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하고 질긴 아름다운 그 사랑...
나눔방
, 2006-02-21 , 조회수 (2937) , 추천 (0) , 스크랩 (0)
내게 가득한 주님의 사랑은 
나의 사랑없음을 알게 하고

목 놓아 불러보는 그분의 찬송은
나의 믿음 없음을 보게 합니다.

가슴에 고여오는 그분의 사랑을
밤늦도록 글로 써 보지만
늘 못다한 고백뿐.....

그 아름다운 사랑 이란 주제로 글 하나를 써봅니다.. 

세상의 모든 책에는 주제라는 것이 있다. 어떤 책이든 책이름이 있고 지은이가 있듯이 책에는 주제가 있기 마련이다. 주제란 그 책이 다루고자하는 근본적인 문제와 중심 사상을 말한다. 주제는 세상의 책들이 존재하는 이유이며, 그 책이 쓰여진 목적이고 알맹이다. 책은 그 안에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주제는 책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세상에는 성경이라고 불리는 책이 있다. 세상은 그 책을 다른 책들과 구별하여 성경이라고 부르며,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다. 성경에도 각 책마다 책이름이 있고 저자가 있으며 주제가 있다. 당신은 성경의 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성경의 주제는 성경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우리의 어떠함에 따라 달라진다. 당신이 성경을 읽고 그 안에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났는가? 그렇다면 당신에게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당신이 그 책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는가? 그렇다면 성경은 당신에게 구원의 책이다. 그 구원으로 인하여 주님께 생명을 얻고 그분께로 태어났다면 성경은 당신에게 생명의 책이 된다. 당신은 성경에 있는 많은 교리들을 보았는가? 진리와 생명으로 인도하는 교리들을 그 책에서 찾았다면 당신에게 성경의 주제는 교리가 된다. 그 후 당신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와 천국(kingdom of heaven)에 대한 이상을 보았다면 성경의 주제는 왕국(kingdom)이 된다. 당신이 성경을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이 주신 빛을 받았다면 성경은 계시의 책이며, 성경 말씀을 통하여 당신에게 닥칠 일들을 알게 되었다면 성경은 예언의 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이 모든 주제들은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제한되고 가려져 다만 희미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단편인지도 모른다. 성경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은 우리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라고 하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주님이 우리에게 성경의 형태로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의 육체적 환경을 고려하신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의 언어와 이해를 바탕으로 그분의 말씀을 받는 것이고, 우리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그분의 마음과 갈망을 알 수 있다고 해도, 일차적으로는 우리의 관점과 생각을 거쳐야 한다. 그리하여 성경의 주제는 우리의 우매함과 육신의 생각으로 찾아낸 거룩하고 성스러운 그분의 단편일 수밖에 없다. 당신은 당신의 영과 혼으로 성경을 온전히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어떻게 주님의 생각을 알 수 있으며, 우리의 좁은 뜻으로 어떻게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우리의 어두운 마음으로 어떻게 주님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성경에서 아무리 많은 주제를 찾아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사상과 언어에 비친 하나님의 모습일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유리를 통하여 희미하게 그분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므로(고전 14:12).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성경에 대한 하나의 절대적인 질문을 갖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왜 성경을 쓰셨을까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성경을 쓰셨으며, 그분이 유일하게 쓰신 한 권의 거룩한 책에서 무엇을 말씀하려 하셨을까? 우리가 주님의 책에서 찾아낸 그 많은 주제들이 정녕 그분이 말씀하시고자하는 것이었을까? 자, 이제 그분의 책을 펴 보자. 처음 책은 창세기다. 창세기 1장에는 남자와 여자가 등장한다. 2장에서 그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한다. 3장에서 남자는 여자를 위해 죽는다. 그분의 성스러운 책의 첫 세장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다. 우리가 알거니와, 이 세상의 영화나 소설의 대부분은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야기다. 불경스럽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그분의 책을 세상의 책처럼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야기로 시작하셨다. 주님이 왜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야기로 그 거룩한 책을 여셨는지 궁금하지 않는가? 그것은 그 사랑이야기가 주님이 하고 싶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세상의 작가들처럼 남녀의 뜨거운 사랑을 글로 쓰셨다. 첫 남자가 첫 여자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것을 보라. “당신은 내 뼈들 중의 뼈요, 내 살들 중의 살이니, 당신은 나의 여자입니다(창 2:23).” 아! 아~ 당신은 그토록 가슴 저려오는 열렬한 사랑의 고백을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있는가 주님은 왜 그런 뜨거운 사랑이야기를 쓰셔서 우리에게 주셨을까? 그것은 그 이야기가 바로 주님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신의 사랑이야기를 자신의 책에 쓰셨으며, 우리는 그 책을 성경이라고 부른다. 자, 이제 냉정하게 그분의 사랑이야기를 들어보자. 주님은 지금 창세기의 남자 주인공이 되어 우리 앞에 있고, 우리는 그 무대의 3장에서 벌어진 우리 조상들의 사랑 행각을 보고 있다. 세상의 모든 소설들이 그렇듯이 태초의 그 사랑에도 연적(戀敵)이 등장한다. 대적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질투했다.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낙원의 동산에서 뱀은 질투의 화신이 되어 벌거벗은 여자를 유혹한다. 감수성과 상상력이 풍부한 여자는 금단의 열매를 따 먹었고, 그 열매를 남자에게 주었다. 남자는 그 열매를 받아들였다. 주님은 그 상황을 ‘그가 먹더라’라고 짤막하게 기록하셨다(창 3:6). 그분의 사랑이 깨진 비통함을 감추기 위해서였을까. 남자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으로 고통스럽게 여자를 쳐다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먹으면 죽으리라고 한 그 열매를 정녕 먹었단 말이오(창 3:11)?” 그녀의 눈은 충혈되고, 눈처럼 하얗던 피부는 어느새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남자는 그런 자신의 여자를 보고 그녀의 죽음을 생각했다. 그것은 그가 시작한 사랑의 끝이었고, 그 사랑은 목숨보다 소중한 그의 전부였다. 과연 그 사랑을 그가 포기할 수 있었을까? 남자는 사랑을 위하여 여자와 같이 죽을 결심을 한다. 그렇게 해서, 이 거룩한 책의 저자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선택한다. "그가 먹더라.’ 그것이, 그가 택하고 그의 후손들에게 유전된 사랑의 방식이다. 이제 그분께로 가 보자. 태초에 하나님은 천상의 낙원에 혼자 계셨다. 그분의 창조물인 아담이 지상의 낙원에 혼자 있었던 것처럼. 주님은 거룩하셨다(사 6;3).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분은 거룩하신 분이다. 주님은 거룩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랑이셨다. 우리는 그것을 조금 이해할 뿐이지만 그분은 사랑이셨다. 주님은 사랑이셨으므로 그것을 숨길 수 없으셨고, 그분 안에 있는 사랑을 나타내셔야만 했다. 우리가 알거니와, 사랑은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주님은 거룩하시고 사랑이셨지만, 거룩하신 그분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하셨다. 전능하신 그분은 우주를 지으시고 만물을 만드셔서 그곳에 자신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을 세우셨다. 그런 다음, 그분은 말씀하셨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창 2:18). 천상의 낙원에서 그분은 말씀하셨으리라. 내가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으니... 주님은 왜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주님이 사랑이셨고, 그분의 가슴 속에는 사랑이 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하나님은 그분 안에 가득한 사랑을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을 시작하셨으며, 그 사랑만이 그분을 안식하게 했다(창 2:2). 그러면 그 사랑은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가 알거니와, 그분의 첫사랑은 실패했다. 첫사랑은 언제나 실패한다고 했던가... 그 실연의 대가로 주님은 그 사랑을 위해 죽을 결심을 하신다. 그 결심을, 주님은 손수 만드신 가죽 옷에 담아 그분의 첫사랑에게 선물하셨다(창 3:21). 만약 당신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면 밍크코트 한 벌을 그녀에게 주어 보라. 이렇게 말하면서. “이 밍크가 죽어서 당신에게 털옷이 되었듯이 나도 당신을 위해 죽겠소.. ” 신은 아담처럼 그녀를 위해 죽을 결심을 했지만, 당신의 사랑은 말한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나는 지금 이 코트가 너무 좋은 걸요..” 아! 참으로 첫사랑의 실패는 참담하다. 우리는 그것을 아는가?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다면, 실패한 첫사랑을 포기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랑을 포기했을 지라도 주님은 그분의 첫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 사랑은 노아에게로 이어진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로. 주님은 그에게 사랑의 약속을 속삭이셨다(창 15장). 그 약속은 이삭과 야곱을 거쳐 이스라엘까지 계속된다. 당신은 그런 질긴 사랑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마침내 주님은 자신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신다. 죽을 결심을 하고서.. 그분이 쓰셨던 사랑이야기는 이제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세상의 소설이 다 그렇듯이, 모든 상황은 악화되고 주인공은 적에게 붙잡혀 최고의 위기를 맞는다. 주님은 슈퍼맨이 사랑을 얻기 위하여 초능력을 포기한 것처럼 (사실은 슈퍼맨이 주님을 흉내 낸 것이지만), 그분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보좌를 버리고 한낱 인간으로 처절하게 죽어간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자신이 시작한 사랑을 마치셨다. 그 결과 주님은 그분의 첫사랑을 이루셨고(요 19:30), 순결한 처녀를 얻으셨으며(고후 11:2), 실패한 사랑에 대한 책임을 지셨다. 성경은 세상에 있는, 하나님이 쓰신 단 한 권의 책이다. 세상의 책들이 그렇듯이, 성경에는 저자의 마음과 체취가 담겨 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성경은 구원과 생명과 교리와 왕국과 계시와 예언의 책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그것은 사랑의 책이다. 우리에게는 구원과 생명과 교리와 왕국과 계시와 예언이 필요하지만, 주님에게는 오직 사랑만이 필요하다. 주님은 영원 안에서 우리들의 유한한 시간 속으로 거부할 수 없는 일정을 시작하셨다. 주님은 그것을 책으로 쓰셔서 그분의 사랑에게 주셨는데,우리는 그것을 성경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주님의 사랑의 책이다. 그것이 성경에 있는 모든 주제의 집합이다. 우리가 또 다른 주제를 성경에서 발견한다고 해도 주님은 성경에 자신의 사랑을 쓰셨다. 숭고하고 질긴 그 아름다운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