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영성에 대하여 ..
나눔방
, 2007-08-28 , 조회수 (2593) , 추천 (0) , 스크랩 (0)

                                            고난과 영성에 대하여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심에 있어서 최고의 방법이 무엇일까? 그것은 안타깝게도 "고난"이다. 어쩌면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고난은 고통이요 괴로움이며 부끄러움이다. 고난에서 이런 것이 경험되지 않는다면 이미 그것은 고난이 아니다. 고난은 결코 아름다운 어떤 것도 아니다. 사람으로부터 버린바 되는 것이요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것이요, 오해받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은 고난의 신비(mystery), 다시 말해 분석적인 추리력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고난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아무도 거룩해질 수 없다고 말하였다.

 

   고난 앞에서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신발을 벗어야 한다. 고난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난은 빙산의 일각과 같은 것이다. 중세기 최고의 신학자이고 저술가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병에 걸린 중에 환상을 본 후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환상 중에 본 하나님의 영광과 비교해 볼 때, 이제까지 내가 해왔던 저술들은 모두 지푸라기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이 훈련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러나 그 분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 앞에 서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영적 지식을 알아가는 것 자체가 고난의 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새로운 영적 지식을 알아갈 수록 기존에 알던 것의 균형이 깨어지게 된다. 참다운 지식은 삶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깨어진 균형은 우리에게 고난으로 오게 마련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의 영적 지식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고통 받은 만큼 채워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은 역설 중의 역설이다. 고통은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던 지식과 가치관을 송두리째 흔들거나 없애버릴 수 있다. 아무리 우리가 고통에 대해서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고통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고난 앞에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 ” 라고 말씀하셨고 “ ~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 ” 라고 하셨다.

 

   개인적인 깊은 상실감은 굳건하게 보이는 신앙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고통은 기존의 가치관을 허물어뜨릴 만큼 큰 파괴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 앞에 겸손해야 하고 경외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 가운데 한가지를 들면, 어쩌면 결혼은 순교의 과정이며 고난의 신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작가로 유명한 C.S. 루이스는 1940년에 “고통의 문제” 란 매우 탁월한 책을 저술하였다. 고통에 관한 깊이있는 영적 진리를 말하는 이 책은 매우 많이 팔렸으며, 그 자신 스스로도 그 책의 내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이 그레샴이라는 한 미국 여성이 갖고 있는 불가사의한 힘 앞에서 자신의 독신주의에 대한 신념을 접을수 밖에 없었으며, 그리고 1960년에 그녀가 죽자 루이스는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런 일을 겪은 후 그는 “비통의 깨달음”이라는 책을 필명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은 개인적인 상실감이 그 사람의 굳건한 신앙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가슴 아픈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는 차마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못하고 필명으로 출판하였던 것이다. 그 책 가운데서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슬픔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나 자신에게 슬픔이 닥쳤을 때 당황하거나 그 슬픔에 압도되지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 믿음은 허울일 뿐이었다. 나는 ‘질병’이나 ‘고통’, ‘죽음’, ‘고독’이라는 이름을 가진 害가 없는 모조품들을 가지고 놀았던 것에 불과했다. 나는 내가 밧줄을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밧줄이 나를 지탱해 줄 것인지 아닌지 문제가 되기 전 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문제가 되었고, 나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생각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계속 무너져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직접 무너뜨리셨다. 그렇다면 이런 무너뜨림이 곧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 흔적이라고 왜 말하지 못하겠는가? 이런 무너뜨림은 오직 고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진정한 고통과 무너뜨림의 경험을 한 사람은 그것을 통해서 전적으로 좌절했거나 혹은 영적으로 성장했던지 간에 “그래, 난 꿈에도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나는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그것을 바꾸지 않겠다.”라고 고백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변화되기 위해서 다시 그 때로 돌아가서 그런 것을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분명히 그 고통을 선택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고통은 그런 것이다. 주도권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 분에 의해서만 연단되고 정화될 수 있는 것이 고통이 가지고 있는 비밀이다.

 

   우리가 변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포기해야 할 것들이 있다. 돈, 명예, 명성, 건강, 생명, 가정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그 어느 것도 포기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포기하려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 반드시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루이스나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이 처음에는 고통을 하나의 문제(problem)로 보았다. 간절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꺼리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고통의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니다. 고통은 거쳐야 할 신비(mystery)인 것이다. 문제와 신비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견뎌내야 할 신비로 보기보다는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는 경우가 흔하다.

 

   문제는 수학문제처럼 해결의 가능성이 있으며 또한 그것이 자신의 운명에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대상인 것이다. 그래서 그 문제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고, 때론 회피할 수도 있다. 아니면 멀리 떨어져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신비는 근본적으로 하나의 상황이며,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존재 전체가 달려 있는 상황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삶은 하나의 신비라고 할 수 있다. 덧붙여 우리의 삶에는 또 다른 신비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존재된 피조물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존재하게 되었고 또 고통 가운데 던져졌다. 우리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고 한계를 가진 피조물이기에 고난은 어떤 의미에서 본래적인 것이다. 하지만 고난이 해결할 수 없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라고 해서 그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비란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가 가능하지만 너무 심오해서 인간의 이성적인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샤르뎅(Teilhard de Chardin)은 그의 저서인 『고난의 의미와 적극적인 가치』(The Meaning and Constructive Value of Suffering)에서 다음과 같이 고난의 의미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우주 안에는 무엇인가 진행되고 있는데 그것은 배태와 탄생의 과정이라는 말로 가장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 그리고 이 세계는 우리가 손으로 더듬어 찾아 가는 것이다.(우리가 그 어떤 것도 온전한 지식으로 대할 수는 없기 때문에) ~ 그것은 수많은 실패와 재난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다. 고통 받는 자들이 어떤 아픔을 가지고 있던지, 그들은 모두 가혹하면서도 숭고한 이런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들은 결코 무용지물이 아니며, 해로운 존재도 아니다. 그들은 이 우주의 성장과 승리를 위해서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 그들은 신의 섭리를 따라서 자신의 연약한 육체로 세상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세계가 성장하는데 있어서 효력 있는 요소들이다.”

 

   고통은 꼭 개인적인 고통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세상의 심한 악과 불의를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심한 경우 차라리 죽음을 택할 만큼 고통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면에서는 일반적이지만, 대체로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되며 또한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수용의 강도가 다르긴 하다. 어떤 경우는 그것이 너무 강하고 구조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에 관한 깊은 회의(懷疑)를 유발할 수도 있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에 대한 합당한 이해나 주장이나 증명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보편적인 이해는 있다. 그러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상황에 대해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악과 불의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유명한 소설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무신론자 이반과 신자인 알로샤가 벌이는 논쟁 속에서, 이에 대한 좋은 예를 볼 수 있다. 이반이 알로샤에게 한 이야기 중에 특별히 끔찍한 이야기는 사냥개를 유별나게 아끼는 러시아 지주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그 농장에 있는 여덟 살 된 노예 소년이 우연히 그 지주가 아끼는 사냥개의 발을 다치게 했다. 지주는 소년을 감금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그 아이를 어머니 앞에서 벌거벗겨 매질을 하고 바깥으로 도망치게 하였다. 그리고선 사냥개들에게 아이를 쫓게 했다. 결국 사냥개들은 그 소년을 잡아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말았다.”

 

   이반은 앞으로 그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순수한 그 소년에게 그런 고통이 가해지고 있는 이 세상에 정의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알로샤에게 그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논거를 제시해 보라고 요구했다. 물론 알로샤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합당한 설명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것이 효과가 있을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모든 사람과 피조물을 대신하여 자신의 순전한 피를 흘려주신 그 분의 현존 앞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함께 울어야 합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리고 유일한 해결책은 우리를 위해 이미 그 길을 걸으신 그러나 능력이 있으신 그 분 앞으로 함께 나아가는 그 길이 유일한 길입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며, 정의라는 이름으로 그를 비난하는 모든 고소 앞에서 침묵하신 분이시다. 그 분은 제사장 앞에서도 그리고 빌라도 앞에서도 침묵하셨다.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답이나 주장도 하지 않으셨다. 오직 이 현존만이 의미를 가지며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믿음은 증명의 범위를 넘어서 있으며 초월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은 악과 고통의 한 가운데에서, 불합리의 이 세상에서 오직 거룩한 분의 현존을 통해서만 생겨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그 분의 함께 하심으로 주어진 믿음만이 오직 우리의 삶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분의 은혜가 없이는 결코 이해도 납득도 있을 수 없는 상황과 고통과 불의와 악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한 것은 오직 그 분이 주시는 믿음으로만 극복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믿음은 한정되고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믿음의 범위를 넘어서는 환경에 직면할 때 기존의 믿음은 흔들리게 되며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믿음의 도약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완성된 것은 아니다.

 

   이런 실례를 또한 우리는 성경의 욥의 이야기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순전하고 의로운 욥이 사단의 교사(敎唆)로 인해 재산과 자녀와 그리고 건강까지 빼앗기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욥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시험이었다. 만약 욥이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그것은 욥의 의로움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이제까지 단순히 자신의 재산과 자녀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즉 그가 이전까지 기뻐했던 것은 하나님의 현존 때문이 아니라 그가 누리고 있는 것 때문임을 말하는 것이 된다.

 

   욥기 37장까지 욥은 친구들과 아내와 논쟁을 하게 되는데 그의 친구들은 모두 순전하고 의로운 사람이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신학적 견해를 대표하는 자들이다. 즉 욥의 순전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것이다. 반면에 그의 아내는 욥의 순전성에 대해서는 수긍한다. 그러나 그녀는 욥이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정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욥이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욥은 누구의 말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의 순전함을 부인하지도 않았으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포기하지 않았다.

 

   욥기 38장에서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서 “무지한 말로 하나님의 섭리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모든 논쟁들을 중단시키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욥기의 장엄한 시를 통해서 창조의 경이로움을 일깨우실 때, 우리는 이런 구절을 반복해서 듣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 순간이야말로 욥이 전통적인 하나님 사상을 돌파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때 욥은 순전한 고난자의 개념과 정의로운 하나님에 대한 개념의 딜레마에서 더 이상 갈등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 욥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그리고 그의 친구와 아내의 주장에 대해서 어떤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대답을 하게 되면, 고난은 신비(mystery)가 아니라 해결 가능한 문제(problem)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될 것이다. 고난은 신비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 속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욥은 이렇게 외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내가 고통과 불의와 죄악 가운데 있을 때, 과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정말 고난을 진정으로 겪어 본 사람이라면 우리의 영혼 깊은 가운데서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때가 반드시 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심한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은 ...  사람이 된다.  이것은 심오한 비밀이다.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내 안에서 하나님이 고통을 받으며, 또한 내가 옥에 갇힐 때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옥에 갇히는 것이다. 자리바꿈이 일어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사람의 자리를 취하고 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끊임없는 자리의 교환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수용소에서 규칙을 몇 번 위반하는 일이 있자, 그 처벌로서 10살 정도의 어린 아이를 교수형에 처하기로 결정했다. 교수대 위에서 그 아이는 슬픈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시 역시 어린 유대인 소년이었던 엘리 비셀(Elie Wiesel)도 이 광경을 보고 있을 때 늙은 유대인의 불평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은 어디 있단 말인가? 그가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이 소리를 듣는 비셀의 마음에 다음과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에? 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교수대 위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그 사람 안에서 고통을 당한다. 즉 하나님은 사람의 자리를 취하고 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끊임없는 자리의 교환이 있는 것이다.

 

   혹시, 우리의 삶 속에 고통과 죽음(자아의 죽음)이 유입되는 것은 독단적이고 무의미한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고통은 정말 의미 없을 뿐 아니라 저주가 될 것이다. 시험과 고난이라는 것은 우리가 대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가장 큰 고통인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고통은 결코 독단적이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고통과 기쁨이 배타적인 것으로서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코 진리와 초월에 이를 수 없다. 물론 지성적으로만 생각하면 고통과 기쁨은 서로 모순되는 개념으로 결코 양립할 수 없다. 지성적으로 그리고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고통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쁨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신경증 환자일 뿐이다.

 

   그러나 삶이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경험으로 볼 때 고통은 어쩔 수 없는 현 세계의 상황이다. 그러나 깊이 성찰해보면 고통으로부터 단절되는 삶은 사실은 기쁨으로부터도 단절되는 삶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또한 고난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바른 길로 이끌게 하는 좌표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통이 전혀 없다면 우리의 길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물론 이런 고난은 자신의 죄와 육신의 탐욕과 타락으로 인한 고통과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영적인 통찰을 통해 보면, 우리가 점점 더 순수한 형태의 고통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고통도 점점 더 구원의 능력을 갖게 되고, 궁극적인 형태의 고통에 다달았을 때 구원의 문이 열리게 된다. 궁극적인 형태의 고통이란 순수하고 순전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존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때 겪는 고통을 말한다. 이런 희생과 그에 따른 구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구약의 제사에 있어 흠 없고 순전한 제물의 대신한 희생과 그에 따른 속죄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희생 제물이 속죄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형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고 신비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특별한 상황에서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대신할 수 있다. 즉 자리의 이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장소의 장벽(그 존재를 대신하는 것)을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순전함과 순결함이다. 순전함이 어떻게 죄악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그 죄악을 구원할 수 있는지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며, 또한 일어났음을 신구약 성경은 분명히 선포하고 있다. 그것은 온전한 거룩함이 구원할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온전한 순전함은 자신을 벗어 던지기 때문에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으며 또한 모든 것을 이길 능력이 수반된다.

 

   우리는 일정 부분 연기자의 삶을 살게 되는데 이로 인해 온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우리는 순간순간 우리를 순수함과 거룩 가운데 던져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다. 자기와 세상을 기반으로 두고 행함은 하나님의 자녀의 방법이 아니다. 자신을 돌아보라! 우리는 얼마나 순간순간 타산적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타산(打算)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과거요 이 세상이다. 이러한 것으로는 결코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오직 우리가 순수할 때만이 다른 사람들을 害하는 방법으로서가 아닌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삶 속에 침투해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우리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준 그 분의 고통 안에서 모든 피조물의 자리를 대신하셨다. 그는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셨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잔은 세상의 죄악과 독약들을 모두 모아 놓은 잔으로 자신이 남김없이 마셔야 하는 잔이었다. 피조물의 절정은 자기희생이다. 그것이 궁극적인 것이며 최종 단계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 그곳에 하늘나라가 있다. 또한 시간의 완성 곧 영생의 문이 있다. 이는 경험하는 자만 알 수 있는 실존적 영생이다.

 

   그러나, 우리는 순전하거나 순수하지도 않고 고난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다른 존재를 위한 희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이야기가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잘 인식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 분과 함께 동고동락하고 제자도의 훈련을 받은 제자들일까? 아니면, 주님을 진실한 사랑으로 따랐던 여인들일까? 아니면 직업적으로 거룩한 사람들이고 성경 연구의 전문가였던 율법학자와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이었을까? 놀랍게도 복음서의 기록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나라를 제대로 인식하고 받아들인 사람은 오직 한 사람 곧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였다고 말한다. 그가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주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갈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라고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거룩한 사람이 아니지만 옆에 계신 분이 거룩한 분임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거룩한 사람은 “모든 존재들 속에 스며들고 배어들 수” 있기 때문에 그 거룩한 분도 자신과 같이 죽어가는 범죄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존재들 속에 스며들고 배어들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즉 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 강도는 아무 준비가 없었다. 오직 주님을 만났고, 그 분을 만났을 때 그의 전심으로 순전한 마음으로그 분에게 자신을 의뢰했다. 그렇다 오직 이것만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셨다. 모든 피조물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 자신을 버리셨다.

우리도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야 한다. 우리가 그 길을 갈 때 이 우주에서 나를 통해서 예수님의 구속이 일어나고 피조물의 회복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런 길을 걷는 사람은 영생과 생명을 경험하게 된다. 고난은 우리로 그 길을 가는 것이 진리임을, 하나님 나라의 본질임을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가장 귀한 교육 방법이시다.

 

   십자가의 도가 가장 미련한 방법이었듯이, 고난도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 외에는 우리를 깨뜨릴 다른 길이 없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자의로 가진 것을 내놓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방법이 유일하고 최선의 방법이다. 우리가 사생자가 아니라면 우리는 반드시 이 길을 걷게 된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는 이유 곧 인생의 의미도 이런 고난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조건으로서가 아니고, 정말 내 중심에서 나오는 사랑과 그리고 나의 전 인격으로 그 분을 인정하고 신뢰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할 것이다.

  어쩌면 모든 환경과 고난과 심지어는 사단까지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와 인격으로 새롭게 알고 인정하는데 쓰이는 교육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눈물의 과정이고 자아가 깨어지는 과정이며 고통과 쓰라림의 과정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이다. 우리는 이 과정을 그 분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 긴 것 같지만 순식간에 우리는 그 분 앞에 서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