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리스도
Eugene , 2012-05-17 , 조회수 (2693) , 추천 (0) , 스크랩 (0)

유월절 어린 양의 시험

 

마태복음 21장과 22장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구약의 한 예표의 완성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면 유월절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어도 나흘 앞서 어린 양을 준비해야 한다(출 12:3,6). 준비하는 동안 그들은 어린 양에게 점과 흠이 있는가를 철저하게 시험했다. 어린 양이 유월절에 대한 자격을 갖추려면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유월절 어린 양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는 어린 양이다. 그는 유월절을 완성하러 십자가에 가기 전에 약 6일간을 예루살렘에서 보냈다. 그가 이날들을 보낼 때 유월절 어린 양에 대한 시험이 완전하게 행해졌다. 이 기간 동안 사람들은 예수를 시험에 올려 놓았다.

 

마태복음 21장과 22장에서는 그가 당한 시험을 계시한다. 그는 그때의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인 모든 단체의 지도자와 대표들에게 시험을 받았다. 그들이 누구인지 보도록 하자.

 

무엇보다 먼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있었다(21:23). 대제사장들은 종교 안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다. 장로들은 백성들 가운데 공회에서 권위를 가진 자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시험한 첫번째 사람들은 종교 안에서와 공회 안에서 권위를 가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22:23)라고 질문한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두번째 시험은 가장 강력한 종교 단체요, 헤롯당들과 함께하는 정치 단체인 바리새인들에 의해 행하여졌다. 정치(이상한 동료)와 결탁한 종교가 예수를 두번째 시험에 넣었다.

 

세번째 시험은, 그 당시의 현대주의자들(modernists)인 사두개인들에 의해 이뤄졌다. 오늘날의 기독교 안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피를 흘리시고 죽은 자 가운데에서 육신을 입고 부활하셨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현대주의자들은 오늘날의 사두개인들이요, 사두개인들은 그 당시의 현대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능력도 믿지 않는다. 그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믿지 앉는다(행 23:8).

 

마지막으로 네번째 시험에서, 바리새인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인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에 놓았다.

 

여러분은 이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헤롯당원들, 사두개인들, 바리새인 가운데 전문가인 율법사, 이 모든 사람들이 이 작은 예수를 둘러쌌다. 가장 높은 학식과, 지식과, 지위와, 이름과, 능력을 가진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시험하고 그에게서 어떤 과오를 찾아내기 위해 단합했다. 예수님은 결코 학위를 얻지 않았다. 그는 멸시받는 지역의 멸시받는 마을로부터 와서 이 지도자들 가운데 서 있었다.

 

그러나 주님을 찬양하자. 그는 밖으로 보기에는 작았지만 안으로는 작지 않았다. 그는 밖으로는 뛰어난 용모가 없었으나 안으로는 거대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밖으로는 지식이 없었으나 안으로는 무한한 지혜를 갖고 있었다. 그는 모든 질문에 대답했고 모든 시험을 통과했다. 그는 많은 지도자들의 시험과 조사에 놓여졌지만 당당하게 통과하셨다.

 

결국 그는 그들을 시험에 놓았고 돌 하나로 모든 새들을 죽였다. 하나의 질문으로 그는 그들의 모든 입을 막았다. 그들은 예수를 네 번이나 시험에 넣었으나, 주 예수께서는 그들을 단 한 번 시험에 놓았다. 이 모든 질문, 즉 네 질문과 한 질문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가 얼마나 종교에 반대되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 질문

 

종교의 권위인 대제사장과 공회의 권위인 장로들은 첫번째 질문, 즉 예수의 권위의 근원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는 데 모두 연합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런 권세를 주었느뇨?'(21:23)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렇게 질문한 것이다. 『너의 근본이 무엇이냐? 너의 권위가 신뢰할만한 것이냐? 어디에서 너같이 작은 사람이 이런 권위를 얻었는가?』

 

우리는 그러한 질문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사람들은 항상 그러한 질문을 한다. '그의 근본이 무엇인가? 정통적인가? 건전한가?' 그들의 그 많은 말의 참 뜻은 이것이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했는가? 그는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목사 안수를 받았는가?'

 

물론 주 예수님은 아주 현명하셨다. 그는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뇨?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21:24-25)

 

그는 참으로 그들을 궁지에 물아 넣었다. 그러자 가장 높은 학식을 갖춘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에서 의논하여 말하기를,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21:25)라고 했다.

 

요한은 예수를 증거한 선구자였기 때문에, 만일 그들이 요한을 시인하면 예수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실상, 『우리는 그것을 말할 수 없다. 우리가 말하면 덫에 걸릴 것이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들이 무섭다.』(21:26) 라고 말했다. 결국 그들은 가장 좋은 해결책은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결정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에게 돌이켜 말했다.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그러나 주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고 있음을 아셨다. 그는 사실상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너희들은 알고 있지만 내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이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사실은 너희들이 내게 말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너희들이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나도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너희들은 거짓말하지만 나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참으로 주님이시다. 그는 참으로 우리가 섬길만한 분이시다. 예수 외에 누가 이러한 방법으로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겠는가?

 

주님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신 후에 계속해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마지막 두 가지에 대하여 간략하게 언급하겠다.

 

두번째 비유에서 주님은 그가 하나님의 건축을 위해 있음을 가리켰다(21:33-46). 그들은 주님께 바보스럽고 죄스러운 방법으로 질문했지만 주 예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계시, 즉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밝히셨다. 이 비유에서 그는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가리켰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이 아들은 하나님의 모든 유업을 받을 상속자이다. 그들은 하늘에 속한 이 거룩한 상속자, 즉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주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그러한 분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건축을 위한 모퉁이 돌을 거절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들은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너희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너희들은 누구를 거절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아들인 내가 여기에 있는데 너희들은 나를 거절했다. 그러나, 결국 너희들이 거절한 것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될 것이다.』 무슨 목적을 위해서인가? 하나님의 건축을 위해서이다. 그러한 어리석은 자들에게 말한 답변에서도,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건축을 위해서 있음을 가리켰다.

 

이어서 주님은 혼인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셨다(22:1-14). 하나님의 아들은 모퉁이 돌이자 신랑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두 가지 놀라운 일-건축과 혼인 잔치를 계시하셨다. 건축은 잔치를 요구하고 잔치는 건축을 위하여 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하여 잔치를 누릴수록 우리는 더욱더 그의 건축으로 지어질 것이다.

 

이 비유를 볼 때 주님의 대답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린도 전서 3장과 베드로 전서 2장에 의하면 잔치는 성장을 위한 것이며 성장은 건축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자라기 위해 예수의 혼인 잔치에서 잔치를 누려야 하고, 자랄 때 우리는 건축을 위한 합당한 재료가 될 것이다. 그는 건축의 주된 모퉁이 돌이요 우리는 많은 돌들이다. 우리는 그를 잔치로 누림으로써 돌이 된다. 주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다만 건축과 잔치요, 누림과 건축됨이다.


두번째 질문

 

바리새인들은 그분을 패배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혜롯당원들에게 자기네들과 함께 하기를 요청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단체일 뿐 아니라 유대 국가에 충성스런 애국적 단체였다. 그들은 종교적인만큼 애국적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나라를 사랑했고 그 나라를 지키기를 갈망했다.

 

그 당시 그들의 나라는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으므로 바리새인들에게는 혐오스런 상황이었다. 반면에 헤롯당원들은 이 제국주의의 통치를 대표하는 자들이었다. 어떻게 그러한 두 무리, 즉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함께 일할 수 있었을까?

 

그들에게는 공동의 적이 있었으므로 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함께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여 궁지에 몰아 넣으려 했다. 그들은 물었다.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22:17)

 

이 세금은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세금과 다르다. 이것은 로마 정부에 바치는 세금이다. 그때에 충성스럽고 애국적인 유대인들은 모두 이에 반대했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한 푼도 지불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분명 예수를 진퇴유곡으로 몰아 넣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들의 질문은 매우 간교했다. 만약 예수께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면 헤롯당원들은 그가 로마 제국에 반대한다고 비난하며 즉시 그를 공격했을 것이다. 반면에 그가 유대인이 로마 제국에 세금을 내는 것이 가하다고 하면 유대인의 애국적인 무리는 말할 것이다. 『이 사람은 우리나라를 배반하고 있다.』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간교함이다.

 

주 예수님에게 피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사람이 그를 곤란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할 수 없다. 비록 열 무리가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할찌라도 곤란케 할 수 없다. 그는 길이다. 할렐루야! 그는 예수다! 그가 한 일을 주목하라.

 

가장 현명한 일은 그가 자신의 주머니로부터 셋돈을 꺼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셋돈을 내게 보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그에게 한 데나리온을 가져왔다(22:19). 그들이 셋돈을 가져왔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패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셋돈을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이 가한가 불가한가를 물었으나 예수 아닌 그들이 로마 돈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경우를 잃었다. 그들이 로마 돈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덜미를 잡혔다. 예수는 주시다! 예수를 잡으려 하지 말라. 그렇게 하다가는 여러분이 그에게 잡힐 것이다.

 

그러자 주님은 그들에게 물었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주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시지 알았다. 그는 대적에게 근거를 남기지 알았다. 그는 계속 더하셨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2:20-21). 그들의 입은 다물어졌다.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그의 대답에 놀랐다.


세번째 질문

 

그 후에 사두개인, 즉 그 당시의 현대주의자의 차례가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더 현명해서 예수를 그들의 올가미에 걸리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실상 이렇게 말한 것이다. '선생님, 부활을 믿는 어떤 사람들이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문제가 있읍니다. 모세의 율법의 규율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죽고 아이가 없으면 그 형제가 그 아내와 결혼하여 그에게 자손을 낳아줘야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첫째가 결혼했으나 죽어서 그의 형제에게 아내를 남겨 놓은채 자손이 없었읍니다. 둘째도 똑같이 하였고 세째도 똑같이 하여 일곱째까지 이르렀읍니다. 결국 그들이 모두 죽은 후에 그 여자도 죽었읍니다. 그러면 부활할 때 그녀는 일곱 중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정말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주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22:29). 주 예수께서는 대답으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는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들은 성경을 모른다. 너희들은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모르고 있다. 너희들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

 

그는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22:30-32).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 모든 사람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죽었다. 그들이 부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그는 산 자의 하나님이다. 이것은 그들이 모두 살 것이고 모두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너희 사두개인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호를 문자로는 알지만 그 안에 있는 실제는 모른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하나님이 이 세 사람의 하나님임을 알려 준다. 그러나 이 표호의 실제는 부활이 있다는 것이다. 이 표호는 하나님이 이 세 사람을 부활하게 하시리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 아닌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 당시의 현대주의자 유대인들은 예수를 궁지에 빠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기회를 잡아 그들이 산 방법으로 성경을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야 하며, 하나님이 사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이 사셨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도 살아야 한다. 우리도 산 방법으로 성경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야 하며, 사신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산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놀랐고 그들은 패배했다.


네번째 질문

 

사두개인들이 잠잠하게 되었다는 것을 듣고 바리새인들은 다시 예수를 시험하려고 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인 율법사가 그를 시험하여 질문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22:36) 다시 말해서 그는 이렇게 물은 것이다. '당신은 모세의 책을 어떻게 해설합니까?'

 

이 질문은 성경의 해설과 설명에 관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주 예수님이 다루기에 극히 쉬운 것이었다. 주님은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22:37-39).

 

그것은 매우 단순하다.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주님은 그들에게 합당한 대답을 하셨다. 그들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결국 그들의 모든 입이 닫혀졌다. 그러나 그들은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패배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라. 이 네 가지 질문 외에 다른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가? 첫째는 종교에 관한 것이요, 둘째는 정치에 관한 것이요, 세째는 믿음에 관한 것이요, 네째는 성경 해석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기독교 안에는 여전히 이러한 문제들이 있고 사람들은 거기에 모든 주의를 기울인다.


주님의 질문

 

이 모든 질문에 대하여 주 예수님은 확실한 대답을 하셨다. 그러나 이제 주님 자신이 질문을 제기하셨다. 이것은 질문 중의 질문이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22:41-42)

 

오늘날 온 우주 가운데 문제는 종교나 정치나 믿음이나 성경 해석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는 누구인가? 그것은 아주 단순하다. 오늘날 기독교는 이 모든 문제들-종교, 정치, 신앙, 성경 해석-을 취급하고 있으나 산 그리스도를 대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모든 문제에 달려들지만 살아 있는 그리스도 자신에게는 달려들지 않는다. 오늘 우리에게는 분명히 옛날과 똑같은 상황이 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맞게 대답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은 사실상 이렇게 물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할아버지인 다윗이 어떻게 손자를 자신의 주라고 부를 수가 있느냐?'

 

그 질문은 그들의 입을 닫게 했다. 그들은 지식적으로 대답할 수는 있었지만 그 영 안에서 실제를 분별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배웠지만, 다윗의 자손인 이 그리스도가 한편으로는 또한 모든 사람의 주(主)시라는 계시를 영 안에서 받지 못했다. 그들은 백 퍼센트 생각에 있었지만 영 안에는 일 퍼센트도 있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놓쳤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 지식으로 인하여 빗나가게 되고, 좌절하게 되고,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졌는지! 이것은 우리에게 성경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이 필요하다. 그러나 영적이고도 살아 있는 방법으로 성경을 대해야 한다. 성경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 대해 눈멀게 하지 않게 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지식이나 가르침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살아 있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산 임재요, 그의 산 영이다.

 

의문은 죽이고, 지식은 무감각하게 하고, 성경 해석은 혼돈시키고 좌절시키고 벗어나게 한다. 우리에게는 살아 있는 성경이 필요하고 살아 있는 말씀이 필요하고 살아 있는 가르침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자신을 생각으로부터 영으로 돌이켜 다윗처럼 영 안에서 그를 주라고 부르기를 배워야 한다. 『오, 주여! 오, 주여! 오, 주여! 나는 나의 지식에 주의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떤 가르침에 주의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내 영 안에서 살아 계신 주님만 주의합니다. 나는 나의 영으로 돌이켜 주님을 부릅니다.』

 

여러분의 머리로 그려서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여러분이 이 책의 어떤 것을 알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실제적으로 두뇌를 떠나 전적으로 영 안으로 돌이켜 『오, 주여!』라고 말해야 한다.

 

종교나, 정치나, 믿음과, 성경 해석은 모두 우리로부터 지나가야 한다. 그리스도는 이 각각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것들에 주의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살아 있는 주님, 살아 있는 그리스도 외의 어떤 것도 주의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 그의 임재가 있는 한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영 안으로 돌이켜 『오, 주여!』라고 말하기를 배워야 한다. 이것이 그를 체험하는 길이다.

 

우리는 모두 바리새인들에게 한 질문에서 주님의 놀라운 지혜를 깨달아야 한다. 그의 질문에서 주님은 그의 인격 문제를 언급했다. 이것은 거대한 문제이다. 우리가 주님을 알려면 그의 인격을 알아야 한다. 한편으로 그는 사람의 아들이요, 또 한편으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사람의 아들로서 그는 다윗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는 오늘 주님이시다. 사람의 아들인 그는 참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인격의 이 두 가지 본성을 깨달아야 한다. 그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사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바리새인에게 한 질문은 그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승천하신 그리스도

 

그러나 주 예수께서는 질문만 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계속하여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이것이 그리스도의 승천을 언급한 것임은 아주 분명하다. 종교에 주의하지 말라. 정치에 그리 많이 관심하지 말라. 소위 기독교인의 신앙에 너무 수고하지 말라. 성경 해석에 그렇게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 우리는 모두 존귀를 얻으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에 집중해야 한다. 주 예수의 승천은 그의 모든 어떠함, 그가 하신 모든 것, 그가 하실 모든 것의 정점이다. 아래의 그림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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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태초에 말씀이었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었다. 다음으로 그는 성육신되셨다. 그는 이 땅에서 인생을 통과하셨다. 그는 죽음으로 들어가 장사되었고 부활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거치시고 우주의 정점으로 승천하셨다. 승천한 후 그는 다른 형체를 가지고 다른 방법으로 내려오셨다. 그는 생명의 영으로 뿐만 아니라 능력의 영으로 내려오셨다. 그러한 그는 교회를 건축하시고 교회를 그의 재림을 위한 신부로 준비하시어 천년왕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어느 날 그가 이루고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영원 가운데 하나님과 어린 양으로서 새 예루살렘과 함께 계실 것이다.

 

마태복음 22장 41절부터 45 절까지에서 주님은 자신을 인격으로 언급할 뿐 아니라 승천한 인격으로 언급하신다. 그는 승천한 분이시다. 이러한 과정 안에서 그는 정점에 계신다. 그는 승천하신 분으로서 영원 전부터 승천까지의 모든 것과 승천부터 영원 후까지의 모든 것을 포함하신다. 할렐루야! 승천하신 그러한 그리스도가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은 것에 관하여 많은 말을 한다. 또한 그들은 항상 그들이 얼마나 불쌍하며 약한가를 말한다. 몇몇 사람들은 또, 하나님의 긍휼로 그다지 약하지 않고 참으로 영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의 부담은 우리가 이 모든 것으로부터 구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적인 문제나, 정치나, 소위 말하는 믿음이나, 심지어 성경 해석까지도 잊어버리라. 여러분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는가에 관해 너무 많이 말하고 있으나, 예수께서는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실 것이다. 모든 문제에 대해 합당한 대답이 있으나, 주된 문제는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이다.

 

여러분은 자신을 성경으로부터 살아 계신 승천한 그리스도에게로 돌린 적이 있는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여러 가지에 주의를 기울이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살아 계신 인격인 그리스도와의 계속적인 산 관계를 소홀히 한다. 예를 들면, 그것은 자매들이 짧은 치마를 입어야 하는가, 긴 치마를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점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여러분의 치마를 길이로 측정하지 말고 그리스도에 의해 측정하라. 그것은 그리스도를 거친 치마이어야 한다. 옷을 만질 때는 언제나 치수, 색깔, 모양으로 판단하지 말고 그리스도로 판단하라.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좋은 길은 그리스도에 의한 것이다. 믿음에 대해 주의하는 가장 좋은 길도 그리스도에 의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있다면 분명히 여러분은 합당한 신앙을 가질 것이다. 여러분에게 산 그리스도가 결핍되어 있다면 여러분이 신조를 가졌을지라도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불쌍한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 없이 성경을 취한다면 우리는 성경조차도 잊어야 한다. 주님의 뜻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회만을 주의하는 것이다. 이 모든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주 예수님은 교회를 잊지않으셨다. 우리는 이미 얼마나 그가 하나님의 건축인 교회를 언급하셨는지를 보았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에서 그는 질문하는 자들을 주님 자신과 그의 교회의 문제로 인도하셨다.

 

주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최근에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서 구원 받아 어느 정도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아직도 얼마 만큼의 종교가 있다. 이 모든 구절로부터 우리는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에는 오직 그분 자신과 그의 교회만 있음을 보았을 것이다. 많은 종교적인 일들과, 정치적인 일들과, 건전한 믿음에 관한 문제들과,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들로 인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회로부터 많이 벗어났다. 수년 전에는 성경 해석이 나를 사로잡고 유혹했다. 어떤 사람이 한 구절을 가지고 나에게 올 때, 나는 그에게 50가지를 해설해 주려고 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이 나에게 한 구절을 가져온다면 나는 그 구절을 줄여서 오직 그리스도만 말할 것이다. 성경의 해석에 관하여는 잊어버리라.

 

때때로 어떤 성도들은 주 예수님이 언제 오시느냐고 묻는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만 그가 돌아오시리라는 것이다. 때때로 그들은 그분이 오실 징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징조는 다만 징조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기꺼이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사신 그리스도만을 주의하겠는가? 그가 오늘 오시든 내일 오시든, 이런 징조가 있든 저런 징조가 있든, 그것은 작은 문제이다. 다만 그리스도를 주의하라. 그러면 여러분은 그의 오심에 대한 준비가 될 것이다. 누가 어떤 문제에 관하여 묻든지, 나는 결국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할 것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를 보라. 그는 존귀를 받으신 분이다. 할렐루야! 그는 태초에 하나님이셨고, 성육신되셨으며, 이땅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통과하셨다. 그는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셨고, 승천으로 말미암아 우주의 정점으로 올라가셨다. 이제 승천 후에 그는 생명과 능력의 영으로 여기 계시고 온 땅에서 교회를 건축하기 위하여 운행하신다. 그는 모든 지방의 촛대들 사이에 걸어다니시는 인자이시다. 그는 여기 우리 가운데 계신다. 이것이 우리가 주의해야 할 바로 그것이다.

 

그는 많은 지방 교회들 가운데에서 수적(數的) 성장을 주의하시고 생명의 성장을 더욱더 주의하신다. 그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헤롯당원들이나, 사두개인들처럼 어리석지 말라. 그들이 주의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리스도와 교회에 집중하라.』

 

우리가 성경의 어떤 구절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단지 성경 이해에만 주의하지 않는다. 어떤 부분, 어떤 장이 성경에서 가장 큰지를 모른다면 우리는 다만 모를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아는 데만 주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 우리는 승천한 그리스도에 대하여 주의한다! 그는 사람의 아들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다윗의 씨일 뿐 아니라 다윗의 뿌리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지방 교회 안에서 항상 성경을 다루고 끊임없이 성경을 먹는가? 어떤 것을 배우고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를 먹기 위해서다.

 

우리 모임에 아직도 종교적인 요소들이 있다. 왜 우리가 어떤 질서를 지키는 데 대해 그렇게 주의하는가? 그것은 아직도 우리가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모든 것을 알맞고 질서 있게 하라고 말했다고 따질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을 말하며 따지는 그 사실이 여러분 안에 있는 종교를 나타낸다.

 

내 말을 잘 이해하기 바란다. 나는 여러분이 집회에서 자유롭게 오직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으며 보고 싶다. 다만 집회에 와서 영 안에서 자유롭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라. 현재의 그리스도에 대해 자유함을 느끼라. 그리스도를 공급할 자유를 느끼라. 다만 자유를 느끼고 그렇게 조심스러워 하지 말라.

 

여러분 중 몇몇은 연륜에 주의한다. 적어도 여러분의 머리카락 중 몇 개가 집회에서 조심스러워하는 것 때문에 희게 되었을까 두렵다. 조심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다만 기꺼이 그리스도와 함께 자유를 누리라! 집회에 와서 느슨하게 가라앉아 있지 말고 영 안에서 생생하게 그리스도와 함께 자유를 누리라!

 

마태복음을 다 읽어보면 주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한번도 유대 종교에 대해 조심스러워 한 적이 없음을 알 것이다. 그는 세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신 때부터 유대교나 종교적인 느낌에 대해 전혀 주의하시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항상 사람의 눈에 거칠고 어긋나게 행동하셨다. 그는 의도적으로, 그의 제자들이 어떤 종교적인 것에도 주의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만을 주의하도록 감동을 주셨다.

 

나는 여러분에게 마태복음 21장과 22장을 5번 기도하며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여러분은 주 예수님이 얼마나 절대적으로 종교 밖에 있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오직 그분 자신과 그의 건축인 교회만을 주의하셨다.


위트니스 리
[그리스도냐 종교냐,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