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 바울의 글을 주욱 읽어 보면서 자신을 바라봅니다.
집회가 이상해 보이고 시간이 아까운것 같은 느낌이 들때,,,
주님의 역사를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볼때,,,
혹은 교회의 이상을 보지 못하고,, 몸의 이상을 깨닫지 못하는 지체들을 볼때,,,
답답해 할 필요가 없음은
그의 글을 깊이 묵상 할 때에 더욱 자명해 집니다.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 을 입은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악하여졌습니다.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하셨습니다.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하셨으니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 이야 말로 할수 있겠습니까…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가지들이 꺽이운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니,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꺽이우고 얼마는 믿으므로 섰습니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 하는 마음을 품어야 하는것은,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 하셨은즉 우리도 아끼지 아니하실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을것이데,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때문입니다.
우리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겠습니까?
여기에 큰 비밀이 있으니,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것이
모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이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우리가 긍휼을 입었으니
이는 모두 그분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 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의 답답해 보임을 판단할 필요가 없음은,
모두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때문입니다….
때가되면,
모두 충만히 변화되고
낮아질대로 낮아져 그분처럼 똑같이 된 노예의 위치에 처해진 자들이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