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안에 있는 생명―열국에 의해 상징된 종파 안의 문제
교회
Eugene , 2012-05-23 , 조회수 (2425) , 추천 (0) , 스크랩 (0)

지난 두 메시지에서 우리는 주로 노아의 역사를 보았다. 이들 메시지에서 방주가 노아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져 물을 통과하고 노아를 안내하여 그의 가족을 새로운 시대로 이끌었는가를 우리는 보았다.

 

예표론에 따라서 그 당시 노아와 그의 가족은 부활 안에 살았다. 이러한 생활은 교회 생활의 그림자였다. 부활 안에 있는 교회 생활의 이런 그림자는 교회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고,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한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을 다시 갖는가를 계시한다. 더욱이, 이 그림자는 교회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 아래 살고 있는가를 보여 준다. 우리는 그들을 언약을 가진 사람들이라 부를 수 있다. 그들이 한 것은 다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고 축복으로 충만하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교회 생활의 그림자에도 실패가 있었음을 보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대리 권위자였던 노아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실패케 했기 때문이다. 그 실패 때문에 어떤 것들이 노출되었다. 어떤이는 축복을 받았고 다른이들은 저주를 받았다.


h. 열국에 의해 상징된 종파 안의 문제

 

이 메시지에서는 교회 생활의 유쾌하지 않은 면도 고려해 보자. 교회 역사에는 영광스러운 면도 있으나 또한 수치스러운 면, 불쾌한 면도 있다. 우리는 이 불쾌한 면을 볼 필요가 있다.

 

홍수 후 노아와 그의 가족은 새로운 시작을 가졌다. 그들 사이에는 참된 하나가 있었다. 그들은 모든 점에서 하나였다.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였다. 부활 안에 있는 사람들로서(예표론에서 숫자 여덟(8)은 부활을 나타낸다) 이들 여덟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였다. 그들은 한 하나님을 경배했다. 둘째로 그들은 오직 한 목표를 가졌다. 그것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태초에 하나님이 가지셨던 그 목표로 되돌려졌다. 태초에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의 형상을 가지고 그분을 표현하며 그분의 권위를 가지고 그분을 대표할 것을 목적하셨다. 홍수 후에 새로운 인류가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는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으로 되돌아갔다. 세째로, 이들 여덟 사람들은 의견이나 언어나 개념이나 이해에 있어서 하나였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것을 말했다. 그들은 모두 진실로 하나였다.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그 결과 분열이 있었다. 그들은 가족들과 세대들로 나누어졌을 뿐만 아니라 나라들로 나누어졌다. 한 나라는 어떤 사람이 소위 머리로서의 권위를 행사하는 왕국이요 제국이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에게 권위를 행사할 때마다 그것은 제국이요 국가이다. 부활 안에서 삶의 새로운 시대를 시작할 때에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참된 머리였던 오직 하나의 대리 머리인 노아만 있었다. 그것은 온전한 하나였다. 그러나 결국 노아의 후손들은 가족들로, 국가들로 나누어졌다. 그것은 비극이었다.

 

우리가 지난 메시지에서 여러 번 지적해 냈듯이 모든 것을 포함한 책인 창세기는 씨앗들의 책이다. 전 성경에 계시된 거의 모든 것이 이 책 안에 씨로 심겨졌다. 이 씨앗들은 창세기에 심겨져 성경의 남은 책들에서 발전하여 계시록에서 수확을 거두게 된다. 이것은 또한 분열의 씨앗에도 적용된다. 창세기 10장에 보여진 분열의 씨앗은 신약의 서신들에서 자라 계시록에서 수확을 거둔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있는 이러한 분열의 씨앗을 고려해 볼 시간을 갖기로 하자.


(1) 원래는 하나였음

 

원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였다. 왜 그들은 하나였는가? 가족의 성원이 함께 거했기 때문에 하나였지만 그들의 하나의 주요 요인은 그들의 한 분 하나님이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한 분 하나님을 경배했다. 이 유일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 안에 보존하는 주요 요소이다.

 

노아의 가족은 한 분 유일한 하나님을 경배했으므로 하나였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는 중요하다.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바뀌어질 때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전 상황이 또한 바뀐다.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다양한 경배가 있을 때 그들 사이에 분열이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인류의 하나를 보존하는 주요 요인은 그들이 한 분 곧 참되신 하나님 외에 어떤 하나님도 갖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유일한 한 분 하나님이 계신다. 우리는 유일한 하나님을 경배한다.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더우기 우리 또한 하나이다. 에베소서 4장 6절은 한 분 하나님과 아버지를 말한다. 우리는 유일한 하나님과 아버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이미 언급했듯이 노아와 그의 가족은 하나의 유일한 목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였다. 노아와 그의 아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관심을 위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목표를 위해 있었다. 하나님의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의 목표는 사람이 그분을 표현하고 그분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하나님을 제외한 다른 목표를 갖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농장이나 교육이나 상업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표는 그들 자신의 관심이 아니었다. 그들의 유일한 목표는 하나님을 표현하고 그분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에 깊이 감동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한 분 하나님이 계시지만 우리는 다른 목표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분열될 것이다. 당신의 목표는 무엇인가? 자신의 명성을 얻고 유명하게 되는 것인가? 하나님의 목적을 제쳐 두고 다른 어떤 것을 건축하는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해 이곳 아나하임에 있다. 우리 지방 교회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과 함께 하나로 서 있다는 것을 온 우주에, 심지어 사탄과 반역한 천사들, 국가들, 권력들과 귀신들에게 선포할 강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유일한 목표는 우리의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표현하기 위해 이곳에 있다.

 

나는 우리 집회를 방문한 몇몇 새로운 사람들에게 몇 마디 말하고 싶다. 여러분은 우리가 여기에서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아는가? 우리는 총명한 사람들도 아니고 옷 잘 입은 사람들도 아니다. 인도하는 자들에게도 어떤 아름다운 것이나 형식이나 흠모할 만한 것이 없다. 우리에게는 그랜드 피아노나 파이프 오르간도 없다. 우리에게는 어떤 표시물조차도 없다.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는 다만 광야의 소리이다(요 1:23). 여러분은 우리의 집회에 올 때 외적으로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그러나 여러분이 보는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 자신만이 표현된다. 아마 집회에 참석한 당신은 이상함을 느끼며,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은 매우 좋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똑같이 할 수 없다. 이들의 노래는 그리 음악적이지 않다. 어떤 사람도 매력적으로 입지는 않았다. 외모의 아름다움이나 모양은 없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어떤 것인가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바로 이 「어떤 것」이 하나님의 표현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표현이시다. 그분이 우리의 모양이요, 아름다움이며, 매력이다. 교회인 우리는 그분이 태초에 가지고 계셨던 목적, 즉 사람이 그분을 표현하고 대표하는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으로 되돌아왔다. 이것이 주님의 회복이다.

 

교회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대표한다. 이것이 많은 때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이다. 『주여, 우리는 당신께 요구합니다. 당신은 역사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아닌 당신을 대표하며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대표이므로,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 역사하셔야 합니다.』

 

당신은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가? 당신은 감히 이런 방식으로 기도하는가? 당신이 하나님을 대표하는 위치에 서 있지 않다면 당신의 양심은 그런 기도를 하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을 대표하는 위치에 서 있다면, 당신의 양심은 확신을 가지고 강하게 말할 수 있다. 『주님, 우리는 당신께 요구합니다. 당신의 길을 당신이 옹호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당신의 회복이요 당신의 목적입니다. 당신이 중재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당신을 제외한 어떤 것도 대표하고 있지 않으므로, 주여, 당신이 오셔야 합니다.』

 

이것이 합당한 교회 생활이다. 우리가 이러하다면 우리는 유일한 하나를 가진다. 우리는 오직 하나이다. 『형제들, 하나 되십시오.』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필요가 있다면, 그 때는 이미 너무 늦어서 하나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는 태초의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으로 되돌아가는 한 우리는 자연히 하나이다. 우리는 한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이다.


(2) 결국에는 나뉨

 

그러면 사람들은 왜 분열되는가? 그들은 다양한 경배를 가지기 시작했고 다른 목적과 관심과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분열되었다. 창세기 10장 31절은 사람들이 나누어지는 네 가지 길-그들의 가족에 따라서, 그들의 언어 즉 그들의 다른 말과 개념과 이해와 어조에 따라서, 각기 다른 땅에 따라서, 그들의 다양한 민족에 따라서-을 계시한다. 이 네 항목에 대해 조금더 말하고 싶다.

 

가족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그것은 육신의 관계를 나타낸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표와 하나님의 유익을 관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그들의 가족만을 관심한다. 왜 그들이 그들의 가족과 하나인가? 그들의 가족이 그들의 친척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원칙은 오늘날 주님의 백성들 사이에서도 똑같다. 육신적인 관계로 인해 많은 분열들이 있어왔다. 모든 육신적인 관계가 분열의 출발이다. 비록 우리가 육신적으로 한가족 안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육신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아마 당신은 어떤 형제를 사랑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당신이 사랑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만일 당신이 사랑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당신들은 육에 속한 가정, 육에 속한 취미에 따라 형성된 관계이다. 그러므로 참된 하나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육에 속한 관계를 극복해야 한다.

 

또 다른 분열의 원인은 언어이다. 언어는 말을 의미할 뿐 아니라 당신이 이해한 것을 언급하는 것도 의미한다. 언어는 당신의 관념의 표현이다. 우리의 다른 이해나 관념으로 인해 분열이 야기될 수도 있다. 당신이 하나의 관념을 붙잡고, 나는 또다른 관념을, 세번째 사람도 여전히 또다른 관념을 붙든다면 결국 우리 셋은 다른 언어를 구사하게 된다. 비록 우리 모두가 영어를 말하더라도 우리는 각각 자신의 방법대로 말하고 자신의 언어로 말한다. 이것이 싸움을 낳고 분열로 이끈다.

 

우리는 우리 육신에 속한 관심 때문에 가족들을 가지며, 다른 관념과 어조 때문에 언어를 갖는다. 이들 다른 어조들은 싸움을 낳고 싸움은 분열을 낳는다. 그리스도인의 역사를 보라. 처음에는 많은 성도들이 절대적으로 하나였다. 그러나 어느 날 이 성도들 중 몇이 다른 관념을 붙잡고 달리 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른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혼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역대의 기독교 안에 있었던 분열의 역사이다. 언어는 참으로 분열의 요인이다.

 

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땅은 영역들을 나타낸다. 내가 젊었을 때 나의 지역에 와서 똑같은 주님, 동일한 복음을 전파했던 선교사들이 회의를 열어서 그들 가운데 있는 그 지역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었다. 그들은 어떤 지역은 남침례교에 속했고, 다른 지역은 장로교에, 또 다른 지역은 공개파 형제회 등등에 속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 나라를 넷 혹은 다섯 영역으로 나누었다. 그들은 이점에 관해서 엄격하였고 그들의 영역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는, 『왜 당신은 전파하러 우리 영역에 오십니까? 우리가 이 나라를 몇 영역으로 나누는 데 동의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라고 했다.

 

주님은 우리를 이끌어 미국에서 교회의 지방 입장 문제를 해방하도록 하셨다. 십 년 전 교회의 지방 입장은 강하게 반대를 받았다. 지금 그것은 시장에서 잘 팔리는 상품이 되었다. 사람들은 지방 교회를 말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그들이 그들의 지방에서 지방 교회라고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매우 많은 그룹들이 지방 교회들이 된 것이 아니라 지방 종파들이 되었다. 몇몇은 우리에게, 『우리는 이곳의 지방 교회이다. 우리를 귀찮게 하려고 오지 말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도 말한다. 『우리는 이곳의 지방 교회이며 자치권을 가지고 있다.』 이 자치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을 위해 땅을 나누는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간섭하지 맡라. 우리는 이곳의 지방 교회이다.』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눈에는 그들은 지방 교회가 아니라 지방 종파이다.

 

오늘날 분열적인 사람들은 분열적인 것에 대해 어떤 변명을 사용할 것이다. 그렇다. 모든 지방 교회들은 지방적으로 독립적이다. 그러나 우주적으로 그들은 한 몸이다. 우리는 많은 지방 교회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많은 몸들이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일천 개의 지방 교회들이 있다 할지라도 우주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은 여전히 하나이다. 그리스도는 한 몸 이상 갖지 않으신다. 만일 이곳 아나하임에 있는 형제들이, 그들은 아나하임 교회이므로 다른이들이 그들을 귀찮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선포한다면 그들은 즉시 지방 종파가 된다. 그들은 땅을 분할한 것이다.

 

오십 개의 주(州)로 구성된 국가인 미국의 예를 들겠다. 이들 오십 개 주들은 땅을 나누지 않았다. 우리는 한 주에서 다른 주로 여행할 수 있다. 당신은 오늘 캘리포니아 시민이 될 수 있고 내일은 오레곤 주의 시민이 될 수 있다. 잠시 후 당신이 아리조나 주로 이사하면 그곳 시민이 될 수 있다. 미국은 오십 개의 주로 구성되었지만 오십 개의 땅으로 나누어진 것은 아니다.

 

일단 당신이 육신에 속한 가정이 될 때 당신은 의견 있는 언어를 가질 것이고 그 땅을 나누는 분열적 길을 가질 것이다. 결국 당신은 나라가 될 것이다. 영어의 종파(denomination)라는 말이 나라(nation)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 있다. 예표론에서는 그것이 열국이고 기독교에서는 그것이 종파이다. 종파는 종파로 명명된 것을 의미한다. 예표로는 이디오피아, 애굽, 스바 등과 같은 열국이 있다. 기독교 안에는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등과 같은 종파들이 있다. 이들 모든 것이 열국이요 종파들이다. 모든 것이 분열되었다.

 

내가 구원받았을 때에는 모든 목사들과 성직자들이 종파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때 주님이 우리를 일으켜 종파들을 정죄하도록 하셨다. 그러자 목사들과 성직자들은 이 용어를 사용하기를 멈추었다. 비록 그들이 종파라는 용어를 더이상 사용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다른 이름들을 붙들고 있다. 모든 이름이 분열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모든 종파, 모든 이름이 분열이다.

 

우리의 이름을 「지방 교회」라고 말하지 말라. 우리는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달(moon)에는 어떤 이름이 없다. 그것은 그저 달이다. 우리는 단지 달을 「달」이라고 불러야 한다. 어떤이들은 미국달이 중국 달보다 더 밝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달이나 중국달 같은 그런 것은 없다. 당신이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것은 미국에 있는 달, 중국에 있는 달이다. 그것은 하나의 달이다. 오직 유일한 하나의 달이 있다.

 

이처럼 교회는 단지 교회이다. 「지방 교회」라는 용어는 우리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분열적이지 않고, 소위 교회들로 나누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어떤 지방에 있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지방 교회」라는 용어는 우리의 본성을 나타낼 뿐 우리의 이름이 아니다. 「지방 교회」를 이름으로 생각지 말라. 당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어떤 지방에 있는 교회, 즉 로스앤젤리스 교회, 아나하임 교회 등과 같은 것이다.

 

한 가족 안에는 왕이 없다. 가족의 머리는 왕이 아니다. 당신이 의견과 표현에 있어서 다를 때에도 당신은 왕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당신이 땅을 나눌 때에도 왕은 없다. 그러나 일단 당신이 종파로 명명되고 나라가 되면 당신은 왕을 얻게 되고 즉시 분열된다. 원래 하나는 한 하나님과 한 목적에 근거를 두며, 분열은 많은 다른 경배들, 심지어는 다른 관심과 목표들을 가진 다른 대상을 경배하는 것 때문에 생긴다. 결국 가족들이 형성되고 언어가 표현되고, 땅이 영역, 열국으로 나누어지거나 종파라 불리는 것들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는 분열이었다. 당신이 기독교 역사를 고찰해 본다면 정확히 이런 방식으로 나뉘어졌다.

 

1930년대에 나는 이런 종파 문제에 관해 많이 말했다. 어느 날 잠시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 나의 몇몇 친구들은 나를 잘 알고 있는 많은 나이 든 기독교 지도자들과의 연회에 나를 초대했다. 그곳에 있었을 때 서른 살이 조금 넘은 나는 모두 육십 세 이상 되는 노인들에게 둘러싸인 것을 알았다. 그들 중 한분이 말을 시작하며 나에게, 『이 선생님, 과거에 당신은 설교 중에 종파를 정죄했습니다. 당신이 종파를 거스린 설교를 하여 당신 자신이 또 하나의 종파를 형성한 이유를 말해주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들은 나를 이미 패배시켰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답했다. 『여러분 모두와 이곳에 함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나로서는 모든 문제를 명확히할 최적의 시기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나는 게바에게 속했다」고 말한 것을 꾸짖었습니다. 심지어 어떤이는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이러한 모든 분열적인 사람들을 꾸짖었읍니다(고전 1:11-13). 여러분 모두는 자신이 침례교나 장로교나 중국 독립 교회파 등 어느 하나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양심에서 나에게 말해 주십시오. 사도 바울이 여기에 있다면 여러분은 사도 바울에게 인정받을 것 같습니까?』

 

그들은, 『아닙니다. 물론 바울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정직했다. 내가 그들을 이미 압도했기 때문에 그들은 정직해야만 했다. 그때 나는 계속했다. 『「나는 침례교인이다」, 아니면 「나는 장로교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동의하셨으면 여러분은 나를 어디에 두시겠습니까? 여러분은 나를 장로교에 두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침례교나 중국 독립 교회에 두시겠습니까?』 그들은, 『우리는 당신을 어느 곳에도 두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나를 어느 곳엔가 두셔야 합니다. 내가 어느 곳엔가 머물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자 나는 계속했다. 『주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나는 분명히 그분을 사랑합니다. 내가 그분을 사랑하므로 나는 믿지 않는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나의 전파를 통해 많은 사람이 구원받았습니다. 내가 그들을 어디에 둘까요? 어느 종파로 내가 그들을 보내야 하겠습니까? 침례교입니까? 장로교입니까? 아니면 중국 독립 교회입니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말했다. 『상황을 보십시오. 이제 왜 내가 한편으로 분열을 거스려 전파하는지, 다른 한편으로 내가 또 하나의 분열을 형성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함께 올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여러분과 하나 되게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분과 하나가 아닌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내일부터 여러분의 모든 간판을 내려 놓고 여러분의 다른 모든 이름들을 잊어버리기로 약속한다면 나는 오늘 저녁 모든 형제들과 교통하여 즉시 우리의 집회소 문을 닫을 것을 여러분과 약속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도시에서 한 교회로 함께 모일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지점에서 그들은, 『안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결론을 맺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않고 있으니 분열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날 밤부터 내가 중국 대륙을 떠나던 날까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다시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들은 하늘에 속한 법정에서의 입장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그들의 분열적이고 종파적인 이름들을 유지하기 원했다. 몇 사람은 『우리는 중국 독립 교회 파입니다. 어느 것도 이것보다 좋지 않습니다.』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는 삼대째 장로교인들입니다. 어떻게 이 이름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몇몇 다른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침례교인들입니다. 침례교는 장로교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장로교는 세례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침례를 줍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싸움을 아주 잘 안다.

 

우리가 대만 섬에 왔을 때 주님은 사역을 축복하셨다. 우리는 오백 명이 못 되던 숫자에서 이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1957년 대북에서 이십 일간 집회하면서 나는 하나의 입장에 관해 최소한 서른 메시지들을 전했다. 그 열흘 후 모든 장로들은 우리가 대북 시에서 몇몇 지도적인 자유 그룹들을 접촉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곳에는 비분파, 비종파를 주장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집회하는 것만을 주장하는 자유 그룹들이 최소한 두세 개 있었다.

 

처음에 우리는 성도들 사이의 하나에 관해 그들과 철저한 대화를 하려고 이들 그룹들을 방문하도록 두세 명의 장로들을 보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인도자들 중 몇을 우리와 만날 수 있도록 보내줄 것을 각 그룹들에 청했다. 모두가 함께 왔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님들, 아마 여러분은 우리가 여러분들보다 숫자면에서 훨씬 크므로 책략을 써서 상황을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안심하십시오. 우리는 여러분과 대화할 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회복을 위하여, 몸의 참된 하나를 관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장로직을 물러나 여러 형제들이 장로가 되는 것을 허락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든 집회소의 모든 권리들을 내려놓고 여러분의 손 안에 두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모든 성도들이 여러분과 하나 되고 여러분 모두에게 복종하도록 하는 집회를 갖겠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약속하며, 그 내용을 서류로 작성하여 거기에 서명까지 하겠습니다.』

 

그들은 즉시 속박감을 느꼈다. 그리고 말했다. 『형제님들, 우리는 여러분의 신실함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우리끼리 있기를 원합니다.』 각 그룹의 장로들이 같은 것을 말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들이 하나 되기를 원치 않는 것을 알았다. 왜 그들은 기꺼이 하나 되려 하지 않는가? 그들은 자신의 작은 제국, 그들 자신의 작은 나라를 갖기를 즐기기 때문이다.

 

일차 대전 후 미국의 월슨과 영국과 프랑스의 지도자들은 세계 각국을 연합하려는 시도에서 국제 연맹을 형성했다. 그것은 끝내 실패했다. 그리고 이차 대전 후 루즈벨트 대통령과 다른 세계 지도자들은 국제 연합(U.N.)을 형성하기 위해 일했다. 하지만 각국은 참으로 연합되었는가? 그들은 전쟁에서는 참으로 연합했다. 원칙적으로 동일한 일이 나의 고향에서 오십 년 전에 일어났다. 나는 구원받은 직후 나의 목사를 보러 가서 왜 그리스도인들이 그처럼 나누어졌는지를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오, 너는 격려받아야 한다. 내가 너를 위해 몇 가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 도시의 모든 종파들이 연합되려고 하고 있단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동일한 목사님이 나에게, 그들이 연합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더 분열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연합을 목적으로 개최된 회의에서 그들은 서로를 거스려 싸우고 있었다. 만일 당신이 나를 믿지 않는다면 종파의 모든 지도자들이 함께 모일 때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라. 그들 모두는 다른 것을 언급할 것이다. 그들은 모두 영어를 말할지 모르나 모두 다른 개념을 갖고 이야기할 것이다. 당신은 그들 사이의 분열을 볼 것이다.

 

분열되어 달리 말하는 것은 저주이다. 만일 당신이 분열된다면 먼저 저주를 경험할 것이다. 당신이 달리 말한다면 당신의 영이 먼저 죽게 될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당신은 교회를 손상시킬 것이다. 그러나 당신 자신이 가장 큰 손실을 겪을 것이다. 분열되어 달리 말하는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저주이다. 지난 오십 오년 동안 내가 지켜보고 관찰한 바로는 분쟁자 중 한 사람도 손실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분쟁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한 분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가? 우리에게 한 권의 성경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한 주를 믿고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한 하나님, 한 성경, 한 주가 있으므로 다른 모든 관념들을 내려놓고 주님의 관심을 위해 같은 것을 말하자. 이것이 사도 바울이 우리 모두에게, 『같은 것을 말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의견으로 조율되라』고 훈계했던 이유이다(고전 1:10, 헬라어 참조).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다른이를 향해 하나되는 것, 즉 한 생각과 한 입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름 15:5-6).

 

주님의 회복 안에서 내가 이 나라에서 사역한 첫 해에 나는 텍사스 주의 타일러에 초대받았다.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다른 의견들을 붙잡고 있음을 알았으므로 매우 조심했고 주의했다. 나는,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크게 외치거나 말하지 않았다. 몇몇이 기도하고 있었을 때 나는 거기에 않아 조용히, 『아멘, 주여.』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도 내 소리를 들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결국 누군가가 말했다. 『이 형제님, 아마 당신은 이곳 관습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아멘」이라는 것을 듣는 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나는 조용한 아멘 소리도 멈추었다. 나중에 몇 사람이 나에게 와서 말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예배에서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습니다.』

 

수년 전에 소위 웨슬레 교회들 중 몇 곳에서는 「아멘 코너 (Amen Corner)」를 두고 아멘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은 다 거기에 앉게 했다. 우리는 아멘이라고 말하는 그러한 일들로 인해 마음 상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아멘을 하든 하지 않든, 아멘을 크게 하든 조용히 하든 우리에게는 문제가 없어야 한다.

 

침례에 관해서도 많은 논쟁이 있다. 어떤 사람은 물을 살짝 뿌리는 것이 바른 방식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오직 물에 잠기는 것만이 성경적이라고 말한다. 어떤이는 사람들을 앞으로 물에 잠그는 것을 고집하고, 다른이들은 뒤로 잠그는 것을 고집한다. 어떤 사람은 단 한 번 잠그는 것을, 어떤 사람은 세 번 잠그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사용되는 물의 종류에 관해서도 논쟁한다. 물이 뜨거워야 한다든지 차가워야 한다든지, 소금기가 있어야 한다든지 없어야 한다든지, 사람이 만든 탕에서 해야 한다든가 아니면 자연 호수나 강이나 바다에서 해야 한다는 등 분분하다. 많은 다른 의견들이 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로 인해 나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한 분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아들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구주로 성육신되어 오셨고 우리의 구속을 위해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지금은 하늘에 계신 주이시며 우리 안에 생명 되심을 믿고 있다면, 우리는 모두 하나 되어야 하며 어떤 것으로도 나누어지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과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실행하도록 이끄신 후에 몇몇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에서 우리를 반대하기 시작했다. 어떤이들은 우리를 비난했고 다른 이들은 이 두 가지 때문에 악하게 우리를 정죄하기조차 했다. 기도로 말씀을 읽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자신의 생활을 변화시킨다면 나는 그것을 좋아한다. 극장에 가거나 스포츠 활동에 참여하는 것보다는 만 배나 더 좋다. 그것은 록(rock) 음악보다 훨씬더 좋다.

 

삼일 하나님에 관해, 성경에 따라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이 삼일 하나님 곧 아버지·아들·성령이심을 믿는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믿는다. 하지만 어떤이들은 삼일성을 묘사할 때 그들의 관념을 따라서 『아버지, 아들,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의 본성 안에 있는 세가지 다른 인격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 한 하나님이란 무엇인가? 그분은 인격이 아니신가? 아버지가 인격이고, 아들이 인격이고, 성령이 인격이듯 하나님 자신도 인격이셔야만 한다. 만일 그렇다면 한 분 하나님 안에 네 인격이 있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전문 용어로 삼일성을 이야기하면 문제가 발생되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혼돈되게 한다. 우리는 그것에 몰두해서는 안 된다. 로마서 강해로 유명한 그리피스 토마스는 「신학의 원칙」을 말하면서, 『「인격」이라는 용어는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삼신론(三神論)에 빠진다. 삼일성의 진리와 체험은 신학적인 용어에 달린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삼일성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비밀이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적절히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성경에 따라 한 분 유일한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이 아버지·아들·성령이신 삼이일(三而一)이심을 말할 수 있다.

 

이사야 9장 6절은 아들이 아버지라고 말하고,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은 주님이 그 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단지 성경이 말하는 것을 모두 믿는다. 우리는 더이상 무엇도 말할 수 없다. 「한 분 하나님의 본성 안에서」 세 개의 다른 인격들이라는 관념을 붙잡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형제들이지만 그들의 의견과 신학 용어로 인해 분열적이다. 비록 그들이 그런 관념을 붙잡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한 분 삼일 하나님이신 아버지·아들·성령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구주가 되기 위해 성육신 되어 오시고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여 지금은 하늘에서 주이시며 또한 우리 안의 생명이신 주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로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순수한 성경의 말씀에 따라 삼일성을 믿는다. 우리는 분열적인 신학 관념들이나 신학 용어들을 붙들고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회복 안에서 몸의 하나를 위해 여기에 있다. 분열은 저주를 가져오지만 하나는 축복을 가져온다. 『형제들이 하나 안에 동거함이 얼마나 선하고 즐거운가 거기서 주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원한 생명이라』(시 133:1,3).


i. 바벨에 의해 상징된 바벨론으로 완성됨

 

열국에서 바벨이 일어났다. 이것은 종파 가운데서 바벨론이 나온 것을 상징해 준다. 모든 분열과 종파가 큰 바벨론에서 완성될 것이다. 바벨론(Babylon)은 히브리어 바벨(Babel)과 같은 헬라어 단어이다. 만일 당신이 신약을 읽는다면 기독교의 분열들, 즉 모든 종파들 중에서 바벨론이 나왔음을 볼 수 있다. 고대에 모든 국가들은 바벨을 산출했고 기독교 안의 모든 종파들은 결국 큰 바벨론으로 완성될 것이다. 다시 한번 우리는 창세기가 씨앗의 책임을 본다. 왜냐하면 이곳 창세기 10장에 바벨론의 씨가 있고 계시록 17장, 18장에 큰 바벨론의 수확이 있기 때문이다.


(1) 저주의 노선으로부터

 

바벨은 저주의 노선에 있는 국가들로부터 나왔다(10:6,8). 저주받은 노선은 함이었다. 바벨의 건축자인 구스는 함의 아들이었고, 구스의 아들 니므롯은 바벨 왕국의 첫 왕이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의 예표이다. 기독교는 열국들로 아주 잘 예표되고 있다. 열국들 가운데 바벨은 저주받은 노선에서 나왔다. 저주 중의 저주가 무엇인가? 반역이다. 함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스르는 그의 반역으로 인해 저주받았다. 신성한 통치를 거스른 함의 반역으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 아래 함의 후예들은 그의 사탄의 조직인 바벨을 세우는 데 사탄에 의해 이용되었다. 오늘날 동일한 것이 적용된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통치를 관심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왕국만을 관심하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건축되어 왔다.

 

로마 카톨릭교를 포함한 모든 종파 속에도 참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주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존재하고 있는 종파의 조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다. 종파의 조직들은 합당한 교회 생활의 하나님의 경륜을 파괴시키고 사탄의 조직을 세우기 위해 사탄에 의해 이용되어 왔다. 종파들 속에나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 있는 모든 믿는이들은 그들이 어디에 있다 하더라도 구원은 받았으나 그 체계, 그 악한 조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


(2) 바벨의 첫 왕으로 우상을 가져온 니므롯

 

성경에 따르면 니므롯은 우상에 속한 많은 것들을 가져온 바벨의 처음 왕이었다(10:10). 그 우상 숭배는 가장 마귀적인 상징인, 아기를 안고 있는 마돈나(Madonna)를 발명하였다. 두 바벨론이라는 책에 따르면 마돈나는 니므롯의 어머니이자 그의 아내였다. 바벨론 사람의 숭배로 인해 발명된 이 상은 전 세계, 즉 이집트, 인디아, 그리이스, 로마 이교도, 티벳, 중국, 일본에까지 전파된다. 그것이 심지어는 로마 카틀릭보다 우세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삼백여 년 전 중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했을 때 선교사들은 힌두교 우상 사원에서 똑같은 상징물이 발견되자 바티칸에 이것에 관한 보고서를 보냈다. 이것은 두 바벨론이라는 책에 문서로 남겨져 있다.

 

나는 구원받기 전 어린아이였을 때 중국에 있는 카톨릭 성당에 가서 이 상을 보았다. 동일한 기간에 나는 중국 회교 사원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동일한 그림을 보았다. 구원받은 후 나는 나의 설교 가운데 몇 가지 점에서 카톨릭교와 힌두교가 동일한 근원에 속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동일한 상이 카톨릭 성당에서도, 힌두교 우상 사원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카톨릭교 속에 있는 몇가지의 근원을 노출시킨다.

 

열국이 바벨을 산출했듯이 종파들은 결국 큰 바벨론을 산출할 것이다. 이것들은 듣기에 유쾌하지는 않다. 그러나 문제삼지 말라. 열국들이 바벨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내시려고 개입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이 전에 하셨던 것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을 하셨다. 아브라함의 역사는 노아의 역사보다 훨씬 더 좋다. 누가 오늘날의 아브라함인가? 교회 사람들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의 노아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는 우리는 오늘날의 아브라함이다. 이 악한 세대에 대해 우리는 오늘의 노아이며, 종파적인 기독교에 대해서 말한다면 우리는 바벨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오늘날의 아브라함이다. 다음 메시지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활에 대해 더 보게 될 것이다.


위트니스 리
[창세기 라이프 스타디, "창세기 34",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