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안의 몇 차례 주님의 중대한 회복
교회
Hannah , 2009-03-17 , 조회수 (5401) , 추천 (1) , 스크랩 (0)

 

 

역사 안의 몇 차례 주님의 중대한 회복

 

 

 청교도들의 반응은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길에 있지 않다
 

오늘 저녁 우리는 계속하여 주님의 회복의 역사 안에 있는 일들을 보기로 한다. 우리는 교회가 세워진 지 얼마 안 되어 간교한 자가 무언가를 가지고 들어온 것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 첫째는 종교 곧 표준적이고 성경적인 종교이다. 둘째는 철학 곧 인간적인 사상과 관념이다. 셋째는 조직과 사람의 각종 야망과 역사이다. 우리는 독사와 맹수를 두려워하듯 종교와 철학과 조직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유는 이것들이 교회를 파괴했었고 오늘날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들에 따라 각종 패괴하고 세속적이며 육체적인 것들이 들어왔다. 종교와 철학, 그리고 인간 조직이 있는 곳에 각종 패괴한 것들도 들어오기 마련이다.

 

소위 기독교 안에도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역사상 이러한 사람들을 청교도들이라고 한다. 제 1세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청교도들이 있다. 청교도들이란 항상 당시 패괴한 상황에 대한 일종의 반응이다. 한면에서 말하면 이 모든 반응은 다 좋은 것이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교회와 하나님의 영원한 목표에 대해 분명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반응을 갖는 동시에 엄중한 많은 잘못을 범했다. 그 중 가장 큰 잘못은 계속 나뉘어지는 것이다. 어느 때든지 청교도들의 반응이 있을 때에는 동시에 예외 없이 항상 분열이 있었다. 그러므로 모든 반응이 예외 없이 다 분열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반응이 거듭될수록 분열이 일어났다. 결국 하나님의 목표 전체가 거의 끝났고 별로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우리는 이것이 주님께서 아직 돌아오시지 못하는 이유임을 알아야 한다. 그분의 다시 오심을 위하여 그분에게는 디딜 수 있는 디딤돌이 필요했으나 결국 얻지 못하셨다. 참으로 주님을 믿는 사람은 수억이 되지만 정상적인 교회생활은 결핍되어 있다. 2세기초부터 이런 일들이 발생했다. 그러나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길에 있지 않았다.

 

 

루터의 과오는 국교회를 산출한 것임

 

마르틴 루터가 개혁을 일으킬 때 하나님의 회복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주님이 루터를 사용하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 있어서 매우 강했다. 그는 실로 목숨을 버리는 대가를 지불했고 이신칭의를 위하여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교회의 문제에 올 때 왜 그렇게 나약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읽은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때 루터는 독일정부와 연합하는 것이 잘못인줄 알면서도 여전히 연합하였다. 그 잘못으로 인하여 소위 국교회가 산출되었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로마 카톨릭과 그리이스 정교 외에 가장 큰 종파는 국교회이다. 그리고 모든 국교회는 거의가 루터파였다. 오직 하나 곧 앵그리칸 교회인 영국 성공회만이 예외이다. 규모가 가장 큰 것은 로마 카톨릭이고 두 번째가 그리이스 정교이며 세 번째는 국교회이다. 예를 들어 독일 국교회, 덴마크 국교회, 노르웨이 국교회, 스웨덴 국교회, 앵그리칸 국교회이다. 이 모두가 다 루터가 뿌려 놓은 씨에서 나온 국교회들이다. 내가 루터를 정죄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그가 하나님을 위한 가장 큰 종임을 존경한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만일 우리에게 교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보장이 없다. 교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면 우리가 가장 좋은 일을 할지라도 그것을 시행할 때에 과오를 범할 수 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사실이다. 한동안 상실되었던 믿음으로 의롭게 됨은 개교 이후로 영원히 상실되지 않았다. 그러나 루터는 우리를 최초의 교회생활의 상태로 돌아가게 하지 못했다.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회복하는 큰 일에 주님에게 쓰임을 받았다. 또한 그는 봉쇄된 성경을 풀어서 공개된 성경이 되게 하였다. 루터는 이 두 가지 큰 일을 행했다. 그러나 교회 문제에 있어서 그는 별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고 도리어 극히 큰 잘못을 범했다.

 

 

속 생명을 주의하는 사람들에게 실행적인 교회생활은 없었음

 

그런 뒤 얼마 안 되어서 소위 개혁교회 특히 비교적 큰 국교회들이 죽은 상태에 떨어졌다. 특히 국립교회는 죽은 종교로 변해버렸다. 개교는 주후 1500년 즈음에 일어났지만 반 세기도 안 된 1600여년에 이르러 주님은 다른 반응을 일으키셨는데 이는 곧 속 생명을 주의하는 신비파이다. 이 반응은 소위 개신교의 테두리가 아닌 로마 카톨릭의 테두리 안에서 일어났다. 그 개교에 의해 정죄된 악한 테두리 안에서 하나님은 속 생명을 주의하는 한 무리를 일으키셨다. 여러분은 그들의 이름을 알 것이다. 예를 들면 귀용 여사, 페네롱 신부 등이다. 이들은 속 생명에 관한 것에 점점 인식을 갖기 시작했고 생명이 무엇인가를 조금씩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 생명은 아들 안에서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사람에 의해 얻어진 하나님 자신이다.

 

내가 다시 반복하거니와 이것은 공허하고 텅빈 개혁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라는 것이다. 의심할 것 없이 그때 로마 카톨릭은 죽어 있었고 그리이스 정교도 죽어 있었다. 개신교도 마찬가지였다. 살아 있는 파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므로 17세기에 와서 하나님은 전체 죽은 기독교 안에 속 생명의 반응을 일으키셨던 것이다. 우리는 페네롱, 귀용 여사 같은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많이 말했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귀용 여사가 자신으로는 이것 저것을 할 수 없고 반드시 몸 안에 있어야 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은 실로 몸의 원칙에 대한 글을 썼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실행적인 교회생활이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로마 카톨릭의 영역 안에 있었다.

 

 

청교도들이 많은 사립교회를 형성함

 

동시에 많은 청교도 단체들이 일으켜졌다. 모든 청교도 단체들은 모두가 진리에 대해 무언가를 본 지도자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은, 올바른 침례는 사람을 물 속에 잠기게 하는 것임을 보았다. 이것은 성경의 어떤 교리와 진리에 대해 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보았고 심지어 이를 위해 대가를 지불하기까지 했다. 그런 다음 깨끗한 마음으로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들과 함께 서서 아주 자연스럽게 소위 교회로 형성되었다. 이것이 침례회의 기원이다. 이러므로 이때부터 네 번째 종류의 소위 교회가 생겨났다. 첫째 종류가 로마 카톨릭이고 두 번째가 그리이스 정교이며 세 번째가 국교회이다. 이제 네 번째 종류인 사립교회가 일어났다. 사립교회는 먼저가 침례교이고 다음이 장로회이며 그 다음은 감리회 등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립교회가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지 당신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오늘 또 다섯째 종류의 소위 교회인 자유그룹이 있음을 알려주겠다. 이 자유그룹은 미국에서 말하는 소위 「성경교회」도 포함한다. 십 오 년 전만 해도 이것은 미국에서 상당히 유행이었다. 「믿음성경회」, 「갈렙성경회」, 「성결성경회」, 「지역성경회」 등 가지 각색의 성경교회가 일어났다. 성경교회란 무엇인가? 성경교회는 로마 카톨릭에 속하지 않고 그리이스 정교에 속하지도 않으며 국교회에나 큰 사립 종파에 속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그들이 소재하는 지역에서 모임을 형성해 사람에게 성경을 가르친다. 그들은 그 모임을 「성경교회」라고 자칭했다.

 

이것은 하나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이어서 소위 자유그룹들이 많이 일어났다. 일종의 교회생활의 칭호로 사용되었던 「형제들」은 지난 세기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지난 세기(19세기) 초에 소위 「포리로스형제들」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그런 일찌기 17세기 유럽 중부에 이미 몇 종류의 형제회가 있었다. 가령 소위 「은혜형제들」이 그렇다. 메노회의 사람들도 자신들을 일종의 형제회라고 자칭한다. 그들은 소위 「메노형제회」이다. 일찌기 삼백 년 전의 모든 「형제들」의 상태는 매우 좋았다. 그들은 어떤 진리를 위해 서 있었고 핍박을 견디어냈다.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온 핍박뿐 아니라 국교회로부터 온 핍박도 있었다. 국교회는 그들이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핍박을 받고 쫓겨나 유리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교회생활을 회복하기 시작한 모라비안 형제들

 

주후 1700년 쯤에 진젠돌프(N.L. Zinzendofr)라는 한 청년이 주님에 의해 일으켜졌다. 그는 옛 독일 제도 하의 한 백작이었는데 보헤미아에 매우 광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주님은 그를 사용하사 그의 재산을 풀어 많은 도망한 청교도들을 영접하게 하셨다. 각기 다른 종파의 청교도들과 형제들이 다 그가 있는 곳으로 피난했다. 어떤 사람은 장로회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침례회의 배경, 또 어떤 사람은 메노회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진젠돌프의 보호를 받기 위해 보헤미아로 간 사람들은 아마 일곱에서 열 가지의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었다고 믿는다. 이들 청교도들이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붙들고 있는 교리로 인하여 자주 다투고 화목하게 생활할 수 없었다. 주님이 진젠돌프에게 지혜를 주심으로 어느 날 그는 모든 인도자들을 모아 상황을 설명했고 그들도 굴복되어 교리상의 다툼을 버리고 하나를 지키겠다고 약속하고 그들의 배경을 잊어버리기로 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하나 안에 서서 모이기 시작했다. 얼마 안되어서 한 번의 주님을 기념하는 집회를 통해 그들은 성령 충만을 얻었고 이로써 그들은 사상 최대 최강의 부흥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그때까지에 있어서는 지상에서 가장 흥왕한 그리스도인 단체가 되었다.

 

나는 여러분의 시간을 많이 쓰고 싶지 않고 다만 한 가지 사실을 말해주고자 한다. 심지어 요한 웨슬레와 그의 형제 찰스 웨슬레까지도 그들로 인해 구원을 받았다. 이것은 그들이(웨슬레 형제) 유럽에서 미국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난 일이다. 요한 웨슬레는 런던에 도착한 후에 보헤미아에 가본 적이 있고 거기서 한동안 묵었다고 한다. 내가 읽은 웨슬레의 책에서 그는 영국으로 갈 부담 때문이 아니라면 일생 거기에 남아 있기를 원했다고 한다.


역사를 자세히 읽어보면, 여러분은 사도시대 이후 모라비안 형제들이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실행한 첫 무리 그리스도인 단체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 위에 부어졌다. 이것은 1730년부터 1750년 사이의 일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지만 그들의 상태는 여전히 부족함이 있었다. 그들이 모르는 면도 있기 때문에 주님은 더 역사하셔야 했다.

 

 

교회에 대한 형제회의 진일보적인 회복

 

한 세기가 채 안 되어 1825년부터 1828년에 이르러 소위 형제회의 운동이 완전히 형성되었다. 이것은 다비(J.N. Darby)와 몇몇 형제들의 인도하에서 일으켜졌다. 초기에 그들은 참으로 빛이 충만하고 능력이 있었으며 들판을 사르는 불과 같이 매우 빨리 확산되었다. 펜톤(D.M. Penton)은 삼 사십 년 전의 대교사로서 형제회 운동이 개교 때보다 더 크고 강하다고 말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개교는 세상과 관련이 있고 형제회 운동은 참으로 영적인 것이라는 데 있다. 그들은 어떤 것을 선전하거나 고취하지 않았다. 오늘 당신은 다비의 사진을 한 장도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사진 찍는 것을 반대했고, 사진 찍는 것도 세상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러한 황금기도 약 20년 정도밖에 유지되지 못했다. 1840년경 그들 가운데 분열이 일어났다. 첫 번째 분열은 다비와 뉴톤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휴거에 대한 극히 강렬한 다툼이 있었다. 다비는 환난 전 휴거를 강력히 주장했고 뉴톤은 환난 후 휴거를 주장했다. 이 일로 인해 형제들은 둘로 나뉘어졌다.

 

물론 다비를 따르던 사람들이 비교적 많고 뉴톤을 따르던 사람은 적었다. 나는 뉴톤이 쓴 책들을 읽어 보았다. 그도 뛰어난 교사 중의 하나로서 특히 모세오경 방면의 예언에 대하여 깊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성경 지식에 있어서 너무 뛰어난 것이 그들이 분열된 이유이다.

 

얼마 후 다시 2차 분열이 일어났다. 이번의 분열은 소위 개방적 형제들과 폐쇄적 형제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때 그들 가운데 뮬러(George Muller)라는 인도자가 있었다. 고아원을 세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실로 하나님의 종으로서 지난 세기에 「믿음의 왕」이라고 불리웠다. 주 안에서 그는 매우 깊은 사람이었으나 성경 이해에 있어서는 다비와 큰 차이가 있었다. 다비와 그의 추종자들은 종파를 떠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을 받지 않는 데 있어서 매우 강했다. 당신이 아무리 좋고 영적이더라도 당신이 종파 안에 있기만 하면 그들에 의해 악한 동반자라고 불리우게 된다(그들은 종파는 일종의 죄악이므로 종파 안에 있는 사람은 자연히 이 죄의 동반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뮬러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이것은 불공평하다. 많은 사랑스런 성도들이 여전히 종파 안에 연루되어 있지만 그들의 주님과의 관계가 여전히 좋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거절할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그들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두 지도자 사이의 차이점이다. 바로 이런 차이점 때문에 그들은 또 분열되었다. 이로써 그때까지의 형제들은 세 무리, 즉 뉴톤파 형제들, 폐쇄적 형제들, 개방파 형제들로 나뉘어졌다.

 

나는 이런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 나는 그들이 분열된 것에 관한 통계자료를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은 1828년에 완전히 형성되었다가 90년 후인 1919년 곧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해에 150여 개의 단체로 나뉘어졌다. 그로부터 54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소위 형제회 중에는 천여 파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들이 많은 파로 분열된 이유는 지나치게 교리를 주의하기 때문이다. 교리가 있을 때 다른 관념이 생기게 된다. 가령 휴거의 교리에 있어서, 대환난 전 휴거와 대환난 후 휴거와 대환난 중에 휴거된다는 교리가 있다. 40년 전 워치만 니 형제는 이 교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명단을 열거하면서 그들이 믿는 교리를 말해주었다. 즉 환난 전 휴거를 믿는 사람은 켈리(William Kelly), 토레이(R.A. Torey), 무디(D.L. Moody), 브룩스(D.H. Brooks), 켐블린(A.C. Kemblen), 스미스(J. Smith), 스코필드(C.I. Scofield)이다.

 

환난 후 휴거를 믿는 사람은 뮬러, 골든, 기독교 선교 연맹의 창립자인 심프슨(A.B. Simpson), 알닌(Dr. Emin), 몰헤드 교수(Professor Moorhead), 프랭크(H. Franks), 로버트 카미렌(Robert Cameren), 라이트(Wright)가 있다. 물론 뉴톤은 환난 후 휴거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또 한 파는 이기는 자의 휴거로서 소위 부분 휴거 혹은 환난 중 휴거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는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채프만(R.C. Chapman), 고메이트(Gomait), 펜톤(D.M. Penton), 펨버(Pamber)가 있다. 이 외에 폴 레더(Paul Reider)가 있는데 그는 시카고에서 토레이의 일을 이은 사람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교리에서의 이런 쟁론은 유익이 없고 각종 분열만 가져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소위 기요파 기독교 안의 기본 신학 중 90퍼센트 이상이 형제회의 교훈에서 온 것이다. 특히 미국의 모든 기요파 성경학교는 다 스코필드의 가르침을 채택하고 있다. 스코필드는 대학자요 형제회의 학생이며 그의 성경통신교재 중 95퍼센트 이상이 형제회의 가르침을 채택하였다. 미국의 가장 큰 선교사인 무디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서점의 모든 책을 불사를지라도 성경과 맥킨토쉬(C.H. Mackintosh)의 오경만 있으면 충분하다.』 맥킨토쉬도 형제회의 한 교사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형제회의 거의 전체 가르침을 채택하였음을 보여준다. 한면으로 형제회의 가르침은 소위 교회를 도왔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이 가르침들은 또한 많은 분열을 야기시켰다.


1828년부터 1850년까지가 형제회의 황금기이다. 많은 성경학자와 교사들은 형제회의 그 기간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한 예언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좋은 상태는 자주 있지 않고 오래 가지도 않았다.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이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교리로 인해 분열은 계속되었다.

 

 

극동에서의 주님의 새로운 회복

 

한 세기 후인 1920년쯤 먼 동쪽인 중국에서 주님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다. 18세기에 유럽 대륙에는 모라비안 형제들이 있었고 19세기에는 영국에서 형제들이 일으켜졌으며 또 한 세기 후인 1920년 전후에 주님은 극동 중국에서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셨다.

 

여러분은 중국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며 한면으로는 공자의 가르침이 많고 또 한면으로는 불교사상이 충만한 나라임을 알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찬양하자. 어쨌든 주님은 그분의 복음을 중국 땅에 보내셨다. 기독교가 아무리 잘못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세 가지가 중국에 들어갔다. 곧 주의 이름인 주님 자신과 성경과 복음이다. 또한 나는 여러분에게(나는 중국의 어떤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어 성경이 가장 잘된 일곱 가지 번역본 중의 하나임을 알려 주겠다. 미국 표준역처럼 좋다. 미국 표준역은 본래 1901년에 번역된 것이고 중국어 성경은 1905년 경에 번역된 것이다. 그것이 좋은 번역본임을 인해 주님께 감사드리자.

 

내가 이 사역 안으로 들어온 해는 1933년이었는데 그때 나는 상해에 있었다. 그때 우리에게는 많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니 형제님을 찾아갈 시간이 많았다. 일 주일에 적어도 서너 번 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교회 역사로부터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내게 역사를 서술하면서 주님이 중국 땅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 것을 말하는 부분에서 이렇게 말했다. 『형제는 주님이 왜 20세기에 중국에 오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서방 세계와 유럽, 미주에서 정상적인 교회생활이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주님은 강요당하신 것입니다. 중국은 교회생활로 말하자면 하나의 처녀 땅입니다.』 물론 모든 것을 하신 분은 주님이시다.

 

중국에서 주의 회복을 위한 모임이 1922년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꼭 50년이 되었다.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이 땅에서 금세기 초에 그분은 워치만 니 형제님을 은사로서 교회에 주셨다. 나는 그를 전파하기를 원치 않고 나의 부담은 그를 전파하는데 있지 않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미 주님께 갔기 때문에 그의 지난 일을 말하기가 비교적 편리하다고 느낀다. 내가 여러분에게 솔직히 말하지만, 나는 기독교 안에서 교육을 받았다. 나의 모든 것이 기독교로부터 왔다. 나는 의문적인 기독교와 근본주의적인 기독교를 거쳤으며 또한 가장 엄격한 형제회의 기독교를 거쳤다. 그리고 오순절주의적인 기독교도 거쳤다. 내가 허풍을 떤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속 생명파의 무리도 거쳤다. 나는 이 모든 파벌의 기독교를 거쳤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내 일생 중에서 니 형제님과 비교될 만한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나는 확실히 그에게서 최대의 도움이자 최고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각 종파의 그리스도인 실행 중에서 그들의 장점을 취했다. 또한 초기 고대 교부들에게서 장점들을 취했다. 그는 그리이스 정교로부터 장점을 취하고 심지어는 로마 카톨릭의 장점들을 취했다. 그는 장로회, 침례회, 오순절파로부터도 장점을 취했다. 그는 거의 모든 종파로부터, 모든 그리스도인의 실행에서 장점을 취하여 그것들을 함께 두었다.

 

40년 전에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에도 나는 그가 많은 사람의 어깨 위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여러분은 내 말 뜻을 아는가? 그는 참으로 성경을 안다. 나는 그와 같이 성경을 깊이 아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는 생명을 알고 주님을 안다. 그는 또한 교회 역사를 안다. 혹 당신은 믿어지지 않겠지만 40년 전 20세도 채 안 되었을 때 그는 벌써 실행적인 그리스도인에 관한 책 3천여 권을 수집했다. 그때 만일 당신이 그의 침실에 가 보았다면 거기에 책 외에 다른 것이 없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심지어 잠자리 양쪽에도 책이 두 줄로 진열되어 있고 가운데만이 눕는 자리였다. 책, 책, 그리고 책뿐이다. 때로 우리는 그가 책더미 속에 싸여 있다고 말했다.

 

그와의 대화에서 나는 교회 역사를 알게 되었다. 교회 역사의 각종 일을 내게 말할 때 그는 읽었던 책을 다시 들춰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 책은 무엇을, 저 책은 무엇을 말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는 교회 역사를 알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에게서 얻은 도움은 편협되거나 부분적이거나 극단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다면적이고 포괄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초기에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올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침례회인가? 장로회인가? 오순절파인가? 형제회인가?』 그렇게 묻게 된 것은 그 모든 장점들을 포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침례회의 사람들같이 사람을 물 속에 잠그고 장로교같이 교회를 다스리는 장로들이 있으며 또한 형제회 같은 면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무어라고 부르기가 어려운 것이다. 장로교냐? 침례교냐? 오순절파냐? 형제회냐? 감리교냐? 성결교냐? 아니면 무엇이냐? 무어라 부를 수 없음은 우리가 그 모든 단체의 장점을 수집하여 한 곳에 두었기 때문이다.

 


위트니스 리
[정상적인 교회생활의 회복, "역사 안의 몇 차례 주님의 중대한 회복",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