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허비하는가?
복음과목양
포이멘 , 2011-05-19 , 조회수 (4359) , 추천 (2) , 스크랩 (1)
왜 이렇게 허비하는가?
 
성경: 마태복음 26:6-13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인이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상에 앉으신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분개하여 “왜 이렇게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많은 돈을 받고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니, 예수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 여러분은 이 여인을 괴롭힙니까? 이 여인이 나에게 아름다운 일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으나, 나는 여러분과 항상 함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한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2이 여인이 행한 것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인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서는 한 여자가 주님께 나아와 그분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다른 복음서들을 참조하면 이 여자가 바로 마리아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마리아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다만 한 여자라고 말한 것은 이것이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마리아의 집은 그렇게 부유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매우 값진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었다. 제자들은 분노하여 이 귀한 향유를 낭비했다고 말했지만, 주님은 천하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전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오늘날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곳에는 반드시 마리아가 행한 일도 전파되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곳에서 복음이 전파되지만 마리아가 행한 일은 거의 전파되지 않는다. 복음만 전하고 마리아의 일을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리의 균형을 잃게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다만 자신들의 유익과, 즐거움과, 문제 해결을 위해 주님을 믿는다. 그들은 단지 죽음과 지옥으로부터 구원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당에 가기 위해서 주님을 믿는다. 그들은 구원이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에서 건져내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이 세상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임을 보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님을 믿지만 그분 자신이 목표임을 알지 못하고, 다만 그분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수단이나 방법으로만 여긴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형벌을 면할 수 없고, 자신의 힘으로 천당에 갈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그들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 목표 자체가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무엇을 원하시는 가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이것이 오늘날 전파되는 복음의 위험이며, 또한 이것이 바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마리아가 행한 일이 전파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단지 복음을 듣고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드시 마리아의 향유의 향기가 있어야 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구원이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다.
 
어떤 주일 학교 교사가 아이들에게 나사로와 부자 중에서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한 아이가 손을 들더니 ?저는 이 세상에서는 부자가 되고, 죽은 후에는 나사로가 될래요.?라고 대답했다. 오늘날 이 아이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부자처럼 살다가, 죽은 후에는 나사로와 같이 축복을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이 살아 있을 때 부자라면 죽은 후에도 부자일 것이고, 당신이 이 세상에서 나사로라면 죽은 후에도 나사로일 것이다.
 
우리는 복음 전하는 것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만 전파한다면 곧 위험이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면서 반드시 마리아의 행한 일도 전파해야 한다. 한 면으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다른 면으로는 반드시 우리의 옥합(玉盒)을 주님을 위해 깨뜨려야 한다. 고린도후서 5:14에서 바울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말을 끝맺지 않고 15절에서 계속하여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가 행한 일을 전하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분을 위해 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주 예수를 믿도록 예정되었을 뿐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고난받도록 예정되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 이것이 바로 바울이 전한 복음이었다.

마리아가 행한 일
마리아가 주님의 머리와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그분의 장사(葬事)를 미리 준비한 것이었다. 마리아의 생각은 이러했을 것이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내 동생 나사로를 살리시고, 자주 베다니에 오셔서 우리 집에 거하시는 이 분은 참으로 소중한 나의 구주이시다. 지금까지 주님은 네 번이나 제자들에게 그분이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지만(마16:21, 17:22-23, 20:17-19, 26:1-2)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분의 죽음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안다. 그분이 죽으신 후에는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향유와 유향과 몰약을 그분의 몸에 바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주님이 죽으실 때까지 기다리지 않겠다. 지금 주님이 이 땅에 살아 계실 때, 나의 모든 향유와 유향과 몰약을 그분의 몸에 붓겠다. 그분이 죽은 후에 이것들을 그분의 몸에 부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님이 살아계시는 동안 나는 주님께 나의 모든 것을 붓겠다."
 
마리아는 언제 주님의 몸에 향유를 부었는가? 주님이 식사하실 때였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하며 그녀를 의식하지 않으실 때 몰래 한 것이다. 그녀는 미리 주님께 알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이 일을 하기 전에 남 몰래 행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원하지만, 구원자를 원치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구속(救贖)의 역사를 귀하게 여기지만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귀하게 여기지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주 예수를 믿으면 어떤 유익이 있는가를 물을 뿐, 주님을 믿을 때 그분과 어떠한 사랑을 갖게 될 것인가를 묻지 않는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향유로 삼아 주님께 부었다. 안식 후 첫 날 이른 아침에 몇 명의 여자들이 향유와 몰약을 주님의 몸에 바르려고 무덤에 갔지만 그들은 너무 늦었다! 오직 마리아만 주님의 죽음을 이해했으며, 그녀만이 미리 자신을 주님께 부어 주님의 장사(葬事)를 예비했다.
 
제자들의 태도
마리아가 향유를 주님께 부었을 때, 제자들은 이것을 낭비요,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삼백 데나리온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교회 가운데에도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한 부류는 마리아와 같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드리고, 그리스도를 모든 것을 얻기에 합당한 분으로 여기며,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인하여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리는 사람들이다.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실리(實利)를 중시하고, 일과 방법을 중심 삼는 사람들이다. 실리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분명히 마리아의 행동은 허비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삼백 데나리온이 아니라, 삼만 데나리온의 향유를 붓는다 해도 조금도 낭비가 아니다. 문제는 향유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가가 아니라, 그 향유의 부음을 받는 분의 가치가 얼마인가에 달려 있다.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당신이 주님께 드린 물건의 가치가 곧 당신이 느끼는 주님의 가치를 말해 준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헌금을 할 때 돈을 세고 또 센다. 사실상 그들은 그들이 내는 돈의 액수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가치를 계산하는 것이다. 당신이 주님께 드린 것이 곧 당신에게 있어서 주님의 가치를 나타낸다. 마리아가 드린 이 한 옥합의 향유는 마리아의 헌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얼마나 가치 있는 분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자신을 헌신한 정도가 곧 우리가 느끼는 주님의 가치의 정도이다. 많은 순교자들이 그들의 목숨을 기꺼이 드린 것은 그들이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이 그들의 목숨보다 더 가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위해 기꺼이 수고하고 헌신하는 성도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치를 볼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기꺼이 바치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그 모든 것만큼 가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어떤 물건을 살 때 당신이 기꺼이 지불하려고 하는 액수가 곧 그 물건의 가치이다. 가격은 언제나 가치와 일치한다. 당신이 5만원의 가치가 있는 시계를 산다면 당신은 5만원을 지불할 뿐, 결코 6만원을 지불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기꺼이 지불한 5만 원이 바로 그 물건의 가치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주님을 위해 지불한 값이 당신이 느끼는 주님의 가치이다.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삼백 데나리온이면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돌볼 수 있고, 그들의 몇 개월 생활비로도 족한 돈이다. 이것이 돈을 실리적으로 쓰는 방법이다. 이 비싼 향유를 한 순간에 주님께 붓다니! 이 어떠한 낭비인가!?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유용한 곳에, 효용성을 생각하여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렇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을 구원받게 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으며, 일이 잘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실리주의는 바로 유다의 원칙이다.
 
유다는 마리아에게 ?무슨 의사(意思)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고 말했다. 유다는 참으로 경제학자였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마음 속에 경제학이 들어올 때, 사랑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인가??를 생각하지만, 주님은 ?그 일이 과연 나를 위한 것이냐?"라고 물으신다. 주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가 일할 시간은 많지만 나를 사랑할 기회는 바로 지금 내가 살아 있을 때뿐이다."라는 의미이다. 오늘이 바로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낼 유일한 기회이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은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천년 왕국 때야말로 우리가 큰 일을 할 때이다. 그러나 오늘의 문제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어디에 있는가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누구나 그분을 사랑할 것이고, 누구나 그분께 헌신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 우리의 사랑을 나타낼 기회는 바로 오늘이다. 그날 우리가 주님을 보고 사랑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오늘 주님을 보지 않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보지 못했지만 그분을 믿고 그분을 사랑한다(벧전1:8). 사랑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주님을 위해 한 일은 조금도 지나친 것이 없으며, 우리가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잃어버린 것은 조금도 낭비가 아니다. 그러나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마리아가 한 순간에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쏟아버린 것은 낭비하는 것이요, 어리석은 일이다. 유다는 매우 똑똑하고, 실리적이며, 생각이 깊고, 가난한 자들을 염려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교회 가운데 영리한 유다보다 어리석은 마리아가 충만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교회를 심판하시는 기준이다. 사랑하는 친구여, 당신의 신앙 생활의 원칙은 실용주의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인가?
 
이 밖에도 우리는 혼의 힘과, 육신(肉身)의 힘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확장하고 번창시키기 위해 자신의 지혜와 힘에 따라 일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제한하고 조절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일들 중 많은 것들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는 원칙 아래서 행해진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아무리 많이 도와준다 해도 주님의 머리에 부을 향유가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오늘날 사람들은 모두 가난한 자(죄인, 교회, 일 등)만을 기억하고 주님의 머리에 향유가 없다는 것은 소홀히 여긴다. 우리의 많은 일들 중에 진정으로 주님의 기뻐하심을 위한 일이 얼마나 되는가?
 
주 예수님의 때로부터 오늘날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허비했다. 바울이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당시의 유명한 학자였던 가말리엘 문하(門下)에서 배웠고, 젊은 나이에 유대교에서 탁월한 위치에 도달했던 사람이었다. 계속 공부했다면 그는 분명히 유대교의 역사에서 빛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갈릴리의 한 목수를 좇아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것은 허비(虛費)가 아닌가? 교회 역사에서 그와 같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만일 그 재능 있고, 지식 있고, 구변 있고, 사상 있는 사람들이 정치나, 상업이나, 철학이나, 과학에 자신을 드렸더라면 필경 뛰어난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리아의 향유와 같이 한 사람 한 사람 계속해서 주님의 머리 위에 부어졌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허비했다고 말하며, 심지어 교회 가운데서도 어떤 이들은 그들이 자신을 허비했다고 말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실리주의를 교회에 가져온다. 그들은 자신을 허비하지 않으려 하고, 언제나 이득과 손해를 계산한다. 그들은 주님보다 일을 더 관심하고, 주님의 마음의 기쁨보다 사람들의 필요를 더 중요시 여긴다. 그들의 눈은 결과를 주목하고, 몇 사람이 도움을 받고, 몇 명이 구원을 받고 도움을 얻었는가를 주의할 뿐, 주님의 뜻을 엄격하게 따르고, 주님의 기뻐하심을 구하는 것을 주의하지 않는다. 주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사 주님이 실리주의를 배척하심을 보게 하시기를 바란다.
 
실리주의(實利主義)의 가장 큰 위험은 그것이 주님의 기쁘심을 대체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세상의 더러운 일보다는 조금 낫지만, 여전히 주님의 갈망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무지한 사람들은 쉽게 실리주의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외적인 기준에서 볼 때 유다의 실리주의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그들의 생활을 몇 개월 도울 수 있으며, 더 많은 사람으로 이익을 얻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마리아처럼 향유를 허비하는 것보다 더 낫게 보인다. 그러나 구원의 목적은 우리가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우리가 합당한 관계를 갖는 것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관심하시는 것은 우리가 행한 여러 가지 일들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이다. 당신이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가난한 자를 많이 구제하고 도왔다 할지라도, 여전히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주님의 책망을 들을 수 있다(계2:4). 많은 일과 수고와 활동을 했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는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의 아내가 하루종일 당신을 위해 분주하게 일하고, 당신에게 순종하지만, 마음으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당신은 그러한 아내를 원하겠는가? 아마도 일하는 것이 조금 모자랄지라도 마음을 다해 당신만을 사랑하는 아내를 원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님께 쏟아드리기를 원하지만,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은 입으로는 주님을 위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여러 가지 일을 하거나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것을 위한다.
 
오늘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옥합을 깨뜨릴 사람을 부르고 계신다. 그리스도께 부어진 것은 한 가지도 희생이 아니며, 허비도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관심은 가난한 자들이 무엇을 얻었고, 사회가 무엇을 얻었는가가 아니라 주님이 무엇을 얻으셨는가에 있어야 한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마리아의 행한 일도 전파되어, 마리아와 같은 사람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