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성경―한 계시
일반진리
Eugene , 2012-05-19 , 조회수 (3340) , 추천 (0) , 스크랩 (0)

(이 말씀은 위트니스 리 형제님이 1995년 10월 3일부터 5일까지 미국 아나하임에서 사백 여명의 동역자 장로들과 가진 교통의 내용 -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한 열 가지 크고 긴요한 「하나」 - 중에서 첫번째와 마지막 메시지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이 교통은 대만에서 온 형제들로 시작되었다. 그 후에 여러 곳에서 오고 싶다고 요청해서 온 땅의 모든 분들을 다 초대하기로 결정했다. 동역자이고 장로이면 다 올 수 있도록 결정했다. 이제 여기 어떤 나라에서 몇 명이 참석했는가? 12개국 150개 교회-72 해외, 26 가까운 지방, 49개 교회는 남가주와 북가주, 참석 인원은 사백 여명이다. 여기 영어와 중국어로 된 두 종류의 개요가 있다. 어떤 것으로 해야 할지 나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이 개요를 시작할 때 영어로 작성했다. 그것이 나의 습관이다. 한번 영어를 시작하면 거기서 나오기 어렵다. 이 개요를 중국어로 번역하도록 했다. 중국어를 말하고 듣는 형제들에게는 미안하다. 어떤 언어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좋을까를 고려할 때 영어를 하는 형제가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투표해서 이겼다. 영어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좋은 통역자들이 있으므로 중국어를 하는 형제들도 문제가 없다. 대만에서 온 형제들도 좋은가?

 

나는 이러한 때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실 것인가를 관심했다. 그러나 그분으로부터 어떤 느낌도 받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주님은 어느 날 열 가지 크고 긴요한 중점들을 생각나게 하셨다. 그분의 계시 안에서 회복을 위하여 그분을 믿는 것의 열 가지 관점을 일깨우고 상기시키셨다. 나는 그것을 열 가지 크고 긴요한 하나라고 부른다. 이 모든 중점들이 다 하나에 관한 것이다. 첫 다섯 가지 하나는 한 성경, 한 하나님, 한 그리스도, 한 영, 한 생명이다. 이것이 한 인자(factor)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한 구원, 한 생활, 한 간증, 한 몸, 한 성 즉 한 완결이다. 이 다섯 가지가 그 결과이다. 첫 다섯 가지는 요인으로 이 모든 결과들을 산출한다.

 

나는 여러분이 다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형제님, 우리는 이것을 이미 다 다루었습니다. 이 나라에 오신 후에 항상 이런 중점들을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먼 나라에서 와서 며칠 간 거하면서 더이상 식은 밥을 먹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먹다 남은 식은 밥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새롭다. 이 모든 위대한 중점에 대해 각 열 두 번의 특별집회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번 집회 외에 다른 기회가 없다. 이 황금 같은 소중한 기회를 취하여 이 열 가지 큰 하나에 대해 제시하고자 한다.

 

여러분은 모두 회복 안의 동역자, 장로들이다. 여러분들은 중요한 사람들이다. 다 귀빈이다. 주의 회복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 이것이 긴요하다. 여러분이 알 것은 나의 사역의 주요 부분은 지나갔고 뭔가 기울어가는 단계라고 느낀다. 이 열 가지 큰 하나에 대하여 이 시점에 분명히 밝혀서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이며,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밝히고자 한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각 항목에 열 두 번의 특별집회가 필요하지만 여섯 번의 집회밖에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다만 제시할 뿐이고 소화하고 이 안에 깊이 들어가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우리가 주의 회복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게 해야 한다.

 

1 . 한 성경-한 계시

 

첫번째 큰 하나는 바로 한 성경이다. 이것은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이다. 모든 사람이 한 성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한 성경이 여러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갈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어떠한 성경으로 바뀐다.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성경이 있다. 유대인은, 성경이란 성경의 첫 부분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도 온전하지 않은 성경, 반쪽짜리 성경을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유대인들을 만난다면 유대인은 우리들에게, 『너희들의 성경은 엉터리다.』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 성경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으로 어떤 것도 더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가?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의 성경을 가지고 있다. 온전한 성경이다. 그러나 많은 분열이 그들 가운데 있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분열이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얼마나 많은 분열이 있는가? 형제회만 해도 하나이었었지만 1세기 반이 지난 후에 이제는 천 개가 넘는 분열로 나뉘어져 있다. 형제회의 거의 모든 분열이 그들 나름대로의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성경이 이렇게 말한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그 구절은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결국 그들은 같은 성경을 달리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캐스윅도 그들의 성경이 있다. 물론 그들의 성경은 육십 육권이 아니라 몇 권을 더 추가했다. 천주교는 외경을 포함한 성경이 있고, 회교는 경전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또 다른 종류의 성경을 만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종류의 성경을 가지고 있는가?

 

여기서 조금 말하고 싶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있는 모든 분열들이 다 성경에 대한 다른 해석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고 있는가? 형제회는 넬슨 다비가 번역한 새 번역 성경을 갖고 있는데, 바로 폐쇄파이다. 그러나 공개파는 우리가 다른 성경을 펴 내야겠다고 하여 다른 번역은 하지 않고 여백에 여러 가지를 추가해서 뉴베리 성경을 만들었다. 나는 성경을 공부할 때 관련 자료를 취하기 위해 두 성경을 다 공부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겠다. 회복 안의 성경이 하나 이상인가? 물론 하나의 성경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어떤 번역본을 가지고 있는가? 회복역이라구요?

 

나는 그런 말을 두려워한다. 하나님의 계시에 따른 합당한 성경을 갖는 것은 성경을 이해하는 길, 그 방법에 달려 있다. 합당히 이해한다면 합당한 성경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릇된 성경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결코 그릇된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그릇된 것일 수 있다. 바울은 디모데 후서 2장 15절에서, 『너는 말씀을 옳게 분변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말씀을 목수처럼 바르게 쪼개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말씀은 성경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아주 많은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극도로 통제하는 말씀이다. 똑같은 성경을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이해하는 그러한 것들이 이미 바울 당시에도 있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과 싸울 때에 말씀을 바르게 쪼깸으로 유대인을 바로잡았다. 그러면 우리는 말씀을 바로 쪼갠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 보아야 한다. 이 중점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주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실지 물어 보았다. 나는 이 개요가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믿는다.

 

A. 유일한 성경은 그 유일한 계시에 있어서 일관적임

 

그러나 의견에 있어서 일관적인 것이 아니라 그 유일한 계시에 있어서 일관적이다. 침례교 사람들은 침례를 그들의 어떠한 침례로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유일한 계시의 한 부분이 아니다. 또한 장로교 사람들은 장로를 강조한다. 그것이 유일한 계시의 한 부분인가? 성경은 유일한 계시에 있어서 일관적이다.

 

1. 결코 사람의 관념-이해, 논리, 철학, 관점, 기이한 상상-에 따라 해석되어서는 안됨-벧후1:20-21

 

이것을 생각해 보라. 오늘날 그리스도인 가운데 그들의 관념, 이해, 논리, 철학, 관점, 기이한 상상에 따른 해석들은 다 버려져야만 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베드로 후서 1장을 제시했다. 거기서 베드로는 성경의 예언의 말씀을 사사로이 풀 자유가 없다고 말한다. 천연적인 반응에 따라 풀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 계시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기도하여 하나님이 너희를 도와 하나님이 원래 의도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기도하고 기도하라고 했다.

 

2. 유일한 성경에 대한 어떤 해석이든지 그 해석 원칙들에 의해 통제 받아야만 한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므로 이것을 기억하라. 그 원칙들은 무엇인가? 첫 번째 원칙은,

 

a. 유일한 성경은 오직 성경 자체에 의해서와 성경 자체에 따라서만 해석되어야만 한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성경 해석은 반드시 성경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중국의 공자의 제자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 몇몇이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그들은 항상 성경을 공자의 가르침에 의해 이해했다. 여러분은 반드시 성경 자체에 의해서 성경에 따라서 해석해야 한다.

 

b. 신성한 계시의 시대적인 진전에 있어서의 차이점들을 분변함에 의해 해석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아주 큰 원칙이다. 성경에 있어서 시대적인 것은 아주 중요하다. 구약 경륜, 신약 경륜이 있다. 구약에 시대적인 안배가 있고, 신약에 시대적인 안배가 있다. 구약에서는 제 칠일을 안식일로 지켰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안식일이 지나갔고 제쳐졌다. 안식교의 창시자인 화이트 여사는 뒤로 돌아가 구약의 안식일을 신약의 성도들에게 지켜야 할 것으로 주장하여 지금도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구약의 방식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 이것은 아주 커다란 차이점이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시대에 한 시대적인 안배가 있었고, 노아의 때와는 달랐다는 것이다. 노아의 때에는 하나님께서 택함받은 백성은 어디에 가서 거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오셔서 우상을 숭배하는 음란한 땅을 떠나서 좋은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이것이 첫번째이며, 두번째로는, 모든 어린 남자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다. 노아의 때에는 이러한 것들이 노아에게 계시되지 않았다.

 

아브라함 때부터 모세의 때까지 또 다른 많은 것이 나왔다. 모세 때에 율법의 경륜이 있었고, 주님의 오심의 때에는 또 다른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시대적인 것을 다 뒤섞어 버렸다. 천주교는 구약의 제사장의 옷까지 들고 나와 모든 것을 혼합시켜 버렸고, 안식교, 오순절파도 시대적인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은 정말 이상하다.

 

오순절파 사람들은 성경 구절을 노래로 부르기를 좋아한다. 모두 다 구약에 근거한 노래들이다. 그들이 에베소서 4장의 구절을 노래로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에베소서는 오순절파 사람들의 그러한 방식의 이해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해는 표면적인 것이고 공중에 떠있다. 항상 방언을 말하지만 그들의 방언은 공중에 떠다니는 것이 되었다. 오순절파의 목사가 에베소서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한번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주의해서 반드시 한 원칙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에 있어서 시대적인 진전에 있어서 차이점들을 분변하기를 배워야 한다.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한 경륜적인 안배에서 다른 경륜적인 안배로의 진전을 배워야 한다.

 

c. 유일한 성경에 대한 어떤 해석이든지 그 소소한 계시들을 다루어야 하나, 어떤 소소한 계시도 이 유일하고 일관적인 성경의 주요 계시와 어긋나거나, 상합하지 않거나, 일치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성경에는 주요 계시 외에 소소한 계시들도 있다. 이것은 계시의 잔가지들이다. 나무가 있을 때 큰 몸통이 있고 또한 많은 잔가지들이 있다. 몸통을 강조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잔가지를 너무 주의해서는 안 된다. 소소한 계시를 무시하지는 말아야 하지만 이것이 유일하고 일관적인 주요한 계시와 어긋나거나 일치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고린도 전서 11장에서 주님의 머리 되심에 대한, 모든 자매들에게 수건을 쓰라는 계시가 있다. 그러나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이 중심적인 계시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무시하고 버려야 하는가? 지엽적인 잔가지와 같은 계시를 버려야 하는가?

 

머리 수건 쓰는 사람들은 흰색 수건, 검정색 수건, 모자처럼 생긴 것을 쓰느냐 스카프처럼 생긴 것을 쓰느냐로 논쟁한다. 머리 수건 쓰는 것은 우리를 일깨워서 우리 모두가 우리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있어야 함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머리 되심 아래 계셨던 것처럼 우리가 그분의 머리 되심 아래 있어야 함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계시이다.

 

B. 유일한 성경의 유일한 주요 계시가 하나님의 경륜의 유일한 내용임

 

이 몇 가지 노선을 기억한다면 합당한 성경을 갖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천 년 동안 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빗나갔고 소수만이 빗나가지 않았다. 니 형제님은 많은 시간을 들여서 빗나가지 않은 해석을 종합했다. 나는 그분처럼 오래 연구하지 않았지만 십 팔 년 간 합당한 해석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경 해석은 십 구 세기 동안의 합당한 해석이다.

 

나는 감히 우리의 해석이 전혀 빗나간 것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해석이, 회복역 안에 있는 해석은 순수하고, 빗나간 성경과는 다르다. 회복역은 사실상 위트니스 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의 성경의 이해는 니 형제님의 해석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니 형제님의 해석은 모든 십 구 세기 동안의 합당한 성도들의 해석에 따른 것이다. 이것은 니 형제님이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고 또한 위트니스 리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합당한 기초 위에서 우리가 그러한 합당한 계시를 보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결론의 말

 

동역자들과 장로들인 우리 모두는 이 열 가지 크고 긴요한 하나의 이상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주님의 심판대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의 보상을 받아 왕국에서 그분의 왕권과 제사장 직분에 참여할 수 있으려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합당한 하나를 실행하고 주님의 일의 올바른 궤도 안에 지켜지도록, 각 하나가 우리를 지시하고, 교정하고, 조정하고, 규제하는 강력한 원칙이 되어야만 한다. 나는 이것이 아주 분명하리라 믿는다. 이 열 가지 커다란 하나들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이 길을 취하지 않는다면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지난 칠십 삼 년 동안 우리 가운데 적어도 여덟 번에서 열 번 정도의 배역이 있었다.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그 배역 중에 한번의 배역에 있어서도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길이 없었다. 새 예루살렘은 한 길밖에 없다. 어떤 길이든 어느 방향으로 들어 왔든 간에 결국 당신은 한 길에 있게 될 것이다. 그 한 길이 어떤 사람과도 하나가 되게 할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싫다. 나는 다른 길을 가겠다』라고 말해도 소용없다. 여러분은 이것을 보았는가?

 

특히 지난 87년 9월에 배역이 일어났는데, 오늘 정확하게 8년 1개월이 지났다. 그들이 다 어디에 있는가? 하나는 독일에서, 하나는 홍콩에서, 둘은 미국에서 일으켰는데, 전에 그들은 회복 안에 머물렀었고 사람들이 그들을 인정했다. 그러나 지금 독일에 있던 그들은 어디에 있고, 그들의 사역은 어디에 있는가? 또 한 사람은 홍콩에 있는데 그는 거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모든 중요한 메시지들을 그들은 말하지 않고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니 형제님과 이 형제님 메시지라는 것을 다 알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어떤 메시지를 창조해 낼 수 있는가? 한번 해보라. 우 형제여, 형제와 나는 아주 친한데 형제가 회복의 책이 아닌 다른 메시지를 만들 수 있는가? 어떤 메시지를 만들 수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라. 나는 들었다. 사람들이 그들의 집회에 가보아도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제로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주제가 두 못난 사람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에 의해 교통되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1 장에서 그들이 무엇을 말해 낼 수 있는가? 칭의에 대해서도 니 형제님이 다 교통하셨다. 변화에 대해서도 위트니스 리가 교통했다. 모든 메시지가 다 다루어지고 해방되었다. 다른 길이 없다. 내가 너무 지나친 말을 했는가?

 

다른 길이 없다. 오늘 이 땅에서 그 어떤 곳도 갈 곳이 없다. 그 속이는 자들은 갈 곳이 없다. 한 사람은 오십 세밖에 안 되었는데 은퇴했다. 은퇴해서 어디로 가겠는가? 갈데가 없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형제들이여, 회복 안에서 살아야 한다. 회복을 떠난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분열을 일으키는 이 네 사람은 집회에서 생명 주는 영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 영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니 형제님이 말하는 것이 되고 또 위트니스 리가 말한 것이 되기 때문에 그들은 말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여러분에게 정직히 말하는 것이다.

 

나의 육십 삼 년의 경험을 통하여 회복 안에서 나는 1932년부터 육십 삼 년 동안 주님을 위해 말해 왔다. 그것은 내가 구원 받은지 칠 년 후의 일이다. 나는 그 결과를 보았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충실하게 이러한 개요를 작성하여 주므로 이것이 유일한 길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여러분은 동의하는가? 생각해 보라. 이 집회를 여러분에게 넘기겠다.

 

사랑하는 많은 형제들이 대가를 지불하고 여기에 온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올수록 나에게는 내 속의 무거운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향해 울부짖었지만 길이 없었다. 한 가지 기쁘게 생각하는 것은 오래지 않아 아마 이십 오 년이나 오십 년 이내에 회복의 출간물, 회복의 신학이 모든 신학들을 정복하리라는 것이다. 로마 천주교, 러시아 정교회, 개신교 그 어떤 신학이든지 모든 신학이 다 빗나가 있다. 거기에서는 이 신학을 이길 어떤 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러나 여기에서 나온 무언가가 그들을 정복할 것이다. 그들은 정복당할 것이다. 그럴 때 이 계시가 모든 추구하는 자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그들을 이기는 자들이 되게 할 것이다. 그럴 때 이것이 이 시대를 마감하고 왕국을 왕이신 그분과 함께 가져올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방에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당신이 누구이든지 당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무엇을 할 수 있든지, 모든 것을 다 제단 위에 올려놓으라, 기도하라. 『주여, 이 모든 것을 다 당신께 드립니다. 신성한 계시로 기독교의 모든 신학을 정복하도록 나는 이 모든 것을 제단에 드립니다.』라고 제단에 올려놓으라. 나는 여기서 마치겠다.


위트니스 리
[생명의 흐름 95년 10월호, p.10-16,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