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형제님이 일생 동안 받은 고난과 배운 공과
믿는이들
Hannah , 2009-03-17 , 조회수 (5770) , 추천 (1) , 스크랩 (0)

 

 

니 형제님이 일생 동안 받은 고난과 배운 공과

 

 

이제 우리는 니 형제님이 일생 동안 받은 고난 곧 그의 사역에 있어서 받은 고난을 보기로 하자. 나의 의도는 그가 받은 고난을 보여주는 데 있지 않고 여러분과 함께 니 형제님이 배운 영적 공과를 교통하고자 하는 데 있다. 나는 여러분에게 그가 배운 공과는 모두 고난 중에서 얻은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여러분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허락하기 바란다. 나는 상당히 긴 기간 동안 그와 함께 있었고 그의 도움을 받아 왔다. 나는 그의 의도가 나를 돕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나에게 주님이 그를 통하여 행하신 모든 것과 주님 앞에서 그가 배운 것을 모두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가 배운 공과는 거의 사역의 초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교통은 나에게 상당히 큰 도움이 되었다. 비록 내가 노트에 그것들을 기록해 두지 않았지만 고난 중에 그가 배운 공과에 대해 나는 극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영원히 이것들을 잊어버릴 수 없다. 약 40년 전인 1933년 11월과 12월, 그리고 1934년 정월과 2월에 걸쳐 몇 개월 동안 나는 그의 응접실에 앉아서 그에 관한 모든 일을 듣게 되었다. 이천 년 동안의 교회역사에 관한 것도 있고 그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회복에 관한 것도 있었다. 그는 수많은 고난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또한 많은 공과를 배웠다.

 

빈곤

 

첫째로 그가 받은 고난은 바로 빈곤이었다. 당시 그는 학생이었다. 그 나날 동안 중국의 경제상황은 오늘날의 대만보다 못했다. 니 형제님은 비춤을 얻고 그가 본 것에 따라 주님의 부르심을 이루고 주님을 섬겨야했다. 바꾸어 말해서 그는 하나님의 믿음으로 주님을 섬겨야 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나 선교회나 종파 또는 소위 교회의 고용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심지어 그는 어떤 요구에도 승낙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만을 단순히 신뢰하는 것을 훈련하였다. 이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는 1933년부터 자신이 택한 길을 따라 주님을 의지해 생활했다. 물론 그가 주님의 신실하심을 아는 것을 배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경제적 상황하에서 빈곤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장의륜 형제님이 여러분에게, 초기 니 형제님이 상해에 거할 때 때로는 그에게 하루 종일 약간의 빵 외에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었음을 간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때가 한 번이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때로는 다음 끼니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고 한다. 나와 다른 동역자들도 그런 고난을 당한 적이 있다. 그러나 주님은 참으로 기적을 행하사 우리로 난관을 통과케 하셨다.

 

여기서 나 개인의 간증을 좀 하고자 한다. 1937년 내가 중국 북쪽 북평 일대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니 형제님은, 모든 동역자들은 1937년 정월에 열리는 특별집회에 참석하라는 전보를 우리에게 보냈다. 그때 그는 교회 생활에 관한 메시지를 전했었다. 우리는 그 전보를 받고 당일 저녁에 밤차를 타고 36시간을 기차에서 보냈다. 그때 기차에는 특실과 침대실도 있었으나 우리는 돈이 없어서 삼등석을 타고 갈 수밖에 없었다. 상해의 동역자 특별 집회를 마치고 나는 항주로부터 말씀을 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또한 수도 남경에로부터 초청을 받았고 다른 도시도 거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약 2개월 반 동안 집을 떠나 있었다. 내가 급히 떠났기 때문에 집안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안배도 하지 못했다. 사실상 집안 식구들의 필요를 채울 돈도 없이 그냥 떠난 것이다. 그때 내 아내는 이미 네 명의 아이를 가졌었고 한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었다.

 

내가 집을 떠난 지 약 4주가 되었을 때 그들은 먹을 것이 떨어지는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내 아내는 비교적 큰 두 아들에게 무릎을 꿇고 내일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자고 했다. 그때는 밤이었다. 내 아내는 두 아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주님께 간구했다. 여러분은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아는가? 기도한 지 얼마 안 되어 한 나이든 자매가 찾아왔다. 그녀는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경제적 상태는 비교적 좋았다. 깊은 밤에 그녀가 내 집에 찾아왔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평상시 그녀는 집회도 정상적으로 참석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집회가 없는 그날 저녁에 그녀는 내 집 대문을 두드렸다. 내 아내가 문을 열어주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집에 있을 때 마음 속에 불안함이 느껴져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 헌금을 당신에게 가져다 주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매우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헌금봉투를 내려놓자마자 가버렸다. 떠난 후 내 아내가 그 봉투를 뜯어보니 얼마의 돈이 들어 있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이것이 당시 우리의 생활이었다.

 

여러분이 알 듯이, 사오십 년 전 중국의 경제 상황 하에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사람에게 고용되지 않고 직업이나 당신을 보장해줄 사람이 없이 사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중국 땅 전역에서 니 형제님은 이런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선봉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 방면에서 고통을 받았었다. 주님께 찬미하자. 그가 이 길을 열어주었다. 주 예수님은 정말 그를 필요로 하셨고 그를 사용하사 이 길을 열어주셨다. 우리들은 다만 따르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당신은 워치만 니를 따르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것은 너무 좋은 것이다!』라고 말하겠다. 영원토록 나는 이것은 『영광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질병

 

둘째로 그가 받은 고난 중 상당한 부분은 신체의 질병의 고통에서 왔다. 그의 몸은 좋지 않았었다. 첫째로 그는 폐결핵을 앓았었고 수년 동안 폐병을 지니고 있었다. 1929년, 그는 거의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친히 한 간증을 읽어보라. 그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자신이 체험한 신유를 말했다.

 

또한 그의 위장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외에도 그는 수년 동안 일종의 심장병을 앓았었다. 그는 자주 나에게 언제라도 자신은 죽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었다. 나는 그가 지팡이를 의지하고 아주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그때 말하는 것은 그에게 고통이었다. 그는 말을 할 때 식은 땀이 난다고 수차 내게 말해주었다. 나는 작년 6월에 그가 감옥에서 심장병으로 죽었다고 믿는다. 그는 이 질병을 거의 40년 동안 지니고 있었다. 그는 계속 고통을 당했었다. 그는 수차 나에게 특별 집회가 열린 기간에 항상 침대에 누워 있었다가 집회가 시작되면 몸을 일으켜 집회로 가고 말씀을 교통한 후에는 다시 집에 돌아와 누웠다고 말해 주었다.

 

1934년까지 그는 계속 미혼이었다. 그는 1923년에 그의 사역을 시작하였고 11년 동안 그를 도와줄 아내가 없이 계속 혼자 살았다. 이런 면에서도 그는 계속 고통을 당했다.

 

빈곤한 생활 중에 그는 믿음의 공과를 배웠다. 그는 작은 백합같이 이땅에서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을 알았다. 그는 정말 한 송이의 백합화같이 이 땅에서 그를 돕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다만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살았다. 그는 이런 공과를 배웠다. 그의 몸의 질병으로 인하여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많은 공과를 배웠고 심지어 신체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부활 생명을 의지해 사는 것을 배웠다. 많은 때 그는 신체의 힘으로 섬기지 않고 참으로 부활 생명을 의지해 섬겼다. 주님을 찬미한다. 이 모든 고난을 통하여 그는 참된 공과를 배웠다. 나는 그가 배운 공과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적어도 나는 그의 체험으로부터 가장 큰 도움을 받았다고 간증할 수 있다.

 

기독교의 각종 핍박

 

셋째로 그의 고난은 기독교의 각종 핍박으로부터 왔다.

 

멸시

 

먼저 기독교는 그를 멸시하고 경시했다. 초기에 그들은 『워치만 니가 누구냐 20세밖에 되지 않은 젊은이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그가 낸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에 대해서도 그것이 처음으로 알려졌을 때 큰 목사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확실히 들었다. 『아, 워치만 니. 그는 총명한 사람에 지나지 않아. 영어를 좀 알고 그 책들에서 뽑아서 중국어로 번역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비평이 그래도 멸시보다 낫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사람의 비평은 견딜 수 있지만 사람의 멸시는 받고 싶지 않다. 비평은 참된 할례로서 당신의 원래 모습을 변케 하지만 멸시는 이것보다 더 심한 것이다. 니 형제님은 이것들을 견디었다. 그는 사람의 멸시를 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그때 그와 몇몇 사람들은 히브리서 13장 13절 말씀을 좋아했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그는 이 공과를 배웠고 그때 우리 몇몇 사람도 능욕을 지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능욕을 십자가로 삼았다. 우리가 멸시당할수록 즐거웠던 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졌기 때문이다.

 

비평

 

이어서 기독교는 비평하기 시작했다. 먼저는 멸시요 그 다음은 비평이었다. 니 형제님은 기독교 전체를 버리고 부인했기 때문에 그가 비평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25년에서 26년 사이에 그가 출판한 책들을 읽어보면, 당신은 지금으로부터 48년 전에 이 젊은이가 전체 기독교를 폐한 것을 느낄 수 있다. 그의 24기(期)의 출판물로 인하여 전체 기독교가 끝났다. 이 책들이 내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근원이다. 오늘날 어떤 사람은 나 이상수(위트니스 리)가 워치만 니와 다르다고 말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만일 이상수가 기독교를 폐한다고 말한다면 워치만 니는 48년 전에 벌써 이 일을 했었다. 솔직히 말해서 열 명의 이상수도 한 명의 워치만 니와 비교할 수 없다. 그는 나보다 열 배나 더 심했다. 생각해보라. 어찌 기독교가 그를 비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독교는 자주 그를 비평할 뿐 아니라 방어적으로 그를 비평했다. 기독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문서로 그를 비평했다.

나는 니 형제님이 사람의 비평을 받음으로써 참으로 육체를 처리하는 공과를 배운 것을 주의했었다. 그는 비평을 받았지만 전혀 육체의 반응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육체를 입은 천사라고 생각하지 말라. 이 땅 위에는 천사가 없다. 우리는 다 육체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비평을 받음으로 그는 공과를 배웠다. 무슨 공과를 배웠는가? 바로 육체를 처리하는 공과이다.

 

반대

 

비평에 이어 반대가 뒤따라왔다. 전체 기독교가 일어나 그를 반대했다. 중국에 있는 기독교 전체가 보는 어떤 출판물은 매호마다 그를 반대했다. 이 반대들을 당신은 상상할 길이 없다.

 

공격

 

반대에 이어서 공격이 왔다. 그들은 힘껏 니 형제님을 공격했고 그를 무너뜨리려고 했다. 나는 만일 율법이 허락했다면 아마 그들은 그를 죽였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이미 법치국가였고 종교적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 이유로 사람을 죽일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여러 모로 공격을 받았다.

 

또한 가장 심한 공격은 중국의 기독교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서방의 선교사에게서 온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자기 나라와 가정을 버리고 주 예수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면서 이교적인 땅인 중국에 와서 사람들을 구원받도록 도왔고 또 선교단에 속한 교회의 기초를 닦았다고 생각했다. 장로회 선교단 교사들이 장로교를 도왔고 침례회 선교단의 교사들이 침례교가 세운 교회를 도왔는데 이제 외국을 나가 보지도 못한 한 젊은이가 일어나서 감히 문서로 선교사들이 세운 각 종파의 기초를 파괴한다고 말했다. (사실 이것은 진실되지 못하다. 니 형제님은 역사를 읽음으로 기독교와 상당히 많은 접촉을 가졌는데 그들은 그가 기독교를 접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모든 선교사들을 포함한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종파가 다 틀렸고 교회는 오직 한 가지 곧 지방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선교사들이 중국에 온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그들이 한 가지 잘못을 범한 것은 그들의 선교단에 속한 교회를 세웠다는 것이다. 「장로교」라는 명칭을 헐어버려야 하고 「침례교」의 간판을 없애 버려야 한다.』

 

만일 당시에 당신이 선교사였다면 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느꼈겠는가? 당신은 공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격을 받음으로 인하여 니 형제님은 동기가 깨끗해야 한다는 공과를 배웠다. 그는 나에게 분명히 자신이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을 때, 특히 선교사들에게 공격을 받을 때 이렇게 자문했다고 말했다. 『오! 내가 틀릴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처럼 많은 주의 종들이 나를 공격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사람들의 공격을 받음으로 그는 보호를 받고 자신의 동기가 깨끗해야 한다는 공과를 배웠다.

 

1935년 즈음에 내가 항주로 가서 며칠간의 집회를 인도하는 약간의 사역이 있었다. 돌아온 후 그는 나를 어딘가로 데려갔다(우리는 한번도 농담을 하거나 함부로 무엇을 말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가 주님의 감동을 받아 특별히 나를 시험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갑자기 나에게 『왜 항주에 가야 했는가? 왜 항주에 가야 했는가?』고 물었다. 나는 그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해 깜짝 놀랐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항주에 저의 도움이 필요한 형제들이 있다고 느껴서 특별히 그들을 돕기 위해 갔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가 무어라고 말했는지 아는가?

 

그의 말은 매우 솔직했다. 『자네의 이런 방법은 정치인의 방법이라네.』 나는 『무어라고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니 좀 분명히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내가 주님의 작은 종으로서 그곳에 주님을 섬기러 갔는데 왜 그가 나더러 정치를 한다고 말하는지 몰랐다. 그는 『자네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갔던 것이기 때문이네.』라고 말했다. 나는 『저의 목적은 나쁜 것이 아니고 다만 그들을 돕기 위해 갔던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바로 그것이 정치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니 형제님, 그럼 저는 주님을 섬길 길이 없게 됩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나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만일 자네가 어디를 가려고 한다면 어떤 목적을 가져서는 안 되네. 자네가 왜 거기에 가는가? 그것은 주님이 그렇게 인도하셨고 주님이 자네를 인도하셨기 때문에 가는 것이어야 하네. 자네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그분만이 아셔야 하네.』

 

이것은 참으로 하나의 공과였다. 형제들이여, 오늘날까지도 나는 여전히 이 공과를 배우고 있다. 주님을 섬기는 모든 행동에서 아무런 목적과 의도가 없기란 정말 쉽지 않다. 당신은 주님을 위한 모든 행동에서 아무런 의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니 형제님이 배운 것에 따르면, 악한 것이든 선한 것이든 당신에게 어떤 의도가 있다면 당신은 정치가요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 그것은 배우기 어려운 공과이다. 오, 그것은 배우기 어려운 공과였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동기가 어디에 있고 나의 동기가 무엇인가를 묻도록 내게 도움을 주었다. 이런 공과는 내게서 온 것이 아니라 니 형제님에게서 배운 것이다. 나는 다만 따랐을 뿐이다.

 

그는 정말 큰 대가를 지불하였다. 그는 먼저 배운 공과를 다시 내게 전해 주었다. 여러분이 알 듯이 그의 수하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은 교리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항상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리를 붙잡지 말고 공과를 배워야 한다. 사람들에게 교리와 교훈을 줄 때 당신의 교리에는 반드시 실제가 있어야 한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교리와 가르침만 줄 것이 아니라 참된 것들을 주어야 한다. 이 참된 것들은 오직 당신의 체험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가 대가를 지불하여 공과를 배운 것을 볼 수 있다.

 

유언비어를 퍼뜨림

 

공격 외에 기독교는 또한 자주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그에게 악한 이름을 주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대로 그의 명예를 손상시키어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하게 했다. 하나의 예를 들겠다. 처음 상해에 갔을 때 나는 그와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는 나에게, 1930년 경에 화수은 교사의 동역자였던 미스 그로비스(Miss Groves)가 그를 찾아왔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유언비어를 들었기 때문에 니 형제님을 만났을 때 책망하는 어투로 그에게, 『내가 듣기로 어느 여자가 당신과 함께 거한다고 하는데, 맞는가?』하고 물었다. 그때 그는 독신자였고 그로비스 교사는 영적으로 그를 도왔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니 형제님을 책망할 자격이 있었다. 니 형제님은 나에게 『그렇다.』고 답변했다고 말했다. 그가 『그렇다.』고 답한 것을 기억하라. 그녀는 『어찌 여자가 당신과 같이 있을 수 있나요?』라고 말하면서 매우 기분이 나빠서 실망하여 돌아갔다.

 

그러나 니 형제님은 나에게, 그때 자기 몸이 안 좋았고 또 자기를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어머님이 멀리서 오셔서 그와 함께 거하며 그를 돌보았다고 했다. 『한 여자가 나와 함께 거한 것은 사실이네. 그것은 그때 내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라네.』 나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당신은 왜 그녀에게 그분이 당신 어머님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니 형제님은, 『그녀가 나에게 그 여인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네.』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나에게, 『형제여, 우리는 영영 어떤 말로 자신을 위해 변호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그로비스 교사가 나를 책망할 때 나는 자신을 위해 변호하지 않는 공과를 배워야 했고 그 책망을 견디어야 했네.』라고 말했다. 내가 그에게 『왜 그녀가 당신의 어머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나에게 그 여인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네. 만일 그녀가 내게 물었다면 답변했을 것이지만 그녀가 묻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말할 필요가 없었네. 만일 내가 그녀에게 말한다면 이것은 내가 자신을 위해 변호하는 것이네.』 이제 여러분은 금세기에 그가 주님의 손에서 가장 유용한 그릇이 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또한, 1942년에 이르러 니 형제님을 반대하는 큰 풍파가 일어났는데 거의 모든 동역자들과 인도자들이 그를 반대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와 극소수의 형제 자매들이 반대의 대열에 있지 않은 것으로 인해 주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니 형제님이 어떻게 틀렸다고 말해주고 설령 그가 정말 틀렸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옳다 그르다를 말할 지위가 없다. 이는 내가 그에게서 배운 것을 영영 잊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믿고 순복했던 이유는 내가 그와 아주 긴 시간을 보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배운 바 결실한 기본적인 것들과 후에 그것을 내게 전했었다는 사실을 영영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사람들이 그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를 상관하지 않는다. 어떤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나에게 『당신은 사람을 따랐고 워치만 니를 따랐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너무나 영광스럽다. 이렇게 주님으로부터 온 사람을 따를 수 있다는 것은 내게 큰 영광이다.』

 

기독교로부터 온 유언비어가 많았지만 주님에게서 온 표명도 있었다. 한가지의 예만 들겠다. 1938, 39년에 그가 영국에 있었을 때, 어느 날 어떤 사람의 인도로 영국에서 열린 케스윅 총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여러분이 알 듯이 그 모임은 놀라운 모임이다. 그때 케스윅 총회의 의장은 중국 내지회(內地會)의 이사장이었다. 그는 니 형제님에 관한 일을 약간 들었었다. 그는 니 형제님이 회장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니 형제님에게 기도를 청했다. 그 연대에 케스윅 총회에서 말하도록 요청되는 것은 극히 영광스런 일이었다. 단상에서 기도하도록 요청되는 것조차도 큰 일이었다.

의장이 그에게 단상에 올라오라고 청했을 때 그는 올라갈 담력이 없었다. 그가 스팍스(T.A. Sparks)씨(스팍스가 그를 모임으로 이끌었다)에게 물었을 때 스팍스씨는 『올라가 보라!』고 권했다. 그는 단상에 올라가 기도하였다. 그의 그 기도는 온 회중을 사로잡았다. 기도를 마치고 어떤이가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러나 메시지를 마치고 났을 때 그 메시지 내용에 대해서는 말하는 사람이 없고 모두가 니 형제님의 기도에 대해 말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북평에서 나는 어떤 사람에게서 니 형제님이 어떻게 케스윅 총회에서 기도하였으며 그때의 기도가 전 회중을 어떻게 사로잡았는가를 들었다. 후에 그 의장은 니 형제님과 좋은 교제를 가졌는데 그는 이것이 중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선교단의 지도자와 교통하는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대화를 마친 후 내지회의 그 의장은 니 형제님의 느낌에 완전히 동의했다. 그래서 그는 니 형제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여, 중국에서 주님이 당신에게 위임한 바가 바로 허드슨 테일러가 받은 부담이요, 또한 우리가 이루지 못한 점이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중국에 있는 우리 선교사들이 당신을 반대하다니, 정말 그들은 잘못을 범했소.』

 

결국 이 의장은 특별히 중국의 상해로 가서 모든 내지회의 선교사를 모아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워치만 니라는 사람의 일과 사역을 반대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한 것입니다. 내가 일부러 여러분을 모은 것은 워치만 니가 하고자 하는 일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알려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실망시켰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 대신 그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권하고 요청하는 것은 그를 공격하고 반대하는 일을 다시는 영영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그 의장이 런던으로 돌아간 후 선교사들은 더욱 심하게 그를 공격했다.

 

내가 알고 기억한 바에 의하면 1927년에 니 형제님이 상해에서 교회를 세울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그는 오직 한 번 교파에 의해 말씀을 전하도록 초청되었다. 그때가 1932년이었다. 나는 이것이 매우 정확하다고 믿는다. 오늘, 나는 주님이 나를 위해 그로 내 고향의 한 교파에 의해 초청을 받게 하신 것을 안다. 그는 내 집에 묵었는데 그것이 우리의 처음 만남이었다. 한면에서 그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또 한면에서 그는 사람의 공격 대상이 된 면에서 매우 유명했다. 만일 그때 당신이 중국에 와서 『기독교 전체가 공격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바로 「워치만 니」라고 알려 줄 것이다.

 

오늘날 대적의 궤계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요즘 몇 년 동안 어떤 형제들이 니 형제님의 저서를 대량 번역하는데 있어서 그들은 그리스도가 생명 되신 면만을 번역하고 교회인 면은 할 수 있는 대로 숨겨 놓았다는 것이다. 책명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나오는 책들을 그들은 한 권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 니 형제님의 「영광스런 교회」라는 책도 거절했다. 그들은 영적인 면만을 취했다. 이런 책들이 수천만 명에게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니 형제님은 매우 유명해졌다. 사실 이것은 니 형제님의 본 뜻에 위배된다. 그는 전혀 이것을 원치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에게 준 명성은 정확하지 않고 공정하지 않다. 그들은 니 형제님이 귀히 여겼던 교회를 미워했다.

 

나는 그의 책을 출판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대로 교회에 관한 책들은 숨겨 놓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면에서 나는 정말 그들을 방해하는 자가 되었다. 그들은 힘껏 교회에 관한 책들을 숨겼고 나는 힘껏 교회에 관한 책을 출판하였다. 여러분은 돌아가서 「교회의 길」이라는 책의 영문판에서 내가 쓴 서문을 읽어 보라. 그의 책을 출판하는 런던의 어떤 곳에서는 전쟁 이후 니 형제님이 자신의 관념을 바꾸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1945년 이전에 워치만 니는 교회나 종파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1945년 이후 그의 태도를 바꾸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위트니스 리와 워치만 니는 다르다.』

 

바로 이것 때문에 나는 「교회의 길」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또한 대화한 일자와 장소를 기록했는데 그 메시지들에서 1945년 이전에 전한 것은 하나도 없다. 제일 먼저 전한 메시지는 1948년에 전한 것이고 마지막 메시지는 1951년에 전한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니 형제님이 한번도 생각을 바꾼 적이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전쟁 후에 나는 적어도 2년 반의 기간 동안 그와 함께 사역했다. 그는 심중의 일체 부담을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는 『여기서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마음을 열고 저녁 6시부터 밤 늦게까지 교통했던 적이 몇 번이나 되는지 모른다. 1947년부터 48년까지 이 년 동안에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매번 두세 사람이 모였는데 나와 그, 때로는 왕포진 자매가 같이하였다. 나는 그의 마음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 소위 영적이라고 하는 무리들은, 니 형제님이 그리스도가 생명이심에 대해 말한 모든 메시지는 귀히 여기나 할 수 있는 한 교회에 관해 말한 것들은 감추어 놓았다.

 

내가 조금 더 말하겠다. 나는 자주 사람들에게, 오늘날 니 형제님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만일 니 형제님이 미국에 있다면 그를 사랑하고 칭찬하는 사람들이 그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마치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과 같다. 『화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눅 11:47). 주님의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만일 오늘 선지자들이 여기 있다면 그들은 그 선지자들도 죽일 것이라는 뜻이다. 니 형제님이 감옥 밖에 있었을 때 그는 여전히 사람의 공격하에 있었다. 오늘 그의 명성이 전보다 좋아진 것은 그가 감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명성이 좋아진 것은 영적인 면에서의 그의 서적들이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니 형제님은 단지 그리스도를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이상은 또한 교회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생명 되신 것은 교회를 위한 것이다. 지금 나는 여러분에게 대적이 간교하다는 것을 알려주겠다. 대적은 뛰어난 궤계로써 영적인 면으로 실행적인 면을 가리워 버렸다. 여러분은 니 형제님이 당한 고통은 이방 세계가 아닌 기독교로부터 온 것임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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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형제님이 일생 동안 받은 고난과 배운 공과(속)

 

지난 메시지에서 우리는 니 형제님이 일생 동안 받은 고난을 언급했다. 빈곤과 질병으로 인하여 그는 적지 않은 고난을 받았다. 이뿐 아니라 또한 기독교로부터 수많은 고난을 당했다. 그들은 그에게 많은 멸시와 비평과 반대, 공격을 가했고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내가 유언비어를 마지막 항목으로 나열한 것은 이것이 가장 간교하고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탄이 거짓말장이요 또한 모든 거짓의 아비임을 알 필요가 있다.

 

만일 여러분이 돌이켜 주 예수님을 생각해본다면, 여러분은 사복음서에서 유대교 사람들도 주님을 이렇게 대했고 그분을 멸시하고 비평했으며 반대하고 공격했음을 볼 것이다. 또한 그들은 그분에 관한 유언비어들을 퍼뜨렸다. 또한 사도행전에서의 유대교도들도 이와같이 사도들을 대했다. 오늘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주의 회복 안에서 참되게 주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대한다. 멸시, 비평과 반대, 공격 그리고 유언비어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낡은 방법으로서 사탄의 기본적인 수법이며 사탄의 걸작이다.

 

1934년 여름, 상해에서 내가 니 형제님과 함께 차를 타고 교외에 갈 때 한 가지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가 차를 운전하여 커브를 돌면서 "형제여, 이제 우리는 이방인으로 향해야 할 것 같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이 말은 사도행전 13장 47절을 인용한 것이었다.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이 거절하고 핍박했기 때문에 바나바와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고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고 말했다.

 

1934년이 되었을 때 니 형제님의 사역은 완전히 거절당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해 이전에 그의 사역은 항상 기독교를 향해 열려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로부터 얻은 것이 멸시와 비평과 반대, 공격과 유언비어이기 때문에 그는 나에게 "이제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향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때로부터 우리는 더욱 죄인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을 주의하였다.

 

함께 봉사하는 형제들로부터 받은 고통

 

이제 우리는 그가 받은 고통의 다른 면인 함께 봉사하는 형제들로부터 당한 고통에 대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이런 고통은 더욱 어려운 것이다. 외부 사람들로부터 온 고통은 우리 밖에서 온 것이고 형제들로부터 받은 고통은 우리 가운데서 온 것이다.

 

추방

 

니 형제님이 형제들로부터 받은 첫번째 고통은 바로 그들에 의해 교회로부터 추방된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적이 있듯이 최초의 교회생활의 실행은 1922년 그의 고향에서 시작되었다. 약 2 년의 기간이 지난 후 어떤 일로 인하여 1924년에 그는 추방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형제들에게 거절당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교회생활로부터 추방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가 추방된 것은 교회 중에 선포되었을 뿐 아니라 정식으로 분명한 선언문으로 공포되었으며 거기다가 그 선포는 그가 집에 있지 않고 밖에 나가 있을 때 행해졌다.

 

그는 자신이 추방당한 전체 과정을 내게 상세히 교통해준 적이 있다. 그당시 그는 복주를 떠나 항주에 사역하러 갔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편지로 그가 추방되었다고 알려주었다. 그가 천사같이 그것을 개의치 않았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도 사람이다. 그는 나에게, 이 일은 그를 매우 분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묻기를, "앞으로 네가 내 손에 있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네 자신의 손에 있기를 원하느냐?"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항주의 일을 마치자마자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곳의 형제들은 거의가 그를 통해 구원받은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공포된 사실에 대해 매우 분히 여겼고 받아 들이려 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모두 니 형제님의 편에 서 있었다. 젊은이들은 부두로 그를 맞으러 가서 그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그에게 말했다. "니 형제님, 반드시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당신은 이런 추방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말로 그가 또 한 번의 자극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자기편에 서 있겠다는 이들에게 니 형제님은 몸이 불편하고 배멀미가 있으니 그들 중 몇 사람이 밤에 그의 집으로 오라고 말했다. 그날 밤 적지 않은 사람이 왔다. 그들이 아직 도착하기 전 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말고 자신을 위해 변명하지 말라는 주의 음성을 들었다.

 

그러므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 어떠한 반응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 그는 매우 평온함 가운데서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이여,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오늘 저녁 짐을 싸서 내일 여기를 떠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잠잠하십시오." 많은 사람이 그의 말에 울었고 실망도 많이 했으며 이로 인해 집회에 다시는 참석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하여 그는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이것이 1924년에 발생한 일이다.

 

중국어 찬송 468장은 바로 그때 니 형제님이 쓴 것이었다. 나는 영원히 그 찬송을 잊지 못한다. 오십 년이 지난 지금에와서도 이 찬송은 여전히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영을 상쾌하게 한다. 여기에 십자가 지기를 배우고 자신을 위해 변명하지 않고 고통을 당해도 입을 열지 않은 한 사람이 있다.

 

얼마 안 되어 그는 '기독도보'를 낼 부담을 가졌다. 한동안 지난 후 그는 북쪽의 상해로 올 부담을 가졌다. 거기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바로 그때 상해 교회가 세워졌는데 그것은 바로 1926년 초의 일이다. 그가 십자가의 깊은 역사를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의 역사는 그로 말미암아 한걸음 더 전진했다.

 

여기서 당신은 한 가지 원칙을 볼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산출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또한 고통을 거쳐서 산출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경도 교회의 산출이 여자의 해산하는 수고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를 가든 손쉽게 교회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런 일은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산출되지만 또한 사람들의 고난당함으로 산출된다.

 

이의(異議)

 

니 형제님이 형제들로부터 받은 두번째 고통은 바로 이의들이었다. 비록 어떤 형제 자매들은 니 형제님을 거절하지 않았지만 그에 대해 항상 이의를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사역 초기부터 니 형제님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 많은 한 자매가 있었다. 나는 다소 소극적인 것을 말해야 하기 때문에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누구의 약점을 말할 때에는 이름을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녀는 주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니 형제님의 나이는 이십 세였고 그녀는 이십 오륙 세였다. 그녀는 주님을 매우 사랑했고 은사도 있었다. 많은 면에서 사람의 존경도 받았는데 결국 전도여행을 하는 여전도사가 되었다.

 

내가 그녀에 관해 들었던 것은 전쟁시였는데, 그녀는 중국 수도의 한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있었으며 기독교계에서 놀라운 인물로 알려졌었다. 그녀는 교회생활 초기부터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녀에게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는가? 그녀는 항상 니 형제님에 대해 이의를 표했다. 니 형제님을 추방한 그 여섯 형제들을 따라 그녀는 항상 니 형제님에 대해 이의를 가진 사람이었다.

 

1934년 정월, 상해에서 우리가 세번째 이기는 자의 집회를 가질 때 그녀가 집회에 참석한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집회에서 이의를 가진 사람이었다. 니 형제님이 말씀을 전할 때 그녀는 항상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이것이 일종의 고통임을 아는가? 그녀가 니 형제님보다 연장하고 사람의 존경도 많이 받았지만 니 형제님에 대해서는 이의를 가졌었다.

 

여러분은 수년 동안 니 형제님에 대해 이의를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한 자매를 예증으로 삼았는데 그녀는 가장 강렬한 이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생활이 중국 온 땅에 퍼지던 기간에 그녀는 그 안에 있지 않았다. 초기에는 그녀가 그 안에 있었지만 나중에는 나갔다. 이런 이의는 니 형제님에게 실로 일종의 고통이었다.

 

성숙되지 않음과 무능함

 

니 형제님이 형제들로부터 받은 또 하나의 고통은 바로 사람의 성숙되지 않음과 무능함에서 온 것이었다. 그가 형제들과 함께 일하고 같이 책임을 짊어졌지만 기타 형제들은 그와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성숙하고 유능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미숙하고 무능했다. 이것은 그에게 참으로 고통이었다.

 

오십 년 전 중국에서 니 형제님은 매우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몇 년을 앞섰는지 모른다. 그가 본 많은 것들을 형제들은 보지 못했다. 그들은 미숙하고 무능했는데 이것은 그에게 일종의 고통이었다. 이것은 내가 이 사역에 들어올 때 본 상태였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면서도 말하기를 좋아했고 결국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 되었다. 여러분이 알듯이 교회생활에서 좋은 일꾼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일을 해내지 못한다. 사람에게 속지 말라.

 

완악함

 

이어지는 것은 사람의 완악함이다. 아주 실제적인 한 가지 실례를 들겠다. 내가 이 사역에 들어온 것은 교회생활이 시작된 지 십 일 년 되던 해의 일이었다. 나는 니 형제님의 요청으로 상해를 방문했는데 그는 나더러 거기에 4개월간 머물라고 하였다. 그 기간의 끝무렵에 그는 나를 찾아 와서 "이 형제, 우리 동역자들은 형제가 이곳으로 이사와서 우리와 함께 거하며 함께 일하는 것이 좋다고 느끼네. 주님 앞에 나아가서 주님이 형제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를 보게."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나는 주님 앞에 나아가서 물었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매우 분명하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사역에 들어왔다. 그는 나를 어떤 책임의 위치에 두었다. 나는 그가 왜 이렇게 하는가에 대해 아주 이상하게 느꼈다. 나는 새로 들어온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사역한 지 적어도 오륙 년이 되었었다. 나는 새로운 사람에 지나지 않았지만 니 형제님은 내게 중한 책임을 안배하였고 그와 함께 일하도록 지정하였다. 나는 바빠 자기 일에 수고하는 형제들 중에 한 사람만이 제외인 것을 발견했다. 그 형제는 나보다 연로하고 니 형제님보다도 연로하였다. 그당시 내 나이는 26 세쯤이었고 니 형제님은 28 세였고 그 형제님은 35세였다. 주의 일에 들어오기 전에 우체국 국장을 지낸 경력이 있는 형제였다.

 

어느 날 미국에 공부하러 가려고 계획하고 있는 아주 총명하고 학문 있는 한 사람이 우리를 찾아왔다. 그때 그는 구원받은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미국으로 가기 전에 침례받기를 바랬다. 그는 한두 번 집회를 참석했었고 또 니 형제님은 그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에 우체국 국장을 지냈던 그 형제는 "안 된다. 그는 너무 생소하고 한두 번밖에 집회에 참석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사람에게 침례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니 형제님이 "형제님, 무엇을 염려하십니까?"라고 말하자 그는 "그가 아직 구원받지 않았을까봐 염려스럽다."라고 말했다. 그때 니 형제님은,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만일 이 일이 잘못되었다면 주님 앞에서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그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니 형제님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그는 견제하고 동의하지 않았다. 이것은 참으로 니 형제님으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게 했다. 이것은 한 가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사역 초기에 니 형제님은 기독교의 실행들에서 많은 것들을 취했었다. 그는 어떤 실행에서 성결을 취했고 어떤 실행에서는 침례를 취했으며 또 어떤 실행에서는 다른 것을 취했다. 우리의 집회 방식에 대하여 그는 대체적으로 형제회의 실행을 취했다. 형제회의 모임에서 자매는 입을 열지 못했다. 찬송은 할 수 있어도 기도는 하지 못했다. 오늘날까지도 형제회에서는 집회에서 기도를 포함하여 자매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1932년 이후. 내가 사역에 들어온 그 해에 니 형제님은 집회에서 자매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교회에게 너무 큰 손실이라고 느꼈다. 그는 자매가 집회에서 기도하는 것이 절대로 옳은 것임을 분명히 보았다. 그러나 대다수의 소위 인도하는 사람들은 집회에서 자매는 말할 수 없고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인상이나 가르침을 받았었다. 니 형제님은 그들에게, "집회에서 우리는 마땅히 자매들을 해방해야 하고 그들이 기도하는 것을 허락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안 된다!"고 말했다. 그후 상해에 갔을 때 나는 이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점점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여러분에게 솔직히 말을 하거니와, 이 일에 대하여 내가 첫번째로 아멘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작은 예이다.

 

형제들이여,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처음부터 모든 일이 다 어려웠다. 마치 길을 닦을 때 첫무리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길이 닦인 후에 다른 사람들은 아주 쉽게 그 위로 차를 몰 수 있는 것과 같다. 니 형제님은 개척자와 같다. 그는 유일하게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었다. 한두 가지 일이 발생한 후에 나는 그가 왜 나를 그런 위치에 두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유는 그가 너무 외로왔기 때문이었다.

 

형제들만 완고하고 완악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때때로 자매들 가운데서 이런 문제는 더욱 크다. 이런 완고함과 완악함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고통은 매우 큰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면으로 다른 사람의 완고함과 완악함을 견디기를 배워야 하고 다른 면으로는 영원히 어떤 사람을 향하여도 완고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에게 "좋습니다. 형제님이 그렇게 느끼시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기를 배우라. 너무 자신을 믿지 말고 다른 사람을 믿고 당신의 형제 자매들을 믿기를 배우라. 이것은 좋은 공과이다.

 

야심

 

네째는 지위에 대한 형제들의 야심이다. 자매들에게는 별로 야심이 없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형제들 편에서는 이런 야심의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주의 일에 들어왔을 때 니 형제님은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자주 집회에 참석하지 못했었다. 그는 문서의 일을 해야 했고 특별 집회도 돌봐야 했으므로 정규적인 집회는 돌볼 수 없었다. 내가 거기 있었으므로 그는 집회의 책임을 나에게 맡겼다. 그때 아주 진취적이고 모든 면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활달한 한 형제가 있었다. 나는 젊은 사람으로서 그 형제를 매우 감상했었다.

 

주일날에는 대개 세번의 집회가 있었다. 어느 주일 오후 집회 때 나는 그 형제에게 메시지 전해줄 것을 청했다. 니 형제님은 그 일을 알고서 나를 책망하면서 "형제는 그 형제로 하여금 메시지를 전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이 나쁘냐며 이상히 여겼다. 그러나 그때 그는 내게 무엇을 설명해주기를 원치 않았다.

 

나중에 나는 그 형제가 세번째로 교회생활에 들어온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다(두번째 사람은 안과의사인 유형제이고 첫번째 사람은 앞에서 내가 말한 그 완고한 형제이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상해의 내지회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그는 인도자가 될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는 인도자 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여러분은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아는가? 그가 교회에 들어온 1927년부터 그는 계속 장로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교회에 들어온 지 21년 되던 해인 1948년에 그는 교회를 떠났고 집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했으며 순회 전도사 한 사람을 고용했다. 이것은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집에다 경배할 우상을 세우고 또 제사장을 고용한 것과 같다.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하다.

 

지난 사십 년 동안 나는 중국의 유명한 전도사들을 보아왔는데 거의 모든 사람이 이 길을 갔었다. 그들은 집회에 와서 어떤 지위를 얻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니 형제님은 항상 교회가 유기체이지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줄 지위가 없다고 말했다. 당신은 치과의사가 무엇을 하는지 아는가? 그들은 의치에게 어떤 지위를 부여한다. 몸에 안착한 것은 다 외부로부터 온 것이고 그 안에 생명이 없다.

 

나는 이름을 말하고 싶지 않지만 오늘 중국에 나와 나이가 비슷한 유명한 전도자들이 모두 이 길을 갔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그들은 우리와 한동안 모임을 가진 후에 주의 일에서 어떤 지위를 얻고자 하는데 결국에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떠나 이 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야심이다. 니 형제님은 공개적으로 우리에게 교회생활에서 지위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영원히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 한 젊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매우 가식적이고 간교했다. 그는 항상 가장 영적인 체 했다. 왜 그런가? 이는 그의 야심 때문이었다. 초기에 상해 교회의 모든 성도가 그에게 속다시피했다. 그러나 점차 이리의 꼬리가 드러났다.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이나 동역자들은 그의 모든 것이 거짓된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모두 이 일을 처리하는 데 동의했다. 한 번은 교회가 긴급집회를 가졌는데 모든 성도가 다 참석했다. 그 중 한 동역자는 일어나서 대중 앞에서 그의 거짓됨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그를 정죄하러 일어났다. 모든 회중이 다 그를 정죄했다. 그는 떠난 후에 당시 최고의 신학교에 의해 교수로 초빙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기독교이다.

 

나는 여러분 젊은이들에게 교회 안에 형제들에게 지위를 추구하는 야심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이것은 니 형제님으로 하여금 많은 고통을 당케 했다. 그는 나에게 이 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결국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지나가게 했다. 그는 자신에게는 누구에게 줄 지위가 없고 다른 사람도 자신에게 지위를 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누구든지 남고자 하는 자는 남고 떠나고자 하는 사람은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에 야기된 분열은 바로 이런 야심으로 인한 것이었다.

 

야심이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야심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분열을 야기시킨 다음 그들은 항상 핑계를 대며 코트 곧 교리의 코트를 입는다. 그들은 교회가 어떤 교리에서 잘못되었고 주님 앞에서 자신은 이에 대해 분명해졌다고 말한다. 이것들은 모두 거짓된 것이고 핑계이며 야심을 덮는 코트에 지나지 않는다.

 

거역

 

또 한 가지 내가 발견한 것은 바로 형제들의 거역(때로는 자매들의 거역도 포함된다)이다. 젊었을 때 이스라엘의 역사를 읽던 중 그들이 모세를 거역한 것을 읽었을 때 나는 그것을 이상히 여겼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교회생활 안에 들어온 후 나는 거역을 발견했다. 밖으로부터 온 공격이 있을 뿐 아니라 더욱 속으로부터 나온 거역이 있었다. 결국 거역뿐 아니라 공격도 있게 된다. 이런 공격은 형제들로부터 온 곳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또 한 가지 니 형제님에게 많은 고통을 준 실제적인 일이었던 그의 혼인에 대해 알려주겠다. 1934년까지 그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었다. 그는 아마 32세였을 것이다. 그 모친은 중국식 가정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혼사를 매우 관심했다. 장자인 그가 여태 결혼을 하지 않는 데에는 악간 복잡한 이유가 있었다.

 

1934년 10월쯤 항주에서 특별집회가 있었는데 니 형제님은 남쪽으로 동역자인 이연여 자매를 만나러왔다. 그녀는 니 형제님보다 여덟 살이 더 많았고 또한 동역자 중 가장 연장자로서 40 세 정도였었다. 니 형제님의 어머님은 그녀에게 니 형제님이 결혼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 연장한 자매는 돕기 원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니 형제님의 모친은 니 형제님을 만나러 갔고 그는 결혼할 것을 승락했다. 열흘간이 특별집회를 마친 그 다음날 그는 결혼했다. 나는 니 형제님의 신랑 들러리로 선택되었다. 또한 연장한 빌립 란 형제님은 사회자로 요청되었다.

 

이 혼인 이전에 큰 풍랑이 일어났었다. 이 풍랑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는 니 자매(니 형제님의 부인)의 고모 때문이었다. 니 자매는 어려서 양친을 잃고 고모의 손 아래서 자랐다. 이 고모는 자기 조카가 가난한 전도사에게 시집가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다. 사오십 년 중국 사람들은, 특히 상류사회에서는 전도사를 거지와 같이 여겼다. 니 자매는 상류사회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동의하지 않았고 특히 고모가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어나 반대하기 시작헀고 기독교 인사들이 이 일을 알고서 야합했으며 교회 가운데 육에 속한 사람도 합세하여 이 일에 참여했다. 세 방면에서 일어나 니 형제님을 반대했다.

 

나는 신랑 들러리를 한 다음 북쪽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생겼다는 전보를 받고서 상해로 다시 돌아왔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은 큰 풍랑이었다. 어느 날 아침 니 형제님은 나를 찾아와서 결혼으로 인해 이런 풍랑이 발생한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보십시오. 우리 모든 사람의 이름이 이 큰 도시의 가장 큰 신문에 실렸습니다."

 

나는 그 안의 자세한 것을 말하고 싶지 않다. 결국 니 형제님은 상해를 떠나 차로 천 리 밖에 있는 한 성으로 갔다. 나는 상해에 남아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거기 머물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생활에는 항상 청명한 하늘이 있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천사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렇지 않다. 그들이 다 천사라 할지라도 사탄은 남몰래 작은 귀신들을 집어넣을 것이다.

 

내가 또 여러분에게 가장 큰 풍랑을 말해주겠다. 초기에 중국은 경제적 상황이 좋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에 의해 일으켜져 믿음으로 섬기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생활했다. 내가 여러분에게 나의 간증을 말한 적이 있다. 이제 한 가지 더 말해주겠다.

 

1936년, 나는 이 사역에서 북쪽의 고성 북편으로 보내심을 받았다. 그떄 우리 가운데 사역에서는 사람을 보낼 뿐 누구에게 공급하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이 형제님. 우리에게 형제님이 북편으로가야 한다는 주님의 인도가 있는데 형제님은 어떻게 느끼십니까?"라고 말했다. 나는 "아멘!"하고 그곳으로 갔다. 그곳에 간 후의 모든 필요는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앙망해야 했다.

 

당시 내가 북편에 갔을 때 이 도시가 상당히 큰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자전거 한 대를 살 수 있다면 행동하기가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를 위하여 기도할 때 "가서 사라!"는 주님의 느낌이 있었다. 나는 주님께, 지금 내 주머니 속에 돈이 있으나 이것은 이사 비용으로 족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깊은 속에는 주님이 돈을 주시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것이 금요일 혹은 토요일의 일이었다.

 

주일 만찬을 마치고서 2 원이 들어 있는 헌금 봉투를 받았다. 주일이 지나고서 월요일에 한 연장한 형제가 나를 찾아와 긴 대화를 가졌다. 그는 떠나면서 티 테이블 위에 한 봉투를 두고 갔는데 그 위에는 "이 형제님, 이것은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가 떠난 후 봉투를 뜯어보니 그 안에 10원이 있었다. 또 같은 날 등기 편지를 받았는데 그 안에 20 원짜리 환어음이 들어 있었다. 그 돈은 먼곳에서 누군가가 내게 부쳐준 것이었다.

 

나는 우체국에 그 환어음을 바꾸러 갔을 때 자전거 점포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모든 면에 만족스런 자전거를 발견하여 그것을 사게 되었다. 자전거에다 전호 붙은 세금까지 해서 32원이었다. 내가 자전거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음이 매우 즐거웠다. 그래서 서실로 가서 무릎 꿇고 주님께 감사했다. 기도할 때 주님은 내게, 주일 저녁부터 받은 헌금이 32 원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자연히 나는 주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주의 신실하심에 감사드렸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생활했는가에 대한 하나의 예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 주님에 의해 일어난 사람은 많았으나 경제적 상태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당하고 병든 사람도 많았다. 어느 날 니 형제님은 우리에게 동역자의 삼분지 이가 폐결핵으로 죽었다는 통계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연령도 많지 않았었다. 다 삼십 오세에서 사십 세 사이였다. 내가 여러분에게 니 형제님이 항상 수입의 삼분지 일로 남을 도왔다는 것을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면에서 필요로 하는 금액은 너무나 컸다.

 

여기서 나는 여러분에게 니 형제님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말해주겠다. 1940년, 41년에 약제사인 니 형제님의 둘째 동생은 중국에서 몇 가지 약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영을 잘 하지 못해서 니 형제님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서 니 형제님은 그 경영을 사역의 필요를 돕기 위한 기회로 삼았다.

 

얼마 안 되어서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형제들은 더 높은 지위를 얻으려는 야심 때문에 교회 형제들 가운데 오해를 조작해냈다. 이런 오해들은 눈덩이같이 구를수록 더욱 커졌다. 상해 교회 전체가 일어나 니 형제님을 반대할 정도로 커졌다. 그러므로 니 형제님은 할 수 없이 상해를 떠나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상해는 일본의 통치 하에 있었다. 상해에 있는 일본 헌병대는 상해 교회에게 기독교의 위장조직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조직은 일본 당국의 명령을 들었다. 교회는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임을 중지당했다.

 

이러한 혼란 하에 니 형제님은 그의 사역을 중단하고 상해를 떠나 내지로 들어가 중경에서 그의 제약 회사를 계속했다. 그의 사역은 그때의 중단으로 육 년간 중단되었다. 어떤 사람은 그가 너무 바쁘고 사업에 점유되었기 때문에 사역할 시간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완전히 유언비어였다. 그가 사역을 중단하게 된 것은 너무 바쁘기 때문이 아니라 형제들의 거역 때문이었다. 이것이 몇 년 동안 그가 받은 가장 큰 고통이었다.

 

육 년의 세월이 지난 후 1948년에 우리 가운데 큰 부흥이 일어났다. 그런 부흥을 통하여 거역했던 사람들은 모두 후회하고 니 형제님에게 회개하며 죄를 자복했다. 이렇게 하여 니 형제님은 다시 사역을 하게 되었다. (한 마디 말하고 싶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니 형제님을 거역하고 반대했지만 그들은 교회를 반대하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의 간증이다. 교파로 돌아간 사람은 거의 한 사람도 없고 다 교회 안에 머물렀다.)

 

내가 또 한 가지 알려 주고 싶은 것은 그때 부흥이 일어났을 때 상해 교회는 집회 장소를 짓기로 했다. 당시 땅을 사는 데에는 십만 오천 달러가 필요했고 동시에 내부에 삼천 명, 외부에 이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집회소를 짓기 위해서는 십만 달러가 필요했다. 이런 액수는 당시로 볼 때 상당히 큰 부담이었다.

 

어느 날 니 자매님이 나를 찾아와 "이 형제님, 니 형제님이 교통할 것이 있다고 오늘 저녁 저희 집에 오시랍니다."라고 말했다. 그날 나는 그를 찾아갔다. 그는 나에게 37개의 금덩어리를 넘겨주었는데 한 개가 백 돈이나 되었다. 도합 삼천 칠백 돈의 황금이었다. 그때의 싯가로 열 돈이 오십 불이었다. 그는 이것을 땅 사는 데 사용하라고 말했다. 내가 이것이 어디서 생겼느냐고 물으니까 그는 제약회사를 경영하여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매우 놀랐다. 그때 땅을 사서 집회소를 짓기 위해 헌금한 지 육 개월이 지났다. 형제들의 헌금 총액은 삼천 칠백 돈의 황금이었다. 니 형제님이 내게 건네준 것과 똑같은 금액이었다.

 

이것은 일부분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의 부흥 이후 그는 훈련을 갖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 되어 공산당이 쳐들어와 많은 돈을 들여 산 훈련센타를 점유했다. 그 센타는 작은 산에 있었는데 그 위에 지은 작은 집도 다 압수당했다. 그는 1952년에 감금되어 이십 년간 옥살이를 하고 감옥에서 순교했다.

 

일생 동안 고난을 당한 사람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나의 관점과 그에 대한 나의 지식에 따르면 그는 일생 동안 하루도 안일한 날을 보내지 못하고 계속 고난을 당했다. 이 많은 고난을 거쳐서 그는 천연적인 생명과 혼을 처리하는 것과 자아를 처리하는 것을 배웠다. 한쪽에 제쳐놓음을 당했던 육 년 동안 그가 배운 마지막 공과는 겉사람의 파쇄였다. 천연적인 사람이 파쇄되어야 영이 해방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그는 지식이나 교리만을 사람에게 전해주지 않았다. 그의 모든 가르침 안에는 참된 체험이 있었다. 그는 고난으로부터 이 공과들을 배웠다.

 

오늘 우리들은 이 모든 공과들을 승계받았다. 나는 여러분에게 니 형제님에게서 본 고난보다 내 일생을 도운 것이 없다고 간증할 수 있다. 그에 대해 받은 인상을 나는 종신토록 잊지 못한다. 그런 인상들은 나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가장 큰 도움이었다. 나는 이것이 또한 교회에게 크나큰 도움이라고 믿는다. 오늘 우리는 확실히 이런 유산을 물려받았다. 이것은 니 형제님이 지불한 큰 대가로 얻어진 것이다. 이 대가는 바로 그가 받은 고난이다.

 

내가 거듭 말하거니와 니 형제님은 일생 고난을 당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그의 아내는 그보다 칠팔 개월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그 다음 그가 주님께로 갔다. 그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유명도 남기지 않고 그냥 그렇게 가버렸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그는 적지 않은 것을 남겨 주었다. 여러분은 내 말에 동의하는가? 여기에 교회들이 있고 수많은 영적 축복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그로 말미암아 남겨진 것이다.

 


위트니스 리
[정상적인 교회생활의 회복, "니 형제님이 일생 동안 받은 고난과 배운 공과",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