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 가장 사람답게 사는 길인가? 하나 밖에 없는 목숨
어찌 살아야 죽음 앞에 이르렀을 때 잘 살았다는 말을 들을꼬
이런 사색과 고민 속에 빠져 지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야말로 주님의 긍휼로 1983년 말쯤 한 길을 보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온지가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후회가 없습니다.
어제 한 사람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듣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듣고 보니 그분이 사람으로서 살았던 일생이 제가
선택해서 걸어왔던 바로 그 길이었습니다. 그 궤적은 신약 중
에서도 사복음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신약경륜을 위하여 (그리고 신약
경륜을 따라) 사람이시되 사람의 생명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을 살아 표현하셨습니다(요6:57상).
이런 탁월한 삶을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과 사람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함 등의 두 방면에서 조명해서 보여줄 때 제 안에 짜릿한
전율이 흐름을 맛 보았습니다.
먼저 그분은 주님자신을 생명의 씨로 사람 안에 뿌리고 그 씨가
사람 안에서 자라게 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막4:26, 27).
그분은 한 알의 밀알로서 죽으서 많은 밀알을 산출하고 그
밀알들이 한 떡으로 뭉쳐지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요12:24).
그분은 사람으로서 사람만 잔뜩 표현하던 사람들을 위 두
과정을 거쳐 사람이되 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롬1:3-4, 8:29).
위 세 가지를 한데 묶어서 표현한다면 주 예수님은 <그분자신을
사람들 안에 분배하사 그들로 그분의 몸의 지체가 되게 함으로
이들이 단체적으로 하나님을 표현케 하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이것은 뭇 사람들의 삶을 열 가지로 압축한 단어인, <종교, 문화,
윤리, 도덕, 성격개조, 철학, 영성, 성경적임, 성결, 승리의 삶>
과는 차별된 삶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위 열 가지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위 열 가지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으되 영원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
(엡1:3-4)을 이루는 하나님의 신약경륜에 때란 삶과 비교할 때
부족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에 깊은 속에 공감이 가시는
분은 이 글을 바로 이해하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두번 째는 주 예수님은 사는 동안 최소한 일곱 번의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셨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서 확 등장
(커밍 아웃?)해서 그 상황을 단박에 종료시켜 버릴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시되 그냥 사람의 위치에 계속 머물러서 사람으로서
그 상황을 통과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입니다.
우리 주님은 아래 모든 사례에서 후자를 택하심으로 훗날 사람
으로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살아 표현하고자 하는
저를 포함한 모든 추구하는 믿는이들에게 어떻게 예수 믿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좋은 본이 되셨습니다(벧전2: 21).
첫번째가 유년시절에 (하늘의) 아버지 집에 머물지 않고 돌아가
육신의 부모를 섬긴 일, 둘째는 한 사람의 위치에서 침례를 받은
것, 셋째는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것, 넷째는 베드로에게
십자가에 죽지 말라는 책망을 들었을 때 그 말을 받지 않은 것,
다섯째는 변화산에서의 변형 이후에 사역을 바로 마감하지 않은 것,
여섯째는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하는 인파 앞에서 동요되지 않고
한 알의 밀알로서 죽음의 위치를 고수한 것, 마지막으로 게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가 주신 잔을 마신 것이 그것입니다.
집회에서 받은 감동이 컸었는데 막상 글로 압축헤서 표현하려니
그것이 반감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다시 말해내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