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익은 열매
믿는이들
Hannah , 2009-04-02 , 조회수 (4903) , 추천 (0) , 스크랩 (0)

 

처음 익은 열매

 

 

 

계시록 12장에서 우리는 사내아이를 밴 채 큰 용과 맞서고 있는 우주적인 여자에 대한 분명한 이상을 보았다. 우리 모두는 이 표적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13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경륜의 완성을 방해하기 위해 용인 사탄과 합력하는 두 짐승-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을 보았다. 그에 이어서 우리는 14장에서 더한층 중대한 문제를 갖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처음 익은 열매(1절-5절)를 볼 뿐 아니라 처음 익은 열매의 휴거 후에 일어나는 일들(6절-13절), 즉 영원한 복음의 전파(6절, 7절), 종교적인 바벨론의 멸망(8절), 짐승과 그의 형상을 경배하는 것에 대한 경고와 그 표시에 대한 경고(9절-11절), 대환난 동안의 순교(12절, 13절)등을 본다. 더우기 14장은 또한 수확(14절-16절)과 큰 포도주틀(17절-20절)을 다루고 있다.

 

14장은 네 가지 주요 부문-처음 익은 열매의 휴거, 처음 익은 열매의 휴거 후에 일어나는 일들, 대다수 믿는 이들을 거둬들이는 것인 수확, 지상의 악한 사람들을 거둬들이는 것인 큰 포도주틀-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이 장은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말세에 어떻게 다뤄질 것인지를 계시해 준다.

 

지상에 있는 모든 이들은 두 부류-하나님의 백성인 자들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중 하나에 속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대인들인 이스라엘 사람들로 구성된다. 이스라엘은 본 장에서 취급하지 않는데, 이는 그것이 이미 7장에서 십 사만 사천 명의 선택된 이스라엘인들에게 인치는 이상으로 다뤄졌기 때문이다. 본 장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 중 일부인 그리스도인들을 다루시는 것에 대해 펼쳐 보여 준다.

 

이 부분의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는 두 가지 주요 부류-일찍 익는 첫열매와 나중에 익는 수확물-가 있다. 처음 익은 열매의 휴거와 수확물의 휴거 사이에서 네 가지 중요한 일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곧 영원한 복음의 전파, 큰 바벨론 즉 종교적인 바벨론인 로마 천주교의 멸망, 짐승을 경배하는 것에 대한 경고, 대환난 동안의 큰 순교 등이다. 수확 후에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있는 상황이 말끔히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여전히 땅 위에 남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밭에 있는 밀이 아니라 악한 밭에 있는 포도들로 여겨질 것이다. 이 포도들은 큰 포도주틀 속으로 함께 넣어져서 주 예수님에 의해 짓밟힐 것이다(19절, 20절). 그 때에 온 땅이 말끔히 청소될 것이다. 이처럼 14장은 매우 의미심장한 장으로서 땅 위의 모든 사람들의 상황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계시해 준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며 주권적이시다. 그분의 지혜와 공의와 주권으로써 그분은 땅 위의 모든 이들을 합당한 방법으로 합당한 때에 다루실 것이다. 그분을 찬양하자!

 

성경에 예언된 것은 단순히 하나의 원칙이다. 우리에게는 그 세부 사항들이 없다. 만일 주께서 우리에게 장차 일어날 일들에 대한 세부 사항들을 모두 주신다면 성경은 수천 페이지가 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갖고 다닐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의 지혜로 인해 주님께 감사한다. 이미 지적했듯이 바벨론 때부터 장차 올 열 왕국을 가진 소생된 로마 제국 때까지의 모든 세상 권세들은 느부갓네살이 꿈에서 본 거대한 형상으로 상징된다(단2:31-33). 머리는 바벨론을 상징하고, 가슴과 두 팔은 메도-페르시아를, 배와 넓적다리는 그리이스를, 두 다리는 로마 제국을 상징한다. 로마 제국이 그 형상의 두 다리로 상징된 두 편으로 분열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발목이 가리키는 시대는 불분명하다. 현재 우리는 이 불분명한 시기에 살고 있다. 주후 476년 로마 제국이 종결됨으로써 간격이 있게 되었지만, 이 시기 동안 그 간격은 로마 천주교에 의해 메꿔지고 있다. 이 장구한 공백기의 끝 무렵에 로마 제국이 소생될 것이며 그 형상의 열 발가락으로 상징된 열 왕국으로 최종 완성될 것이다. 다니엘서 2장에 따라 이 열 왕국은 손으로 뜨지 않은 돌 하나에 의해 부숴질 것이다(34절-35절).

 

이 돌은 느부갓네살로부터 마지막 시이저(황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형상 전체를 부수기 위해 하늘에서 오실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로 세상 권세의 여러 단계들에 대한 분명한 그림을 제시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의 형상을 사용하셨다. 이것이 성경 안에 있는 예언의 방법이며 원칙이다. 어떤 의미에서 성경의 예언은 매우 간략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휴거에 관해서도 원칙은 동일하다. 이기는 자들의 휴거와 대다수 믿는이들의 휴거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우리는 메시지 29와 30에서 이 휴거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 두 가지 휴거의 원칙에 입각해서 우리는 이제 처음 익은 열매를 보기로 한다.

 

Ⅰ. 처음 익은 열매

 

A. 하나님과 어린양께 드리는 처음 익은 열매

 

4절에서 언급된 하나님과 어린양께 드리는 처음 익은 열매는 하나님의 농작물 가운데서 가장 일찍 성숙한 자들이다. 이 초기의 이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밭에서 먼저 익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수확 전에 하나님과 어린양께 드리는 첫 열매로서 거둬질 것이다. 14절부터 16절까지에 따르면 수확물은 나중에 거둬질 것이다. 이것은 마치 좋은 땅의 첫 열매를 추수 전에 거둬들여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져가는 것처럼 그들이 추수 전에 하늘로 휴거될 것이라는 뜻이다(레23:10-11, 출23:19).

 

6절부터 13절까지에 기록된 사건들-그것은 모두 대환난 동안 발생함(마24:31)-은 최초의 이기는 자들이 1절부터 5절까지에 있는 처음 익은 열매로서 대환난 전에 휴거되리라는 것과 14절부터 16절까지에 있는 대다수 믿는이들을 포함하는 수확물은 대환난의 끝 무렵에 휴거되리라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다.

 

B. 십 사만 사천 명

 

1절은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라고 말한다. 과거에 많은 교사들이 이 숫자가 문자적인 것이냐 아니면 상징적인 것이냐에 대해 논쟁을 했다. 혹자는 십 사만 사천이란 숫자가 문자 그대로의 숫자가 아니라고 말했고, 혹자는 2장과 3장의 일곱 도시가 문자 그대로인 것과 마찬가지로 십 사만 사천이란 숫자도 반드시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숫자는 의심할 것 없이 문자적인 숫자이긴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비록 그 숫자는 문자 그대로이지만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떤 원칙을 적용해 봄으로써 우리는 이 숫자의 영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십 사만 사천은 12곱하기 12의 천(千)배이다. 열 둘은 하나님의 영원한 행정에 있어서 완성의 수이다. 일백 사십 사(21:17)는 열 둘에다 열 둘을 곱한 것인데 완성 중의 완성, 즉 가장 완전한 방법 안에서의 궁극적인 완성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그것은 이 궁극적인 완성의 일천 배이다.

 

열 둘이란 숫자는 6더하기 6으로 된 것이 아니라 3곱하기 4로 된 것이다. 나는 이것을 근거 없이 경솔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인 숫자 열 둘은 3곱하기 4로 이뤄진다. 새 예루살렘은 열 둘의 성(城)-열 두 기초, 열 두 사도의 이름(21:14), 열 두 문, 열 두 천사,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21:12), 열 두 진주(21:21), 열 두 달, 열 두 종류의 과실(22:2)-이다. 그 성벽의 높이는 일백 사십 사 규빗(열 둘 곱하기 열 둘, 21:17)이며 그 면적은 일만 이천 스다디온(열 둘의 천 배, 21:16)이다. 모든 방면에서 새 예루살렘은 열 둘의 성이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 있는 열 둘이란 숫자가 3곱하기 4로 이뤄졌다는 것을, 그 성이 사면에 각각 세 대문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알 수 있다(21:13). 의심할 여지없이 삼이란 숫자는 삼일 하나님을 상징한다. 21장과 22장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묘사는 삼일 하나님을 계시한다. 22장 1절에서 우리는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를 본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분 자신을 그 성 안으로 분배하시는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을 본다. 이것이 삼일 하나님이다. 성 자체는 넷이란 숫자로 상징된 하나님의 피조물을 대표한다(네 생물, 4:6). 새 예루살렘에서 그것은 셋 더하기 넷의 문제가 아니라 셋 곱하기 넷의 문제이다.

 

오늘날 우리의 숫자는 일곱 교회, 일곱 등대와 같이 일곱이다. 그러나 영원 안에서 우리의 숫자는 삼일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상징하는 열 둘-셋 곱하기 넷-일 것이다. 그러므로 열 둘이란 숫자는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상징한다. 얼마나 놀라운가! 이 연합은 하나님의 경륜의 완성, 즉 하나님의 경륜적인 행정의 완성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열 둘이란 숫자는 그분의 경륜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행정에서의 완성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그것은 단지 숫자 열 둘이 아니요, 열 둘 곱하기 열 둘의 천 배이다. 열 둘 곱하기 열 둘은 하나님의 경륜을 위한 하나님의 행정에서의 완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위한 하나님의 행정에서의 완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노래 중의 노래, 만주의 주, 왕 중의 왕과 같은 명칭들과 비슷하다. 열 둘의 열 두 배는 완성 중의 완성을 의미한다. 이 완성은 잠시적인 것이 아니요 영원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행정에서의 완성이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열 둘 중의 열 둘, 즉 완성 중의 완성이 되리라는 것을 온 우주에게 선포할 것이다. 우리가 새 예루살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경륜을 완수하기 위한 하나님의 행정에서의 완성일 것이다. 그런데 14장에서 우리는 열 둘 곱하기 열 둘의 천 배, 즉 완성 안에서의 완성의 천 배를 갖는다. 이것이 십 사만 사천이란 숫자의 의미이다. 십 사만 사천의 첫 열매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있는 믿는이들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우리보다 앞서간 수많은 위대한 교사들의 어깨 위에 서 있다. 그들로 인해 주님께 감사한다. 이 숫자의 의미에 관해 우리가 본 것은 그들의 이해를 기초로 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보여 주셨던 것보다 좀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비록 십 사만 사천이란 숫자가 문자적인 것일지라도 그것은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살아 있는 모든 이기는 자들이 영원토록 그분의 경륜을 완수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행정의 완성의 일부라는 것을 말해 준다. 살아 있는 이기는 자가 된다는 것은 커다란 문제이다. 처음 익은 열매가 되는 것은 영원토록 그분의 경륜을 완수하는 하나님의 행정의 완성을 위해 있는 것이다.

 

C. 땅으로부터 구속함을 얻음

 

3절은 그 십 사만 사천 명이 『땅으로부터 구속함을 얻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들이 더이상 땅 위에 있지 않고 하늘로 휴거되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1절부터 5절까지의 시점에서 처음 익은 열매들은 「땅으로부터」 구속함을 얻었기 때문에 더이상 땅 위에 있지 않다. 그들은 어린양의 피로 구속함을 얻었으며 땅에서 하늘로 데려가졌다.

 

D.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을 받음

 

4절은 처음 익은 열매들이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들이 더이상 사람들 가운데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E. 시온 산에서 어린양과 함께 서 있음

 

첫열매들은 어린양과 함께 시온 산 위에 서 있다(1절). 1절에서 언급된 「시온」은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시온이다(히12:22). 시온 산 위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이들은 적 그리스도가 종교를 핍박하기 전에 하늘로 휴거된다. 이 휴거 뒤에 적그리스도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그들로 자기를 경배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이 사실로 미루어보아 우리는 살아 있는 이기는 자들이 대환난 전에 휴거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F.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갖고 있음

 

1절은 또한 십 사만 사천 명이 그들의 이마 위에 기록된 어린양의 이름과 그분의 아버지의 이름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들의 존재가 어린양과 아버지와 하나라는 표시요, 그들이 그분들께 속해 있다는 표시이다. 이들 초기의 이기는 자들의 이마 위에 기록된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은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의 이마 위에 기록된 짐승의 이름과 대조를 이룬다(13:16-17).

 

G. 새 노래를 부름

 

3절은 『또 그들이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으로부터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고 말한다. 십 사만 사천 명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른다. 처음 익은 열매 외에는 아무도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수 없는데, 이는 그들 외에는 누구도 필요한 체험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래는 언제나 체험으로부터 나온다. 만일 당신에게 체험이 없다면 아무 것도 노래할 수 없다. 그 십 사만 사천 명의 이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특이하고 특별한 체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노래를 이해하지 못한다. 비록 그들은 이 노래들이 이상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 노래들이 달콤하며 맛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노래들을 부를 적마다 우리는 심취되어 버린다. 그러나 체험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가 노래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체험 있는 사람들만이 십 사만 사천 인의 노래를 배울 수 있다.

 

2절은 『또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고 말한다. 많은 물은 소리의 소란스러움을 상징하고, 큰 뇌성은 소리의 장엄함을 상징하고, 거문고 타는 자들의 소리는 소리의 유쾌함을 상징한다.

 

큰 뇌성의 장엄함은 사탄으로 무서워 떨게 할 것이다. 그 날에 십 사만 사천 인의 노래가 시끄러울 것인데 오늘날 우리의 노래 소리가 조금 시끄러우면 안 되겠는가? 우리의 노래 소리가 시끄러우면 시끄러울수록 더 좋다. 물론 종교적인 사람들은 이것을 정죄할 것이다. 십 사만 사천 인의 노래 소리는 나이아가라 폭포의 물소리와 다소 비슷하다. 사실 나는 그것이 많은 경우에 나이아가라 폭포보다 더 시끄러울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죽어 있으며 율법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 있어서는 안 되며 시끄러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시끄러운 노래는 연기(演技)가 되서는 안 되며, 그보다 우리의 영으로부터 발산되는 것이어야 한다.

 

시편에서 우리는 적어도 여덟 번 정도 주님께 즐거운 소음을 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시95:1-2, 98:4, 100:1). 이 소란스럽고 즐거운 소음은 우리의 영으로부터 자동적으로 나와야 한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달콤한 체험으로 가득 채워질 때 우리 영은 아구까지 충만케 될 것이다. 우리의 기쁨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을 향해 즐거운 소음을 발하는 것이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엄청난 충격을 가진 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그 소리는 연기(演技)가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모일 때 취해야 할 길이다.

 

나는 이것을 체험했다고 간증할 수 있다. 때때로 우리가 영 안에서 소란스러운 소음을 내고 있을 때에 주님을 찬송하고 찬양함과 달콤한 음악이 이 소란스러운 소리로부터 나온다. 만약 당신이 이것을 체험해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아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음을 참을 수 없다고 말한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나의 방법이 아니라 주님의 방법이자 성경적인 방법이다. 만일 당신이 오늘날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훈련하지 않는다면 나중에라도 그렇게 하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H.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음

 

4절은 처음 익은 열매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들이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고 말한다. 십 사만 사천이 문자적이냐 아니면 상징적이냐에 대해 논쟁이 있어 온 것과 마찬가지로 이 구절에 언급된 동정성의 이해에 관해서도 논란이 있어 왔다. 이 부분의 말씀에 따르면 십 사만 사천의 살아 있는 이기는 자들은 모두가 동정남(童貞男)들이다. 어떤이들은 이 동정성이 문자적이라고 말하고 또 다른이들은 그것이 영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의 동정성은 마태복음 19장 11절, 12절에서 주님이 언급하신 동정성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와 동일한 원칙이 자매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전 7:7, 34, 37).

 

동정성의 원칙은 우리가 땅에 속한 그 어느 것에도 더럽혀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문자적으로만 취한다면 모든 자매들은 제외될 것이다. 그러나 자매들이 살아 있는 이기는 자들 가운데에서 제외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가 살아 있는 이기는 자가 되려면 반드시 주의 은혜에 의해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지켜져야 하며 또 땅 위에서 처녀와같이 살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우리가 영화 보러 가든지 안 가든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들의 눈에는 내가 영화관에 가는 것이 심각한 일이다. 만일 내가 그리 한다면 나는 더럽혀질 것이다. 우리는 동정(童貞)의 삶, 즉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는 이유는 더럽혀지길 원치 않기 때문이다. 가끔 어떤 형제들이 내게 맥주 한 잔을 마시라고 권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사양했다. 주님의 긍휼과 은혜가 나를 오십 년 이상이나 지켜 주셨다. 나는 맥주를 마심으로써 오염되도록 그렇게 값싸게 자신을 팔지 않을 것이다. 비록 맥주를 마시는 것이 죄짓는 것은 아닐지라도 나는 맥주를 마심으로 나의 동정성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들에 관해 율법적이지는 말라. 나는 맥주를 마시고 있는 형제들 앞에서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앉아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결코 율법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우리 자신을 처녀로 보존하려는 우리의 갈망의 문제이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 예수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위해서 처녀로 남겠습니다. 주여, 나는 어느 것에도 더럽혀지거나 오염되고 싶지 않습니다. 주여, 나는 당신을 위해 자신을 지키고 싶습니다.』 청년 때 나는 날마다 이런 식으로 기도했다. 주께서 진실로 내 기도에 웅답하셨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여러 해에 걸친 여행에서 나는 여러 가지 다른 상황들을 접해 보았다. 그 상황들 안에는 커다란 유혹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심지어 참소자 앞에서도 주님의 은혜가 나를 지켜 주셨다고 간증할 수 있다. 비록 호텔 방에 텔리비젼 세트들이 있었지만 단 한번도 텔리비젼을 켜지 않았음을 주께서 나를 위해 간증하실 수 있다. 텔리비젼을 보는 것이 죄되는 것은 아니라 해도 나는 더럽혀질 것이다.

 

내 방에 있을 때 나는 『주여, 나는 더럽혀지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처녀로 보존되길 원합니다. 주여, 나는 이 도시에 텔리비젼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당신을 증거하기 위해 왔습니다. 형제 자매들은 호텔 방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켜 볼 수 없지만 마귀들은 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만일 내가 텔리비젼을 켰었더라면 주 예수님을 위한 나의 증거는 충격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더럽혀지지 않았고 주 예수님을 위해 처녀로서 보존되었다는 것을 내 양심이 증거했기 때문에, 나의 말하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주님의 구원을 율법 준수의 문제로 전락시키는 것은 개탄할 만하다. 우리는 결코 우리 교회가 어떤 것들을 하지 말라고 금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할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 얼마나 가련한 태도인가! 우리에게 있어서 그것은 율법 준수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한 사랑스런 갈망의 문제이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사랑하므로 그분을 위해 순결한 처녀로 보존되기를 열렬히 갈망한다. 백화점에 있을 때마다 나는 그분이 나를 더럽혀지는 데서 지켜 주시도륵 그분을 바라본다. 이것이 바로 처녀가 되는 것의 의미이다. 형제들이나 자매들이나 모두 주님을 위한 처녀들일 것이다. 만일 당신이 주님께 이런 식으로 기도하고 처녀같이 살기를 갈망한다면 모든 「해충」들은 당신의 발 밑에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이기는 자, 즉 첫 열매 중 하나가 되는 길이다.

 

당신은 12장의 이기는 자들과 14장의 이기는 자들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해 할지도 모른다. 12장에는 사내아이가 있고 14장에는 처음 익은 열매가 있다. 12장에 관한 메시지들에서 우리는 사내아이가 사탄과 싸우고 그를 패배시키기 위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그러므로 사내아이는 원수를 처리한다. 처음 익은 열매는 싸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과 어린양에게는 누림이 필요하다. 우리 살아 있는 이기는 자들은 누림을 원하시는 그분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것이다. 그분들의 필요는 누림이다.

 

하늘에 있는 원수 마귀는 주님의 심판을 집행하게 될 사내아이에 의해 반드시 내어쫓겨야 한다. 이것이 사내아이의 역 할이다. 그러나 하늘에는 또 하나의 필요가 있다. 즉 하나님이 만족하셔야 한다. 하나님은 배고프고 목마르시다. 그분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약간의 첫열매를 맛보길 갈망하신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는 주님의 주권적인 지혜를 본다. 역대로 죽은 이기는 자들은 사내아이 곧 투사들이 될 것이다. 비록 지금 땅 위에 살아 있는 우리도 역시 원수와 싸워야 하지만, 내내 싸울 필요는 없다. 사탄에게 잠시 설교한 뒤에 당신은 그에 관해 잊어버려야 한다. 원수는 간교하다. 일단 당신이 그에게 설교하기 시작하면 그는 계속적으로 자기에게 설교하라고 유혹한다. 『내 얼굴은 두꺼워졌다. 나는 수치감이 없다. 나는 네가 온종일 설교하는 것을 듣고 싶다.』

 

그는 당신으로 하여금 주님을 사랑하는 데서 벗어나게 하려고 이렇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정 시간 동안 마귀에게 설교하고 나서 당신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마귀야, 나는 더이상 너에게 설교할 시간이 없다. 그보다 차라리 나는 주님께 내가 얼마나 그분을 사랑하는지를 말씀드리는 데 시간을 사용하겠다. 나는 사랑 안에서 나의 주님과 함께 머물고 싶다. 사탄아, 너는 주님의 적인 동시에 나의 적이기도 하다. 나는 네게 충분히 설교했다. 사라져 버려라. 이제는 내가 주님과 달콤한 밀월을 누릴 시간이다.』

 

이런 전략을 배우라. 너무 오랜 시간 사탄에게 설교하지 말라.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사탄에게 설교하고 나서 멈추고 이렇게 말하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데 시간을 보내라. 『주여, 나는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과 말씀을 나누는 것을 누립니다. 주여, 나는 당신을 만족시켜 드리고, 당신과 하나 되고, 당신의 임재 안에 머물고 싶습니다.』 매우 친근하게 주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시간 보내기를 배우라. 만일 당신이 그런 시간을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다면 당신은 결핍되어 있다. 그저 죄 없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단지 좋거나 옳은 것만으로는 흡족하지 않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과의 사랑 안에 빠져야 한다. 비록 나는 「사랑에 빠지다」라는 용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주님과의 사랑에 빠져서 이런 얘기를 주님께 들려 드려야 한다.

 

『오, 주 예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줄 아십니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여, 내가 하지 않으려는 몇 가지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이기는 자가 되는 길이다. 비록 주님은 그분의 적과 싸울 사내아이를 필요로 하시지만, 더한층 그분은 그분의 만족이 되는 처음 익은 열매들, 즉 그분의 사랑하는 자들을 필요로 하신다.

 

예표에서 처음 익은 열매는 농부의 집으로 가져가지 않고,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하나님의 집인 성전으로 가져갔다. 이것은 심지어 첫열매이신 주 예수님의 경우에도 동일했다(고전15:20,23). 부활의 아침에 주님은 마리아가 자신을 만지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그분은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요20:17).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나는 나의 부활의 신선함을 내 아버지께 드려야 한다. 내 아버지께서 나의 부활의 신선함을 맨처음 맛보는 분이 되셔야 한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누림을 위해 우리 자신을 신선하고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주께 드려야 한다. 만일 당신이 단순히 어떤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것을 만지기를 꺼려한다면 당신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는 높은 차원에 있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당신은 가장 낮은 수준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우리는 두려워서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함으로 어떤 일들을 행하길 거절하여 최고 높은 차원에 있어야 한다. 자매들은 자기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집에 가는 대신 자기 남편과 함께 있길 원한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어떤 일 하기를 삼간다. 내게 그것을 할 자유가 있고, 그것을 하는 것이 나쁘지 않더라도 단순히 주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나는 그것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이 이 부분의 말씀이 지닌 진정한 의미이다.

 

우리는 4절에 있는 원칙을 따라야 한다. 이 원칙은 우리-형제나 자매나 마찬가지로-가 그분께서 우리를 그분 자신을 위해 은혜로써 지켜 주시도록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동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투사들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주님의 만족을 위해 일찍 익는 처음 익은 열매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필요가 있다. 『주여, 당신의 만족을 위해 나는 일찍 익고 싶습니다. 주여, 나는 나의 휴거보다는 당신의 만족을 관심합니다. 나는 당신을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 하늘로 데려가지길 원합니다. 주여, 내가 당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한, 내가 땅 위에 있든지 하늘에 있든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이기는 자들의 태도이다.

 

처음 익은 열매들에게는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문제가 안 되므로, 우리는 그들이 들림 받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지만, 그대신 십 사만 사천의 처음 익은 열매들이 어린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서 있다는 말을 듣는다. 우리가 지적했듯이 이것은 확실히 땅 위에 있는 시온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시온이다. 만일 당신이 살아 있는 이기는 자들 가운데 하나라면, 당신이 휴거되는지 안 되든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당신은 이미 주님의 임재 안에 있으므로 휴거가 갑자기 닥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여기 지상에서 그분의 임재 안에 있든지 아니면 거기 시온 산에서 주님의 임재 안에 있든지 당신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기에 도착할 때 당신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오! 나는 여기서 주님과 함께 있구나! 나는 그분의 임재 안에 있구나!』라고 말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리라. 처음 익은 열매로 휴거된 이들은 놀라는 기색이 전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주 예수여, 나는 당신과 여러 해 동안 끊임없이 함께 있었습니다. 내가 아나하임에 있든지 삼층천에 있든지 별 차이가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외부인들에게는 당신이 시온 산 위에 서 있게 된 것이 갑자기 일어난 일로 보이겠지만, 당신에게는 그것이 놀랄 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평범한 체험이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여러 해 동안 남편과 떨어져 있었다면, 남편을 볼 때 흥분되어 「열광」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언제나 남편과 함께 있다면, 확실히 그렇게 「열광」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당신은 바로 지금 그분과의 친근한 교통 안에 있음으로 처녀로 그분 안에 보존되어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휴거가 갑자기 닥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평상의 체험일 것이다.

 

비록 처음 익은 열매에 관한 이 구절들이 한 종류의 휴거를 지적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상 휴거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사내아이가 「들림 받는다」는 말을 듣지만, 첫 열매들은 어린양과 함께 시온 산 위에 서 있다는 말을 듣는다. 만일 그들에게 언제 거기에 도착했는지 묻는다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여기에 있다. 우리는 여러 해 동안 주님의 임재 안에 있어 왔기 때문에 여기 있다고 해서 특별한 느낌이 없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이런 분위기 안에서 살아 왔다.』 이것이 살아 있는 이기는 자들의 휴거이다. 이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어린양의 배고픔을 만족시키는 처음 익은 열매들이다. 하나님의 농작물 가운데 가장 일찍 성숙한 이들은 싸움을 위해 있지 않고 만족을 위해 있다.

 

I. 그들의 입에서 거짓말을 찾아볼 수 없음

 

5절은 처음 익은 열매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입에 거짓말이 없고』라고 말한다. 거짓말은 사탄의 표현이자 표시이다. 마귀는 모든 거짓말장이의 아비요 거짓말들이 그에게서 나온다(요8:44). 이기는 자들의 입에서 거짓말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의 표현에서 사탄에 속한 것이 전혀 없음을 가리킨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 입에서 어떠한 거짓말이나 허위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비록 나는 거짓말하는 것을 미워하지만 여러 해 동안 참 그리스도인들의 거짓말 때문에 고통을 겪어 왔다. 얼마나 수치스러운가!

 

 

주의 회복 안에서는 우리 입에 어떤 거짓말이나 허위도 없어야 한다. 우리가 「예」라고 말할 때는 그렇다는 뜻이고, 「아니오」라고 말할 때는 아니라는 뜻이다. 만일 분명하게 예,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경우에는 지혜를 사용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거짓말이나 허위도 우리 입에서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거짓말장이이자 모든 거짓말의 근원인 사탄과 아무 상관도 없다.

 

J. 흠이 없음

 

5절은 또한 처음 익은 열매들이 흠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들이 티나 주름이 없이 하나님의 거룩 안에서 온전하며(엡5:27),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성화되었고 하나님으로 완전히 적셔졌음을 말한다(살전5:23).

 

K.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감

 

십 사만 사천의 첫 열매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간다』(4절). 어린양이 우리를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어디로 가든지 우리가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그분이 어디로 가시든지 그분을 따르는 공과를 배워야 한다.

 


위트니스 리
[요한계시록 라이프 스타디, "처음 익은 열매",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