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이야기(5)
나눔방
, 2006-10-15 , 조회수 (2126) , 추천 (0) , 스크랩 (0)

어제는 뉴질랜드에 있는 딸아이 학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학교에서 국제전화를 했으니 얼마나 다급한 일인가 싶어 잠시 놀랐습니다.

그러나 내용인즉..

딸아이가 헌혈을 하려고 혈액검사를 했는데

검사결과 헤모글로빈 수치가 너무 낮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딸아이의 얼굴이 너무 하얗다는 것입니다.



제가 뉴질랜드로 돌아갈 2주 동안 딸아이가 쓰러질 수도 있으니

학교 측에서 너무나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딸아이 피부색은 원래 희고 평소에 건강하니 괜찮다고 하여도

교감선생님은 속히 정밀검사와 치료를 받아야한다고 성화가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학교 측에서 딸아이를 위한 의사를 주선하는데 동의를 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빈혈 가지고 뭐 그리 야단이고, 사람 놀라게.”

그리고는 남편과 옛날 학창시절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뜨거운 햇살 아래 교장선생님의 길고 지루한 훈계.

얼굴이 하얗게 쓰러지는 아이들은 양호실에 눕히고 정신 들면 다시 교실로.

건강보다 빠지지 않고 수업 듣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물론 아파도) 빠짐없이 출석을 하면

개근상을 주면서 칭찬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개근상에 무척 목을 맨 학생이었습니다.

초등 6년 개근, 중등 3년 전근, 고등 3년 개근상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초등 2학년 때는 수두를 앓았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가지 못하도록 어머니가 방문을 잠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창호지 문을 뚫어 문고리를 빼고 몰래 학교에 갔습니다.

공부하고 있는 교실에 물주전자와 약을 들고 어머니께서 들어오셨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아픈데도 등교한 사실을 칭찬하시며 어머니와 집에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퇴처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어머니 등에 업혀 집을 돌아 왔습니다.

수두로 엉망이 된 얼굴보다 수업시간 어머니 등에 업혀

교실을 나온 사실이 더 부끄러웠습니다.

그날 이후 똑 같은 일이 서너 번 더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 초등학교 6년 개근은 김청자 담임선생님의 아량(?)이었습니다.



이러한 이력으로 조성된 제 사고방식은 지금도 여전히

어떤 일이 있어도 학교는 가야한다 입니다.

그래서 아이들 감기 정도는 결석 이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제 딸아이도 한국에서 초등 6년 개근을 했습니다.

그런데 뉴질랜드에 가니 사정이 다릅니다.



감기가 들었거나 아픈 아이는 학교에 보내지 말라는 통지문을 보내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배가 아프거나 머리가 아파도

아이를 데려 가라고 집으로 전화를 합니다.

가끔 그렇게 전화를 받고 학교에서 아이를 데려 오는 날이면

제 입에선 항상 불만이 나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아프다 싶으면 아예 약을 잔뜩 먹이고

웬만하면 참고 수업 다 마치고 오라고 타이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만 나오면 우리 아이들은 저를...(^^이하 생략)



전에는 이런 일을 두고 성실, 근면, 열심에 근거한 밀어붙임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런 제 사고방식은

아이들 표현대로 무지막지한 구석이 많습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에게 전염이 되든 말든 내 아이 공부만 시키겠다는

이기주의까지 깔려 있지 않나 싶습니다.

몸이 아픈데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고

전염성이 있으면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말입니다.


먼 훗날 아이들이 기억하는 엄마는..

뭐가 더 중요하고 뭐가 앞뒤인지를 모르고 밀어 붙이기만 하는 엄마.

다정하고 온유하기 보다는 매일 공부해라 잔소리만 하는 엄마가 아닐까.

아이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오후엔 약국에 들러 딸아이를 위하여 철분제 한 통을 샀습니다.

빈혈이 심하다는 딸아이 소식 듣고

엄마로서의 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저의 어떠함을 미워합니다.

가족과 지체들을 힘들게 하는 저의 강함들을 참으로 미워합니다.

오 주님, 제 자신을 제하여 주소서.

당신의 생명만을 취하게 하소서.

당신의 따사로운 온유와 사랑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