로 믿는 믿음이다. 아마 당신은 그런 믿음을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다. 전번 메시지를 읽은 후에 당신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요 천지의 주재이신 분을 믿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그다지 사랑스럽고 귀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넣어주고 계심과 우리 안에 들어온 것에 의해 하늘에 속한 씨가 태어날 것임을 믿는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한다. 부디 이것이 우리 존재 안에 새겨지기를!


(1) 부르심받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의 두 범주

 

(a) 생존하게 함

 

15장 전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을 보호하시고 물질적인 많은 것들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다(12:16). 아브라함은 롯에게 모든 선택권을 주었으며 네 왕을 이겼다. 그러나 이것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함과는 관계가 없었고 다만 아브라함의 생존과 관계 있었다(12:10, 14:24). 그는 이 모든 것들을 환경 안에서 외적으로 체험했으며 생명 안에서 내적으로 체험하지 않았다.


(b)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게 함

 

당신은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가?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의 형상을 가지고 그분을 표현하며 그분의 권위로 그분을 대표하며 그분의 왕국을 위해 온 땅을 차지하는 사람을 얻는 것이다. 창세기 1장 26절의 서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그분의 형상 안에서 그분을 표현하며 그분의 권위로 그분을 대표하며 그분의 왕국을 위해 온 땅을 차지하는 사람을 얻는 것임을 본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분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축복을 얻고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땅 위에 그분의 왕국을 얻을 수 있는 큰 나라가 될 것을 약속하셨다. 오늘날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그러나 창세기 15장 전에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함과는 관계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아브라함 안으로 뭔가를 역사해 넣으신 것을 보여주는 기록은 15장부터 24장에 있다. 그것은 더이상 환경 안에서의 외적인 체험이 아니라 생명 안에서의 내적인 체험이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아닌, 그들의 생존만을 주의한다.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까지도 아직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의해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주님께서 좋은 직장, 좋은 남편이나 아내, 좋은 교육, 뛰어난 승진을 주시기를 소망한다. 이 모든 것들이 당신을 생존하게 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함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15장 전의 모든 것은 아브라함의 생존을 위해 좋고 도움이 되고 유익하며 인간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하지만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와는 관계가 없다. 아브라함의 상황을 보라.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얻은 육축이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었는가? 여종들이 하나님을 대표할 수 있었는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것을 주셨지만 아무 것도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유용하지 않았다. 생존하는 것과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원칙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동일하다. 우리의 교육과 직업과 집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함에는 합당치 않다.


(2)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두 가지가 필요함

 

(a) 씨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의 시대에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를 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씨이다(15:1-6, 13:16과 22:17-18과 12:2을 보라).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의도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우리가 보았듯이 그분의 목적은 그분 자신을 표현하는 그분의 형상과 그분 자신을 대표하는 그분의 권위를 가진 사람을 얻으시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씨가 없었다. 씨 없이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씨를 필요로하신다. 그분은 그 씨를 통하여 사람들을 얻기 원하신다.

 

1) 아브라함이 소유한 것이 아님

 

아브라함은 우리의 어떠함과 같았으며, 우리는 그의 어떠함과 같다. 자기에게 씨가 필요함을 알았을 때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을 생각했다(15:2-4). 아브라함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나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얻으시기 위해 내게 씨가 필요함을 알았다. 나는 늙었고 내 아내는 기능이 거의 끝났다. 그러니까 그 씨는 내가 이미 소유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미 소유한 것을 결코 사용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여기에 합당치 않다. 당신이 소유한 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에 좋은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당신이 소유한 것은 다만 엘리에셀일 뿐이다. 당신이 소유한 것은 아무 것도 쓸모없다. 우리가 가진 것은 아무 것도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에 유용하지 않다. 우리가 소유한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다메섹에 속한 어떤 것이다.

 

2)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자임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씨는 하나님의 약속이므로 아브라함을 통해 난자이다. 그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씨를 낳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의 안에 역사해 넣으신 자이다(15:4-5). 그렇다면 그 씨는 누구인가? 만일 당신이 창세기 15장과 갈라디아서 3장을 기도하며 읽는다면 당신은 그 씨가 그리스도 자신임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낳을 수 없다. 우리의 교육, 성공, 기술 등은 의미가 없다. 이 모든 것들은 자손이신 그리스도를 낳기 위해 주께서 우리 안에 역사해 넣으신 것이 아닌 엘리에셀일 뿐이다. 그것들 중 아무 것도 주관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의 환경 안에 있는 객관적인 것일 뿐이다.

 

당신의 엘리에셀은 당신의 대학 교육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당신은 교회 생활 안에서도 여전히 당신의 엘리에셀, 곧 대학 교육을 신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다메섹을 통과하며 최소한 하나의 엘리에셀을 취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씨가 될 수 없다. 그 씨는 우리가 취한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역사해 넣으신 어떤 것이어야 한다. 다메섹에서 우리가 취한 것은 모두 그리스도를 낳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역사해 넣으신 것만이 씨이신 그리스도를 낳을 수 있다.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 역사해 들어 오신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계시되었고(갈 1:15-16) 그의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시며(갈 2:20) 그의 안에 그리스도께서 형상을 이루셨으며(갈 4:19) 그에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라고 말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살았다. 다소의 사울이었을 때 그는 유대교라는 다메섹을 통과하며 많은 것을 얻었다. 그 당시에 그가 얻은 모든 것은 엘리에셀이었다. 주님은 바울에게 그 모든 것들-쓰레기와 배설물과 개가 먹는 밥-을 잊어버리고 덮어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이 가진 것들 중 어떤 것도 그리스도를 낳을 수 없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 역사해 넣으신 것만이 그리스도를 낳을 수 있었다. 주님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너의 종교적인 배경에서 네가 얻은 것은 결코 그리스도를 낳을 수 없다. 오직 내가 네 안에 역사해 넣어주는 것만이 그리스도를 낳을 수 있다. 내가 네 안에 역사해 넣어 주는 것은 내 은혜이다.』 결국 바울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여기에서 나는 은혜와 축복의 차이점에 대해 말하고 싶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은혜는 사실상 축복이다. 축복이란 무엇인가? 축복은 번창이요 이익이요 상여금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라는 단어의 형용사형을 사용하여, 『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은혜로우신지!』라고 말하기 좋아한다. 그러나 이것은 은혜의 참된 의미와는 심히 거리가 멀다. 민수기 6장 25절에 있는 「은혜로운」의 히브리어 단어는 「낮은 사람을 다정하게 대하기 위해 자기의 몸을 굽히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왕이 거지에게 무엇을 주기 위해 다정하게 몸을 굽힐 수 있다. 이것이 은혜로움의 의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은혜는 오직 하나님 자신이다. 성경에서 은혜는 다만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누림이 되신 하나님 자신이다. 요한복음 1장 17절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하며 요한복음 1장 16절은,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말한다.

 

축복은 우리의 생존을 위한 것이지만 은혜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하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직장과 건강과 우리의 육신의 생명까지도 잃었을 것이다.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 온전히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생존하는 것뿐이라면 헛되고 헛되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다만 여기에서 생존을 위해 돈을 벌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헛되고 헛되다. 모든 자동차와 집과 학위와 직장이 헛되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이 있습니다. 아들들은 의사이고 딸들은 교수입니다. 이 어떠한 축복인지!』

 

만일 당신의 생존이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이것들은 당신과 당신의 가족이 헛되고 헛된 것들 안에 살기 위한 축복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오 년 전에 나는 겨우 매년 오천 달러를 벌었는데 작년에 나는 이만 오천 달러를 벌었습니다. 이 어떠한 축복입니까!』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하지 않는다면 이것 또한 헛되고 헛된 것들 안에 살기 위한 축복이다.

 

최근 어느 날 아침에 주님은 나를 일찍 일어나게 하셔서 한 가지를 보여 주셨다. 그것은 신약의 책들 중 어느 책도 『축복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또는 『축복이 네 영에 있을찌어다』라는 말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서신이,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라는 말로 끝난다(갈 6:18, 엡 6:24, 빌 4:23, 골 4:18). 『축복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물질적인 것들이 번창하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축복으로 가득한 육신이 되었다거나 축복이 그리스도와 함께 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책도, 『축복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라는 말로 끝나지 않는다.

 

구약에는 주로 축복이 있지만 신약에서는 물질적인 축복이 즉시 영적인 축복으로 대치된다. 에베소서 1장 3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영적인 축복으로 축복하셨다고 말하며, 에베소서의 마지막 구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라고 말한다. 성경 전체의 마지막 구절 또한 은혜를 말한다. 계시록 22장 21절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요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축복이 너희 모두에게 있을찌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다. 그 구절은 다만,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라고 말한다.

 

당신은 민수기 6장 24절부터 26절에서,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준 축복을 기억하는가? 그것은 이와 같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반대로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에 있는 바울의 축복은 또 다른 범주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반복하거니와 축복은 우리의 생존을 위한 것이고, 은혜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3) 하나님의 약속과 의로 여기신 바 된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의 제의를 거절하신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기에게서 난 자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늘의 뭇별처럼 많이 얻을 수 있도록 그를 위해 어떤 일을 하겠다고 약속하셨다(15:5). 아브라함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분을 믿었으며 주님은 그 믿음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다(15:6).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곧 그 자손을 낳기 위해 우리 안으로 역사해 들어오실 것을 믿는 믿음이었다. 이 믿음이 하나님께 귀한 것이며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우리의 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믿음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축복을 주의하고 은혜를 별로 주의하지 않는다. 지금은 신약 시대이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를 주의하지 않고 축복만을 주의함으로써 여전히 구약 시대에 살고 있다. 주의 회복 안에서 우리에게는 축복이 필요하다. 우리가 항상 함께 모이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네가 소유한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네가 할 수 있고 앞으로 할 일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네 안에 뭔가를 넣어줄 것이며 그것이 자손을 낳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믿는다면 이런 믿음은 하나님께 귀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고 믿는 그런 믿음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씨이신 그리스도를 낳기 위해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넣어 주고 계심을 믿는 그런 믿음이다.


(b) 땅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두번째 것은 땅이다(15:17-21, 12장 7절과 13장 14절-15절과 17절과 17장 8절을 보라).

 

1) 땅의 정의

 

땅은 무엇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적인 죽음을 요단강으로 간주하고 땅을 하늘나라로 간주한다. 이런 관념은 전혀 성경의 합당한 이해에 따른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시대에 땅은 그가 살 수 있는 장소였다. 아브라함은 그 안에, 그 위에 살아갈 장소가 필요했다. 따라서 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안에서, 그 위에 살아갈 장소였다. 더우기 아브라함의 시대에 땅은 하나님이 그분의 왕국을 땅에 세울 수 있도록 아브라함이 그의 모든 대적을 멸할 수 있었던 장소였다. 더 나아가서 땅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표현인 거처를 가질 수 있는 장소였다.

 

그러므로 여기에 땅에 관한 다섯 요점이 있다. 첫째로 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장소이며, 둘째로 그들이 그 위에서 살아가는 장소이며, 세째로 하나님의 대적이 망할 수 있는 장소이며, 네째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수 있는 장소이며, 다섯째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표현을 위해 거처를 소유하실 수 있는 장소이다. 결국 땅 안에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졌고 하나님의 거처인 성전이 건축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함의 축소판이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생존과는 전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아브라함이 생존하는 것과 그가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를 위해 씨와 땅을 얻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오늘날 우리의 땅은 무엇인가? 의심할 것 없이 땅은, 우리 안에 살고 계시며 또한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와 그리스도 위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씨로서 그들 안에 들어오시는 것을 주의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땅이신 그리스도 안에 사는 생활을 주의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들이 그 안에와 그 위에 마땅히 살아야 할 땅이 아니다.

 

또한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들이 모든 대적을 멸해야 할 땅이 아니다. 어디에서 우리는 우리의 대적을 멸할 수 있는가? 우리의 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의 그돌라오멜과 다른 왕들을 죽이는 바로 그 장소이다. 그리스도는 또한 하나님의 거처가 건축될 수 있는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땅이다.

 

만일 이것을 보았다면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축복만을 구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표적에서 빗나갔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생존이나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그처럼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보살피도록 해야 한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떠나시거나 거절하지 않으실 것이다(히 13:5).

 

하나님의 목적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과 우리의 할 수 있음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가진 것은 엘리에셀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스마엘이다.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이 가진 것이었고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들 중 아무 것도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함에 있어서 인정되지 않았다.

 

우리가 가진 것과 우리의 할 수 있음은 인정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하나님 자신이어야 한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우리가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닐 때,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 안에 넣어 주실 것이며, 우리 안에 들어오신 그분은 씨이신 그리스도를 낳을 것이며 우리를 땅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씨가 되셔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살아가는 땅이 되어야 한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가? 그렇다. 그러나 그분이 씨가 되셔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가?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땅이신 그분 안에 살아야 한다.

 

오늘날 땅은 또한 교회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확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확장이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살며 그리스도 위에서 산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대적을 멸한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처가 있는 하나님의 왕국을 가진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교회 안에 올 때 즉시 집에 왔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방랑하지 않고 우리가 그 안에 살고 그 위에 살 수 있는 곳을 얻었으며 우리의 모든 대적을 멸할 수 있고 하나님의 거처가 있는 하나님의 왕국을 가질 수 있는 곳을 얻었다.

 

교회 안에 오기 전에 우리에게는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없었지만 교회 안에 온 후에 우리의 생활에는 얼마나 많은 적극적인 변화가 생겼는지! 교회 안에 오기 전에는 우리의 대적을 멸하기가 어려웠지만 교회 안에 온 후에는 매우 쉬워졌다. 그돌라오멜은 교회를 두려워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모든 대적을 멸할 수 있는가? 가나안 안에서이다. 오늘날의 가나안은 무엇인가? 그것은 확대된 그리스도이신 교회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거처가 있는 하나님의 왕국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 또한 교회 안에 있다. 확대된 그리스도이신 교회는 오늘날 우리의 좋은땅이다.

 

씨와 땅이 모두 그리스도이다. 씨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며 땅은 우리가 그 안에 사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씨로 사시며 우리는 땅이신 그분 안에 산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씨와 땅이다.

 

2) 하나님의 약속과 아브라함의 부족한 믿음

 

이 장에서 하나님은 씨에 관한 그분의 약속을 반복하셨을 뿐 아니라 땅에 관해서도 약속하셨다. 씨에 관한 약속은 초반부의 여섯 구절에서 충분히 다루어졌다. 아브라함은 씨에 관한 약속에 있어서 주님을 믿었다. 7절에서 하나님은 땅에 관한 약속을 확정적으로 주셨으나 아브라함은 이 약속에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부족했다.

 

이것에 의해 우리는 씨에 관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땅에 관해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쉬움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땅이신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보다 씨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살도록 하는 것이 더 쉽다.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사시는 씨로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처가 있는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교회 생활을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땅으로 취하는 것보다 쉽다. 이 면에 있어서 아브라함은 우리처럼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땅에 관한 그분의 약속을 확증하기 위하여 그와 언약을 세우셔야 했다. 다음 메시지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우신 언약에 관한 자세한 사항들을 볼 것이다.


위트니스 리
[창세기 라이프 스타디 Ⅱ, "창세기 44",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