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통제
체험
Eugene , 2012-05-15 , 조회수 (2420) , 추천 (0) , 스크랩 (0)

우리가 주님을 이미 믿었다면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많은 습관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고 주님을 믿기 전의 인격과 성품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 타고난 성품과 인격과 습관들은 새 생명이 나타나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를 만날 때 그들은 우리에게서 새 생명을 만지기 어렵고 우리 주님을 만지기 어렵게 된다.

 

많은 경우 사람들이 만지게 되는 것은 우리의 타고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즉 당신이라는 사람이 매우 총명할지라도 그 총명은 타고난 총명에 지나지 않고 당신이 매우 열성적일지라도 그 열성은 타고난 열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 당신이 만난 어떤 사람이 매우 온화할 수 있지만 이것은 그의 타고난 온화함에 지나지 않고, 그가 매우 민첩할 수 있지만 이것은 그의 타고난 민첩함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사람들의 이러한 본래부터 있었던 상태가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만지기 어렵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로 주님은 우리 몸에서 두 방면의 역사를 하신다. 한 방면은 주님이 과거 우리의 습관과 품격과 성품을 헐어버린다는 것이다. 오직 이렇게 하는 것만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우리 몸에서 자유로이 나타나게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주님의 생명은 천연적인 생명의 방해를 받게 된다. 또 한면으로 성령은 우리 몸에서 세밀하게 새로운 성품과 새 품격을 만들어내어 새로운 생활과 습관을 갖게 한다. 주님은 낡은 것을 헐어버리실 뿐 아니라 또한 새로운 것을 우리 몸에 조성하신다. 즉 소극적인 헐어버림이 있을 뿐 아니라 적극적인 조성도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후 주님이 우리 몸에서 하고자 하시는 두 방면의 일이다.


Ⅰ.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믿은 후 그 사람 자체가 헐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안타깝게도 지나친 총명으로 인하여 인공적인 방법으로 과거 그들의 성품과 품격과 습관들을 헐어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헐으실 때 맨 먼저 헐으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인공"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과거 우리가 인공으로 세운 성품과 품격과 습관들을 다시 인공으로 헐어버리는 것은 유익이 없을 뿐더러 도리어 번거로움을 더할 뿐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우리는 과거의 모든 것이 확실히 헐릴 필요가 있으나 우리 스스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인공적인 헐어버림은 외면적인 장식으로 변하여 오히려 영적 생명의 성장을 저지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헐어버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처리하는 일을 스스로 어떤 방법으로 생각해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일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 전체의 역사를 그 분 손에 맡기도록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우리는 이런 기본적인 사상에 대하여 분명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면 그분이 친히 우리 몸에서 역사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겉사람을 헐기에 유익한 환경을 우리에게 안배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헐어져야 하고 우리의 어떤 부분이 특히 강퍅하며 어떤 부분이 지나치게 강한가를 알고 계신다. 아마 우리들은 어떤 부분에서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릴 것이고 또는 어떤 부분에서 너무 경솔하거나 너무 고지식할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 자신은 이것을 모를 수 있지만 오직 하나님은 그것들을 아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철저하게 아시므로 그분이 역사하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 몸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허는 작업과 조성하는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편의상 "성령의 통제"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가 당한 환경이 비록 하나님이 안배하신 것이지만 그러한 안배를 우리에게 설명하시는 분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의 안배하심이 외면적인 일이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안배들을 우리 속에서 어떤 것으로 해석하시고 우리 몸에 적용되게 하신다. 외면적인 일들을 내적인 것들로 전환시키는 것을 "성령의 통제"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뿐 아니라 사실상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환경을 안배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직접 안배하시지 않고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안배하신다. 주님의 승천부터 주님의 다시 오심까지의 시대를 성령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대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모두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령은 환경 안에서 안배하실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인도하시는 분이다. 사도행전의 여러 곳에서 성령이 재촉하고, 허락하지 않고 금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환경 안에서의 성령의 안배와 믿는이들 속에 있는 재촉과 허락하지 않음과 금지함을 통틀어서 성령의 통제라고 명명할 수 있다. 그 의미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통제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통제는 인도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성품에 관한 것이기도 하며 노정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또한 품격에 관한 것이다. 우리 안에 새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고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해야 가장 적합할지를 아신다. 따라서 성령의 통제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우리로 적합한 환경을 만나도록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안배하시는 바로 그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 몸에서 허는 작업과 조성하는 작업을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통제는 우리가 성숙하고 달콤하게 변할 수 있기 위해 우리 몸에 성령의 조성이 있도록 우리의 천연적인 성품과 습관을 헐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환경은 하나님이 안배하신 것이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그분의 세신 바 되었다. 우리 아버지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질 수 없을진대 하물며 우리의 조우이겠는가! 한 마디의 날카로운 말과 좋지 않은 표정과 뜻에 맞지 않은 일과 도달하지 못한 소망과 갑작스럽게 육신의 건강을 잃어버린 것과 사랑하는 자가 홀연히 떠나는 이 모든 일들은 다 아버지의 허락하신 바들이다. 순조로움이든 타격이든, 건강이든 질병이든, 기쁨이든 고통이든 우리에게 임한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거친 것들이다.

 

하나님이 환경을 안배하신 것은 바로 우리의 낡은 인격과 성품을 헐어내고 새로운 품격과 성품을 우리 몸에 조성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환경들을 안배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런 환경 가운데서 부지불식간에 헐어질 것이 헐어지고 조성될 것이 성령에 의해 조성됨으로써 하나님을 닮은 품격과 성품을 갖게 하고 이러한 것들이 날로 날로 우리 몸에서 나타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은 즉시 우리는 첫째로 우리 자신이 헐리고 세워질 필요성이 있음을 알아야 하고, 둘째로는 우리 자신들이 친히 헐고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환경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그분이 헐고 세우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Ⅱ. 하나님은 어떻게 안배하시는가?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위하여 안배하시는가? 우리 각 사람의 성품과 품격이 다르고 생활과 습관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 각자에게서 헐어져야 할 것도 각각 다르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제하실 때 그분의 안배하심은 사람에 따라서 그 종류가 다양하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당한 환경이 다 다르다. 비록 부부는 가장 친밀한 사이지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안배하심이 다르고 부자지간이 친밀하고 모녀지간도 친밀하지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안배하심은 각각 다르다. 하나님이 우리의 환경을 안배하실 때 그분은 우리 각 사람의 필요를 보시고 우리에게 주신다.

 

하나님의 모든 안배에는 교육을 위한 목적이 있다. 로마서 8장 28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모든 것"은 십만 가지 백만 가지...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다.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안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나 우연히 당한 환경이 없다. 만사 즉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이 안배하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난 일들을 혼잡스럽게 질서 없이 널려 있는 것으로 보지만 그 속에 어떤 뜻이 있고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고 말한다.

 

우리들은 어떤 일들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지를 모르고 우리가 어떤 일들을 당하여 어떤 유익을 얻게 될지를 모를지라도, 한 가지 아는 것은 어떤 것도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의 안배하심이 우리에게서 거룩한 품격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우리 스스로 거룩한 행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환경들을 통하여 우리에게서 거룩한 성품을 만들어내시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사용하겠다. 항주(杭州)에는 비단을 짜는 직공들이 많다. 그들은 비단을 짤 때 수직과 수평으로 움직이면서 여러 가지 색상을 사용하여 짜는데 뒷면에서 볼 때는 아주 혼잡스럽다. 그래서 문외한들이 이것을 보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다 완성된 것의 앞면을 보면 거기에 사람, 꽃병, 산수 등이 수놓아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옷감을 짜고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당신은 실이 상하좌우로 왔다갔다하고 붉은 색도 있고 청색도 있다는 것밖에 볼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눈에는 우리가 당한 환경들이 이상하게 여겨져서 하나님이 어떤 무늬를 짜고 계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통제하기 위한 모든 실과 색상에는 그 목적이 있고 모든 도안까지도 그분이 미리 안배하신 것들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환경을 안배하신 것은 바로 우리에게 거룩한 품격을 지으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만난 모든 일에는 다 일정한 가치가 있다. 혹 우리가 지금은 아무 것도 모를지라도 어느 날엔가 그것을 알게 된다. 어떤 일들은 우리가 당한 그때에는 별로 보기에 좋지 않지만 한동안 지난 후 돌이켜보면 주님이 왜 그렇게 행하셨고 주님의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분명히 알게 된다.


Ⅲ.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

 

우리에게 이러한 조우들이 있을 때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로마서 8장 28절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바꾸어 말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 우리는 유익을 얻을 수도 있고 그 유익을 저지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의 태도와 큰 관계가 있다. 우리가 그 유익을 일찍 얻는가 늦게 얻는가는 우리 자신의 태도가 어떠한가에 달렸다. 만일 우리의 태도가 옳다면 우리는 즉시 그 유익을 얻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에게서 나온 그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만일 사람이 자신에게 선택이 있고 자신을 위하여 아무 것도 구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이 주신 것만을 원한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뜻만을 가진 것이다. 만일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외적인 모든 일들이 혼잡스럽고 질서가 없을지라도 그것들은 능히 사랑 안에서 조성되어 그로 유익을 얻게 한다.

 

만일 어떤 일을 만날 때 우리가 속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위하여 뭔가를 구하고 자신을 위하여 어떤 욕망을 가지며 하나님 외에 자신의 어떤 애호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유익을 지연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많은 일들에 대하여 불평하고 거스르며 원망하며 또한 탄식하게 된다. 형제 자매들이여, 비록 모든 것이 합력할지라도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로 인해 우리는 즉시 유익을 얻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많은 자녀들이 분명 많은 일들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별 유익을 얻지 못한다. 그들 위에 수많은 통제와 안배가 있었지만 그들은 풍성한 결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온유하고 부드럽지 못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므로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많은 다룸을 받았지만 영 안에서 별로 얻은 것이 없다.

 

우리가 주님을 믿자마자 마음속에서 하나님 사랑하기를 배우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구한다. 하나님을 아는 길은 지식에 있지 않고 사랑에 있기 때문에 지식이 부족한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지식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아는 것은 많으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의 모든 지식은 그로 하나님을 알도록 돕지 못한다. 사람이 어떤 일을 만나든지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러한 일은 그에게 유익으로 변한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손길을 알고 그 아래 복종하기를 배워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했다면 모든 일이 사람과 관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을 탓하게 되고 그들이 잔혹한 방법으로 대한다고 느끼게 된다. 혹 우리는 우리의 형들이나 자매들, 우리의 부모 혹은 우리의 친구들이 틀렸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틀렸다고 탓하고 있을 때 우리는 낙심하고 실망할 뿐 어떤 유익도 얻지 못한다. 우리가 교회 안의 형제들이나 자매들, 곳곳의 모든 것이 틀렸다고 느낄 때 우리는 화를 내고 판단할 뿐 어떤 유익도 얻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주 예수님의 말씀하신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그런 모든 환경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에 복종하게 되고 유익을 얻게 된다.

 

시편 39편 9절은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 일을 행하신 연고니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태도이다. 이 일을 행하신 이가 하나님이시요 내게 임하게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이 일이 내 유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잠잠하고 자동적으로 순복하는 것이다. 이때 나는 왜 다른 사람의 처지는 그러하고 나의 처지는 이러하냐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것이 하나님의 손인 줄 알기 때문에 다만 잠잠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몸에서 헐고 조성하는 역사를 하심을 보게 된다.

 

아마 어떤 사람은 우리가 사탄의 손에서 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물을 것이다. 이 질문에 관하여 기본적인 원칙은 이렇다. 즉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관하여는 순복하고 사탄의 공격에 대하여는 대항하는 것이다.


Ⅳ. 헐어버림과 조성함

 

주님이 매일매일 우리로 당하게 하시는 많은 일들 중에 우리가 만나기를 즐겨한 일들은 매우 적기 때문에 성경의 명령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이다. 우리는 주님을 힘입어 기뻐해야만 항상 기뻐할 수 있다. 주님 외에 항상 우리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순조롭지 않은 환경을 주시는가? 그분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분의 목적은 바로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을 헐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예레미야 48장 11절 말씀을 읽어보자.

 

"모압은 예로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치 술의 그 찌끼 위에 있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않음 같아서 그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치 아니하였도다." 모압 사람은 롯의 자손이자 아브라함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육체에 속한 사람들이다. 모압은 예로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않았고 시련과 타격을 받지도 않았고, 어려움과 고통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그로 눈물을 흘리게 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뜻에 맞지 않게 하는 일이 없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그는 얼마나 축복된 자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모압의 상태를 무엇과 같다고 말씀하시는가? "마치 술의 그 찌끼 위에 있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아니함 같다."

 

만일 술을 흔들지 않는다면 아랫 부분에는 찌끼가 있어도 윗 부분은 맑다. 그러나 일단 흔들어 버리면 술이 섞여지기 때문에 찌끼 위의 술은 완전히 맑아질 수가 없다. 철저히 맑게 하려면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겨야 한다." 과거에 바로 왕이 술을 만들 때에는 여과하는 그릇이 없었기 때문에 찌끼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술을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겨야만 했다. 본래는 술과 찌끼가 한데 섞여져 있었으나 이제 술을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김으로써 찌끼를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찌끼가 다른 그릇으로 따라 들어갈 수 있으므로 그때는 또 다른 그릇을 가져와서 다시 한 번 옮겨야 한다. 이렇게 수차례 반복하여 옮김으로 찌끼를 말끔히 제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모압은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술을 옮기지 않고 술을 그 찌끼 위에 있게 하여 그 찌끼가 조금도 제하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맛이 남아 있고 그 냄새가 변하지 않았다." 모압의 맛은 항상 모압의 맛이었고 모압의 향기는 항상 모압의 향기였다. 그의 원래의 상태가 어떠했으면, 오늘날에도 그러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래 맛을 원치 않으시고 그 냄새가 변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주님을 믿은 지 십 년이나 되었는데도 구원받은 그날의 맛이 십 년 후에도 여전한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이런 사람은 모압과 같이 그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하지 않은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믿은 첫날 제멋대로 행하더니 이십 년 후에도 제멋대로 행하고, 첫날 괴상하게 처신하더니 오늘에 와서도 변함없다면, 그 사람의 원래 맛이 아직 남아 있고 냄새가 변치 않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원래 습관과 인격을 제하고자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몸에서 부당한 것들을 다 제하고자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셨다가 다시 저 그릇에서 다른 그릇으로 수차 옮기심으로써 우리의 찌끼를 제하시고 원래의 맛을 없게 하신다.

 

모압이 걸어간 길은 순조로운 길이었지만 그 결과는 "그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하지 않은" 것이었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가는 길은 모압처럼 어려서부터 평안하거나 그리 순조롭지 않으며 도리어 바울이 말한 것처럼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찌끼를 제하고 우리의 원래의 맛을 제하는 주님의 역사임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더 이상 자신의 맛과 천연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기를 원하신다.

 

낡은 것들은 반드시 헐어져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어떠함을 뿌리째 뽑아내고자 하신다. 주님은 당신을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시고 또다시 저 그릇에서 다른 그릇으로 옮기시며, 오늘은 당신을 위해 이것을 안배하셨다가 내일은 다른 것을 안배하시며, 이 환경에서 저 환경으로 옮기시고 이 조우에서 저 조우로 옮기신다. 매번 주님께서 당신을 헐기 위하여 환경을 안배하실 때 자연히 당신은 원래의 맛을 잃으며 원래의 냄새를 잃게 된다. 거듭거듭 당신으로 하여금 원래의 맛을 잃게 하는데 어제와 오늘을 다르게 다루시고 오늘과 내일을 다르게 다루신다. 주님은 당신의 찌끼가 다 제해지고 당신의 원래의 맛이 상실되고 냄새가 변하기까지 오늘 당신 몸에서 조금 헐어내고 내일도 어떤 점을 헐어내신다.

 

하나님은 우리 몸에서 소극적으로 헐어버리는 역사를 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적극적으로 조성하는 역사를 하신다. 창세기에 기록된 야곱의 일생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조성됨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매우 천했다. 그는 아직 모태에 있을 때에 형과 다투었고 태어날 때에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앞서려고 했다. 그는 교활하고 탐심이 있었으며 항상 술수로 사람을 다루었고 자기에게 이익 되는 일만 했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속였고 자기 형과 외삼촌도 속였다. 그러한 그는 또한 외삼촌에게 당하였고 자기 아들들에게 속았다. 그는 힘을 다하여 자기의 발전을 꾀했지만 결국에는 여전히 기근에 떨어졌다. 그러므로 야곱이 거친 길은 매우 험난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편안하게 살지만 야곱은 험악한 삶을 살았다.

 

그가 거친 일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몸에서 끊임없이 헐어내는 역사를 하심을 볼 수 있다. 그로 하여금 갑작스럽게 이러한 일을 당하게 하다가 또 저런 일을 당하게 하여 매번 그가 만난 것들은 온통 험난함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이 많은 고난을 체험하게 하신 후에, 마지막에 애굽으로 갈 때 그는 이미 하나님의 거룩함을 만진 사람이 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거기서 우리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맑고도 장엄한 한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는 자기 아들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구할 정도로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아브라함이 말할 수 없는 예언을 말하고 이삭이 줄 수 없는 축복을 줄 수 있는 정도로 맑아졌고, 바로조차도 고개를 숙여 그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장엄하게 되었다. 이것은 본래 그렇게 비천했던 야곱이 하나님의 파쇄로 인하여 이처럼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 야곱이 된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야곱이 수년 동안 허는 역사를 거침으로써 결국 하나님이 그의 몸에 이렇게 많은 조성을 이루실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임종시에 지팡이를 의지하여 하나님을 경배할 정도로 아름답게 될 수 있었다. 그가 병중에 있으면서도 지팡이를 의지하여 하나님을 경배했다는 것은 그가 여전히 나그네 생활을 기억하고 있고 나그네의 성질을 잃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처음에 그는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리를 침상 위에 두고 예언을 하였었지만 예언을 마친 다음에는 다리를 침상 위에서 거두고 기운이 끊어져 죽었다. 그의 죽음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것은 극히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다.

 

우리는 야곱의 일생을 자세히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가 태어날 때 그보다 더 인간적인 맛을 내는 사람이 없었지만, 세상을 떠날 때 그가 가지고 있던 원래의 맛은 조금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온전히 하나님에 의해 조성된 사람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당한 모든 일이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온전케 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각양 각색의 어려움으로 우리를 심하게 헐으신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어려움들을 이길 때에 우리 속에 조성이 있게 된다. 바꾸어 말해서 비록 우리가 쓰러질 정도로 어려움이 임할 지라도 그분의 은혜가 능히 이 어려움들을 이기게 하시는데, 우리가 이길 바로 그 때에 우리 속에 조성됨을 증가시킨다. 하나님은 한면으로 우리로 극히 험난한 환경을 당하게 하시고 그 환경들을 통하여 우리를 헐으시며 또 한면으로 우리가 일어날 때에 우리 속에 조성을 좀더 증가시키신다.

 

우리가 성령의 통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임을 하나님께 감사하자.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우리가 성숙의 단계에 이르도록 성령의 통제로 말미암아 우리를 헐고 다시 조성하시기를 원한다.


워치만 니
[그리스도인의 50 필수과정, "성령의 통제",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