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를 구하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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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gene , 2012-05-19 , 조회수 (3272) , 추천 (0) , 스크랩 (0)

소개의 말

 

보는 것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역사하여 우리가 그분과 완전히 하나로 연합하여 그분의 생명과 성품을 소유하여 그분과 똑같은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과 그분의 본성의 모든 것을 그 아들 그리스도 안에 두시어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이 그 아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심은 곧 그분 자신과 그의 본성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육신 안에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분의 본성에 속한 모든 것을 얻게 하는 절차를 다 밟으시고 부활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 들어 가시고 승천으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강림하여 그분을 믿고 영접하는 모든 사람 안에 들어오셨다.

 

이때에 우리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을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셨고 또한 성령 안에서 우리 안에 역사하신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본성에 속한 모든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얻은바 되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 계시며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얻었다면 그리스도를 얻은 것이고 그리스도를 얻었다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본성에 속한 모든 것을 얻은 것이다.

 

또한 우리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도달하신 모든 것-죽음, 부활, 승천과 영광에 들어가심 등-은 우리의 체험과 우리의 도달한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과 그분의 본성에 속한 모든 것과 그리스도께서 체험하고 도달하신 모든 것은 이미 우리의 것이 되었다.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우리는 이미 이 모든 것을 얻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과 우리를 위해 이루신 모든 것을 우리는 다 얻었다. 우리는 더이상의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이후로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얻은 것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사도 바울을 따라 계시를 구하는 기도가 있기를!

 

위트니스 리

 

 

계시를 구하는 기도

 

성경 : 에베소서 1:3-23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역사와 영원 안에서의 그분이 예정하신 영원하신 계획을 알기 시작할 때 우리는 갈수록 에베소서가 우리에게 준 빛이 얼마나 많고 높고 특별한지를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에베소서에 있는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두 가지 기도를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기도 중 하나는 1장에 있고 하나는 3장에 있다. 1장의 기도는 기초적인 것이고 3장의 기도는 건축을 위한 것이다. 1장에서의 바울의 기도는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알려 주고 3장에서 바울이 기도한 목적은 우리에게 주님과의 관계를 알려줄 뿐 아니라 우리와 교회와의 관계를 알려준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울이 1장에서 한 기도이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1:17)라고 기도하였다. 바울이 그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한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17절). 이것은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이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그 성취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바로 그분의 아들이 되도록 부르신 부름이다. 장래의 이 아들들은 그분의 기업이 될 것이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이 이미 정해졌다. 그러나 장래의 영원 안에서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은 기업을 얻으실 것이다. 이 기업은 어떠한 영광의 풍성이 있게 될지! 과거 영원 안에서 하나님에게 어떤 정하심이 있고 미래 영원 안에서 하나님은 어떤 것을 얻게 되는데 이 두 가지를 합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목적이다. 여기서 바울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다.

 

『그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이 어떤 능력으로 그분의 목적을 달성하고 그분의 계획을 성취하시는가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것은 특별히 오늘날 우리와 그분의 관계와 그분의 영원한 계획과의 관계를 말해 준다.

이 몇 가지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계시를 얻어야 한다.


참으로 하나님을 앎

 

여기서 바울이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는 데 있어 우리에게 알리고자 한 첫번째 사실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다.

 

바울이 아덴을 지날 때 어느 단 위에 『알지 못하는 신』(행17:23)이라고 쓴 것을 보았다. 당시 아덴 사람의 머릿속에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분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사상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었고 그들의 철학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 없었다. 그들에게 이상(理想)과 추측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알 수 없었다. 마치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같다.

 

주 예수님이 세상을 떠날 무렵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고 하셨다. 그분은 영생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 준다.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을 알았다. 당신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확실히 하나님을 알았고 영생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 『지혜와 계시의 영을 저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기도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영생을 얻고 하나님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러한 인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가 주님을 믿거나 주님을 믿은 지 몇 년이 되었다면 하나님에 대해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는 알지만 많은 때에 우리는 두뇌의 도움과 느낌의 도움이 있어야 만이 앞에 있는 노정을 갈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이것 외에 많은 사상의 도움이 필요한 것 같다. 우리에게 많은 사상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이 견고하지 못하고 말할 근거가 불충분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사상의 도움이 있어야 만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사상의 도움이 없을 때 어떤 이유나 교리적으로 이해가 안갈 때 앞의 노정을 달릴 수 없는 것과 같다. 많은 경우 우리는 어떤 느낌이나 열렬한 감정, 즐거운 느낌, 기쁜 느낌, 곧 하나님 외에 이러한 느낌들이 있어야 만이 앞의 노정을 달릴 수 있다.

 

그러나 어느날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어 그분 자신을 새롭고 특별하고 더 깊이 우리에게 계시해 줌으로써 우리가 그분을 알 뿐 아니라 참되게 알게 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알았다. 나는 보았고 분명해졌다. 어떠한 사상의 도움이나 감정의 도움이나 어떠한 도움도 필요치 않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이 말의 의미를 한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어느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었다. 『나는 주님을 믿은 지 벌써 이십 이 년이 되었는데 처음 이 년 동안에 나는 많은 힘을 들여 믿으려고 애썼다. 내가 구원받았는지의 여부에 있어서 나는 확실히 구원을 받았고 누구도 내가 구원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고 내게 영생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사람들이 내게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을 때 나는 믿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확신있게 「믿습니다」라고 말하라면 나는 자신을 붙들고 믿어야 할 것 같다. 만일 내가 자신을 붙들고 있지 않으면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할까봐 두렵다. 내가 주 예수를 믿은 그 믿음은 많은 힘을 들여서 믿는 믿음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가?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가? 이것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나는 내 믿음을 견지하기 위해 많은 이유와 교리를 필요로 한다. 내게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이유와 올바른 많은 교리가 있어야 만이 안심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수 있다. 나는 사상의 도움이 있어야 만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오늘 나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간증할 수 있다. 오늘 나는 내 하나님을 참으로 안다. 나의 믿음을 돕기 위해 어떠한 이유도 필요없고 나의 믿음을 보호하기 위해 어떠한 외적인 증거도 필요없다.』

 

형제 자매들이여,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앎은 계시로부터 온다. 교리를 잘 이해하는 데서 오지 않고 당신 속에서 아는 것이다. 이것은 물이 가득찬 컵을 물이 흐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고 다니는 것과 같이 갓 구원받을 때에 갖는 그러한 인식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물이 가득찬 컵을 조심스럽게 들고 다니는 것과 같이 주 예수를 믿었다. 그들은 이것저것을 듣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어느날 하나님이 그들에게 계시를 줄 때 그들은 속에서 그분을 알게 되고 참으로 그분을 알며 보게 됨으로 아무 문제가 없게 된다.

 

형제 자매여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알았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믿든 믿지 않든 그것은 당신에게 도움을 주거나 당신을 요동케 할 수 없다. 설사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이 일리가 있고 성경은 완전히 거짓된 것이므로 믿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가 믿어야 한다는 이유보다 더 많다 하더라도 그 이유들이 당신을 요동케 할 수 없다. 당신은 담대히 「내 안에서 이것을 안다. 나의 앎은 사상보다 더 깊고 감정보다 더 깊다. 내가 안에서 아는 이 앎은 밖의 어떤 방법으로도 요동케 할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실로 이것은 큰 문제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감정에 의해 생활한다. 만일 오늘 기쁘고 즐겁다고 느껴지면 그는 하나님이 참으로 선대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일 모든 것이 냉랭하게 느껴지고 어떤 것도 맛볼 수 없다고 느낄 때 그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그분을 알기 어렵다라고 말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감정의 부축함을 받고 산다. 어떤 감정이 사라질 때 그는 흔들리고 굳게 서지 못한다.

 

이러한 상태는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느낌이 냉랭하든 뜨겁다고 느끼든 암담하고 흥분된다고 느끼든 하나님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문제삼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께 이끌려질 필요가 있다. 나의 인식은 나의 기쁨보다 더 깊고 내 고통이나 내 어떠한 느낌보다 더 깊은 것이다. 밖에 어떤 즐거움이나 고통스러운 여러가지 느낌이 있지만 나는 그것들을 상관하지 않고 내 안에서 하나님을 안다. 형제 자매들이여, 오직 이러한 사람만이 견고히 설 수 있고 요동하지 않을 수 있으며 오직 이러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다.

 

전에 한 형제는 주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성경에 잘못된 부분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듣고서 마음이 아파서 울 뻔했다. 그는 성경이 옳다고 믿었던 고로 어찌 성경이 틀릴 수 있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그러한 의문을 던졌던 사람은 여러 곳을 지적하면서 그에게 확증해 주었다. 그러자 이 형제는 만일 성경이 정말 틀렸다면 어떻게 하느냐고 생각하며 마음 속에 조금 두려움을 가졌다.

 

그는 이러한 의문을 한 노자매에게 가져갔다. 그는 그녀가 주님을 사랑하며 성경을 사랑하므로 성경에 이러한 틀린 점이 있다는 것을 볼 때에 그녀가 조급해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말을 듣고서 그 자매는 아무일 없는 것 같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형제는 당신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내게는 문제가 된다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 형제는 그 자매에게 그러한 의문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 자매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이러한 의문의 해답을 얻는 데 있지 않다고 말해 주었다. 그런데도 이 형제는 당신과 같이 나이 든 사람에게는 이러한 의문이 문제되지 않을지 모르나 나같이 논리적인 젊은 사람더러 이것을 그냥 통과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후에 이 형제는 약 일 년 동안 성경을 통독하고 이러한 의문들을 연구한 결과 성경이 틀리지 않고 옳다는 많은 증거를 찾아냈다. 그래서 그 마음 속에 있는 이러한 무거운 돌이 내려 놓아졌다. 그러나 만일 이 형제가 참으로 하나님을 알았다면 헛되이 일년 동안 그것을 인해 염려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형제 자매여. 만일 당신이 참으로 하나님을 알았다면 더 많은 의문이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돌(부담)은 당신 마음에 있지 않을 것이고 당신을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저것을 증명할 수 있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할 수 있고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렇게 참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은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분이다. 참으로 그분을 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증명해야 할 많은 이유나 분명한 교리를 찾아내는 데 있지 않고 계시에 달려 있다. 이 계시는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게 속에서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 계시의 영을 구해야 한다. 이러한 앎은 믿는이의 기초이므로 이 앎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기업을 앎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참되게 알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의 부르심이 어떠함과 성도들 가운데 그분이 얻으실 기업의 어떠함을 알기 원하신다. 바꾸어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알 뿐 아니라 영원 과거부터 영원 미래까지의 그분이 하신 일과 그분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을 알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에베소서가 영원 과거에서 영원 미래까지의 문제를 다루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책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성도들 가운데 그분이 얻으실 기업과 우리 믿는이에게 하나님이 주신 능력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참되게 깨닫고 영원 과거부터 영원 미래까지 하나님의 행하신 역사를 보았다면 이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 각 사람이 받은 부르심과 관계가 있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얻으실 기업과 관계가 있으며 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추상적으로 보거나 우리와 무관한 것으로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거나 알더라도 한 쪽으로 제쳐놓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형제 자매여,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우리 개개인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이 계획을 붙잡으려 해도 붙잡지 못하고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우리가 받은 부르심과 관련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역사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기업을 먼저 보기로 하자. 그런 다음 믿는 우리에게 주신 능력에 대해 보기로 하자.

 

우선 우리가 받은 부르심에 대해 보자. 18-19절: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들 앞에 소망이 놓여져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소망을 천당에 둔다. 천당이 있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아니요 그분의 부르심이 우리에게 주신 소망도 아니다. 그러면 이 소망은 무엇인가? 4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닮게 하는 것이다. 적극적인 면에서는 거룩하게 되는 것이고 소극적인 면에서는 흠이 없게 하는 것이다.

 

형제 자매여, 이 얼마나 놀라운 부르심인가! 만일 당신이 약해진 적이 없고 당신이 문제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이 부르심이 얼마나 특별한지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얼마나 연약한 사람이고 얼마나 쓸모없는 사람이며 얼마나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 부르심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를 거룩케 하려고 부르시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날 부르셨습니다. 당신은 나로 아무 문제가 없고 당신과 같이 온전하게 되도록 부르셨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언젠가 그분이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오늘날 우리가 아무리 약하고 쓸모없고 문제 투성이이고 흠이 많다 하더라도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그분 앞에 설 수 있게 됨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심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정하셨으므로 필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소망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소망이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목적은 바로 이것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이 얻으실 기업에 대해 보기로 하자.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8-19절).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이 얻으실 기업은 대체 무엇인가? 성도들이 바로 하나님의 기업이요 하나님의 재산이다. 여기에서의 뜻은 하나님이 기업을 성도들에게 준다는 말이 아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기업이 된다는 말이다. 바울은 성도들 가운데 곧 그분의 자녀들 가운데 하나님이 기업을 얻으시는데 그 기업은 영광스러울 뿐 아니라 그 영광의 풍성이 있다고 말한다.

 

에베소서 1장 5절과 11절에는 동일하게 「예정」이라는 단어가 있다. 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으니(원문 참조)』. 여기서는 우리가 아들의 명분을 얻도록 예정되었다고 말한다. 11절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기업이 되도록 예정되었다고 말한다. 5절에서 말한 것과 10절에서 말한 것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두 가지는 또 서로 연결된 것이다.

 

영원 과거부터 영원 미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아들을 얻고자 하시는 영원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많은 사람들이 이 아들의 문제가 얼마나 중대한지를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이 아들을 얻는 데 있고 하나님의 계획이 아들과 관계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은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은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안에 넣으사 능히 우리로 아들이 되게 하셨음을 보여 준다. 히브리서 2장 10절은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목적이 달성될 때는 바로 많은 아들들이 영광 안에 있을 때이고 하나님이 많은 아들들을 그분의 영광 안으로 이끌 때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하나님의 목적은 아들들을 얻는 데 있다. 하나님은 이 아들들을 그분의 기업이라고 부르신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1장은 한 면으로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을 얻기 위해 예정하셨다(5절)고 말하고 다른 한 면으로는 그분의 기업을 얻기 위해 우리를 예정하셨다(11절)고 말한다.

 

하나님의 기업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기업은 이 기업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을 그분의 아들이 되도록 예정하셨고 또한 그분의 기업이 되도록 예정하셨다. 바울은 우리 마음 눈이 밝혀져 빛을 받으므로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이 얻으실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보기를 바랬다. 그 영광은 무엇인가? 이는 하나님 자신과 같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속한 사람이 되고 그분의 기업과 그분의 아들들이 되도록 우리를 택하셨다. 우리는 우리가 이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우리 눈을 열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자신을 알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의 역사와 계획과 목적을 알기를 원하신다. 이러한 앎은 이상을 필요로 한다. 만일 우리에게 이상이 없다면 우리가 본 것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 우리는 종종 현재 우리 손에 쥐고 있는 조그마한 일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본다. 우리는 우리의 일이 조금 좋아질 때 좋아하고 우리의 일이 조금 잘못될 때 괴로와한다. 우리의 안목은 이렇게 작은 범위에 국한되어 있어 하나님 앞에서 더 큰 것을 보지 못한다. 이것은 너무나도 비좁은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새로 나온 천 원짜리 지폐를 보고서 놀라 그 지폐를 그의 전 재산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많은 때에 우리의 안목도 이와 같이 비좁으므로 그 영원한 것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야가 영원 과거부터 영원 미래까지 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비좁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우리 눈을 열어 주시기 바란다.

 

사람은 너무나도 비좁고 우리 자신은 너무나도 협소하다. 우리가 하는 일 또한 너무나도 보잘 것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작은 영역에서 나와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과 성도 가운데 그분이 얻으실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보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사람에게 필요가 있는 문제만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의 필요인 것이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에게 어떤 필요가 있어서 전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께 어떤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은혜의 복음과 왕국의 복음을 두 가지 다른 복음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두 가지 다른 복음이 아니라 복음을 두 방면에서 본 것이다. 사람 편에서는 은혜의 복음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왕국의 복음이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에게 돌아올 많은 사람들을 얻고자 하시고 그분의 목적을 성취할 많은 사람들을 얻고자 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일은 사람 편에서만 힘써야 할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 편에서도 힘써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하시기 때문에 우리 또한 하나님의 이러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얻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영세에 관한 이상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이상은 당신의 일을 바꾸어 놓을 것이며 당신의 관점과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변하게 할 것이다. 이 이상을 본 후에 당신은 과거 당신의 협소한 일을 계속하지 않을 것이고 과거의 관점과 방법 안에 계속 머무르지도 않을 것이며 당신의 작은 득실에 계속 남아 있지도 않을 것이다.

 

어떤 형제 자매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해 들었지만 나가서 일하고 복음을 전할 때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의 일을 하나님의 계획과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 줄을 모릅니다. 내가 하는 일에 분주하고 바쁘다 보면 내가 들었던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잊어버리게 되고 점차적으로 그것이 흐려지고 보이지 않게 됩니다. 내가 처음 들을 때는 아주 분명했지만 얼마 후에는 잊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들은 것을 쉽게 잊어버리지만 우리가 본 것은 쉽게 잊어버리지 않으며, 교리는 쉽게 잊어버리지만 이상은 쉽게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당신이 보았는가의 여부와 당신의 마음 눈이 하나님에 의해 열려졌는가에 달려있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 눈을 열어 주사 당신이 참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기업과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보았다면 당신은 자연히 당신이 하는 일이 크든 작든 그것을 하나님의 계획과 연결시킬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연결 할 수 없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로 간주될 수 없다.

 

우리가 이상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에 의해 우리 눈이 열릴 필요가 있다. 이러한 구원은 우리를 자신의 협소한 영역에서 구원해 내는 큰 구원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영원 안에서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하루도 안식할 수 없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성취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루도 만족할 수 없게 된다. 우리 마음 속에 염려하고 우리 몸에 짊어지고 우리 손으로 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그것이 될 것이다. 작은 돌멩이 하나가 움직이는 것까지도 영원 과거부터 영원 미래까지의 그 일을 건축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이상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간구한다. 우리가 이러한 이상을 잊어버리고 이러한 이상보다 더 적은 우리의 일을 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하나님은 꼭 우리에게 큰 일을 하라고 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한 모든 일이 그분의 큰 영역 안에 포함되고 그분의 큰 목적과 연결되며 그분의 큰 역사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신다. 일생 동안 당신이 행한 일은 아마도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일이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라고 하는 일이라면 확실히 놀라운 일일 것이며 영원 과거부터 영원 미래까지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의 일부일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앎

 

에베소서는 영원 과거에서 영원 미래까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한 면에서는 영원 과거를 보여 주는데 그 영원 과거 안에서 하나님에게 어떠한 예정하심과 계획과 뜻이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다른 면에서는 영원 미래를 보여 주는데 그 영원 미래 안에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실 것이고 그분 자신이 얻고자 하신 것을 얻으실 것임을 말해 준다.

 

그러나 이 두 영원 사이 곧 시간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영원 과거 안에서 정하신 일과 영원 미래 안에서 그분이 얻고자 하시는 것을 어떻게 하시는가? 여기서의 바울의 기도는 객관적인 방면과 주관적인 방면을 언급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 자신을 알고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과 성도들 가운데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알게 하는 것은 객관적인 면이고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 하는 것』은 주관적인 면이다.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알고 영원 과거부터 영원 미래까지의 하나님의 역사를 깨달은 후에라야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주관적인 방면이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먼저는 객관적인 면에서 보는 것이고 그 다음이 주관적인 면의 역사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 순서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제쳐놓고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아는 것도 제쳐놓은 채로 「나」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얻고 내가 더 거룩케 되고 더 승리하고 더 신령해지는 것을 첫째로 삼는다. 그가 주의하는 것은 하나님의 어떤 방면이 아니라 자기의 어떤 방면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의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그분의 영원한 계획을 앎으로 우리 안에서 현재 그분이 하신 역사로 말미암아 이 목표에 이르게 하는 그것이다. 우리 안에서의 그분의 역사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 개인의 승리와 개인의 일은 다 그 영원한 목적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 적잖은 사람들은 이 순서를 뒤바꿔 버린다. 그들은 자기 개인의 문제만을 주목한다. 그들은 자기가 어떻게 승리하고 어떻게 거룩케 되고 자기의 기도가 어떻게 응답받는가를 주의한다. 하나님 앞에서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추구하는 사람과 전진하고자 하는 사람들까지도 종종 하나님 앞에서 자기 개인의 문제를 놓고 어떻게 해답을 얻을 수 있는가를 주목한다. 그들이 주의하는 것은 자기 개인의 문제이다. 그들이 사모하는 것과 바라는 것도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고 해방하며 평안하고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 삼고 자기 안에서 맴돌며 그들 자신만을 주의한다.

 

물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역사가 필요하고 우리가 승리하고 개인적인 거룩을 가지며 우리 자신에게 능력과 강건함이 필요하며 해방과 구원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이상을 보고 그분의 역사의 목적을 안 다음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 안에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지 당신 개인에게 승리하는 생활을 주거나 거룩한 생활을 주는 이렇게 작은 데 있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에게 영원 과거부터 영원 미래까지 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는 것과 구속받은 모든 사람들이 그분의 계획에 참여하고 그분의 영원한 계획을 성취할 수 있도록 그분의 큰 능력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신다는 이 사실을 보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관적인 역사는 객관적인 봄(seeing)에 근거해야 하고 주관적인 능력이 객관적인 이상에 근거한다는 중요한 원칙을 보아야 한다. 이상이 먼저이고 능력은 나중이며, 객관적인 것이 먼저이고 주관적인 것이 나중이다. 만일 사람에게 이상이 없다면 하나님이 그의 속에 역사하기를 바랄 수 없다. 가령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떠한 물건을 사오도록 부탁할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돈을 줄 것이다. 아버지의 목적은 아들의 호주머니 속에 수표 몇 장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물건을 사오는 데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누림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다룸을 받아야 한다. 아마 당신은 이 문제를 상당히 큰 문제라고 느낄 것이다. 물론 이 문제는 매우 큰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영적인 미래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 속에 하나님의 주관적인 역사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이상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주관적인 역사는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이상에 근거한다. 이상이 첫째이고 그 다음이 주관적인 역사이다. 먼저는 이상을 보는 것이고 나중이 주관적인 역사이다. 부르심의 소망과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이 얻으실 영광의 풍성이 먼저이고 당신 안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아는 것이 나중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서 다만 일하는 종으로서 어떤 일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하나님의 벗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자. 우리가 하나님의 일이 곧 우리의 일임을 볼 수 있도록 우리는 이상을 보고 알며 소유하고 붙잡고 우리 마음이 그 이상에 사로잡혀야 한다.

 

당신이 이상을 보고 당신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역사와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아야 만이 하나님 앞에서 유용하게 될 수 있다. 이상은 당신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하고 능력은 당신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게 한다. 이상은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하고 능력은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게 한다.

 

사도는 여기에서 우리가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과 성도들 가운데 그분이 얻으실 영광의 풍성을 알 뿐 아니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알기를 원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과 그분의 계획과 목적을 알아야 할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참되게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우리 속에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그분의 계획과 그분의 목적을 참으로 안다고 할 수도 없다. 하나님과 그분의 계획과 목적만 알고 그분의 지극히 큰 능력을 모른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다 객관적인 것일 뿐 주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계획과 목적을 알아야 할뿐 아니라 또한 부활 능력을 알 필요가 있다.

 

19절:『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 능력은 실로 큰 것이어서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 능력의 크심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능력이다.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능력이고 그들의 생각으로 아무리 헤아려도 알 수 없다. 이 능력의 크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그들의 마음 눈을 밝혀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우리는 말로 이 능력의 크심을 표현할 길이 없다. 이 능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이나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이 능력이 심히 크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그릇인 우리 안에 별로 가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이 질그릇 속에 보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후4:7).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질그릇인 우리 안에 보배가 있다. 질그릇에 담긴 이 보배는 우리 자신도 분명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보배롭다. 우리가 이 보배의 귀함을 알 수 있기 위해 우리 눈은 주님에 의해 열려질 필요가 있다. 한 면에서 우리는 이 질그릇이 이 땅에서 지나갈 장막이라는 것을 보지만 또 한 면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거듭난 그 순간에 무엇을 얻었는가를 알아야 한다. 사람이 거듭나서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영 단번 이루어지지만 그 한 순간에 받은 것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기 위해서는 삼사십 년이 필요하다. 그 한 순간의 체험은 아주 빨리 지나가지만 그가 다시 체험하고 마음 눈이 열려서 그 순간에 얻은 은사의 크심과 그에게 베푸신 능력의 크심을 알기 위해서는 삼사십 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하다. 거듭남이 평범한 일 같지만 마음 눈이 열린 사람에게 있어서 이 거듭남은 그에게 베푸신 큰 능력이다. 거듭남은 영 단번에 얻는 것이지만 마음 눈이 열린 사람에게 있어서 이것은 영원한 세계 안에 있는 생명이다. 이 생명은 영원까지 계속되는 생명이며 이 능력은 지극히 큰 능력이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거듭난 그 순간에 그가 얻은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온전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더 많이 아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우리의 성장은 주님으로부터 능력을 많이 얻는 데에 있지 않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 어떤 능력인지와 그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더 많이 보는 데 있다. 우리가 거듭난 그 순간에 하나님은 질그릇 안에 보배를 두셨다. 그러나 이 보배가 얼마나 크고 어떤 종류의 보배인가를 알아내려면 일생이 필요하다. 만일 사람이 구원받은 날에 그가 본 보배가 구원받은 지 십 년 혹은 이십 년 후에 본 보배와 같다면 그 사람은 성장하지 않은 것이다. 비록 그가 구원받은 지 십 년 혹은 이 십 년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갓 태어난 갓난아이와 같다.

 

하나님은 성령의 계시로 인해 우리가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볼 수 있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강함이나 약함은 우리가 본 것에 달려 있다. 무언가 본 사람은 강하고 보지 못한 사람은 약하다. 무언가를 얻은 사람이 강하고 얻지 못한 사람이 약한 것이 아니다. 무언가 얻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의 문제는 그것을 보았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역사는 그분 앞에서 우리가 이것저것을 구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다 주셨고 그것들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그것들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해야 한다. 볼 때만이 체험이 있게 된다.

 

과거 많은 성도들은 거의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힘을 주어 그들이 일어나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이미 이것을 얻었습니다.』라고 말함으로 어떤 영적인 관문을 통과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얻지 않은 것을 간절히 구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이미 얻은 것을 봄으로써 감사와 찬미를 발하는 것뿐이다. 무언가 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 능력의 크심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럼 이 능력은 얼마나 큰 것인가? 바울은 『(이 능력은) 그(그리스도)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특별히 「...을 따라」를 주의하자. 우리는 믿는 우리에게 그분이 베푸신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역사한 그 능력에 따른 것임을 보아야 한다. 바꾸어 말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역사한 그 능력의 크심이 바로 교회에게 하나님이 역사한 능력의 크심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역사한 그 능력의 크심은 믿는 우리에게 역사한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여러분은 이것을 보았는가? 만일 보지 못했다면 이것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당신은 에베소서를 여러 번 보았고 암기하고 있으며 특히 19, 20절을 더 잘 외운다고 해서 다 된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외웠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니라 계시가 있고 이상을 보아야 만이 온전하다. 바울이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능력의 지극히 큰 것을 보기를 원하는 데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있는 능력과 그리스도에게 있는 능력이 똑같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만일 우리 몸에 나타난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능력에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가 아직도 보지 못한 부분이 많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겸손히 시인하고 하나님께 우리에게 보여 달라고 구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보았든 보지 못했든 하나님이 믿는 이들에게 주신 능력은 그분이 그리스도에게 역사한 큰 능력에 따른 능력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할렐루야! 이것은 사실이다. 그리스도에게 있는 능력의 크심이 바로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 있는 능력의 크심이다. 이것이 사실임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가 참으로 이 사실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밖에서 더 많은 능력을 우리에게 옮겨 부어 주시기를 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하고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의 눈을 열어 주사 당신에게 이 사실을 보게 하신다면 당신은 날이 갈수록 당신이 이미 얻은 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미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능력이 어떤 일을 했는가를 보기로 하자. 바울은 『그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엡1:19-20)라고 말했다. 이 능력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능히 살리시는 능력이다.

 

우리는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그 보배로움을 느낀다. 부활은 바로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는 그것(행2:24)이고 사망이 붙잡을 수 없는 그것이다. 죽음에 들어가서 다시 살아 나온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었다. 역대의 모든 사람들은 다 죽었고 죽음에 들어간 사람들은 다 죽음에 남아 있고 거기서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죽음에서 나온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우리 주님이다. 그분은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요11:25)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분이 생명이기에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며 그분은 또한 부활이시기에 그분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산다. 죽음에 들어간 사람들은 다 죽음에 매여 거기서 나오지 못했다. 죽음에 들어가서 거기서 나오게 하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뿐이다.

 

형제 자매여, 당신이 어떤 사람이 죽은 것을 보고서 그가 다시 살아나기를 바랄 때 비로소 당신은 사망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된다. 죽음에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나 죽음에서 나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은 생명을 거절할 수 있어도 사망을 거절할 수는 없다. 사탄의 역사는 흑암과 사망의 두 방면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능력은 사망을 통과하면서도 사망에 매여 있지 않을 수 있다. 마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고 음부의 권세가 삼킬 수 없는 그것이 부활이다. 사망을 통과하면서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바로 부활이다. 현재 우리 안에 있는 능력이 바로 이러한 능력이다.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한 능력이 또한 우리로 사망을 거치면서 사망에 붙잡히지 않게 한다. 이 능력은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릴 수 있었듯이 또한 우리를 죽음에서 살아나게 한다.

 

하나님의 이 능력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릴 뿐 아니라 또한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것)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 또한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만물의 머리가 되게 하심은 교회를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만물의 머리가 되심은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이 능력의 공급을 받을 수 있다.

 

형제 자매여, 당신 안에 있는 능력은 이러한 능력이고 당신 안에 이러한 보배가 있는데도 그리스도인이 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이 다른 어떤 것을 당신에게 주어도 당신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마땅히 하나님에게 『당신은 이미 다 이루셨기 때문에 더 이상 내게 무엇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 능력이 지금 당신 안에 넣어져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이길 수 없는 시험이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부활 능력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난 능력이고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케 한 능력이고 그리스도에게 역사했던 똑같은 능력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쓸 때 우리가 이 주관적인 역사를 개인적인 것으로 오해할까봐 아주 조심스럽게 서술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러한 주관적인 역사에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주관적인 역사는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몸을 위한 것이다. 이는 곧 영원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획이 개인과 관계있지 않고 교회와 관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관계된 것은 교회이고 영원 과거 안에서나 영원 미래 안에서도 이 계획은 교회와 관계된다. 오늘날 하나님의 역사도 교회 안에 있으며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것이다. 오늘날 당신에게 나타난 능력도 역시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교회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도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결코 이러한 능력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인지와 또 우리의 생명은 전체 몸의 보호가 필요하고 개별적인 지체로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생명이 보존된다는 것은 나의 생명이 파괴되지 않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생명도 파괴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만일 혈관 하나가 끊어져서 한없이 피를 흘렸다면 온 몸은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적극적인 면에서 귀가 듣는 것은 전체 몸을 위해 듣는 것이고 눈이 보는 것은 전체 몸을 위해 보는 것이다. 한 지체가 뭔가를 얻을 때 다른 지체도 무언가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귀히 여기지 말고 몸 안에서 살기를 배워야 하며 교회를 귀히 여기고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전진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생명을 보존하는 그릇이 몸인 것을 보아야 한다. 바울은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 능력의 힘이 큰 것은 교회를 아는 사람들이 체험하는 바이다. 교회를 보지 못하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은 사람에게 지극히 큰 능력은 결코 표현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주관적인 역사를 말할 때 이것은 개인을 단위로 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단위로 한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참으로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 눈을 열어 주시기 바란다. 이 지극히 큰 능력은 또 다른 어떤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봄으로 얻는 것이다. 다만 듣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기본적인 문제는 계시와 본 것에 달려 있다. 당신이 많은 교리를 들었다 해도 계시가 없다면 당신에게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들은 교리는 마치 받을 수 없는 빛과 같이 영원히 그것을 소유하고 사용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되돌려 받을 수 없는 빛과 같은 교리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가 무언가를 참으로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자.


계시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미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이 성도들을 위해 한 기도를 보았다. 이러한 기도에서 중요한 요점은 그들의 눈이 열려서 몇 가지 사실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는 데 있다. 에베소서 1장은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다 이루어졌으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또 다른 역사가 아니라 이미 완성된 일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에게 계획이 있었고 뜻이 있었으므로 오늘 하나님의 자녀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게 있는 계획과 뜻을 깨닫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그이신 줄... 을 믿어야 할지니라』(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그이신 분이므로 그분은 전혀 변하지 않으셨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이 이미 이루신 것을 알 수 있는 계시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사도의 기도는 우리가 그이신 하나님과 그분이 정하신 계획과 그분이 이루신 역사를 참으로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분의 계획 안에서 새로운 규정과 새로운 역사를 하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이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이 이미 이루신 것을 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렇게 정해졌으면 좋다거나 저렇게 정해졌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은 이미 정하셨으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정하신 것을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많은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것들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우리는 새로운 체험을 갖게 된다. 우리가 그분이 이루신 역사와 이미 이루신 역사를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서는 지혜와 계시의 영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에라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쓰임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역사의 두 방면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하나는 창세 전에 그분이 하신 일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에서 그분이 하신 일이다. 그분의 영원한 계획에 관계된 모든 것은 창세 전에 이미 이루어졌고 우리의 타락과 실패에 관한 모든 것은 십자가에서 이미 처리되었다. 영원 안에서 하나님은 어떠한 부르심과 선택을 예비하셨고 어떤 예정하심을 가지고 계셨다. 하나님이 원하는 모든 것은 창세 전에 벌써 정해졌다. 하나님이 이미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것은 누구도 바꾸어 놓을 수 없다.

 

그렇다. 창세 후로 인간이 타락하고 사탄이 들어와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의 일을 파괴하였지만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 있는 능력이 지극히 큼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타락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또한 구속이 있다. 사망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부활이 있다. 하나님은 영원한 계획을 가지고 있고 또한 십자가의 구속이 있다. 영원한 계획이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파괴된 것 같지만 타락으로 파괴된 것을 부활은 회복하고 되찾을 수 있다. 십자가는 타락에서 우리를 회복할 수 있고 부활은 죽음을 제거할 수 있다.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미 다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미 다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중에 누구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다른 어떤 일을 더해 주기시를 바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만일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러한 정하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좋았을텐데.』라고 말하겠지만 바울은 창세 전에 정하신 것이 완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만일 오늘날 하나님이 조금 더 역사하신다면 좋을텐데』라고 말하겠지만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와 부활 안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우리가 보기 원하신다.

 

오늘날 성도의 필요는 하나님의 더 많은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더 많이 역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거나 하나님이 너희에게 더 풍성한 은혜를 주기를 바란다거나 하나님이 너희에게 있는 그 능력을 더 크게 하시기를 바란다고 기도하지 않았다. 바울은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참으로 그분을 알고 그분이 너희에게 주신 부르심의 소망과 성도 가운데 그분이 얻으실 영광의 풍성과 너희 가운데 있는 그분의 능력의 지극히 큰 것을 너희로 알게 하기 위해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한다고 기도하였다. 바울은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얻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얻은 것의 영광과 풍성과 지극히 크심을 보기를 바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에 대한 계시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에서의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일들을 우리가 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큰 능력을 주시거나 하나님이 더 많은 일을 주시도록 기도하지 않았고 지혜와 계시를 구했다. 이 지혜와 계시는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러한 기도 안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바로 이상이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계시를 얻었는가의 문제이다. 여기에 큰 차이가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하나님이 그들에게 아무런 역사도 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아무 것도 주시지 않은 것 같이 이것저것을 얻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에베소서 1장의 가장 특별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는 이미 다 이루어졌고 우리가 하도록 남겨 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원 안에서 다 이루셨고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도 다 이루셨다. 오늘 문제는 오직 우리가 그것을 보았느냐, 보지 못했느냐에 있다. 문제는 하나님의 역사에 있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이 이루신 역사를 보았느냐에 있다.

 

예를 들어 성질이 고약한 한 형제가 있다 하자. 그가 한 번 그 성질을 이기려고 해도 이기지 못하고 두세 번 처리하고 거절하려고 해도 길이 없을 때 그는 하나님이 왜 그의 성질을 처리해 주지 않느냐고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보았는가? 그의 문제는 바로 하나님이 어떤 역사를 해 주시기를 바라는 데 있다. 그는 하나님이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기만 하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에베소서 1장 3절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복주셨다』고 말한다. 이 신령한 축복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에게 또 다른 역사를 요구하기를 원치 않고 그분은 우리 눈을 밝히사 그분이 이루신 것을 우리가 보기 원하신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이 이미 이루신 역사를 보기 원하신다. 이것이 에베소서 1장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바이다. 우리는 『하나님이여 왜 당신은 내게 더 큰 능력을 주시지 않습니까? 왜 나의 나쁜 성질과 허다하게 많은 나쁜 일들을 깨끗이 제거해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기도할 것이다. 우리는 더 큰 능력을 구하지만 성경은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능력이 아니라 당신 안에 있는 능력이 심히 큰 것을 볼 수 있도록 지혜와 계시의 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만일 어느날 하나님이 당신의 눈을 밝히사 당신 속에 있는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 주신다면 당신은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형제 자매여, 부활 능력이 하나님의 가장 큰 능력인 것을 아는가? 전성경에서 하나님은 부활이 하나님의 역사의 최고봉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 부활의 역사가 있을 때가 하나님의 역사의 극치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밝히사 우리가 이것보다 더 뛰어난 역사를 할 수 없고 그리스도에게 그분이 하신 역사가 가장 높은 단계로서 더이상 무엇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의 그러한 기도가 하나님에게 무엇을 하도록 구하는 기도가 아님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도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더 하기를 바라는 것이 없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미 완전하므로 거기에 어떤 것도 더할 수 없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한다. 오늘 하나님은 당신의 눈을 밝히사 당신에게 보여 주고자 하신다. 당신이 그 능력이 어떠한 능력이고 그 능력이 당신에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바라는 구원은 장래의 구원이거나 내일 혹은 내년에 이루어질 구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장래에 이루어질 구원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구원이다. 많은 사람들의 승리가 내일에 속한 것이고 장래에 속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사모와 소망과 기도는 다 장래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에게 계시가 있다면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계시는 하나님이 장차 이루실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신 일을 보여 준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어떤 약함이나 실패 때문에 어느날 거기서 구원받기를 바란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그의 눈을 열어 주신다면 그 약함과 그 실패가 이미 십자가에서 처리되었음을 볼 것이다. 당신의 눈이 열릴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당신의 역사가 이미 이루어졌음을 찬미합니다. 그것을 완전히 이루셨음을 당신께 감사하고 찬미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베소서 1장의 보배로움을 볼 수 있다. 1장은 우리에게 죄사함이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고 구속과 성령을 얻는 것도 이미 이루어진 사실임을 보여 준다. 우리가 이미 모든 것을 다 얻었으나 한 가지 부족한 것은 그것이 바로 계시이다. 이 한 가지가 보완될 때 모든 것을 갖추게 된다.

 

우리가 왜 여전히 이렇게 연약한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여전히 쓰임받지 못하는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그토록 능력이 있으셨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왜 여전히 연약한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내신 능력은 그분이 그리스도에게 역사한 그러한 능력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 우리가 우리 주님과 같은 그러한 봄(seeing)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차이점은 능력의 종류에 있지 않고 능력의 크고 작음에 있지도 않고 보았는가 보지 못하였는가에 달려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계시이다. 계시가 있을 때 모든 것이 해결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거듭 우리에게 계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계시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계속 말해 왔듯이 다만 듣는 것으로는 소용이 없고 반드시 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교리가 아니라 계시이다. 당신이 에베소서 1장을 다 외운다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일단 당신이 보았다면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달라질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라고 기도하였다. 성령이 없다면 우리의 총명이나 우리의 교리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도록 우리 눈을 열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이 우리 눈을 밝히사 뭔가를 보게 할 때 우리는 즉시 그분 앞에서 『하나님, 당신이 다 이루셨음을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큰 능력을 주시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능력이 얼마나 큰 지를 보아야 한다. 지혜의 영은 우리를 깨닫게 하고 계시의 영은 우리로 보게 한다. 그러므로 지혜뿐 아니라 또한 계시가 필요하다. 지혜가 있을 때 깨달을 수 있고 분명해 질 수 있으며 계시가 있을 때 보고 이해할 수 있다.

 

아마 우리들은 여러 번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안에서의 교회의 위치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어디서부터 그 관계가 시작되는가? 계시에서 시작된다. 당신으로 하여금 영원 전에 하나님이 정하시고 이루신 것을 보게 한 것은 계시이다. 또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역사를 보게 한 것도 계시이다. 바로 이 계시가 당신으로 하여금 영원 안에서의 정하심과 십자가의 역사를 보게 하고 당신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고 보며 깨닫게 한다. 바로 이 계시가 당신으로 하여금 교회의 일부가 되게 하고 오늘 이후로 그분 손에서 유용한 그릇이 되게 한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말들에 아주 익숙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계시의 중요성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이 이미 다 이루어졌고 오늘 문제는 사람이 그것을 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이 하늘에서 가장 관심하는 것은 그분의 계시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것을 구할 것이 아니라 바울과 같이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 자신과 형제 자매를 위해서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이여, 나는 보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해야 한다.


워치만 니
[일곱 광주리 가득히 6, "계시를 구하는 기도",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