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
저는 그 동안 영원한 생명 곧 영생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시간은 무엇이며?, 또 시간과 영생의 관계는 무엇이며? 또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생에서 영생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에 관해 많이 생각해 보았고 또 이를 다룬 많은 철학과 과학의 서적들도 읽어보았습니다. (이에 관한 글을 보시기 원하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 http://blog.naver.com.jamse12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번 요한서신을 다룬 비디오집회의 메시지 3번에서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에 관해 A.Y 형제님께서 세 방면으로 하신 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미니스트리 115쪽) 하지만 간단히 개념만 언급된 정도여서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더욱 묵상하는 중 성령님의 더욱 확장된 조명이 있어서 여러분과 교통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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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 쉬운 “불멸” 또는 “영원히 계속되는 생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이란 말에는 세 가지 함의(含意)가 있습니다.
- 첫 번째는 시간의 방면입니다. -
영원이란 시간의 면에서 ‘처음도 없으며 끝도 없는’ 것입니다. 이는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은 시간의 연장이나 확장이나 단절이 아니고 시간을 내포하며, 동시에 그것을 超越한 어떤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원에 대비할 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이란 것이 결국 피조물이라는 것은 이미 우리가 주지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시간을 인간이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곧 영생을 알지 못하는 세상의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피조물인 시간을 극복하지 못한채 종처럼 매여서 쫓기듯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다가 때로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人生無常을 말하며 덧없는 세월을 한탄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이 가지고 있는 사망의 냄새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려느니하고 체념하며 살다가 죽는 것이 인생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믿는 자인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 곧 영생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언제나 그 영생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피조물인 시간을 원래의 위치대로, 우리의 다스림의 대상이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곧 우리 안에는 영생 자체이신 그 영이 있음으로, 우리가 그 안에 온전히 들어감으로써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도 하나님처럼 영생을 누려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 가운데 온전히 들어가서 그 영을 잠시도 놓치지 않고 영의 충만과 기쁨으로 순간순간을 산다면, 우리 안에서는 시간의 斷切이 아닌 시간의 超越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하루는 성경말씀처럼 천년과 같게 될 것입니다. 또 이러할 때 우리의 바깥에서의 객관적인 시간의 지속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는 의미가 사라질 것입니다.
곧 더 이상 우리에게 있어 하루 더 살고 못살고는 중요치 않게 될 것입니다. 또한 나이가 많고 적음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간의 선 위에서 우리가 영생에 있지 않을 때 즉각적으로 역사하는 사망도 삼킨바 될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주님이 당장 부를지라도 미련 없이 아멘! 하고 언제라도 몸을 벗고 그 분 앞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는 우리는 목숨을 다하여 하루에 있어 단 1초도 그 생명에서 그 영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함으로서 자신이 항상 永生의 位置에 있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생명에서 떨어지고 그 영을 놓친다면, 그 순간 바로 여러분은 시간에 종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 두 번째는 質의 방면입니다. -
"영원함"이란 신성하고 결코 파괴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생은 언제나 늘 새롭게 生成되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부활 생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온전한 자유와 창조(계속적인 신선한 생명의 흘러넘침) 가운데 있습니다. 절대 고착되지 않습니다. 고착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피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내 안에 영생을 가진 그리스도인이지만 바로 이 자리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하나님의 그 부활 생명을 곧 그 영을 붙들지 않고 있다면 우리에게도 세상을 지배하는 법(質의 법)은 즉각적으로 역사할 것입니다.
세상은 그냥두면 자동적으로 후패하고 낡아지며, 질서에서 무질서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이것은 세상의 학문인 물리학에서도 "엔트로피(entropy)의 법칙"으로 이미 증명된 원리입니다. 인간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의 인생도 그냥 두는데도 저절로 좋아지고 개선되는 법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갈 때만 인간의 삶은 새로운 삶 곧 부활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곧 그 영을 놓치지 않고 온전히 그 영 가운데 있다면, 비록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질지 모르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될 것입니다.
- 세 번째는 공간의 방면입니다. -
영원함이란 ‘공간적인 것’ 곧 영역과 관련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아닌 곧 영원한 생명이 아닌 사람의 생명은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방면에서 한 가지 쉬운 예를 들면, 세상의 부자란 자기가 다스릴 수 있는 공간과 환경의 영역이 넓은 사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자기 한 몸 누일 공간만 겨우 가질 뿐입니다.
그러나 영생이신 하나님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실뿐 아니라 모든 공간 곧 전 우주를 다스리십니다. 요한은 문들이 닫혔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오셨다고 요20:26에 기록함으로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공간을 초월하고 계신 영생이심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영생을 소유한 우리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온전히만 붙든다면, 우리도 역시 공간과 영역을 다스릴 수 있을 것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성경에 있습니다. 바울은 富할 때나 궁핍할 때나 그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자족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깊음이나 삼킴이나 매질이나 감옥도 그를 제한시킬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생명으로 충만하여 찬송할 때 옥문이 깨지고 착고가 풀렸으며, 또한 옥중에서도 그의 사역은 중단됨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더 이상 공간과 환경은 그를 지배하는 것이 될 수 없었으며, 오히려 그가 영생의 생명으로 그것을 다스렸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보이는 환경이 어려울지라도 우리는 영생을 통해서 그것을 극복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가운데서 창조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이미 자신 안에 있는 영생을 단 한 순간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온 생각을 사로잡아 영을 집중해야 하며, 내 안 깊은 곳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샘물처럼 쉬지 않고 외쳐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치열한 삶을 살아갈 때, 그런 삶이야말로 ‘이기는 자’의 삶이요 追求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