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중, 권속, 몸, 새 사람
교회
Eugene , 2012-05-20 , 조회수 (2363) , 추천 (0) , 스크랩 (0)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2:15, 4:24)와 골로새서(3:10)에서 새 사람에 관하여 썼을 때, 수신자들에게는 그런 용어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인식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 알려진 세계는 오늘날 알려진 것만큼 크지 않았다. 사람들이 세계에 관하여 말했을 때, 그것은 주로 로마 제국 아래 있는 지중해 연안의 세계를 가리켰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세계는 그렇게 작지 않았다. 세계는 지구 전체를 포함한다.

 

이천 년 전에는 세계를 평평한 것으로 여겼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세계가 구형(球形)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집회 안에서 우리는 모든 여섯 대륙에서 온 성도들을 볼 수 있다. 세계의 그 많은 나라들을 대표하는 형제 자매들을 볼 때, 한 새 사람에 대하여 사역하려는 나의 부담이 분발된다. 바로 이러한 때 우리는 한 새 사람을 보게 된다.


회중

 

사도들의 시대로부터 최소한 십 육세기까지 교회가 하락하고 있었음을 우리 모두는 시인해야 한다. 십 육세기에 이르러 교회는 밑바닥까지, 암흑 시대 안으로 타락했다. 그것은 더이상 하락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때 주님은 그분의 회복을 시작하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음」이라는 매우 기초적인 성경 진리로부터 회복을 시작하셨다. 루터는 교회에 관해서도 무언가를 보았지만, 이 문제를 관심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는 교회에 관하여 무언가를 보았지만 충분히 보지는 못했다.

 

2세기 남짓 지나서 진젠도르프 백작과 많은 다른 형제들, 이른바 모라비안 형제들이 교회에 관하여 좀더 많은 것을 보았다. 진젠도르프의 소유지인 보헤미아에서 그들은 교회의 실행을 갖기 시작했다. 그것이 교회 실행에 대한 주님의 회복의 첫걸음이었다. 교회사를 읽어보면 진젠도르프 이전에는 교회 실행에 관해서 그처럼 분명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실행이 좋았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1세기 후인 1800년대 초에 주님은 존 넬슨 다비와 다른 형제들을 포함해서 추구하는 한 무리를 일으키기 위해 보헤미아에서 영국으로 가셨다. 그들은 교회 생활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실행은 보헤미아에서 진젠도르프의 인도 아래 실행되었던 것보다 훨씬 진보한 것이었다.

 

이 형제들은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나온 사람들의 모임(엡 1:22, 고전 1:2)이라는 것을 보기 시작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받아 세상에서 나온 모든 성도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church)」라는 용어를 쓰지 않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이 용어가 잘못 사용되어 오면서 손상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타락한 기독교는 교회를 아마 「높은 탑」과 종이 있는 물질적인 건물로 생각했을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많은 부모들은 일요일 아침에 자녀들에게 「교회에 가자」고 말하는데, 그것은 나무와 돌과 벽돌과 유리로 된 건물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것은 얼마나 가련한 일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얼마나 가련한가.

 

형제회는 이 잘못된 개념을 버렸고, 심지어 교회라는 용어까지도 버렸다. 그들은 「회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이 후로 「하나님의 회중」은 형제회를 따라 회중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나는 「회중」이라는 단어에 동의한다. 「회중」이라는 단어는 「교회」보다 낫다. 헬라어 원문에서 교회는 「에클레시아」이다. 「에클레시아」는 부르심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의 어근과 기본 요소는 부르심에 해당한다. 「에크」는 「나오다」를 의미하고, 「칼레오」는 「부르다」를 의미한다.

 

교회는 와서 함께 모이거나 함께 집회하는 부르심받아 나온 자들이다. 형제회는 이것을 보았고, 그들의 가르침에서 이것을 매우 분명히 했다. 오늘날에도 그들의 책에서 이것을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형제회는 용어를 잘못 하는 것과 그것의 잘못된 개념을 버리고 「교회」에 대한 올바른 단어, 즉 「회중」을 사용함으로 좋은 출발을 가졌다. 비록 「회중(assembly)」이라는 영어 단어가 「부르심받아 나옴」이라는 헬라어의 뜻을 전달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이미 언급했듯이, 그 본래 뜻은 「부르심받아 나온 자들의 모임」이다.


권속

 

역시 형제회로부터 성도들은 교회가 「하나님의 권속, 하나님의 가족」임을 보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하는 에베소서 2장 19절에서 분명히 계시된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아버지시며 우리 모두는 그분의 자녀들이다. 그분의 자녀들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집 사람들이다.

 

헬라어로 권속은 거처인 집과 집 사람들인 권속을 가리킨다. 동일한 단어를 이 두 가지 의미로 번역할 수 있다. 에베소서 2장 끝에서는 권속을 하나님의 거처로 계시한다. 19절에서는 권속을 언급하고, 22절에서는 우리가 영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한다.

 

권속은 거하는 곳, 거처이다. 물질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권속은 결코 아버지가 거하는 처소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영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하나님의 가족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이다. 하나님의 거처는 그분의 자녀들로 지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분의 가족이면서 또한 그분의 거처이다. 가족이 곧 거처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요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을 온 우주에 선포할 수 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들이며 동시에 그분의 거처이다. 형제회는 그들의 가르침에서 이 점을 매우 분명히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인 회중으로부터 하나님의 가족인 권속으로 하나님의 거처로 계속 나아갔다.


그리스도의 몸

 

형제회는 또한 하나님의 가족이요 권속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보았다(엡 1:23, 고전 10:17, 12:27). 일부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란 우리와 그리스도가 얼마나 가까운가를 설명해 주는 비유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와 그리스도는 마치 몸의 지체가 그 머리와 가까운 것과 같이 가깝다. 우리는 이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내 몸이 하나의 비유라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내 몸은 하나의 예시가 아닌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사실이지 비유가 아니다. 요한복음 15장에 있는 포도나무는 비유로 여길 수 있으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은 비유라고 말할 수 없다.


새 사람

 

교회는 첫째로 회중, 둘째로 권속이요, 셋째로 몸이요, 마지막으로 새 사람이다. 에베소서 한 권 안에 이 모든 중점이 들어 있다. 「에클레시아」는 1장에 있고(22절), 권속은 2장에 있고(19절), 몸은 1, 2, 3, 4, 5장에 있으며(1:23, 2:16, 3:6, 4:4, 12, 16, 5:23, 30), 새 사람은 2장과 4장에 있다(2:15, 4:24).

 

새 사람은 교회의 가장 높은 방면이다. 개정된 표준역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은 에베소서 4장 24절에 있는 새 사람을 「새로운 본성」이라고 번역함으로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다. 여기의 새 사람은 헬라어 원문에서 2장 15절에서 사용된 것과 같다.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4장 24절에 있는 동일한 어구(語句)를 새 본성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4장 24절의 사람이라는 단어가 4장 13절에서도 쓰였는데, 이 구절은 『우리가 다... 장성한 사람에 이르도록』이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우리 모두가 장성한 본성에 이르도록』이라고 번역될 수 없다. 같은 장인 에베소서 4장에서 이 단어는 최소한 두 번-장성한 사람과 새 사람-사용된다. 우리는 교회가 몸일 뿐 아니라 새 사람이라는 것을 볼 수 있도록 전진해야 한다.


몸 안에서 선택이 없음

 

초기 단계에서 교회는 회중,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권속은 회중보다 교회의 더 높은 방면이다. 당신은 회중을 더 좋아하는가 아니면 권속을 더 좋아하는가? 회중은 다른 생명을 가진 사람들의 단체일 수 있지만, 권속은 한 아버지의 동일한 생명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다. 권속은 모임보다 훨씬 좋다. 교회가 회중이라고 말하는 것은 좋지만, 그렇게 달콤하지는 않다.

 

미국에는 회중(집회)이 있다. 미국에서 모든 회의는 집회-토론자들과 반대자들의 회합-이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회합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약의 회중은 부르심받아 나온 자들이 함께 모인 것이다. 부르심받아 나왔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부르심만 받고 아버지의 생명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놀랍지 않을 것이다. 부르심받았다는 것은 당신을 부르신 분의 생명을 갖고 있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회중」은 생명을 시사하지 않지만, 가족은 생명을 시사한다.

 

몸은 권속보다 교회의 더 높은 방면이다. 권속 안에는 「집 사람들」이 있지만, 몸 안에는 지체들이 있다. 한 가족의 구성원들이 기쁠 때에는 함께 머문다. 그러나 기쁘지 않을 때에는 싸우고 헤어진다. 그렇지만 몸에 있는 팔은 어깨에게, 『너에 대해서 기분이 좋지 않아. 너를 떠나고 싶어.』라고 말할 수 없다. 팔은 어깨 아래에 있기 때문에 어깨를 떠날 수 없다. 팔이 어깨를 좋아하든지 좋아하지 않든, 팔의 운명은 그 어깨와 함께 있는 것이다.

 

젊었을 때 나는 「어깨」 아래에 있었다. 많은 때 나는 거기에 있다는 것이 언짢았다. 하지만 「팔」처럼 내가 어깨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어깨의 잘못도 아니고 내 잘못도 아니었다. 그것은 머리의 안배였다. 나를 커다란 어깨 아래에 팔로 둔 것은 창조자의 안배였다.

 

나는 커다란 어깨 아래에 있을 뿐 아니라, 또 대단히 많은 「작은 손가락들」 위에 있도록 안배되어 있었다. 이 모든 작은 손가락들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주었는지 여러분은 모른다.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기를 원했을 때,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일하기를 좋아했다. 만약 내가 잠잠하기를 좋아했다면, 그들은 줄곧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손가락들을 잘라버린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손이 없는 팔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권속보다 우리에게 더 구속력이 있다.

 

만약 당신이 교회가 몸이라는 것을 보았다면, 당신은 결코 교회를 떠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교회가 모임이라는 것만 보았다면 당신이 기쁠 때는 머물겠지만, 기쁘다고 느끼지 못할 때에는 떠날 것이다. 심지어 권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단 당신이 가족 중 한 사람에 대해 마음이 상했다면, 당신은 떠나기로 결심할지도 모른다. 만약 당신이 교회가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것만 보았다면, 당신은 그렇게 견실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형제들과 함께 행복감을 느낄 때에는 머물러 있겠지만, 행복을 느끼지 못할 때에는 떠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몸의 한 지체라는 것을 보았다면, 당신에게는 선택이 없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몸에 대해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이 그들의 실행에서는 실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 그들은 한 「몸」 안에 있지만, 2주 후에는 또 다른 「몸」 안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달 후에는 세번째 「몸들」을 가지고 있을 때, 이들 중 어떤 것도 그 몸이 아니다. 그 몸은 유일하게 하나이다. 에베소서 4장 4절은 「한 몸과 한 영」을 말한다. 「몸들」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그 몸의 지체라면, 당신은 결코 떠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만일 이것은 그 몸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당신이 틀렸든지 아니면 당신이 만나는 그룹이 잘못된 것이다.

 

나는 체험해 보지 않은 것을 여러분과 교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몸을 체험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체험하고 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든지 심하게 대하든지, 나의 운명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나에게는 선택이 없다.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우리 모두 서로를 사랑하라는 것이다(요 13:34). 하지만 우리는 천연적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얘기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천연적인 생각으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이해한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회중과 권속에 모두 적용될 수 있다. 가정에서 부모들은 항상 자녀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당신은 또한 그 몸의 지체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몸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회중과 권속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과 조금 다르다. 내가 이미 언급했듯이, 회중 안에서는 내가 여러분에 대해 기쁘다면 함께 머물겠지만, 마음이 언짢으면 쉽게 떠날 수 있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내가 여러분에 대해 기쁘다면 함께 얘기하겠지만, 언짢다고 느끼면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몸에서는 결코 떠날 수 없다. 당신에게는 선택이 없다. 많은 때 내 눈에 눈물이 고였지만, 나는 행복했다. 한면으로 우리는 몸 안에 있기 때문에 행복하겠지만, 또 한면으로 몸의 생활이 그렇게 즐겁다고 생각지는 말라.

 

많은 때 나는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첫째,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나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일 수밖에 없으며, 태어나는 것에 관해서 내게는 선택권이 없다. 사람이기 때문에 또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외에 달리 선택이 없다. 셋째,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나는 교회 안에 있어야만 한다. 만약 교회 안에 있지 않다면,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내가 사람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 나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며,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 결국 나는 그 몸의 지체이다.

 

수년을 거쳐 오면서 나는 많은 성도들이 야심이 있고, 지위를 얻기 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한 형제가 장로가 되면, 그가 장로가 되지 않기란 매우 어렵다. 그는 장로 직분을 잃어버리면 괴로워할 것이다. 다른이들이 그를 괴롭히지 않는데도 그는 자신의 야심 때문에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도자가 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들은 교회에서 장로가 될 수 없다면, 최소한 봉사 그룹의 인도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만약 당신에게 섬기려는 부담이 있고 교회가 무엇인지를 보았다면, 교회 봉사에 참여하고자 하는 갈망을 갖게 될 것이다. 봉사 그룹이 있든지 없든지, 당신은 다만 와서 섬길 것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순수하지 않은 동기이다.

 

내 중점은, 몸 안에서 그런 대단한 인물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평강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합당한 교회 생활 안에 있어야 하며, 합당한 교회 생활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 몸에 자신을 복종시켜야 한다. 나에게는 선택이 없다. 당신에게는 선택이 있는가?

 

만약 당신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느낀다면, 당신은 몸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몸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그 몸의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심지어 사람이 되는 것을 주의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매우 비참한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단순하게 처신해야 한다.


유일한 인격을 지닌 한 사람인 교회

 

교회는 회중이요, 권속이요, 몸일 뿐 아니라, 한 사람이다. 이보다 더 높은 항목은 없다. 새 사람은 교회의 가장 높은 방면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에게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반면에 새 사람으로서 교회에게는 인격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오십 년 전에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어느 날 나는 교회가 새 사람이라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내 노력을 끝내 버렸는데, 이는 새 사람 안에는 오직 한 인격만 있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3장 10절과 11절이 오늘날처럼 그렇게 분명한 적이 없었다. 이 구절들은 『새 사람을 입었으니... 거기에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고 말한다. 새 사람 안에서는 당신에게 어떤 지위도 없고, 나 역시 그렇다.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미워할 지위가 없다. 우리에게는 심지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지위도 없다. 당신은 나에게 다른 이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칠지 모르지만, 새 사람 안에는 나의 여지가 없다. 다른 사람을 아주 친절하고, 다정하고, 부드럽게 대하라고 가르칠지 모르지만, 나는 교회가 새 사람이라는 것을 보았고, 이 새 사람 안에는 나를 위한 여지가 없다. 이 새 사람 안에서는 그리스도가 만유이시다.

 

11절에 있는 「만유」는 모든 사물이 아닌 사람들을 의미한다. 새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이시다. 그리스도는 당신이요 그리스도는 나이시다.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신다. 그분은 새 사람의 모든 지체들이시고 모든 지체들 안에 계신다.

 

많은 사람들이 이 단어를 「모든 것」으로 잘못 해석한다. 그들은 이것을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 되신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이 구절의 「만유」라는 단어는 에베소서 4장 6절에 있는 것과 같은데, 그 구절은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고 말한다.

 

여기의 「만유」는 모든 사물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사물의 아버지가 아니라 모든 사람, 곧 믿는이들의 아버지이시다. 그것은 골로새서 3장 11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새 사람 안에는 당신을 위한 여지가 없다. 다시 말하면, 이 새 사람 안에는 유대인을 위한 여지가 없고 헬라인을 위한 여지도 없다. 미국 사람을 위한 여지도 없고, 영국 사람을 위한 여지도 없다. 일본 사람도, 중국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이 새 사람 안에는 천연적인 사람을 위한 여지가 없다. 미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여지가 없을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여지도 없다. 이 새 사람 안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아무런 여지도 없다. 빠른 사람을 위한 여지가 없을 뿐 아니라 느린 사람을 위한 여지도 없다. 할례당은 종교적인 사람들을 의미하고 무할례당은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종교적인 사람들에게도, 비 종교적인 사람들에게도 이 새 사람 안에서는 여지가 없다. 문명화된 사람들이나 야만인들에게도 여지가 없으며, 종들과 자유인들에게도 여지가 없다. 이는 이 새 사람 안에서는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당신이 되시고 또 내가 되신다. 그리스도가 우리 모든 사람이 되신다.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이시고,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들 안에 계신다. 새 사람 안에서의 문제는 겸손하거나 친절하거나 부드럽거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한 인격의 문제이다. 이 새 사람 안에서의 문제는 도덕성이나 윤리나 선함이 아니다. 이 새 사람에게는 오직 한 인격만 있다.

 

교회의 가장 높은 방면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는 새 사람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 즉 단체적인 한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 우리 모두가 가장 높은 이상 안으로 인도될 수 있도록, 또 교회가 단지 모임이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무리나 하나님의 가정의 권속이나 그리스도의 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그리스도-을 따라 창조된 새 사람임을 볼 수 있도록 주님을 앙망한다. 새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라 창조되었고, 그 인격으로 그리스도를 인격 삼는다. 이 새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실현하고자 하시는 것을 성취할 수 있다.


위트니스 리
[한 새 사람, "회중, 권속, 몸, 새 사람",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