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단순히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는 사랑 없이 많은 일들을 다룰 수 있지만, 사랑 없이 사람을 다룰 수는 없다. 우리는 사랑 없이 탁자나 의자를 다룰 수 있지만 사람은 다룰 수 없다.
내가 당신과 한 방을 쓴다고 가정해 보자. 만일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같이 지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당신과 함께 머무는 것이 어려울 뿐 아니라 당신도 나와 함께 머무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그와 같이 어떤 살아 있는 인격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성경에 의하면,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부부에 비유된다. 우리는 그분의 신부이고 그분은 우리의 신랑이다. 신부와 신랑은 사랑해야만 한다. 결혼에 사랑이 부족하다면, 그 결혼에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을 것이다. 사랑 없이 참된 결혼 생활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결혼이란 유일하게 사랑 위에 건축되어진다. 사랑 없이는 어떠한 결혼 생활도 없다.
마찬가지로 주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도 결혼 관계와 같고, 이 결혼은 사랑이 수반되어야 한다. 주님 편에서는 어떤 문제도 없으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확실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 편에 있다. 우리는 주 예수를 사랑하는가?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을 말할 때 달콤한 감정을 여러분 속에서 느끼는가? 언제든지 우리가 주님에 대하여 아주 조금이라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분께 매혹되는가?
믿음과 사랑
바울은 디모데 전서 1장 14절에서,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라고 말한다. 은혜는 두 방면에서 풍성한데,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에서이다. 원래 다소의 사울이었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심지어 그는 주님께 대해 미움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그가 주님으로부터 긍휼과 은혜를 받았을 때, 예수를 믿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을 사랑하게 되었다. 한때 그는 예수를 미워하였지만, 그후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예수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것이 가장 큰 긍휼이고, 이것이 참된 은혜이다. 단지 주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그분을 사랑해야만 한다. 우리 모두가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를 믿게 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 아버지, 당신의 은혜로 인해 내가 주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라고 기도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믿음이 필요할 뿐 아니라 또한 사랑도 필요하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이 두 가지이다. 이 복음서의 첫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신 주 예수님께서 태초에 말씀이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후 어느날 그분은 은혜와 실제가 충만함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한 사람으로 성육신되셨다. 요한복음은 우리가 이분을 믿도록 격려한다.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동사들 중 하나가 「믿다」이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우리는 그분을 믿어야 한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영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영접함으로 믿고, 믿음으로 영접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믿고, 믿음으로 그분이 주신 것을 영접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에 대해 말씀하신 후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셨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1, 23)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들에서 주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주님을 믿는 것과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믿는 것은 영접하는 것이지만 사랑하는 것은 여러분이 영접한 것을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마지막 장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물으셨다. 이로써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보여 주신 것은, 주님을 영접한 사람으로서 그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그분을 누리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자매들은 수퍼마켓에 가서 많은 식료품을 사서 집에 저장해 준다. 그러나 그들이 이 식료품을 사서 저장해 두었지만 아직 누리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자매들은 그것들을 저장할 뿐 아니라 또한 그것들을 누려야 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주 예수를 믿느냐고 묻는 것은 불필요하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 예수를 사랑하는지는 커다란 의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은 주 예수를 사랑하는가? 여러분은 다른 모든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가? 베드로는, 『주여,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줄 당신이 아시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여러분도 똑같이 말할 수 있는가? 솔직한 마음으로 우리는 『주 예수여,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줄 당신이 아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지금 우리가 주님을 믿고 있다면, 주님은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신다.
내가 훌륭한 성경 한 권을 한 형제에게 준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그가 단순히 그것을 받기만 원하지 않고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기를 원할 것이다. 이것이 주님을 믿는 것이 한 가지 일이고, 주를 사랑하는 것은 더 깊은 일인 이유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믿음과 사랑과 함께 그에게 풍성하였다고 말했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는 것은 바로 그분의 은혜이고, 주 예수를 사랑하는 것 또한 그분의 은혜이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주님 안에서 믿음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그분을 믿고 그분을 사랑한다.
예수를 사랑함
여러분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얼마나 긴 구절인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많은 세월 동안 나는 그 구절이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나에게는 단지 이것으로 충분했다. 많은 때 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하반절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단지 상반절만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덧붙였다. 바울은 단순히 스스로 자제할 수 없었다. 그는 그 안에 살아 있는 그러한 분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였다. 그것은 강권하는 힘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우리를 강권하신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하여 그분 자신을 주셨다. 이제 나는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으로 인해 산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님의 대적이었고 핍박자였다. 그러나 어느 날 주님은 그를 땅에 거꾸러뜨리셨다. 그후 그는 예수의 대적자와 핍박자에서 예수를 사랑하는 자로 바뀌었다. 참된 능력은 사랑 안에 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모든 어머니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어머니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어머니들은 사랑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주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나는 전에 한 자매가 순교시에 적은 시(詩)를 읽은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을 인용할 수는 없지만 주된 요점은 기억할 수 있다. 그녀는, 예수의 모든 순교자는 예수를 사랑하는 자이며, 예수를 사랑하는 모든 자는 예수를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다고 말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는가? 만일 여러분이 그들을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할 수 있다. 사랑은 그것을 할 수 있다. 오직 사랑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게 한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물으셨고, 베드로는, 『주여,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시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럴 때, 결국 주님은 그가 어떻게 죽게 될 것인지를 그에게 말씀해 주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요 21:18-19). 예수를 사랑하는 자로서 베드로는 또한 예수를 위한 순교자였다.
여러분은 예수를 따르고, 예수를 위하여 여러분의 생명이 희생되는 것이 고통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반대로 그것은 참된 즐거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 능력은 사랑 안에 있다.
사랑함으로 누림
생명은 인격이다. 그리고 이 인격을 적용하고 누리는 길은 사랑 외에는 없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필요가 있다. 지난 세기 동안 성도들 중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곤 하였다. 『주여,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옵소서.』 우리도 같은 기도를 할 필요가 있다. 일단 우리가 예수의 사랑을 본다면, 우리는 심히 강권당할 것이고 사로잡힐 것이고 매혹되어질 것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을 사랑함으로 그분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생명이다. 그리고 이 생명은 한 인격이기 때문에 그분을 체험하는 길은 사랑 외에는 없다. 오직 예수를 사랑함으로 우리는 그분을 누릴 수 있다.
만일 내가 어떤 형제를 누리기 원한다면, 나는 그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내가 그를 사랑하면 할수록 나는 그를 더욱더 누릴 수 있다. 주 예수님은 교리가 아니고, 은사나 능력도 아니며, 우리의 사랑과 애정과 존중이 필요한 인격이시다. 얼마나 우리에게 주 예수님을 향한 달콤한 애정과 사랑이 필요한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가르침들을 붙잡고 있지만 주님을 향해서는 아주 차겁다. 그들은 모든 교리들과 시대들과 예언들과 예표들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신성한 가르침에 관하여 박사 학위까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주 예수님에 대해서는 아주 차겁다. 우리는 가르침들은 냉담하게 다룰 수 있지만 이 인격은 냉담하게 다룰 수 없다. 우리는 모든 교리들을 다룰 때 우리의 생각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차겁다. 만일 우리가 이 인격을 다룰려고 한다면, 우리는 뜨겁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아주 넘치는 애정을 가지고 항상 그분을 접촉해야 한다. 육십 육 권의 성경 가운데 한 권인 아가서는 주 예수님이 얼마나 전체가 사랑스러운 분인지를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은 얼마나 주 예수님이 매력적이신지, 얼마나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는 다만 그분을 사랑한다! 여러분은 이렇게 어떤 교리를 사랑할 수 있는가? 나는 여러분이 이런 식으로 은사들을 사랑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여러분은 은사들을 사랑하는가? 여러분은, 『오, 사랑하는 은사여, 당신은 전체가 사랑스럽습니다. 혹은 오, 치료함이여! 오, 방언이여! 그 모든 은사들은 아주 달콤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방법으로 말하기를 시도해 보라. 전혀 그것들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천 번도 말할 수 있다. 『주 예수여, 당신은 전체가 사랑스럽습니다! 오 주 예수여, 당신은 전체가 사랑스럽습니다.』 여러분의 집에 가장 좋은 가구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의자, 책상, 침대는 모두 아주 비싸고 아름답다. 그러나 당신이 한 인격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의자들 중 하나에게, 『작은 의자야, 나는 너를 매우 사랑한다. 너는 전체가 사랑스럽구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나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나의 방에 있는 모든 가구들을 돌보지만 결코 내가 그것을 얼마나 사랑하는가에 대해서는 말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전혀 이런 식으로 내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면 말할수록, 달콤한 사랑과 누림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이것은 사람 안에 사랑을 느끼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은 의자가 아니시며, 침대도 아니시고, 가르침이나 교리나 은사나 능력도 아니시다. 그분은 사랑스런 인격이시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그는 나의 생명이시라!』
이 생명은 다름 아닌 사랑스런 인격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셨다.』라고 말하면서 주님께 대한 참된 사랑을 갖지 못한다면 그분은 단지 교리 안에서 우리의 생명이시다. 우리는 단지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가지고 있지만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누림은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생명이신 예수를 누리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한, 우리가 「생명」이란 용어조차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생명을 누릴 것이다. 우리는 그저 교리만을 알지 않고 우리의 생명이시고 산 인격이신 예수를 누릴 것이다.
주님의 성품을 취함
내가 어떤 형제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것은 많은 것을 포함한다. 그는 그 자신의 의지와 갈망과 목적을 가진 강한 성품이 있는 한 인격이다. 그는 또한 그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그에게 나의 갈망을 따르도록 요구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요구이다. 만일 내가 진정으로 그를 사랑한다면 나는 그의 갈망을 따라야 한다. 이런 이유로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한 후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생명과 인격으로 취하려면 주님의 갈망을 우리의 갈망으로 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의지를 우리의 의지로 취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목적을 우리의 목적으로 취해야 한다. 인격이신 그분을 사랑하려면, 우리는 그분의 성품을 취해야 한다.
여러분이 남편이라면, 참으로 여러분은 아내를 사랑하는가? 여러분의 아내를 사랑하는 최상의 길은 그녀의 의지를 여러분의 의지로 취하고 그녀의 성품을 취하는 것이다. 내가 한 남편으로서 나의 사랑하는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그러나 당신은 내가 머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하오! 당신은 나에게 복종해야 하며 내가 무엇을 말하든 나를 따라야만 하오.』 이것이 사랑인가? 만일 내가 참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면, 나는 그녀의 성품을 나의 성품으로 취했을 것이다. 그녀의 의지(意志)를 나의 의지(意志)로 취했을 것이다. 그녀의 목적을 나의 목적으로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기는 쉬워도 그렇게 행하려면 참된 사랑이 요구된다.
그것은 자매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위하여 어떤 것을 준비한다고 말하지 말라. 당신은 이런 방법으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의 남편은 당신이 준비한 것을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단지 그를 위해 어떤 것을 준비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갈망을 당신의 갈망으로 취하는 것이요, 그의 성품을 당신의 성품으로 취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은사들과 능력이 있는 많은 가르침들을 소유했을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취하지 않았다. 주 예수님은 가르침들과 은사들과 능력을 소유한 어떤이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베드로와 같이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이렇게 말하는 자들을 필요로 하신다. 『오, 주 예수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을 따릅니다. 나는 당신을 나의 인격으로 취합니다. 나는 당신의 성품을 나의 성품으로 취합니다. 나는 당신의 의지를 나의 의지로 취합니다. 나는 당신의 갈망을 나의 갈망으로 취합니다. 나는 교훈들이나 은사들이나 능력을 주의하지 않습니다. 나는 단지 당신 자신만을 주의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을 나의 인격으로 취하면서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과거 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중에서 수많은 교훈들을 들어 왔고 많은 것들을 행하여야 한다고 배워 왔다. 그러나 우리가 주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한 아무 것도 통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로 여겨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을 얼마나 많이 죽은 자로 여기든 우리는 결코 죽지 않는다. 그 반면에 우리 마음에서부터, 『주 예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성품을 나의 성품으로 취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우리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길 필요가 없다. 그럴 때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이다.
또 어떤 이들은 거룩함에 대해 가르친다. 그러나 무엇이 거룩함인가? 거룩함이란 단순히 주 예수 자신이시다. 만일 우리가 거룩해지기를 시도하고, 거룩을 소유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하루 종일 『주 예수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면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백화점 안에 있을 때, 고른 모든 물건을 집어들고서 『주 예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해 보라. 자동적으로 아주 많은 것들을 내려놓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주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집에 와서도 여전히 우리는 『주 예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형제는 여든 네 살이 넘게 살았었다. 그가 매우 나이 들었을 때, 어느 날 여행을 하다가 어느 호텔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자기 전에 그는 주님께 이렇게 말했다. 『주 예수여, 여전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의 저서들 중 어떤 것도 이 짧은 말만큼 나를 감동시킨 것은 없다. 이 짧은 말이 나의 마음을 만졌다. 그 당시에 그는 아주 늙었지만, 그는 여전히 주님께 그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이것을 읽은 것은 수년 전의 일이다. 나는 즉시 주님께 이렇게 말했다. 『주여, 항상 당신을 사랑하도록 나를 지키소서. 나는 단지 이 한가지만을 할 수 있도록 당신께 부탁합니다.』
사랑을 좇아 따라감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여러분 자신을 드리라. 다른 어떤 길도 그렇게 유력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어떤 방법도 그렇게 안전하고 부요하고 누림이 충만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분을 사랑하라. 그밖의 어떤 것도 주의하지 말라.
교훈과 교리와 은사와 능력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당신의 사랑 안에 나를 지키소서! 당신 자신으로 나를 사로잡으소서! 당신의 사랑스런 임재 안에 항상 있게 하소서!』 만일 우리가 이런 식으로 기도한다면, 우리는 주님께 향한 사랑이 어떤 사랑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생명이 어떤 생명인지 알게 될 것이다. 단순히 우리는 주님에 의해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그분을 사랑하는 한 모든 것이 다 좋을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하다면 그분이 우리에게 지혜가 되실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그분이 능력이 되실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합당하고 충분한 지식이 필요하다면, 심지어 그분은 우리에게 합당하고 충분한 지식이 되실 것이다. 그분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시다. 그밖의 어떤 것을 얻으려고 시도하지 말라. 그분이 여러분에게 그분의 사랑을 계시하도록 단지 그분을 주목하라. 아가서 1장 4절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는 주님께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요청해야 하고, 그럴 때 다른이들도 우리와 함께 그분을 따라 달릴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분을 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러한 방법으로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계시록 2장에서 교회의 타락은 주 예수님을 향한 첫 사랑을 잃음으로 시작된다. 에베소 교회에는 많은 좋은 행위들이 있었고 심지어 믿음 안에서 강했지만, 주님은 그 교회를 책망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하셨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신선한 최상의 사랑을 잃어 버렸다. 이것이 교회들의 타락의 시작이 되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침체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주님께로 가야하고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나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나는 사랑스런 당신 외에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필요치 않습니다. 다만 당신 자신을 나에게 보여 주소서! 내가 따르도록 나를 인도하소서. 오, 주여, 내가 당신의 사랑으로 인해 강권함을 얻도록 당신의 사랑을 나에게 보이소서! 주여, 나는 당신을 위해 어떤 것을 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단지 당신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나는 단지 당신을 나의 인격으로 취하기 원합니다. 나는 당신의 성품이 나의 성품이 되기를 원하고, 당신의 의지가 나의 의지가 되기를 원하고 당신의 갈망이 나의 갈망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을 나의 모든 것으로 원합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그것이 단순히 믿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또한 사랑의 문제임을 보았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만일 우리가 주 예수님을 향해 그러한 불타는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분의 모든 것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그밖의 어떤 것을 추구하라고 격려하지 않는다. 주님께 가서 여러분이 그분을 따라 달릴 수 있도록 여러분을 인도하시기를 요청하라. 여러분은 그 「조에 생명(zoe-life : 영원한 생명)」이 그러한 사랑스런 놀라운 인격이고 그 사랑이 그분과 교제하는 길임을 인식해야 한다.
위트니스 리
[아가서 강해,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함",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