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에 속하는가 두뇌에 속하는가
생명
Eugene , 2012-05-21 , 조회수 (2519) , 추천 (0) , 스크랩 (0)

성경 :

 

고린도 후서 3장 6절 :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여기서 「의문」은 율법을 가리킨다. 율법을 성령과 비교해 볼 때 율법 안에는 성령의 살리는 그 능력이 없기 때문에 율법은 사람을 죽일 따름이다. 주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성령 외에 사람을 살리는 것은 없다. 하나님의 생명조차도 성령 안에 있다. 심지어 우리의 물질 세계도 당초에 성령의 운행하심으로 생긴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 되신 주 예수님의 출생도 성령에 의한 것이다. 성령의 계시에 따르면, 생명을 주었고 사람을 살리는 것은 모두 성령에 달린 것이다. 율법은 의문을 좇을 뿐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을 죽게 한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구약의 「의문」(곧 율법)이 있을 뿐 아니라 신약의 「의문」도 있다. 구약이 중요시하는 것은 율법이다. 이 율법은 성경이 우리에게 말한 것으로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고 거룩하며 영에 속한 것이다. 다만 그 안에 성령이 없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많은 문자와 같이 사람을 죽이는 의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신약의 복음의 많은 진리와 명령, 훈계와 교훈도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사람의 행위를 통제하고 사람의 도덕성에 영향을 준다 할지라도 성령의 능력을 떠날 때 사람을 죽이는 의문으로 변하게 된다.


성령이 없는 것은 모두 죽은 것이요 능력이 없는 것임

 

성령을 떠나서는 생명이 없고 모든 것이 죽은 것이라는 진리는 많은 믿는이에 의해 소홀히 여겨졌다. 우리는 온전히 성령의 역사를 의지해야 하고 우리의 모든 것은 무익하다는 것을 철저히 보지 못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육신의 부패함을 시인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육체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성령을 의지하여 사는 단계에까지 인도하고자 하신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성령이 운행하신 결과가 아니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산출된 모든 역사와 행위와 모든 기도와 진리 추구가 다 죽은 것임을 보기 원하신다. 그분은 이 모든 것들이 죽은 행실로서 무덤에 묻히기에만 합당하다고 보신다.

 

오늘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분의 자녀로 더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망을 제하고 사망을 이기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죄를 이기는 것을 주의할 뿐 사망을 이기는 것을 주의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법에서 해방하실 뿐 아니라 또한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신다(롬 8:2). 오직 성령만이 능히 이 생명을 주신다. 성령이 없는 곳에는 생명이 없고 사망으로 충만하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더우기 사망을 이기고 생명으로 충만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듯 사망을 미워하신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끊어지게 하고 사망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을 갖는 것을 가로막는다. 죄를 이기는 것은 소극적인 것이고 생명으로 충만되는 것은 적극적인 것이다.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죽은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산 것임을 보고 알아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 있는가? 성령을 힘입음으로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말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육체에 속한 것들이 사망에 속할 뿐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완전한 율법까지도 성령을 떠나서는 여전히 죽은 것임을 계시한다. 의문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은 분리할 수 없다. 하나님은 성경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동시에 그분의 영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말씀을 받으라는 조건을 추가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이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그분의 영을 말씀의 원조력으로 삼으시고 그분의 말씀을 확증하신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접하고 그분의 영을 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 없음을 볼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의문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어리석은 것으로 여긴다고 말한다.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로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에게 성경은 죽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거나 무능하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이 없는 고로 이 사람에게 성경은 죽고 능력 없는 한 권의 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의문에 지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전자는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후자는 두뇌의 지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원동력과 생명이 있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두뇌로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한다면 그는 이 말씀 안에 있는 능력과 생명을 얻지 못한다.

 

두뇌로 진리를 영접한 사람에게는 모든 진리들이 사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진리들은 그에게 효력이 없고 필요에 따라 그것들을 적용할 수도 없다. 그가 그 진리의 배경과 사실과 과정을 다 알고 하나님의 약속도 가지고 있더라도 그 안에서 능력을 얻지 못한다. 이 진리들은 그 사람에게는 진리라 할 수 없고 공허한 가르침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그가 그 진리의 진실성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믿는이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는가를 알아보려면 다만 그가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 있는가를 알아보면 된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서 믿는이에게 성령을 주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확증되지 못한 이유는 성령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위험은 믿는이가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읽고 진리를 추구하되 두뇌의 지혜에만 의존하는 데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영을 연결시키셨다. 그러나 사람은 그분의 말씀을 그분의 영과 분리시키거나 그분의 영을 그분의 말씀과 분리시킨다. 이 두 가지의 극단은 다 똑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분의 영과 분리시키는 사람의 그 행위는 결국 괴상하게 된다. 그러나 전자에 떨어진 자가 후자에 떨어진 자보다 많다.

 

많은 사람들은 과학서적을 읽듯이 성경을 읽는다. 그들은 머리가 좋고 사람의 지도(指導)가 있으므로 거기다가 노력만 더하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성경 공부는 당신으로 성경적인 사실과 교리를 이해하게 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분의 능력으로 그분의 진리를 이해하는 단계로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지기를 바란다.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을 믿는이에게 실시할 수 있다. 두뇌로 진리를 받아들일 때 결코 진리 안에 있는 생명과 능력을 볼 수 없다.


한 가지 중요한 분별

 

그러면 성령에 의해 진리를 받는 것과 두뇌로 진리를 받는 것에는 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가?

 

가) 기도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내려놓지 않고, 온전히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서 어떤 책이나 교사로부터 또는 성경 자체로부터 진리를 받는 것은 두뇌로 진리를 받는 것이다. 두뇌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성령을 거치지 않고 직접 책이나 교사 혹은 성경으로부터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성경을 이해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것이 죽은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산 체험이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신 하나님 자신을 가까이 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사람은 하나님을 접촉할 수 없다.

 

나) 갈라디아인들은 복음을 믿다가 후에 다시 율법을 지키는 데로 돌아갔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2)고 물었다. 사도의 뜻하는 바는 그들이 믿음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행위를 의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사도는 그들에게 또 한 마디를 물었다.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사도의 말의 뜻은 그들이 처음에는 성령을 의지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를 의지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질문 중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인, 성령에서 나온 것은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고 육체에서 나온 것은 모두 행위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육체가 행위와 하나이듯 성령은 믿음과 하나이다.

 

그러므로 두뇌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성령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하나는 믿음이 필요 없고 하나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진리를 받아들이려면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두뇌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으로 이해하게 할 뿐이지만 성령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으로 믿게 한다. 하나의 예를 들겠다. 믿는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생명과 능력의 근원이다. 이것은 우리가 특별히 중요시하고 항상 전하는 바이다. 이 진리를 이해하는 믿는이가 적지 않고 이 진리를 위하여 일어나 특별히 간증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실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많은 사람의 말투는 그들의 체험을 드러낸다. 내가 알고 있는 한 형제는 자기가 주님과 함께 죽은 진리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말씀을 전할 때 『여러분들은 죽어야 합니다. 죽지 못할 때에는 십자가의 힘으로 죽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말들은 아주 신령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알쏭달쏭한 말이다. 이것은 그가 함께 죽은 것에 대해 두뇌로만 이해했을 뿐 성령의 능력을 얻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왜 그런가? 이는 사람이 실지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반드시 먼저 믿음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후에야 역사한다. 믿음이 먼저이고 사람 속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나중이다. 만일 사람에게 믿음이 없다면 그가 알고 있는 진리는 일종의 이상(理想)에 지나지 않고 성령은 그 진리가 성취한 것을 그에게 이루지 못한다.

 

이제 함께 죽은 문제로 돌아가보자. 성령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그분의 죽음 안에 우리를 포함시켰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사실이듯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참된 것이듯 우리의 죽음도 참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음으로 형벌에서 벗어났듯이 우리 자신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믿음으로써 죄의 권능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가르쳤으므로 문제는 우리가 믿는가 믿지 않는가에 달렸다. 만일 우리가 믿는다면 성령은 우리의 체험에 있어서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증거하실 것이다. 이런 경지에 이르러야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받아들인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을 좇아 진리를 받아들이는 순서를 본다. (1)성경의 가르침 (2)믿는이의 믿음 (3)성령의 역사이다.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두뇌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없다. 그는 성경을 상고하거나 다른 사람의 말하는 것을 들을 때 함께 죽은 이유를 깨닫고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에게는 믿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의 그의 옛사람의 위치를 분명히 볼 수 없고 그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행위에 있어서 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결심한다. 그는 사람에게 권면할 때 쉬지 않고 당신은 죽어 마땅하다고 말한다. 때로 그가 조금 더 진보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의 진실성을 이해하고 그의 입으로도 자신이 이미 못 박혔다는 것을 시인할지라도, 행위에 있어서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를 못 박았다는 사실을 믿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을 못 박으려고 한다.

 

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 받아들여진 진리라면 그 진리는 그 사람의 체험이 된다. 성령이 어떤 진리를 계시하는 목적은 믿는이에게 상고할 자료를 더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믿는이를 이 진리의 내용 안으로 더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두뇌의 깨달음은 그 진리를 좋다고 칭찬하게 할 뿐 그로 하여금 그 진리의 도움을 얻게 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어느 종류의 진리를 찬성하고 좋아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들이 두뇌 속에만 머문다는 것이다. 어떤 진리가 그 사람에게 능력이 없다면, 그 사람은 이 진리가 그의 두뇌 속에만 있을 뿐 성령의 능력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원리와 실지의 차이점과 관련점을 보아야 한다. 많은 원리들은 본래 성령의 계시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저장된 것이 많고 교사가 많은 고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통하여 영적인 생명의 원리를 깨달을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두뇌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런 원리들을 생명에 적용할 수 없다. 두뇌로 원리를 깨달을 수 있겠지만 오직 성령만이 이 원리를 실시할 수 있다.

 

사람이 대수(代數)에서 방정식 하나를 풀기는 쉬워도 어떤 문제를 방정식으로 열거하기란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두뇌로 영적인 원리를 배우기는 쉬워도 이 원리를 생명에 실시하는 것은 두뇌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리를 공부하는 사람은 세계의 대도시와 농공상업의 분포도를 잘 알지만, 아마 그는 한 발자국도 문 밖으로 나서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사람이 두뇌로 성경을 상고하여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떤 체험도 가질 수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령이 주신 것이 아닌, 두뇌 속에서만 성경 지식을 추구하고, 적지 않은 비밀을 깨달으며, 많은 영적인 원칙을 이해하고, 그리스도가 이루신 역사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더 깊은 것들을 이해하는 데에만 머무는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진리를 이행할 능력이 없다. 이런 방법은 성경을 과학 서적으로 삼게 할 뿐 독자로 저자와 아무 접촉을 갖게 하지 못한다.

 

사실 하나님은 말씀을 입으로 해내셨지만 또 한면으로는 성경에 기록하셨다. 그러나 이런 말씀도 하나님처럼 성령 안에 있다. 만일 독자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영접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감소시키어 성경을 세상의 죽은 책들과 똑같게 만든다.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사람의 사상과 견해를 분명하게 하겠지만 영적 생활과 일에 있어서는 실지의 효능이 없다. 이런 해설은 우리에게,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전하는데 왜 아직도 그 진리가 그들 자신에게나 듣는 자에게 능력이 없는지를 보여준다. 진리가 말하는 자의 두뇌에만 머문다면 듣는 사람에게도 두뇌에까지만 전달될 따름이다.

 

진리만 있고 진리의 영이 없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분이 진리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진리의 영이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믿는이들이 진리와 연합하는 것은 진리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진리의 영으로 말미암지 않을 때 진리는 진리이고 믿는이는 믿는이이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믿는이가 참되게 그리스도를 알고 체험할 수 없듯이 믿는이들이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역시 참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체험하지 못한다.


참된 영적인 일

 

오늘날 많은 설교 중에 심오한 것과 영적인 교훈이 가득한 것도 많으며 신앙이 순수한 것도 많고 해설이 온전한 것도 많다. 동시에 듣는 사람도 어느 정도 감동을 받고 그들의 행위와 도덕성에도 영향력이 미친다. 이런 설교라도 사람의 지혜에만 의존하고 성령에서 나오지 않은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역대로 깊이 있는 사람이 말한 격언조차도 사람에게 격려를 줄 수 있고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성령이 역사한 결과가 아니다. 나는 많은 사람의 설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 왔다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가 아닐까 두렵다.

 

사람의 모든 것은 말살되고 사람은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는 자가 되어 다만 십자가로 종결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 되시고 모든 것을 소유하시며 또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에 마땅히 모든 것이 되셔야 한다. 모든 것이 성령의 능력 안에 있어야 한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사람의 어떠함을 말살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로 큰 손해를 보게 하고 전진하지 못하게 하며 정체되게 하고 열매를 감소되게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열매와 참된 영적인 일이다. 오직 이런 것만이 영적인 유용성이 가장 크다.

 

사람의 지혜로 행한 일은 다른 것에 있어서는 왕성할 수 있을지라도 아무런 영적 가치가 없다. 하나님의 손에서도 아무 유용성이 없다. 참되게 하나님께 속한 일은 오직 성령만이 하실 수 있다. 우리 사람의 지위가 작을수록 성령의 능력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성령이 오 분간 역사하시는 것이 우리가 백 년간 수고하는 것보다 더욱 영적인 유용성이 있다. 밤이 맞도록 수고해도 아무 소득이 없는 바에야 주님의 명령을 듣고 물고기를 그물에 가득 하도록 잡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두뇌의 지위

 

그러면 사람의 두뇌는 하나님의 진리에 있어서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두뇌도 나름대로의 지위가 있다. 우리는 사람의 두뇌가 다 같지 않다는 것을 분별해야 한다. 진리를 계시하는 것은 성령이고 성령이 계시한 것을 받아들이는 기관은 사람의 새롭게 된 영이다. 오직 사람의 새롭게 된 영만이 계시를 얻을 수 있다. 두뇌는 계시를 얻는 기관이 될 수 없다. 두뇌는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새롭게 된 두뇌는 사람이 계시로 얻은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일을 도울 따름이다. 그러나 두뇌 자체는 하나님의 진리를 발명할 수 없다. 낡은 두뇌가 전달하는 일을 저지할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의 영이 새롭게 되었다면 계시를 얻는 데 있어서 어떤 것의 제재를 받지 않는다.

 

하나님은 옛 창조를 말살하셨다. 천연적인 결함은 계시를 얻는 일을 제재할 수 없다. 사람의 천연적인 장점도 계시를 얻는 것을 돕지 못한다. 우수한 두뇌가 전달하는 일을 도울 수는 있어도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계시를 주지 못한다. 또한 우리는 그러한 전달자가 무엇을 전달할 때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천재의 헛됨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교사들은 그들의 천연적인 재간이 일반인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자기들이 진리를 상고하고 이해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사실상 이를 통해 그들이 이루어놓은 것은 어떤 영적 가치가 별로 없다. 지능이 뛰어난 자는 종종 지능이 낮은 자의 교사가 되지만, 많은 때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그렇지 않다. 때로는 가르치는 자가 가르침을 받는 자들보다 못할 수도 있다.

 

현재 교회에는 영성이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아닌 다만 지능이 남보다 특출한 사람이 지위가 있고 이름 있는 사람이 되는 위험스런 상태가 있다. 이 말은 세상적인 학문이나 지혜가 있는 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안에서 이름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오늘날 재간과 지혜를 가지고 그것들을 성경과 영적인 일에 사용할 뿐, 남들보다 성령을 더 깊이 알아서 유능한 지도자가 된 성경 교사나 집회의 인도자가 얼마나 있는가? 많은 신령함이 참된 신령함이 아니다! 이는 그 안에 성령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두뇌 속의 영적인 사상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의 가르침과 설교는 다만 성경을 상고한 결과일 뿐 성령이 그들을 가르친 공과의 결과가 아니다. 자연히 그것들은 사람의 사상에 도움이 될 따름이다.

 

많은 사람들은 천재가 합당한 곳에 사용되어야만 하나님의 일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늘이 주신 천재의 재간」이라도 영적인 일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성령이 재간을 사용할 수 있지만 이 재간은 반드시 성령께 온전히 굴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성령으로 충만된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남을 인도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사상이 남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인지 아니면 실지로 하나님의 영을 알았기 때문인지를 스스로 알아야 한다.


성령이 결핍되어서는 안 됨

 

하나님은 성경이 성령의 묵시이듯 우리에게 성령의 계시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신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것이듯 사람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읽을 필요가 있다. 성경이 성령에 의해 기록되었듯이 사람이 성경을 읽을 때에도 성령의 비춤이 필요하다. 사람의 지혜는 이 면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나님은 성경의 분명한 해석까지도 믿을 만한 것이 아님을 알기 원하신다. 우리의 능력은 오직 성령에서 나온다. 사람의 지혜가 성경 진리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을 주지만 그 진리의 유익을 얻게 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의 진리를 추구하는 동기가 잘못되었다. 그들은 지식의 욕구를 만족시키거나 다른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교리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들의 목적은 영적 생명을 자라게 하는 데 있지 않고 이치상(理致上)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있다. 그들의 동기가 이러하므로 그들은 두뇌로 교리를 이해한 후에 스스로 위안을 얻고 남을 가르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며, 더 나아가 영적인 실제를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람이 오직 성령에 의해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오직 성령에 의해 진리를 이해하며, 오직 성령에 의한 기도에서 하나님의 들으심을 얻을 수 있으며, 오직 성령으로만이 영적 생명의 성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볼 때, 비로소 성령을 믿고 의지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비춤을 주시도록 참으로 그분께 구하는 때가 얼마나있는가? 비춤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아마도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상고하며 추구하는 때가 기도한 때보다 더욱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진리를 이해했지만 영적 생명이 여전히 고갈된 믿는이들이 많다.

 

오늘날 설교에 대해 사람들은 영 안에서 생명을 얻기보다 두뇌 속에서 수긍할 만한지를 더욱 주의한다. 우리는 참되게 가치 있는 것이 사람의 두뇌 속에 있지 않고 영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을 처음 만날 때나 더 풍성한 생명을 공급하기 위해 만날 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한 가지 일은 바로 그분의 영을 사람의 영 안으로 역사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사람의 영 안으로 주입하는 것이다. 한순간 이치에 수긍하는 찬성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주입이 없기 때문에 헛된 수고이다.


하나님의 징계

 

이것은 매우 배우기 어려운 공과이다. 사람의 육체는 하나님을 거스름으로 범죄하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기를 싫어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할 때, 육체는 하나님에게서 독립하여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지 않아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려 하지 않는다.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서도 사람은 자신의 지혜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할 수 없이 그분의 자녀들로 많은 고통스런 체험을 갖게 하신다. 그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힘으로나 지혜로 얻는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조금도 도움을 줄 수 없음을 알게 하는 데 있다. 또한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모든 육체적인 힘을 버리고 성령과 그분의 능력을 추구하게 하는 데 있다.

 

많은 사람의 역사가 처음에는 왕성하였다가 한동안 지난 후에 언제 그랬느냐는듯이 점점 식어지는데, 그 목적은 사역자로 하여금 그의 일이 어디서 잘못되었는지를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육체의 업적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분의 일꾼들에게 그들의 일이 얼마나 공허하고 무의미한가를 보여줌으로써 다시 성령으로 시작하게 하신다. 이런 체험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른다!

 

또한 많은 믿는이들은 자신들이 많은 것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진리들을 의지하면 넉넉히 이기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번번히 실패한다! 분투하여 이 진리들을 붙잡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싸울 때 그들이 알고 있는 진리들은 짚과 같은 병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통곡하며 눈물을 흘린다. 하나님의 진리가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령의 검은 오직 성령으로만 휘두를 수 있고 육체로 성령의 병기를 사용하는 것은 다윗이 사울의 갑옷을 입듯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신다. 그들이 두뇌로는 진리를 이해했지만, 아직 성령을 의지해 이 진리를 생명이 되게 하지는 못한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

 

하나님의 진리가 믿는이들에게 이를 때 두 번의 옴이 있는데, 한 번은 두뇌에 오고 또 한 번은 영에 온다. 영에 오는 것은 항상 머리에 오는 것보다 느리며, 어떤 경우에는 몇 개월, 어떤 경우에는 몇 년이나 늦게 온다. 하나님은 믿는이들에게 진리를 주시고서(곧 두뇌에서 이 진리를 이해함) 그들로 오직 그 진리만으로 승리하는 단계에 이르도록 환경 가운데서 역사하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믿는이들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 진리를 알고 만족된 체험을 갖게 된다.

 

그러나 매우 안타까운 것은, 믿는이들이 두뇌로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것으로 만족하여 체험을 온전히 추구하지 않거나 더욱 그 진리로 다른이를 가르침으로써 하나님이 그에게 그 진리의 실제를 주시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능력이 있는가에 대한 오해의 여지가 없음

 

우리는 성령에 생명과 능력이 있기 때문에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은 무엇이든 그것에 생명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가 그 사람의 생명을 돕지 못하고 그에게 원동력을 더해 줄 수 없으며 다만 그에게 좋은 사상을 주고 철저한 분석을 배우게 할 뿐 시험이 맹렬할 때 그를 돕지 못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성령의 역사가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재미 있는 말을 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한다. 또 얼마나 많은 때 사람이 성령의 교리를 말하나 거기에 성령의 능력이 조금도 없는지! 오늘날 믿는이에게 부족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닌 더 많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기이한 것은 사람이 두뇌의 힘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때 자주 그 진리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 진리를 깨닫고 성령의 능력으로 이 진리를 지킨다면 어떤 필요가 생길 때, 그는 물에 빠진 사람이 밧줄을 잡듯이 그 진리를 붙잡지 않아도 성령이 그 진리로 그를 붙잡게 하고 구원하게 한다. 이 구별은 매우 큰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을 떠나서는 다 죽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생명이 한순간도 끊어질 수 없듯이 성령이 주신 능력도 순간순간 새롭고 끝없이 흘러나와야 한다. 성령이 한 번 어떻게 역사했다고 해서 언제나 그렇게 역사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한 번의 그분과의 접촉은 오직 한 번의 능력밖에 얻게 하지 못한다. 우리와 성령의 왕래는 영단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영적인 체험을 들을 때 우리는 천연적으로 그들을 모방하기가 쉽고 하나님이 동일하게 우리를 인도하여 동일한 결과를 주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럴 때마다 우리는 자주 실망한다. 이는 그들의 체험이 성령에서 나온 것인 데 비해 우리의 체험은 두뇌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여 직접적으로 그분을 찾을 수 있도록 자주 우리를 실망시키신다. 두뇌에서 나온 모방은 소용이 없다. 성경을 인용한 것일지라도 동일하다. 성경이 성령의 묵시로 된 것이므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많이 인용하면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말씀은 성령이 다시 우리에게 말씀하실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진리를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성령이다. 우리는 그분의 계시와 그분의 실시하심을 추구함으로써 그분이 진리를 우리 두뇌에서 우리 마음 속으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말씀 안에 있는 이론으로 만족하지 않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이 하신 말씀을 다 참된 것으로 여길 수 있기 바란다.


워치만 니
[믿음의 문과 길, "영에 속하는가 두뇌에 속하는가",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