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믿는이들을 다루시는 길―천국에 들어가는 조건
믿는이들
Eugene , 2012-05-22 , 조회수 (2590) , 추천 (0) , 스크랩 (0)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왕국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따라 그들에게 상급을 주시는 때이다. 왕국 안에서 충성된 자는 상을 받게 되고 충성치 못한 자는 형벌을 받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충성스럽지 않다면 왕국 안에서의 지위가 남보다 낮을 뿐 결코 지위를 잃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일을 깨닫지 못함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된 일로 생각한다. 그들은 장래 주 예수님이 다스리실 때, 천국 안에 지위의 높낮음의 차이가 있을 뿐 천국을 잃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국에 지위의 높낮음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없는가의 차별도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열 고을과 다섯 고을이 다르고(눅 19:17-19) 그 면류관과 영광도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 별과 저 별의 영광이 다르고 왕국 안에서의 지위도 각각 다른 것이다(고전 15:41). 왕국에는 등급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도 있다.


하나님의 뜻을 준행함

 

그러므로 성경은 영생을 얻은 사람이 왕국과 아무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는 아주 엄숙한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7장 21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기서는 주님을 『주여.』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을 말하는데, 이들에 대한 주님의 태도에 차별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떤이는 그의 나라(왕국)에 들어갈 수 있고 어떤이는 그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여기서 주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주신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고 주님을 부르며 일도 했지만, 그의 일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 것이 아니라면 그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천국의 상급은 사람의 순종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은 영생을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천국을 잃을 수 있다. 하늘이 통치하는 때는 바로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때이다. 그 때 어떤 사람은 왕국을 잃고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절에서 주님이 이 사실을 말씀하신 후, 32절부터는 이 일을 예언의 방식으로 설명해주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한두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서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장래 심판대 앞에서 일어날 일들을 알려주신다. 그분은 「그 날에」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늘의 일이 아니라 장래의 일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수고하고 일하지만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빛 비춤을 얻지 못한다. 심판대 앞에 설 그 날이 올 때,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하실 때, 그들은 제일 먼저 빛비춤을 얻을 것이고 그들의 위치와 생활이 틀렸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날에 주님 앞에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 구절에서 세 번씩이나 「주의 이름으로」를 언급했기 때문에 그들이 주께 속한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 입을 열 때마다 『주여, 주여.』라고 말했다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위치에 서 있는 자임을 말해준다. 그들은 전도했을 뿐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했다. 또한 이 모든 일을 주의 이름으로 행했다고 했다. 세 번의 「주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그들의 주님과의 관계를 말해준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확실히 구원받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이들이 구원받지 않았다면 여기에서 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은 무의미한 것이다. 마태복음 7장은 산 위에서 주 예수님이 아흡 가지 축복을 언급하신 후에 말씀하신 마지막 단락의 말씀이다. 주 예수님이 산 위에서 하신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다. 주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고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 앞에 나아왔을 때, 그분은 입을 열어 제자들에게 5장부터 7장까지를 가르쳐 말씀하셨다.

 

주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지 말아라 만일 너희가 나를 주라 칭한다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좇아 행해야 한다 너희가 밖으로 나가 전도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했지만, 이 일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대치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천부의 뜻을 행하는 것과 전도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어떤 때 사람이 전도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하나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으로만 그분을 주라 부르지 말고 행위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이 사람들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이 말씀은 전혀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는 만일 이 무리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제자들이 이 단락의 말씀을 듣든 듣지 않든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그들은 구원받지 않은 무리이고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뜻을 쫓아 행하든 행하지 않든, 당신은 우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구원받은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사람들이 된다. 이것은 이 단락의 말씀의 가장 높은 의미를 말살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주 예수님은 구원받은 사람에 관한 말씀으로 구원받은 사람을 경고하신 것이다. 결코 그분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에 관한 말씀으로 구원받은 사람을 경고하실 수 없다. 예를 들어, 당신 집에 두 딸과 한 하녀가 있다 하자. 당신이 작은 딸에게, 『보라, 그 하녀는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므로 때려주겠다. 그러니 오늘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도 똑같이 때려 주겠다.』고 말했다면, 당신은 이 말이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녀는 당신이 낳은 자식이 아니므로 그를 때려 주는 것은 옳으나, 당신의 딸은 하녀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녀의 비유를 딸에게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만일 어머니가 말하기를, 『어제 네 언니가 말을 안 들어서 때려 주었다. 너도 조심해야 한다. 말을 듣지 않으면 너도 때려 주겠다.』고 했다면, 이것은 합당한 것이다. 언니는 비유로 사용할 수 있지만 하녀의 비유를 딸에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심에 있어서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예로 사용하실리가 없다. 만일 그랬다면 제자들이 일어나서, 그들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고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므로 그러한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보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많으며, 그들은 너희들과 똑같이 나를 주라 부르고 많은 일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왕국 밖에 갇힌 자들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근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라.』 이렇게 할 때만이 믿는이들은 그들이 일을 해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지 않으면 동일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임을 알게 된다. 만일 이 사람들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주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성분이 더이상 없게 된다. 여기서 주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경고하시고자 한 것이다. 만일 자기의 일을 하나님 앞에 가져온다면, 주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겠다. 가령 오늘 어느 법관의 아들이 운전을 하다가 다른 사람의 차를 치받아 경찰에게 붙들려 법정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다 하자. 법관이 그에게, 『젊은이는 성이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 몇 살이며 본적은 어디인가?』라고 물을 때, 그 아들은 아래에서, 『나를 모른다는 말인가?』하고 생각할 것이다. 처음에는 그가 몇 마디 답변하겠지만 더 물어보면, 『아버지 왜 나를 몰라 보십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이 때에 법관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법관은 책상을 치면서,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집에서야 너를 알지만, 법정에서는 너를 전혀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왕국의 문제를 보았다면, 이것이 왕국의 문제임을 깨달을 것이다. 왕국 안에서는 당신이 구원받은 사람인가 하나님의 자녀인가를 묻지 않고, 오직 주님을 믿은 후의 당신의 행위가 어떤가를 묻는다. 아마도 당신은 구원받은 후에 큰 열심을 내고, 비록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지는 않았지만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했다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주님 앞에 나와서 그분께 당신의 불법적인 일에 근거하여 왕국에 들어가도록 허락해달라고 한다면, 그분은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주님은 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셨는가? 다음 문구가 그 이유를 말해준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것은 그들을 영생으로부터 떠나게 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여기서 말한 불법을 행하는 자는 규칙을 지키지 않은 사람, 원칙대로 하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의 눈에는 악한 일을 해야만이 악(중국어 번역에는 불법을 행한 자가 악을 행한 자로 되어 있음-역자 주)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과 그분이 옳다고 보시는 것과 그분이 안배하신 것을 듣지 않았다면, 당신이 아무리 일을 잘 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불법이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악을 행한 자」로 번역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툼과 변론의 여지를 남겨주게 된다.

 

여기서 말한 것은 악을 행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규칙을 지켰느냐의 문제이다. 규칙은 무엇인가? 규칙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뜻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무어라고 말하든 간에 주 예수님은 그것을 불법이라고 하신다. 자기 뜻을 좇아 행하는 자들은 천국에 참예하지 못한다.

 

내가 이 말을 하는 목적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주님을 믿은 사람이 영생을 잃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성경은 그가 왕국의 지위와 영광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지 않고 자기의 뜻을 좇아 일한다면, 우리는 왕국 밖에 갇혀 있게 된다. 우리는 선지자 노릇하는 것과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권능을 행하는 것을 대단하게 볼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할 줄 안다면 놀라운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대치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진하여 그분을 위해 일을 맡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주님의 뜻을 아는 사람일수록 함부로 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것과 일하는 것의 차이는 너무나 큰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일을 좋아하고, 전도하는 것과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권능을 행하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그러나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데에서 깨어날 것이다.


자기 몸을 쳐서 주님의 기쁨을 구함

 

성경에는 사람들이 멸망을 가리키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나 사실상 왕국과 상급을 잃는 것을 가리키는 한 구절이 있다. 고린도 전서 9장 23-27절 :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자기가 버림이 될까 두렵다고 말했다. 여기서 볼 때 바울까지도 버리워질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말한 「버리워짐」은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인가? 어디로부터 버리워지는 것인가? 지난 메시지들에서 우리는 성경을 읽으려면 문맥을 보아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여기서 우리도 전체 문맥을 보기로 하자.

 

24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경주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으로 여겨, 달음질하는 이는 많으나 상 얻는 이는 한 사람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한 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상급의 문제이다. 이 구절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말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해야 상급을 얻을 수 있는지를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이, 이미 주 예수를 믿은 사람만이,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만이 경주장에서 달음질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만이 달음질할 수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얻으라고 하신 상급을 추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은 경주장에 입장할 자격조차도 없다. 성경에서는 구원을 달음질해서 얻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성경은 사람이 달음질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만일 그렇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고, 구원은 일하는 것에 달려 있게 된다. 성경은 상급을 달음질을 통해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경주를 우리 앞에 두사 그 안에서 달음질하게 하신다.

 

상급은 무엇인가? 25절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여기는 상급이 곧 면류관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면류관이 상징하는 것은 왕국과 영광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버리워짐은 구원받지 못한 것을 가리키지 않고 면류관과 상급을 얻지 못함을 가리킨다. 만일 바울이 버리워질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 중 버리워질 가능성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만일 바울이 상급과 면류관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 모든 사람도 상급과 면류관을 잃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36절은 버리워지는 이유를 말해준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바울은 허공을 치지 않았고 목표와 향방이 있었다. 그의 목표와 향방은 고린도 후서 5장에서 말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9절)이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는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썼다. 경주장에서 그는 어떻게 달음질하였는가? 그는 자기가 임의로 달음질하지 않았고 일정한 목표와 향방이 있었으며 허공을 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이 그에게 시키는 것을 하지 않았고 사람의 필요가 무언가에 따라 하지도 않았다. 만일 필요로 말하자면 필요가 너무 크기 때문에 온종일 달음질하고 밤에도 달음질해야 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을 위해 있지 않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있다.

 

상급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몸을 상(賞) 위에 두며, 또 많은 사람들은 자기 몸을 하나님의 뜻 위에 둔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육신을 자기의 통제 아래 두었다. 그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는 몸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몸을 속박할 수 없다. 육신에 어떤 자극이 있기만 하면 그는 여러 가지 죄를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 육신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은 상급과 면류관을 잃어버리게 된다. 비록 이러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 사람 자신은 버리워지게 된다.

 

우리 주님을 믿는 사람은 한번 구원을 받으면 결코 그 구원을 잃어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주 예수님이 영광 가운데서 강림하여 땅에서 다스리실 때 모든 사람에게 면류관을 주시는 것은 아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를 때에는 모든 구원받은 사람이 똑같이 영광을 얻게 되겠지만, 주 예수님이 이 땅에서 천 년 동안 다스리실 때에는 어떤 사람은 그분의 상급과 권위와 영광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 때 어떤 사람은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구원과 영생을 얻는 일에 있어서는 이것이 완전히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없는가는 그의 행위로 결정됨을 보여준다. 좀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자가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제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외적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할 수 없다면 당신은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성경에서 면류관은 숫자가 한정되어 있는 것 같다. 계시록 3장 11절을 보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상급과 은사를 분명히 구분하지 못한다. 또한 면류관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들은 구원을 빼앗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빼앗긴다는 것은 구원을 빼앗긴다는 것이 아니라 면류관을 빼앗긴다는 것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았으나 면류관을 잃을 수 있다.

 

요즘 신문에 충격적인 기사가 하나 실렸는데, 그것은 바로 한 나라의 국왕이 그의 왕관을 잃었다는 것이다(영국의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하여 공작이 됨). 만일 구원받은 사람이 자기가 소유한 것을 붙들지 않고 주 예수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며 주 예수님의 이름을 버린다면, 그는 어느 날 면류관을 잃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자신을 풀어놓고 소유한 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당신은 면류관을 잃게 되고 당신의 면류관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것이다.

 

계시록 2장 10절의 말씀은 앞의 말씀과 거의 비슷하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여기서 주님은 생명을 준다고 하지 않고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고 하셨다. 생명은 충성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생명을 얻은 후에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 생명의 면류관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은 후에 행위가 좋지 않다면, 생명은 잃지 않겠지만 상급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축함

 

성경에서 상급에 대해 분명한 곳은 고린도 전서 3장 14, 15절이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상실될 수 있는 것과 상실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람이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상급을 얻는가의 여부는 오늘 결정할 수 없는 사항이다.

 

그리스도인이 영원히 구원받는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 그러나 장래 상급을 얻는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이것은 당신이 터이신 주 예수님 위에 어떻게 건축하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가 구원받는 문제는 우리 자신의 공적이 어떠한가에 있지 않고 주 예수님의 공적이 어떠한가에 있다. 그분의 공적이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가 상급을 얻게 되는가 해를 입게 되는가는 우리의 공적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만일 주 예수님이신 터 위에 사람이 금과 은과 보석 곧 영원히 가치 있는 것으로 건축한다면 상급을 얻게 될 것이다. 그 반면에 만일 사람이 나무와 풀과 짚으로 건축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상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는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이것은 사람이 상급을 얻을 수도 있고 그의 공적이 불태워 질 수도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가 영원히 구원받는 문제는 천 구백여 년 전에 이미 해결되었다. 이것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당신과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이미 결정되었다. 그러나 상급을 얻을 수 있는가의 여부는 우리의 공적이 어떤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복음의 진리는 매우 균형잡혀 있다. 구원의 안식은 절대로 주 예수님께 있는 것이고 구원함을 얻는 것도 주 예수님께 달려 있다. 그러나 상급을 얻을 수 있는가의 여부는 당신의 공적이 어떤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믿음뿐 아니라 또한 공적이 필요하다. 이 공적은 당신의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서 성령이 이루어내신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상급을 잃을 가능성도 있고 왕국과 면류관을 빼앗길 가능성도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왕국 안의 지위는 고정적이지 않고 유동적이며 불확실함을 볼 수 있다.


자랑할 만한 소망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음

 

히브리서 3장에 이와 유사한 말씀이 있다. 히브리서 3장 6절 :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이 구절에서 볼 때, 우리가 그의 집이 되는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이다. 사도는 만일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고 말했다. 이 집과 이 소망은 무엇인가? 이 복된 소망은 다름아닌 주 예수님이 영광 안에서 다시 오셔서 이 땅 위에 세우실 왕국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있고, 주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영광 안에서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과 충성된 자들과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자들이 주와 함께 왕 노릇 할 것임을 알고 이것을 견고히 붙들면 곧 그의 집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미 주님의 집이다. 우리는 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가고 있다(벧전 2:5). 그러나 장래 왕국 안에서 어떻게 될 것인가는 당신이 얼마나 끝까지 견고히 붙잡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은 영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에 관하여는 성경 다른 곳에서도 매우 분명하다. 영원 안에서의 문제는 이미 완전히 해결되었지만, 왕국 안에서 지위와 상급을 얻는 문제는 오늘 당신이 어떻게 붙잡는가에 달려 있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기 위해 더욱 힘씀

 

또 베드로 후서 1장 10절을 보자.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만일 당신이 선택에 대한 진리를 알지 못한다면, 결코 이 부분이 왕국의 소망을 굳게 하는 것에 관해 말한 것임을 보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 대한 택하심과 부르심이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람이 다시금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로마서 11장은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고 우리에게 확실히 말해주기 때문이다(29절).

 

그러나 베드로 후서에서는 은혜의 부르심만 다루지 않고 택하심도 언급했다. 이 구절은 부르심과 택하심 이 두 가지를 함께 언급했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 거듭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하심을 입은 자는 적다고 말했다(마 22:14). 이 부분에 대하여 나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부분 외에 다른 모든 구절들은 구원받은 이는 많으나 상을 얻는 이는 적다는 것에 관해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한 택하심은 왕국 안에서의 지위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베드로는,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 「이것을」이란 바로 5절부터 7절에서 말한 믿음과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사랑이다. 만일 당신이 이것을 행한다면 언제든지 실족지 않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더욱 힘써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것은 서로 대구(對句)를 이룬다. 앞 구절은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말하고, 뒷 구절은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11절 :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성경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영원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영원 안에서야 그 안에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천년왕국 때에 그 안에 들어간다. 그리스도의 권위는 천년왕국 때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계시록 11장 15절은,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라고 말한다. 이 성경 구절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영원과 연결하여 언급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시작은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곧 대환난이 시작될 때이다. 그리스도께서 왕 노릇 하시기 시작할 때, 어떤 사람은 왕국에 들어가게 될 뿐 아니라 넉넉히 그 안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한다는 것은 이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구원은 이미 정해진 것이고 왕국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를 믿은 즉시 영원히 살고 죽는 문제가 이미 해결된 것을 알기 때문에 그분을 찬양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을 믿은 후에 그 앞에 체험들이 놓여 있는데 곧 장래의 영광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왕국과 면류관과 영광과 상급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나 어떤 사람은 들어가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들어갈 뿐 아니라 넉넉히 들어간다.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상급과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달음질할 필요가 있다. 장래에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해서는 오늘 힘써 노력해야만 한다.


왕국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는 것임

 

나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천년왕국 안에서 그리스도께 어떠한 영광으로 그분이 천 구백여 년 전에 받은 고통에 대해 보상하시는 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나 모르겠다. 고난받는 것과 상급을 얻는 것은 반드시 동등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가장 비천한 데까지 이끌려졌다면 그의 상급은 가장 클 것이다. 가령 당신 집에 있는 어떤 하인이 어느 날 집에 불이 나서 당신이 큰 위험에 처해있는 것을 보고서 당신을 구출하기 위해 심지어 목숨까지도 잃었다 하자. 당신은 어떠한 상급을 그에게 주겠는가? 당신은 그에게 이 센트를 상급으로 주겠다고 말하겠는가?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상급은 반드시 고난받는 정도와 동등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그러한 죽으심을 당하신 것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장래 그리스도께 보상하시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실 것인가? 왕국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영광을 얻으실 때이다. 왕국은 하나님이 그리스도께 상급을 주실 때이다. 그 때에 당신에게도 한 몫이 있다. 당신이 주 예수님이 얻으신 영광을 얻기에 합당한가의 여부는 당신의 생활과 일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영광을 얻기에 합당한가의 문제가 없지만, 왕국 안에서는 합당한 자만이 영광을 얻을 수 있다. 주 예수님은 핍박과 고난과 수치를 당하셨다. 만일 우리도 오늘 똑같이 고난과 핍박을 당하고 수치를 당한다면, 장래 왕국 안에서 그분과 함께 왕 노릇 하게 될 것이다(딤후 2:12).


워치만 니
[워치만니 전집 29, 하나님의 복음 제 21장,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