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의 재고―서문, 머리말
교회
Eugene , 2012-05-21 , 조회수 (2252) , 추천 (0) , 스크랩 (0)

서문

 

이 책은 내가 최근에 상해(上海)와 한구(漢口) 두 지방에서 동역자들과 성경을 연구한 기록으로서 나의 수정을 통해 완성된 것이다. 이 원고는 말씀 전한 것을 기록한 것이므로 많은 부분이 구어체(口語體)이며 완전히 저술한 것이 아니므로 많은 부분이 다 저술한 것처럼 완전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청중을 크게 축복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두 차례에 전한 이 메시지들이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되어 축복의 범위가 확대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지난 십 년 동안 나의 친구들은 사역과 교회에 대한 나의 의견을 분명히 공포(公布)해 주기를 여러 번 요청했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고 지연한 이유는 나 개인에게는 참으로 의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의롭다 하는 모든 것을 나도 의롭다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정죄하는 모든 것을 나도 정죄한다. 나는 성경의 배경과 시대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결코 이런 저런 점에서 성경과 다를 수 있다고 말할 담대함을 감히 가진 적이 없었다. 나는 나와 나의 동역자들이 참으로 온갖 연약함 속에서 휘청거리며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는 이러하지만 우리의 교리는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를!

 

또한 변론이란 얼마나 무익한 것인지! 참으로 무엇을 공포했다면 어떤이는 그것을 공격의 목표로 삼고, 어떤이는 선전의 도구로 삼았을 것이다. 거기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바로 이런 까닭으로 질문에 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에 복음서원(福音書院)에서 출판된 이런 종류의 책들도 판매가 중단되었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입장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친구들이 우리의 간증을 오해하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간증의 내용은 결단코 교회의 외형 한 가지만이 아니다.

 

또 나의 사역은 기독교의 영적인 방면을 위한 것이라고 자인한다. 반면에 이런 종류의 일은 기독교의 기술면(技術面)의 문제에 불과하다. 내가 기독교의 기술면의 문제를 처리하는 것을 피하고 전적으로 나 자신의 영적인 사역을 주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울지! 그러나 주 안의 사랑하는 많은 친구들은 시종 나를 안식하지 못하게 하고 내가 이 문제를 처리하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해 계속 분명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날까지 이 면에 대해 묵묵히 지내왔다. 그러다가 고린도서를 쓴 자가 에베소서를 쓴 자이고 에베소서를 쓴 자가 고린도서를 쓴 것을 보고 비로소 나의 길이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에베소서의 진리로 인하여 어떤 심한 분쟁이 있은 적은 없었지만 고린도서의 가르침을 인한 변론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 에베소서의 진리는 영적인 것이고 범위가 하늘에 있는 것이므로 조금 차이가 있더라도 사람들이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고린도서의 가르침은 실행적인 것이고 범위가 땅에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조금이라도 소홀히할 때에는 모든 사람의 눈이 그것을 주목하게 된다. 참으로 고린도서는 너무 실제적이다! 이 점에 있어서 고린도서는 에베소서보다 더 우리의 순종을 시험한다.

 

본(本)에 관해서 몇 마디 말하고 싶다. 기독교는 명령 위에 세워진 것일 뿐만 아니라 본(本) 위에 세워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명령으로 행하시지 않고 먼저 교회 안에서 많은 방법을 안배하셔서, 후에 들어온 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즉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어떻게 행하는가를 보게 하신다. 모든 것이 다 추상적인 명령과 객관적인 규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모범과 주관적인 생활이 많이 있다. 이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다만 복종하라고 하지 않고 무언가를 느끼게 한다. 기독교에 명령이 있지만 명령 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사적(事跡)이 담긴 많은 역사(歷史)를 우리 앞에 두셨다. 이렇게 하여 그들이 한 것을 봄으로써 우리도 어떻게 행할 것을 알게 하신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하신 적이 없는데 왜 꼭 그것을 준행해야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그분의 행위와 인도하심과 그분의 교회를 보았는데도 아직 그분의 뜻을 모르는가? 아이가 가정에서 사사건건을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버지께 묻는가, 아니면 그의 형들이 씻고 사람들을 대하고 사람 앞에 나아가고 물러나며 겸손한 태도로 양보하는 것을 보고서 자신도 씻고 사람들을 대하고 사람 앞에 나아가고 물러나며 겸손한 태도로 양보하는 법을 알게 되는가? 언제나 우리가 보고 배우는 것이 듣고 배우는 것보다 더 많고 깊다.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왜 신약의 사도행전을 주셨고 구약의 많은 역사서를 주셨겠는가? 이것은 우리가 본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명령으로 아는 것보다 더 쉽기 때문이다. 태초에 그분은 한면으로 우리에게 분명한 명령을 주셨고 또 한면으로는 그분의 집에서 일하는 모든 방법을 안배하셨다. 그분은 별로 무엇을 말씀하시지 않은 것 같지만 그분은 이미 우리 눈 앞에서 행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분명히 보게 하셨다. 그분의 하신 일을 보고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이 일을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이냐고 물을 수 있는가?

 

많은 때 본과 명령은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 또 어떤 때에는 본의 가치가 명령보다 더 뛰어나다. 왜냐하면 명령은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한계를 알 수 없게 하는 어려움이 있는 반면에 본은 이미 준행된 명령이므로 그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뿐 아니라 이 명령이 어떻게 준행되었는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쉽게 하나님의 길을 알게 한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 안에서 본을 제해 버리고 명령만을 남긴다면 우리에게 별로 남는 것이 없게 된다. 명령은 명령의 위치를 가지고 있지만 본도 본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아는 사람은 마땅히 이 점에서 문제가 없어야 한다.

 

많은 변론을 피하기 위하여 나는 이 책을 쓰지 않기를 얼마나 원했었는지!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부담과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들에 대한 책임을 보았다. 이 책이 주님의 이름으로 영화롭게 되도록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형제들이 나를 긍휼히 여겨주기 바란다!

 

제 1장은 매우 전문적인 것으로서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 부분을 읽을 때 확신이 없다면 그것을 그냥 읽어가고 제 2장부터 읽기 바란다. 제 1장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멈춰서는 안 된다. 그 부분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다.

 

당신은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하여 제 2장부터 10장까지를 읽어야 한다. 당신이 이 책을 읽은 후에는 속에 하나님의 빛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빛이 없다면 이 책의 가르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빛이 있다면 성경의 진리에 순종하기 바란다.

 

물론 나는 이 작은 책에서 모든 문제를 다 다룰 수 없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것은 내가 다른 데서 이미 언급했었고 어떤 것은 다른 곳에서 앞으로 언급될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는 이 책의 중심점이 지방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임을 주의해야 한다.

 

1938년 2월 15일

 

상해에서 니토셍

 


머리말

 

우리의 한 가지 목적은 사역을 완전히 성경대로 하기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웅지(雄志)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가장 높은 표준이며 완전한 본이요 권위가 충만한 명령임을 믿는다. 우리는 어떤 훼손이나 부족함 없이 이런 것들을 좇아 행하려 하는 웅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모든 뜻에 대하여 거리낌이 조금도 없기 바란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주의할 뿐 아니라 성경의 본도 주의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물론 귀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원하고 성경의 본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생긴다. 그럴 때 사람은 자신의 잘못된 사상과 근거 없는 느낌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여겨 틀렸는지조차도 모르게 된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성경과 충돌되는 일을 하게 되고, 또 그것을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은 물론 성경의 본도 주의할 때 비로소 그 인도하심이 성령에서 나온 것인지를 증명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인도하심이 성경과 일치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사도행전에서는 사람을 이렇게 인도하고 오늘날에는 사람을 또 저렇게 인도할 수 없으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것이 겉으로는 다르더라도 원칙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그분의 뜻은 변함이 없다. 영적인 일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영원한 것이다. 영원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영원하며 시간에 따라 바뀌지 않는다.

 

그분이 행하신 모든 일에는 영원한 성질이 들어 있다. 이러할진대 우리가 어찌 사도행전에서의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고 오늘날의 하나님은 또 다른 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환경의 차이나 외형과 일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마음가짐과 길은 사도행전에서 지시한 것과 다를 수 없다.

 

또한 사도행전은 교회 역사(歷史)의 창세기이다. 바울 시대의 교회는 성령이 역사한 창세기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라고 말씀하셨지만 주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두 가지에는 차이가 있지 않은가?

 

아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것을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과 상반되고 다른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은 언제나 당초와 같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이 처음에는 아내를 내어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시다가 잠시 후에는 또 버릴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또 잠시 후에는 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시어 재삼재사(再三再四) 변하시는 것 같다. 그러나 주님은 본래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목적은 처음이나 나중이나 동일하다.

 

오늘도 당초와 여전히 똑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창세기」의 모든 명령을 보는 것은 후에 생긴 모든 약속에서가 아니다. 후에 생긴 모든 약속은 다 『너희...을 인하여』가 있어 하나님의 당초의 뜻과 똑같이 순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려면 하나님이 작년에 어떻게 사람을 인도하셨고 십 년 전에 어떻게 인도하셨고 백 년 전에 사람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보아야 할 뿐 아니라 당초, 즉 교회의 「창세기」로 돌아가 하나님이 본래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장 높은 뜻의 표시이다.

 

오늘날 환경과 배경과 사정에 많은 차이가 있지만 이런 것들은 우리의 본이 될 수 없고 우리를 지배할 권위가 없다. 우리는 반드시 본래로 돌아가야 한다. 환경이 어떠하든 배경이 어떠하든 사정이 어떠하든 하나님이 본래 우리에게 주신 본이 어떠한가를 물어야 한다. 환경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고 배경과 역사도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본래로 돌아가야 한다.

 

본래의 그것만이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고 하나님의 영원한 길이며 우리의 표준이요 우리의 본이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주신 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영적인 교리는 귀한 것이다. 우리가 언급한 성령의 충만과 그리스도의 승리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길 등등은 다 귀한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면적인 진리를 돌아보실 뿐 아니라 외면적인 진리도 돌아보신다. 이면적인 것이 귀하지만 하나님은 외면적인 것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신다.

 

에베소서와 로마서와 골로새서를 하나님이 쓰셨지만 사도행전과 디모데 전후서와 고린도 전후서도 하나님이 쓰신 것이다. 에베소서는 그렇게 높고, 로마서에는 은혜가 충만하고, 골로새서는 사람의 행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이 외에 다른 내용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역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하며 교회를 어떻게 조직하며 교회의 외형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도 언급하셨다. 하나님은 한 가지도 우리 스스로 생각하여 행하도록 남겨 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일에서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에게 생각하라는 여지를 남기지 않으셨다. 사람은 생각 없는 삯꾼을 쓰기를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은 너무 구상이 많은 사역자를 쓰기를 두려워하신다. 하나님은 다만 사람이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의 말을 듣기 원하실 뿐이다. 그분에게는 참모가 필요하지 않다. 바울은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라고 말했다. 사람은 모사가 되기를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사역에 관한 모든 일을 하나님이 다 안배하셨으므로 우리가 생각할 필요 없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며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말할 필요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고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물어야 한다. 영적인 것들이 귀한 것이듯 이런 것들도 똑같이 귀하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한 가지 일은 바리새인들이 그릇의 바깥은 씻었지만 그릇 속에는 더러운 것이 가득 차 있었으므로 주님의 책망을 받은 것이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그릇이 더러운 것은 상관 없고 속이 깨끗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이 깨끗하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밖도 깨끗케 되기를 원하신다. 외면적인 것만 있고 이면적인 것이 없는 것은 영적인 사망이다. 이면적인 것만 있고 외면적인 것이 없는 것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신다.

 

신약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뜻의 표현의 일부분이므로 다 영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은 매우 작고 중요하지 않게 보이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무의미한 일을 하신 적이 없다. 모든 것에 영원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 만일 사람이 그것들을 소홀히 여긴다면 상당한 영적 손해를 피하기 어렵게 된다.

 

우리는 성경 안의 외면적인 것들을 율법으로 지켜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죽은 것이고 영적인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외면적인 것들만 율법화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면적인 영에 속한 진리도 율법화되어 죽은 것으로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다.

 

사실상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은, 외면적인 것이든 이면적인 것이든, 성령 안에 있을 때에는 살아 있는 것이고 율법 안에 있을 때에는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이 외면적인 것이고 어떤 것이 이면적인 것인가를 나누지 말고 다만 그것이 성령 안에 있는가 율법 안에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번에 우리가 연구하는 성경은 그릇의 외부 문제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을 따르기 위한 율법과 규례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령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문제가 항상 변론되는 문제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 안에서 행한다면 외면적인 이 많은 것들도 아주 살아 있는 것들이 될 것이다.

 

바울의 서신 안에서 다룬 교회 문제를 오늘날 여러 저자들의 책에서 다룬 교회 문제와 비교해 보면 이 차이점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것이든 육체 안에 있을 때에는 좋은 것도 죽은 것으로 변한다. 모든 것은 성령 안에 있을 때만이 살아 있는 것이고 생명이다. 우리는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고 실행할 때 모든 것이 성령 안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기를 바란다.

 

이번에 우리는 세 가지 대상에 대하여 성경을 상고한다.

 

우리의 동역자들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바와같이 *우리 가운데에는 일정한 규례나 원칙이나 규정이 없다. 우리는 오직 성경의 빛을 따라 행하기를 바란다. 언제든지 우리에게 성경의 빛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실행한다. 우리가 얻은 빛이 충분하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빛을 보면 즉시 실행한다. 그 소경이 사람을 볼 때 처음에는 나무처럼 보였다가 후에는 사람으로 보였던 것과 같다. 우리가 첫번째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도 두번째에 가서는 이해하게 된다.

 

(주(註) : 내가 말한 「우리」는 동역자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동역자들은 단체이므로 우리라고 말할 수 있다 - 사도행전에서 동역자를 말할 때 사용된 「우리」를 기억하기 바람 - 이것은 성경이 허락한 것이다. 형제들 가운데 「우리」라는 말을 사용했다면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포함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범위가 너무 작아서 종파의 냄새가 있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우리」는 동역자들을 대표하여 말한 것이지 어떤 형제들을 대표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헌법을 쓴 적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일정한 헌법이 있으면 성경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헌법이 없고 오직 한 권의 성경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빛을 보면 즉시 실행하고 잘못 본 것은 정정한다. 우리는 이 성경에 근거하여 우리의 행한 것을 정정한다. 장로 문제에 있어서도 전에는 그렇게 분명하지 않았었지만 지금은 많이 분명해졌다. 만일 우리가 교만하지 않고 더욱 겸손하다면 더 많은 빛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더욱 분명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일정한 헌법 없이 오직 성령을 좇아 공개된 성경으로부터 언제나 새로운 빛을 받는다는 것을 선언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어떤 최종적인 결정이 없다. 언제든지 우리가 이렇게 최종적인 결정을 할 때 우리는 성경의 빛의 문을 닫아 버리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 밖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반드시 항상 우리의 마음을 열어 놓고 하나님의 새로운 빛을 받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잘못을 알기 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어 우리로 하여금 자신들의 잘못을 모르는 어두움에 머물지 않게 하시기 바란다!

 

주님 안에서 그분을 섬기는 우리가 몰라서는 안 될 많은 문제들이 있다. 이것들을 모른다면 우리의 마음가짐이 옳을지라도 지식이 결핍되어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되게 행하지 못하게 된다. 물론 신약에 있는 우리에게는 우리의 선지자로서 어떤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언(선지자로서 말함)을 멸시치 말고』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사역(ministry)이 무엇이든, 우리의 교리적인 사역이 무엇이든, 하나님의 일에서 우리가 사역하는 공통적인 원칙들이 있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보내시며,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의 발자취는 어떠하며,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며, 선교회와 교회의 차이가 무엇이며, 사역자들간에 어떻게 동역하는가 등등은 주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할 매우 중요한 것들이다.

 

이번에 우리의 집회는 과거의 모든 견해를 버리고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나와 빛을 얻음으로써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것』을 얻어 사역을 재고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식이 있은 후에 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그것을 율법으로 삼고 문자적인 것을 좇아 그것을 의지하여 생명을 잃게 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문제가 성령에 달려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빛을 보고 성경의 가르침을 알았을지라도 성령이 없다면 여전히 죽은 것이다. 어떤 종류든 그 종류의 환경 안에서 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사람은 반드시 공기의 환경에 있어야 생존하고 물 속에 두면 죽게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의 본을 성령 안에 둔다면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이 된다. 그릇의 바깥 부분같이 아주 작고 사람들이 중하게 보지 않는 것도 살아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본을 보는 동시에 그런 본들을 원칙이나 규례나 율법으로 삼아 지키는 것을 피하고 그것들을 성령 안에 둠으로써 살아 있고 생명에 속한 것이 되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원한다.

 

일반 형제들에 대하여

 

성경에 대한 이러한 상고는 단지 동역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많은 형제들을 위한 것이다. 과거 십여 년 동안 많은 동역자들이 많은 간증들을 나타냈었다. 각지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간증을 받은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분이 우리를 거절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많은 자녀들도 우리를 거절하지 않은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들은 우리의 영적인 사역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십자가의 메시지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한 것을 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머리시요 성령이 하나님의 능력이심을 안다. 그들의 소망은 들림받는 것이고 그들의 눈은 계속 왕국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각지에 있는 많은 형제들은 우리와 오랫동안 접촉하였는데도 아직도 우리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대체 사역자가 무엇이고 교회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들은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나 왜 우리가 이렇게 하는지를 모른다. 그들은 대체 무엇이 그 사역이고, 무엇이 일이고, 무엇이 사역자이고, 무엇이 교회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의 근거가 무엇이고 우리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초기에 우리는 형제들은 이런 것들을 알 필요 없고 다만 하나님 앞에서 믿음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고 사람 앞에서 사랑과 행위가 있는 사람이 되면 족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근년(近年)에 우리의 간증을 받은 사람들이 우리의 길을 모르기 때문에 몇 가지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다.

 

(1) 합당치 않은 바램 : 그들은 우리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마땅히 바라야 할 것 이상의 바램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한 사역자가 자신을 형제들에게 얼마나 드려야 하고 지방에 있는 교회는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사도」가 해 주기 바라고 교회가 마땅히 책임지어야 할 것을 「사도」가 책임지기를 바란다.

 

이러므로 지방에 있는 교회로 하여금 자라지 못하게 하며 사역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 본래 형제들이 힘써야 할 것을 사도가 힘써 주기를 바라고 교회가 책임져야 할 것을 사역자들이 책임지기를 바란다. 이는 지방에 있는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를 닮지 못하게 하며 사역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들에게 시켜 하게 하신 일을 할 수 없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역자가 어떠한 사람이고 사역이 어떠한 것인지를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여 사역자들에 대해 마땅히 가져야 할 이상(以上)의 바램을 갖지 않도록 사역을 재고할 필요가 있었다.

 

(2) 정확하지 않은 말 : 어떤 형제들은 사역의 원칙에 대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밖으로 정확하지 않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의 내용과 사역의 원칙을 모른 결과 가르침을 받지 않은 말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오해하게 했다. 이 무리들은 우리를 잘못 대표한 것이다. 그들이 말한 것은 우리의 뜻과 방법이 아니므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했을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형제들이 잘못된 말을 함으로써 생긴 불필요한 오해와 다툼을 피하기 위하여 형제들로 하여금 사역의 원칙이 어떠하고 동역자들이 왜 이렇게 행하는가를 알게 하기 위해 이 사역을 재고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형제들이 우리가 가는 길을 깨닫고 또한 그들 자신들의 책임을 알며 성경 안에서 하나님이 계시한 진리에 대해 분명해지기를 바란다.

 

우리를 책망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지난 몇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책망하고 비평해 왔음을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러나 이 비평은 두 방면에서 온 것이다. 한 방면은 수준이 높기 때문이고 한 방면은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수준이 지나치게 높은 사람은 아는 것이 많으므로 사람들이 말한 것에 대해 이것도 틀렸다고 말하고 저것도 틀렸다고 말한다. 어떤 것도 그들의 눈을 만족케 할 수 없다.

 

이외에 수준이 낮은 사람들도 비평할 줄 안다. 그들에게는 참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이것도 틀렸다고 하고 저것도 틀렸다고 오해하여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말을 함부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비평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비평한다.

 

지식이 높은 사람들에 대하여는 우리가 사람의 손에서 가르침 받는 것을 배우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겸손한 마음을 주시기 바란다. 알지 못하는 형제들을 위해서는 그들이 사역과 지방 교회와의 관계를 알고 비평하지 않도록 그들과 함께 사역을 재고하기 바란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 우리 자신을 위하여 변호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이 몇 년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변호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육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변론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고 분쟁할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밖의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말을 할 담대함이 없었다.

 

이 몇 년 동안 많은 일들이 나 개인에게 떨어졌고, 나를 책망하는 말도 다 읽어 보았다. 주님은 내가 그것을 읽을 때 변론하는 마음으로 읽지 않고 객관적으로 읽은 것을 알고 계신다. 나는 얼마나 그런 책들에서 빛을 얻어 자신의 잘못을 알기를 바랬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책들을 읽은 후 그들이 말한 대상은 우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 즉 그들의 생각 속에 있는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책망하는 교리는 우리가 말하는 교리가 아니고 그들이 책망하는 일들도 우리가 행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입을 열 필요가 없었다. 우리의 마음이 아픈 것은 하나님의 어떤 자녀들은 먼저 누구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헛되게 말한 다음 그런 잘못을 힘껏 공격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형제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또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 바란다.

 

동시에 우리는 또한 근거 없이 욕하는 것이 이유가 될 수 없으며 비웃는 것도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소리가 높다고 꼭 승리하는 것이고 잠잠한 것이 꼭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관하지 않고 입을 열지 않기를 배웠다.

 

우리가 사람에게 책망받거나 비평받는 것은 다 문제되지 않는다. 오직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사람의 책망을 두려워하겠는가? 아니다. 만일 사람의 그 책망이 불필요한 것이라면 두려워할 필요 없다. 만일 사람의 그 책망이 옳은 것이라면 진리를 받기를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나는 우리에게 틀린 것이 조금도 없다고는 감히 말하지 않겠다. 우리에게 많은 연약함이 있고 틀릴 때가 많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또 모든 형제들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기를 바란다. 여러분의 기도를 우리는 환영하는 바이다.

 

과거 여러 해 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많은 부분들이 있었고 오늘날 보다 분명히 보지 못한 부분들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완전히 어리석은 자였고 많은 부분에서 우리가 본 것은 사람을 나무로 본 것과 같았다. 이런 것을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얻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진리를 조금 더 보여 주셨다. 이것을 인하여 우리는 한면으로 우리 자신에게 자격이 없음을 느끼고 또 한면으로는 참으로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친구들에 대하여는, 우리에게 잘못이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여전히 인정한 잘못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환경과 배경과 사람의 사상은 다 하나님의 종을 지배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하나님의 종을 지배할 수 있다. 우리에게 틀린 것이 있다면 우리의 원칙이 오로지 성경의 명령과 본을 본받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따랐다는 데 있을 것이다. 만일 이것을 틀렸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틀린 것이라고 인정하거나 이 틀린 것을 고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분의 모든 일을 지배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명령과 본만이 그분의 모든 종들을 지배하심을 인정한다. 만일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우리의 틀린 점으로 본다면 우리는 오늘 이렇게 틀릴 뿐 아니라 영원히 이렇게 틀릴 것이고, 이 틀린 것을 하나님이 영원히 지켜 주시기를 바란다.

 

만일 우리를 책망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있는 것으로 믿고 성경의 본을 따라야 한다고 느낀다면 이 「사역의 재고」를 보기 바란다. 이 책은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참으로 어떤 사람들인가를 알게 할 것이고 사역의 원칙이 또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우리에게 무언가 가르쳐 줄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겸손히 받을 수 있게 하시기 바란다. 이 사역의 재고가 진리라면 주 안에 있는 형제들도 받기 바란다.

 

나 자신은 이와 같은 책을 출판하지 않기를 바랬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게 시키신 사역은 밖의 변론이 아니라 영적인 사역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책이 가치가 있지만 나의 사역 밖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여러 해 동안 나의 사역의 원칙에 대해 침묵한 이유이다.

 

오늘 나는 내가 이렇게 행하는 것이 『너희의 강요로 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런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사역을 좇아 하나님을 섬기기를 바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나는 할 수 없이『어리석은 자가 되어』이 책을 썼다. 이 메시지들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과 화목을 이루고』 나도 나의 사역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기 바란다. 하나님이 이번에 성경을 상고하는 일을 축복하시어 주님의 어린 양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기를 바란다.


워치만 니
[사역의 재고, "서문, 머리말",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