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안에서의 생활과 집회
교회
Hannah , 2009-03-17 , 조회수 (5473) , 추천 (1) , 스크랩 (0)

 

영 안에서의 생활과 집회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떤 조직이나 운동이 아니다. 지난 오십 년에 걸쳐서 나는 이것이 주의 회복이라는 것에 대한 확증을 얻었다. 주의 회복은 바로 우리를 태초로 이끌고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갖게 한다. 회복이란 무엇인가? 회복은 이미 잃었던 것을 되찾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기독교의 타락의 요인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초기에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소극적인 면에서의 기독교의 오류와 적극적인 면에서의 교회를 보았다. 그러나 50 년 전 우리는 기독교의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이 땅에 기독교가 생긴 지도 천 구백 년이 넘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이름은 갖고 있지만 방대하고 괴이한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라는 명목을 가지고 있고 손에 성경을 쥐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전파한다. 바로 이 세 가지가 사람들로 하여금 소위 기독교를 떠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목에서 기독교는 사악하고 극히 악한 것으로 변했다. 계시록에서 당신은 기독교계가 하나님의 안목에서 큰 바벨론으로서 큰 음녀요 모든 가증한 것들의 어미임을 볼 것이다. 그러나 그 큰 음녀의 손에는 금잔이 있다. 예표에서 금은 항상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들을 나타낸다. 그는 큰 음녀이지만 손에 신성한 것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이름을 가졌다. 당신은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만일 당신에게 하나님의 안목에서 온 이상이 있다면 당신은 그 안에 사악한 것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사악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주님은 이미 이것을 예언하셨다. 한 여자가 고운 가루 속에 누룩을 넣었다. 가루가 있는 곳에 누룩이 있고 고운 가루와 누룩이 이미 섞여졌다. 그러므로 사람이 타락한 기독교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것이 일종의 혼합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악한 것이나 신성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 금잔인 것은 사실이나 금잔 안에 부패와 음란 그리고 하나님의 눈에 가증한 것들이 가득하다. 외모는 신성하나 실제는 마귀에게 속한다. 거기서 당신은 고운 가루와 누룩을 만질 수 있다. 또 이 두 가지가 이미 하나로 섞여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주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기독교로부터 벗어나기가 극히 어렵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많은 시간을 사용하게 했다.

 

1932년부터 나는 주님의 회복 안에 들어왔는데 그것은 주님이 그분의 회복을 시작하신 지 십 년 후였다. 동방에서의 주의 회복은 1922년에 시작되었다. 십 년 후에 비로소 나는 이 회복 안에 완전히 들어왔다. 이 첫 십여 년 동안 나는 주의 회복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 여러분은 내가 1925년부터 니 형제님의 책을 읽고서 기독교의 오류와 정상적인 교회생활에 대해 분명해졌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에 대해 분명해진 후에 니 형제님과 편지 연락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사는 곳이 그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회복에 완전히 들어올 정도로 도움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1931년 9월에 내가 배를 타고 상해의 특별 집회에 참석하러 가려고 할 때에도 돌연히 일본군이 중국 동북을 침략했다는 소식을 듣고 발이 묶여서 가지 못했다. 심지어 그때의 여행을 취소했었다. 만일 그때 내가 상해에 갔다면 1932년 이전에 이 회복 안에 들어섰을 것이다. 어쨌든 오랫동안 나는 주의 회복이 거친 모든 과정을 보아왔다. 이 과정은 무엇인가? 애초부터 기독교를 통과하여 기독교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아직 기독교에서 철저히 나오지 못했다. 잠재의식 속에 우리들은 어느 정도 기독교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런 느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의 핏속에 혹은 우리의 천연적인 성품 안에 있을 것이다.

 

예컨대 당신은 교리를 듣기를 좋아할 것이다. 집회에 올 때마다 당신은 누가 설교해주기를 바랄 것이다. 당신은 이것이 좋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이것은 기독교의 타락이요 니골라당의 부패한 성분이며 성직제도의 사악한 요소라고 말하겠다. 집회에 와서 왜 당신은 남에게 공급할 것을 준비하지 않는가? 혹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 저는 약하고 아무 것도 모릅니다. 오, 그렇게 할 줄 모릅니다!"

 

당신이 범사에 약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의자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데 있어서는 매우 강할 것이다! 당신은 모든 면에서 약하지만 오직 한 가지 즉 좋은 설교를 듣고자 하는 데 있어서는 강하다. 당신은 어떤 집회에 가서 강한 강사가 없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가기가 싫다. 설교가 없는 곳에는 가고 싶지 않다." 이것은 사악한 성직계급의 관념이다. 우리는 이것에 돌을 던진다. 그러나 내가 말하지만 이것은 우리 속에 있다. 오! 주의 회복은 이 모든 것에서 우리를 이끌어내서 처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오직 영이 있었을 뿐이다

 

처음에는 어떠했는가? 처음에는 오직 영이 있었을 뿐이었다. 오, 택함을 받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인 성도들이 영 안에서 그리스도를 누리고 체험하며 단체적인 방식 안에서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이것이 바로 최초의 상태였고 정상적인 교회생활이다. 종교가 없고 규례도 없으며 의식도, 교리도, 가르침도 없고 오직 영뿐이었다. 영 안에서 그리스도를 누리고 체험하며 단체적인 방식 안에서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뿐이었다. 이것이 최초의 상태였다.

 

지난 오십 년 동안 회복 안에서 주님의 발걸음은 빨랐으나 우리는 너무 느리다. 그분은 빠르고 빈틈 없지만 우리는 귀머거리이고 우둔하다. 때로는 1 인치 전진하지만 2 인치 뒤로 물러섰다. 그 후 1 인치 전진하다가 또 3 인치 뒤로 물러섰다. 로스앤젤리스의 교회가 아주 좋다고 말하지 말라. 내가 말하지만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많은 것에 묶여 있다. 몇 개월 전 우리는 앞으로 전진하도록 끌어당겼지만 우리 가운데 진보가 많지 않았다. 여러분이 다 알듯이 위로 올라가기는 어려워도 밑으로 하락하기란 매우 쉬운 일이다. 이것은 몸부림이나 노력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위로 올라갈수록 우리는 더욱 간단해지고 아무 것도 쥐고 있지 않게 된다.

 

가령 성경 로마서에는 적지 않은 양의 가르침이 있다. 심지어 에베소서 같이 짧은 책에도 많은 가르침들이 있다. 그러나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 올 때 모든 교리가 다 지나갔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는 무엇이 있는가? 오직 영! 영! 영이 있을 뿐이다. 요한은 영 안에서 등대를 보았다. 그는 천만의 믿는이들을 본 것이 아니라 한 도시에 하나의 등대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간단하지 않은가? 너무 간단하다. 오늘 저녁 자리에 앉은 분들은 수백 명이나 된다. 그러나 정상이라면 우리는 하나의 등대이어야 한다. 아무 의견이 없고 다툼도 없으며 변론도 없고 가르침도 없이 오직 하나의 등대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안목에서 지방 교회는 금등대와 같이 매우 간단하고 단순하다.

 

이뿐 아니라 계시록에 와서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신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요 성령이 성도들에게 말하는 것도 아니며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을지어다"이다. 참으로 간단하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신다. 마지막 부분인 22장 17절은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이라고 말한다. 천천만만의 성도들이 이제는 한 신부가 되었다.

 

오늘 여기에는 몇백 명밖에 모이지 못했다. 우리는 한 신부인가?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우리 가운데 여전히 다른 관념과 의견이 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주님의 구원하심과 회복하심이 필요하다. 나는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이 아직도 기독교의 영향력 아래에 있고 또 그 영향력이 아주 소극적인 것일까봐 두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주님이 계속 우리를 그분의 완전한 회복으로 이끌고자 하심을 알아야 한다. 또 그분의 온전한 회복은 절대로 기독교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완전히 영에 속한 것이다.

 

우리 손에 성경이 들어온 지도 이미 오십 년이 되었다. 그러나 계시록이 오늘과 같이 그렇게 분명한 적이 없었다. 이 책은 22 장으로 되어 있지만, 나는 이 책이 영과 신부에 관한 책이요 영과 교회에 관한 책이라는 것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절대적으로 영 안에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영 안으로 돌이키고 영 안에 머물러야 한다.

 

반드시 영 안에서와 몸 안에서 살아야 한다

 

최근에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우리를 가리킴) 가운데 가지 말라. 그들의 어떠어떠한 면은 성경적이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50 년 전에 나도 누구는 성경적이지 않다는 똑같은 돌을 던졌다. 그러나 오늘 나는 "누가 성경적이냐?"고 묻겠다. 당신은 성경적인가? 당신은 분쟁적이고, 분쟁은 가장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다.

 

신약에 합일보다 더 중요하고 전략적인 것이 없다. 주 예수님은 아버지께,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하라고 기도하셨다. 그러나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누구누구가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과 하나되지 말자."라고 말한다.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는 것인가? 당신들은 분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성경적이 되도록 돕는 것이다. 성도를 나누는 것보다 더 비성서적인 것은 없다. 나는 성경적이지 않더라도 성도들과 하나 되기를 바란다(대하 30:19, 23 참조).

 

가령 여기에 지독하게 더러운 한 사람이 있다 하자. 이 사람을 조각내고 각 조각을 깨끗하게 씻는다면, 비록 팔이 가장 깨끗한 부분일지라도 그것은 몸에서 이탈된 부분인 것이다. 내가 말하지만, 당신은 더러우나 완전한 사람을 원하는가, 아니면 깨끗한 팔을 원하는가? 내가 솔직히 말하지만, 나는 온종일 24시간 동안 더러운 아이와 함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깨끗한 세척제로 24번 씻었을지라도 그 조각난 어깨를 내 앞에 둔다면 나는 무서워서 거반 죽을 것이다.

 

오늘날 분열된 기독교도 나를 거반 죽을 정도로 놀라게 한다. 그들의 행한 것이 성경적인가도 하나의 큰 문제인데 거기다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분열되었고 몸에서 이탈되었으며 계속 갈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탈된 자들이다. 그들이 당신에게 무엇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말할 때 그들의 의도는 당신을 이탈시키려는 데 있고 나누이게 하려는 데 있다. 이것은 궤술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반드시 영 안에서와 몸 안에서 살아야 한다. 나는 이런 교리나 저런 교리를 사랑하지 않고 오직 영 안에와 몸 안에 사는 것을 돌본다. 내가 말하지만, 이것이 50 년 동안 주님이 우리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유이다. 또한 해가 거듭될수록 주님은 더욱더 많은 것을 얻으셨다. 오늘날 우리들은 문제가 이것 저것에 있지 않고 완전히 영 안에와 몸 안에 있는가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들은 영 안에 있는가? 몸 안에 있는가? 만일 여러분이 '아멘!' 한다면 그것은 옳은 것이다. 우리는 영 안에, 몸 안에 있어야 한다...

 

집회에서 방법을 사용하지 말고 영을 사용하여
풍성한 그리스도를 나눔

 

훈련을 시작할 때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지적한 바 있다. 교회는 바로 삼일 하나님과 우리의 영이 단체적인 방식 안에서 서로 연합된 존재이다. 교회는 신성한 영과 사람의 영이 단체적인 방식 안에서 서로 연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의 행함에서나 우리의 집회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가르침을 지키거나 저런 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갖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교회이다.

당신이 일상생활에서 당신의 영을 끊임없이 사용하고 여러 가지 환경에서도 당신의 영을 사용하며 심지어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에도 당신의 영을 사용할 정도가 된다면, 이것은 당신이 규칙과 규례를 따르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결국 당신의 온 존재 중 당신의 영보다 강하고 예민하며 활발하고 뛰어난 부분이 없게 된다.

집회에 올 때 당신은 어떤 결정이나 규례를 가지고 올 것이 아니라 당신의 영을 사용하면서 와야 한다. 당신은 오

 

오늘 저녁 집회에서 기능을 발휘하겠다거나 발휘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지 말라. "오늘 집회에서 나는 활동하겠다." 이것은 당신의 생각에 의지가 더해진 것이지 당신의 영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결심을 하지 말고 당신의 강한 의지를 사용하지 말라. 이 두 부분을 잊어버리고 당신의 영을 사용하여 집회에 오라. 이렇게 할 때 당신은 즉시 주님의 인도하심을 알게 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우리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지 말고 오직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오늘 저녁 나는 여러분에게 분명한 말씀을 주고자 한다. 우리가 "우리는 살아야 한다. 자유로워야 한다."라고 말할 때 우리의 뜻은 손과 발을 흔들면서 외치고 뛰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요 자유함도 아니다. 집회에서의 살아 있음은 새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풍성을 당신의 영 안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현재 우리의 만찬 집회는 어떤 습관에 젖어 있다. 우리는 찬송을 부르고 거기다가 외치는 것도 있으며 일어나는 자도 있고 구호도 있다. 혹 어떤 사람은 시가의 짧은 몇 마디를 외칠 것이다. 어느 때에는 두 형제가 떡을 떼어 돌린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나는 이것이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다른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혹 여러분은 다음 번에는 그런 방법을 쓰지 말고 새롭고 신기한 방법을 쓰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연기에 지나지 않고 살아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참으로 살아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곧 매일 우리가 영으로 살고 영 안에서 행하여 범사에 우리 영을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강하고 살아 있고 우리의 영을 해방한다면 우리의 영이 쉽게 흘러나오게 될 것이야. 이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으로 인하여 풍성해져야 한다. 나의 자매가 내게 잘못했을지라도 나의 다른 부분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부분이 작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로써 나는 나의 영을 극도로 강하게 하고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풍성을 갖게 한다.

 

만일 우리가 다 이런 사람으로서 집회에 온다면 집회에 와서 찬송을 부르기도 전에 우리는 자연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지금 떡이 상에 있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오늘 주 예수님이 나의 참 떡이라고 간증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분을 체험하였고 그분을 충분히 누리고 있습니다." 보라. 이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일어나 뛰면서 "나는 살았습니다!"라고 말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할 때 사실 당신은 참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장난하는 것으로 살아난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용서하라. 교회집회는 사람이 장난하는 곳이 아니다.

 

주일을 거듭하여 여러분 수백 명이 일률적인 방식의 집회를 하는 것은 실로 나로 염려하게 한다. 여러분 중에는 찬송을 부르거나 외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산 간증을 하도록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하나도 없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어떤 일을 고의로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는 이것이 집회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일이기를 바란다. 찬송을 부르기 전에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간증을 하거나 살아 있는 교통을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어느 때에 집회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을 때 어떤 사람(형식적으로가 아님)이 떡을 돌릴 수 있다. 괴상한 방법을 쓰지 말로 흥미를 끄는 방법으로도 말며 고의로 무엇을 해내려고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참된 것들이 되어야 한다. 당신이 뛰고 사람을 끌어 일어나게 하려는 것은 당신에게 생명이 없고 생명의 공급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영원히 새 모양을 내려고 하지 말라. 우리는 괴상하고 신기한 것을 원치 않고 참되고 살아 있는 생명을 원한다.

 

물론 많은 경우 우리가 영 안에서 강하고 그리스도에 대해 풍성한 체험이 있으면 감정을 억제치 못하여 좀 열광한 상태에 머물 수 있다. 그러나 장난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우리의 뜀 속에는 그리스도가 없이 뛰는 것만 있을 때가 있다. 나는 내 말이 여러분 중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고 다만 더욱 분명해 질 수 있기 바란다. 하나님 앞에서 계산될 수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영과 그리스도의 풍성이다.

 

집회에 와서 새 모양을 조성하거나 괴상한 활동을 하려고 하지 말라. 우리는 이런 광경을 보고 싶지 않다.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것은 살아 있는 영과 그리스도의 풍성을 지닌 광경이다. 만일 우리가 매번 이런 상태에 있다면 우리는 필히 새로운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당신은 오늘 저녁 무슨 일이 발생할지를 예상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당신에게 어떤 규례와 형식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든 사람은 다 영 안에 살고 매일매일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당신은 당신의 체험을 가져오고 나는 내가 체험한 부분을 가져오며 우리 모두가 풍성을 가져와 그분을 전람해야 한다. 장난으로 뛰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넘어뜨리고 영영 사람을 건축하지 못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풍성하고 살아 있으며 신선한 집회이다. 매번 집회에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충만하고 강한 영을 가지고 사람의 영을 상쾌하게 해야 한다. 집회에는 결코 가볍거나 흥미를 끄는 것이나 괴상하고 신기한 것이 없어야 한다.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것이 정상적이어야 한다. 풍성해야 하나 모든 것이 정상적이어야 한다. 집회는 완전히 살아있는 영과 그리스도의 영을 공급하는 데 달렸다.

 

내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집회 중에 살아 있음은 흥미 있게 하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반드시 정상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제멋대로 노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들이다. 우리가 외치고 그 외침이 합당하다 하더라도 결코 제멋대로 행하는 것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살아 있는 영으로 외치고 그리스도의 풍성을 가지고 외쳐야 한다. 우리의 외침 안에서 그리스도를 남에게 공급해야 한다.

 

이것은 마땅히 우리의 일상생활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영 안에서 행해야 한다. 가령 형제들 네 명이 형제의 집에 거한다 하자. 여러분은 매일 싸우는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또한 인내를 배우고 서로 마음을 열지 않는 채 다만 참는 상태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두 가지 상태가 모두 가련하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여러분은 아무 것도 집회에 가져오지 못한다. 그리고 이 형제님이 "우리는 잠잠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면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은 뛰면서 "아멘! 아멘! 지금 나는 살아 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장난치는 것이다.

 

그럼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살아 있다는 것은 성격과 성품이 다르고 환경이 다른 여러분 네 명이, 싸우지도 않고 일반인과 같이 인내하지도 않으며 오직 영을 사용하고 날마다 여러분의 영을 적용하는 그것이다. 이렇게 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그리스도를 체험하는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여러분의 영은 강해지고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분의 체험도 풍성해진다. 또한 집회에 올 때에도 당신의 영은 강건하고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을 가질 것이다. 당신은 '할렐루야!'를 외치고 '주 예수!'라고 말할 것이다. 장난치는 것이 아니라 집회를 풍성케 하고 높이 들어올린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집회를 살리고 사람의 영을 상쾌하게 한다. 이것이 올바른 것이다.

 

집회란 무엇인가? 집회는 바로 우리 일상생활의 전람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이렇다면 함께 모일 때 자연히 우리는 우리 매일의 생활을 전람하게 된다. 사람에게 교리를 말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풍성을 함께 나누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교리는 교리에 지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풍성은 반드시 체험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공급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풍성에 대한 당신의 체험을 사람들에게 전하기만 하면 된다. 결국 이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당신의 봉사가 된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결코 흥미로운 방법이나 신기한 모양을 취하려고 하지 말라. 규례와 형식도 일체 잊어버리라. 집회에서 우리는 오직 살아 있는 영과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을 가져야 한다.

 


위트니스 리
[정상적인 교회생활의 회복, "영 안에서의 생활과 집회",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