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종교를 향한 다섯 단계
생명
Eugene , 2012-05-21 , 조회수 (2416) , 추천 (0) , 스크랩 (0)

성경 : 요한 계시록 1장 12절-18절, 2장 1절-7절, 12절-21절, 24절-29절, 3장 1절-6절, 14절-22절, 17장 4-5절, 18장 2절, 4절, 19장 7절-8절.

 

이제 계시록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 대 종교에 관한 많은 것들을 보게 된다. 우리 모두는 이 책에서의 그리스도가 사복음서의 그리스도와 분명히 다른 것을 깨달아야 한다. 사복음서에서 그리스도는 부드럽고 온유한 분이었으나, 계시록에서는 격렬하게 묘사된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요한복음에서는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의 품에 기댈 수 있었으나 계시록에서는 요한이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즉시 땅에 엎드러졌다. 계시록에서 보는 그리스도는 눈이 불꽃 같고 목소리가 많은 물소리 같은 분이시다. 왜 이런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계시록에 이를 때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그 방면과 태도 또한 그에 맞게 변화된 것이다.

 

계시록에서 보는 종교는 복음서나, 사도행전이나, 서신들 안에 있는 종교와는 다르다. 그 모든 책에서의 종교는 낡은 종교, 즉 유대교였다. 그러나 여기 신약의 마지막 책에서 종교는 새로운 모습을 띤다. 그것은 더이상 유대교가 아닌 그리스도인 종교, 즉 기독교의 종교다. 그리하여 계시록에서는 그리스도도 다르고, 종교도 또한 다르다.

 

이 책의 둘째, 세째 장의 일곱 서신에서 우리는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에 관한 분명한 관점을 얻게 된다. 기독교 종교는 진짜 종교가 되었다. 그것은 단계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여기 이 일곱 서신에서 우리는 이 새 종교를 향한 다섯 단계를 보게 된다. 이 일곱 가운데 오직 두 교회, 즉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만 종교와 관계가 없다. 나머지 모든 교회는 종교와 많은 관계가 있으며 각각에는 그것의 형성을 향하여 취해진 분명한 단계가 있다. 거기에는 기독교의 새 종교를 형성 하는 다섯 단계를 가진 다섯 교회가 있다.


1. 사랑이 없는 일

 

기독교의 새 종교를 향한 첫번째 단계는 그리스도에 대한 친밀하고 개인적인 사랑이 없이 그를 위한 일이 많은 것이다. 여러분은 주님을 위한 많은 수고가 종교를 형성하는 것이 될 수 있음을 결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여러분은 아마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데에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선교계에 가고, 성경을 가르치고, 주님을 알도록 도와 주고 구원받도록 도와 주는 것이 무엇이 잘못됐는가?

 

에베소 교회에서 하신 것처럼 주님은 모든 일을 아시지만 거기에는 위험이 있다. 여러분은 주님 자신에 대한 친밀하고 개인적인 사랑이 없이 주님을 위하여 부지런히 수고하고 많은 일을 성취할 수 있다.

 

교회 생활의 회복에서 우리는 모두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일을 해야 하고 주님을 위해 수고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일이 우리의 사랑스런 주님에 대한 친밀하고 개인적인 사랑과 균형을 이루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실은 주님을 위한 일보다 그를 더 사랑해야 한다. 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그를 위하여 하는 일보다 더 귀하고 사랑스러워야 한다.

 

우리는 그를 사랑하는 것만큼 그를 위한 일에 대해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주 예수에 대한 친밀하고 개인적인 사랑이 필요하다. 이 사랑은 처음 사랑, 즉 가장 좋은 사랑이어야 한다. 처음 사랑(계 2:4)의 「처음」으로 번역된 단어는 가장 좋은 옷(눅 15:22)의 「가장 좋은」으로 번역된 단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사랑은 가장 좋은 사랑이요, 이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유지해야 하는 사랑이다.

 

우리는 그를 위한 일을 잊을 수 있으나 그에 대한 첫번째의 가장 좋은 사랑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첫째로 우리의 신랑이시다. 할렐루야! 우리는 우리 주 예수를 우리의 사랑스럽고, 귀한, 오늘의 신랑으로 보는 눈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를 섬기는 것은 둘째요, 그를 사랑하는 것이 첫째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2:5). 주님은 그들이 회개하여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면 빛을 잃고, 간증을 잃고, 촛대를 잃어 어두움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처음의 가장 좋은 사랑이 없으면 주 예수의 간증에 관한 한 그들은 끝날 것이다. 그것은 아주 심각한 일이다.

 

주 예수를 위한 많은 수고는 간증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빛나는 능력과 빛과 촛대와 간증을 가지는 것은 그를 첫번째의 가장 좋은 방법으로 사랑함에 달려 있다. 빛나는 예수의 간증은 그를 위한 수고에 있지 않고, 사랑스런 그분에 대한 친밀한 사랑에 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한 주님의 경고는 또한 약속과 짝을 이루고 있다. 그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2:7)고 말씀하셨다. 이 세 단어-사랑, 빛, 생명-는 항상 함께 나아간다. 우리가 주님을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첫번째의 가장 좋은 방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빛을 얻을 것이고 생명의 누림을 얻을 것이다. 주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이기는 자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것은 단지 미래에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라는 약속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루어질 축복된 약속이다.

 

합당한 교회 생활은 오늘날의 하나님의 낙원이다. 우리가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이곳에서다. 그리스도는 가르침의 집합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누림을 위한 생명나무이다. 우리는 다만 예수를 모방하고 예수를 따르는 것을 배우지 않고 하나님의 낙원인 교회 안에서 생명나무이신 예수를 먹기를 배워야 한다. 이 약속은 주로 미래에 대한 언급이지만 우리는 오늘날에도 참으로 미리 맛볼 수 있다. 할렐루야! 우리 중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낙원인 교회 생활 안에서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오늘 미리 맛봄을 간증할 수 있다.

 

새로운 종교를 형성하는 첫번째 단계는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과의 친밀하고 개인적인 사랑의 관계를 잃고 주 예수를 위해 많은 일을 하는 것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지방 교회들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첫번째 일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방 교회들 안에서 우리가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가장 첫번째의 큰 인상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가이다. 그의 귀한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우리는 그에 대한 사랑으로 거의 미칠 지경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목적 삼자. 그것을 놓치지 않도록 깨어 있자.

 

우리가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두번째 인상은, 이 예수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서로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친밀하게 그를 사랑하며 또 서로서로 사랑한다. 사람들이 교회 생활을 접할 때 받아야 할 가장 큰 인상은 이 두 면-주 예수에 대한 사랑과 서로서로에 대한 사랑-에서의 사랑이다. 그러면 우리는 빛나는 능력을 가진 촛대를 갖고 모든 어두움을 쫓아 낼 빛을 충만히 가질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생명나무의 누림을 갖게 되고, 지금도 하나님의 낙원에서 그것을 맛볼 것이다. 할렐루야! 그러나 이것을 놓친다면 우리는 기독교 종교를 형성하는 첫번째 단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2.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리

 

에베소 교회로부터 우리는 버가모 교회로 나간다. 버가모에서는 두번째 단계를 보게 된다. 모든 단계에는 연속성이 있다. 단계 단계가 계속된다. 첫번째 단계를 취하면 분명히 두번째 단계를 취할 것이다. 두번째 단계는 1) 발람의 교리와 2) 니골라당의 교리의 두 가지 중요한 항목으로 구성된다.

 

발람의 교리란 무엇인가? 발람은 돈을 위해서 일을 한 선지자였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 전함과 그의 가르침은 직업이 되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지나친 수고와 일에 기인한다. 교회에 수고와 일이 너무 과다할 때 사람들은 분명히 그것을 수행하도록 고용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첫째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사랑하고 일에 너무 주의하지 않는다면 사람을 고용할 필요가 없다. 기독교 안에 있는 위험은 사랑이 없이 일에 너무 주의해왔고, 여전히 일에 주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주 많은 기독교 사역자들이 고용되었다.

 

교회에서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돈을 위하여 하지 않고 주님 자신에 대한 친밀하고 불타는 사랑으로 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불타므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주님을 사랑한다. 우리는 그를 위하여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바치고 싶다. 우리는 그를 섬기고 싶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일이나 수고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표현을 의미한다. 우리는 돈을 위한 어떤 것도 주의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모두 일에 너무 많이 파묻혔다. 그들은 『우리가 어떤 것을 조직하자.』라고 말한다. 『선교 사업을 하자. 많은 선교사들을 보내자. 신학교에 가고, 성경회관에 가고, 그 졸업생들을 권유하자.』 이것이 바로 발람의 교리다. 물론 고용된 사람들은 돈에 의해 일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봉사는 상업화되었다. 이것은 종교일 뿐 아니라 더 악한 것이다.

 

우리 중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이루려고 교회에서 어떤 사람을 고용하려는 생각을 품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종교를 형성하는 두번째 단계를 취한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하지 말고, 얼마나 많은 피를 가지고 있는지를 말하자. 우리는 돈을 위하여 일하지 않고 예수의 사랑을 위하여 일할 것이다. 우리는 돈의 많고 적음에 주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의 사랑을 위하여 섬긴다. 돈으로 하지 않고 피로 한다. 우리가 돈을 생각하고 섬긴다면 결코 사랑의 일을 할 수 없다. 우리가 돈없이 나가, 예수의 사랑을 위하여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가장 좋은 첫번째 사랑을 가지고 교회를 일으킬 것이고 그 교회는 결코 종교를 형성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어떻게 그렇게 무시무시한 종교가 되었는가? 바로 돈 문제, 즉 발람의 교리 때문이다.

 

발람의 교리 뒤에는 필연적으로 니골라당의 교리가 따른다. 이것은 무엇인가? 「니골라 당」이라는 말은 헬라어의 두 단어인 니코(NIKO)와 라오스(LAOS)로부터 온 것이다. 니코(NIKO)라는 단어는 「정복하다」, 혹은 「굴복시키다」라는 뜻이고 라오스(LAOS)는 「사람들 」이라는 뜻이다. 이 두 단어를 합해보면 「사람들을 굴복시킨다」, 다시 말해서 「성직자-평신도 제도」를 뜻한다.

 

주님의 봉사가 상업화되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성직자-평신도 제도가 나타난다. 이 제도는 많은 지체들의 기능을 없애고 그리스도의 몸을 죽인다. 이것은 큰 악이다. 어떤 곳에서는 평신도 중의 어떤 사람이 기도하면 분명히 정죄받는다고 할 정도로 발전되었다. 이것은 최악의 종교다. 성직자-평신도 제도만큼 주님을 손상시키는 것은 없다.

 

내 영 안에는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집회에서 기도하고 외치도록 격려해야 한다는 완전한 확신이 있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주님의 움직임임을 믿는다. 주 예수님은 오늘날 종교와 문화에 맞서 움직이고 계신다. 주님은 최대한으로 반응하고 계신다. 우리는 모두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미워해야 한다.

 

에베소 교회에서는 니골라당의 실행이 다만 일종의 행위로 나타났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러나 결국 버가모 교회에서 그것은 행위로부터 교리로 발전했다. 행위가 교리로 발전된 것은 그 실행이 보통 정당화 된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실행할 뿐 아니라 가르침으로 취하고 있다. 얼마나 통탄할 상황인가! 오늘날 우리는 이 역겨운 실행과 「성직자-평신도 제도」의 가르침을 우리 발 아래 던져야 한다. 우리는 그 가르침뿐만 아니라 니골라당의 모든 행위를 쫓아버려야 한다. 여러분이 집회에 와서 다만 앉아 다른 사람이 기능을 발휘하기를 기다린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니골라당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해방되어야 하며, 벗어나야 하며, 깨뜨려야 하며, 외쳐야 한다.

 

오늘날 지방 교회 안에는 「복종시키는 사람들」도, 성직자도, 평신도도 없어야 한다. 모든 형제 자매들이 기능을 발휘하고, 기도하고, 간증하고, 외치고, 찬양하는 형제 자매가 되어야 한다. 집회에서 외치는 것을 작은 일로 생각지 말라. 내가 말하건대 이것은 주님의 반응이다. 니골라당을 때려 부수고 그리스도를 높이라! 시대는 변했다. 주님은 더이상 니골라당인 「성직자-평신도 제도」를 참지 않으실 것이다. 여러분이 평신도로서 집회에 와서 다른 사람들이 기능을 발휘하기를 기다린다면 여러분은 주 예수를 공개적으로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집회에서 『예수는 주!』, 또는 『오, 주 예수여!』라고 외치면 여러분은 극히 거칠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말하건대 주님은 역사적(歷史的)으로 반응하실 때마다 거칠게, 혹은 격렬하게 반응하셨다. 우리는 세례 요한이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보았다. 주 예수께서는 온순한 방법이 아닌 「거친 」 방법으로 소개되었다. 이제 계시록에서의 주 예수께서는 격렬한 그리스도이다. 그는 종교에 대하여, 실제가 없는 것에 대하여 그의 백성을 그분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에 대하여 격렬하시다.

 

주님에 대한 개인적이고도 합당한 사랑 없이 그를 위하여 수고하는 데에만 너무 빠져 있으면 우리는 분명히 발람의 길을 취할 것이고 결국 니골라당의 교리 안으로 빠질 것이다.


3. 이세벨의 가르침

 

두아디라 교회에 이르면 훨씬 더 악한 상황을 만나게 된다. 두번째 단계 뒤에 분명히 세번째 단계가 있을 것이다. 두아디라에서 우리는 이세벨이라고 부르는 여인을 보게 된다. 그 여인은 많은 교훈을 모았고 자신을 여선지자라고 부른다. 이제까지는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보았지만 이제는 이세벨의 교훈을 본다. 이것이 우리가 교훈을 떨쳐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교회 역사에 의하면, 두아디라는 로마 천주교회를 상징하며 그 영은 여기에서 그 거짓된 교회를 악한 여자 이세벨이라고 부른다. 많은 우상의 가르침과 실행을 교회 안으로 가져와 그것들을 그리스도에 관한 교훈과 혼합시킨 것이 그 여자다. 그 결과는 우상 숭배와 행음이다.

 

주님의 눈에 증오스런 것이 세 가지 있다. 그것은 우상 숭배와 행음과 분열이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모독이요, 행음은 인성(人性)에 대한 해(害)요, 분열은 그리스도의 몸을 절단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을 주의하고, 인성을 주의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주의한다. 하나님은 결코 어떤 우상도, 어떤 행음도, 어떤 분열도 참지 않으실 것이다. 여기 두아디라 교회에서 여자 이세벨은 그 여자의 악한 교리들을 가져왔고, 많은 우상 숭배와 행음을 일으켰다. 하나님의 신성이 모독을 당했고 합당한 인성이 해를 당했다. 이것이 로마 천주교다. 그것은 극도로 무시 무시한 것이다.

 

이세벨이라는 이름의 이 여자가 완전히 발전하면 큰 바벨론이 된다. 그 여자의 이름은 계시록 2장에서는 이세벨이지만, 17장에서의 이름은 큰 바벨론이다. 그녀는 또한 큰 음녀이고 땅의 음녀들의 어미라고 불리운다. 이것이 기독교 종교의 궁극적인 발전이다. 한 단계는 다른 단계를 인도하여 단계적으로 이뤄졌다. 첫번째 단계는 수고가 지나친 것이요, 두번째 단계는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요, 세번째 단계는 이교(異敎)에 문을 활짝 열고 직접 바벨론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바벨론은 기독교 종교의 완성이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종교적인 것을 피해야 한다.

 

선교 사업을 하고, 선교단을 조직하고, 왕국을 진행시키기 위해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잘못된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여러분은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종교를 형성하는 첫번째 단계가 될 수 있다. 여러분이 첫번째 단계를 취하면 두번째 단계를 취하게 되고 결국 무턱대고 흔들거리며 바벨론으로 가게 되기까지 세번째 단계를 취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회복의 시대에 있다. 그리스도 대 종교의 문제에 대한 나의 부담은 매우 무겁다. 이제부터 십 년이나 십 오년 후에 역사가 반복될까 두렵다. 우리는 수고하고 일하는 데 너무 지나쳐 주 예수에 대한 개인적이고 친밀한, 첫번째의 가장 좋은 사랑을 잃음으로써 곧 첫번째 단계를 취할지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종교를 형성하는 데 들어설 것이다. 우리는 곧 모든 교리를 취하게 되고, 종교의 완전한 과정을 걷게 될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주님의 회복 안에 있기 때문에 분명해야 한다. 우리는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단계와 아무 관계가 없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종교적인 것도 갖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4. 옳으나 죽었음

 

주님의 회복의 역사에서 주님은 두아디라로부터 사데로 움직이셨다. 사데는 두아디라로부터의 부분적인 회복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사데는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종의 죽은 종교가 되었다.

 

사데에 무슨 잘못된 것이 있는가? 잘못된 것은 많지 않았다. 죽었다는 것이 유일한 문제였다. 주님은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사데는 거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죽은 상태에 있었다. 우리는 교회 역사에서 마르틴 루터를 통하여 교회가 얼마만큼 회복되었으나 곧 모든 것이 죽게 되었음을 알고 있다. 죽은 방법으로 옳은 것을 갖는 것도 일종의 종교다. 우리가 건전하고 정통적이고 성경적 일지라도 죽었으면 우리는 다만 종교 안에 빠진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좋고 옳은 것이다. 그러나 죽은 방법으로 그것을 말하면 그것 또한 종교이다.

 

나는 소위 루터교 신자들을 많이 만났다. 우리가 아는 바와같이, 루터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에 대한 루터의 가르침에 굳게 서 있었고 그들은 이 문제에 관하여 나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백 퍼센트 옳았으나 교리뿐이었다. 그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나 결국 내가 발견한 것은 그들이 의롭다 함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교리적으로는 절대로 옳았으나 그들이 말한 것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일종의 종교다. 종교인들은 생명이 없이 어떤 종교적인 가르침을 붙잡고 있다.

 

이 원칙을 가지고 오늘날 기독교의 여러 무리들을 점검해보라. 여러분은 그들 중 거의가 다 원칙적으로 똑같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가르침을 붙잡고 있으나 생명이 없다.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들도 깨어 있지 않으면 생명 주는 영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가지고 있으나 생명은 없을 수 있다. 이것 또한 종교다. 우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 우리가 전하는 모든 것, 우리가 나타내는 모든 것이 생명으로 가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사데의 역사를 계속하는 것이다.

 

무엇이 사데의 종교인가? 그것은 아주 옳고, 전통적이고, 성경적인 것을 잡고 있으나 생명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 교회 생활과 교회 입장의 문제도 다만 옳은 교리로만 붙들고 생명을 떠날 수 있다. 성경적이고, 심지어 영적인 모든 것도 생명이 없으면 종교가 된다. 주님은 「죽은채 옳은」 사람들을 참지 않으신다. 이것이 네 번째 단계다.


5. 교리로만 풍성함

 

주님의 움직임의 역사에서, 5백 년 전에 마르틴 루터를 통한 회복에 뒤이어, 150 년 전에 소위 형제회를 통하여 주님은 또 한 단계를 취하셨다. 그것은 처음에 참으로 빌라델비아 교회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았다. 그들은 곧 라오디게아로 타락했다. 빌라델비아는 사데에서 진보한 것이다. 그러나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로부터 타락한 것이다.

 

라오디게아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라오디게아는 모든 것을 가졌고 실로 풍성했으나 사데와 같이 다만 교리에 있어서만 풍성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으나 주 예수께서는 그들이 차지도 덥지도 않다고 말씀하셨다.

 

교회 생활에서 우리도 어느 날 차지도 덥지도 않게 미지근하게 될 위험이 있다. 우리는 부요하다고 말할지 모르나 체험에 있어서가 아니라 교리에 있어서 풍성한 것이다. 우리는 풍성하나 죽어 있을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에게 부요하도록 금(金)을 사고, 눈을 뜨도록 안약을 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도 생명에 관한 풍성, 그 영에 관한 풍성, 교회에 관한 풍성을 다만 교리로 가지고 있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아주 부요하며 알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보지 못한다. 지식은 있으나 빛이 없을 수 있다. 교리는 있으나 금(金)이 없을 수 있다. 차지는 않으나 덥지도 않을 수 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그의 입에서 뱉어버리실 것이다.

 

이제 주님의 약속에 귀를 기울이자. 에베소 교회에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2:7), 버가모 교회에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2:17),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3:20)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우리가 모든 종교를 피하도록 깨어 있으면 주님의 누림을 계속 유지할 것이고 생명의 나무이자 감추인 만나인 그를 주어 먹게 하고, 우리는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우리로 더불어 먹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계시록의 이 두 장의 일곱 서신에서 우리는 종교에 속한 것이 주님에 속한 것과 혼합되어 온 것을 본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세기 동안 주님은 종교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에 속한 모든 것을 나누기 위하여 분별시키는 역사를 해오고 있다. 종교적인 것들은 모두 함께 모아져서 17, 18장의 큰 바벨론에서 완전히 완성될 것이다.

 

큰 바벨론은 종교의 완전한 발전이다. 그것은 이 서신들에서 종교를 향한 모든 단계가 이르는 곳이다. 반면에 주님의 분별시키는 모든 역사의 완전한 발전은 신부인 새 예루살렘이다. 주님의 신부를 위한 주님의 분별하는 역사는 오늘 지방 교회 안에 있다. 지방 교회는 신부를 예비하는 역사의 궁극적인 부분이다.

 

수세기를 통하여 우리는 교회 역사 안에 혼합을 향한 움직임이 있어왔음을 본다. 끝은 바벨론이다. 그러나 수세기를 통하여 또한 거룩하게 분별시키는 역사가 전진해왔다. 이 20 세기의 마지막에 주님은 큰 바벨론으로부터 완전한 분별인 지방 교회들을 회복시키고 있다. 결국 이것이 주님의 분별시키는 역사의 마지막 결과인 신부를 낳을 것이다. 할렐루야!

 

계시록 17, 18장 뒤에 19장에 이르면 신부가 단장되어 있다. 18장에서 우리는 주님의 부름을 듣게 된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4절). 그리고 19장에서 우리는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7절)라는 말씀을 본다. 주님을 찬양하자. 오늘날 우리는 종교적인 것으로부터 완전히 분별되고 어린양의 신부로 예비된 지방 교회 생활 안에 있다.

 

이 모든 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대 종교를 보았다.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결과는 신부가 될 것이고, 종교의 완전한 발전은 바벨론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대 종교는 결국 신부 대 바벨론이 될 것이다. 모든 종교적인 것으로부터 분별된, 신부를 예비하는 지방 교회 안에 있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할렐루야!


위트니스 리
[그리스도냐 종교냐, "새 종교를 향한 다섯 단계",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