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실인의 원칙
왕국
Hannah , 2009-03-16 , 조회수 (4952) , 추천 (0) , 스크랩 (0)

 

나실인의 원칙

 

 

성경 : 민6:1-12. 삼상1:11, 28, 눅1:15

 

 

제사장 직분을 위한 하나님의 보충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주님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정하여 임명하셨다. 또한 민수기 첫 부분에서는 전쟁을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 여러 사람들을 한 군대로 통합하는 방법을 말씀하셨다. 6장에서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이 사람들을 통합하는 방법을 말씀하시는 동안 일종의 보충이 되는 것을 그에게 주셨다. 주님께서는 레위 자손 중 아론의 집만 제사장들로 임명하셨다. 장막에서 봉사하는 나머지 레위 자손들은 제사장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령 아론의 집이 주님께 신실하지 않고 여호와를 버리려고까지 했다 하자. 주님은 어떻게 하셨겠는가? 이런 생각이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다. 창조 후 사람이 하나님을 실패시켰을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나왔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려고 의도하셨다. 제사장이란 주께서 자신과 연합하시도록 자신을 주께 여는 사람이다. 주님은 그의 내용이시고 그는 주님의 표현이다. 이것이 제사장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제사장 나라로 만드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제사장 나라를 대신하기 위하여 레위 지파를 제사장 족속으로 선택하셨다. 그러나 레위 족속 전체가 주님에 의해서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론의 집 사람들만 제사장들이 되어야 했다.

 

아론의 집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가? 아론의 집은 마침내 엘리의 아들 때에 다 지극히 타락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주님은 그 상황을 미리 아셨다. 아론의 집을 제사장들로 임명하신 것 외에 민수기 6장에서는 한 가지를 보충하셨다. 이 보충은, 『...의 경우에는』을 의미한다. 아론의 집 편에서 실패할 경우에 주님은 응급 대비로 옆문을 여셨다. 앞문이 부서질 때에는 옆문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나실인의 규정이 있는 것이다.

 

나실인의 규정은 어떤 사람들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나실인은 누구나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레위 사람이든 아론의 집의 한 식구이든 남자든 여자든간에 옆문은 열려 있다. 자매들이라 할지라도 구약의 제사장들이 모두 남자들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 옆문은 남자들과 여자들 모두에게 열려 있다. 정상시에는 주된 입구만 필요하다. 그러나 사태가 비정상적일 때에는 옆문이 필요하다. 나실인을 위한 규정의 원리는 그 문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활짝 열려 있다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금지되어 있지 않다.

 

 

자발적인 헌신

 

그러면 나실인의 원칙은 무엇인가? 그 원칙은 자발적인 헌신이다. 그것은 주님에 의해서 임명되거나 지명되거나 선택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자발적으로 헌신함으로써 되는 것이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말에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빌려 주는」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부자라면 여러분은 나에게 아무 것도 빌려 줄 필요가 없다. 내가 가난할 때만 여러분으로부터 무언가를 빌어올 필요가 있다. 엘리 시대에 제사장 직분에 관한 한 주님은 정말로 어려우셨다. 그래서 한나는 사무엘을 그분께 빌려드렸다. 그녀는 주님께, 만일 여호와께서 그녀에게 아들을 주신다면 그를 여호와께 빌려 드리겠다고 말했다. 제사장 직분이 빈곤하여 여호와께서 행정 면에서 어려우실 때 누군가가 자발적으로 자신을 주님께 빌려드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무엘은 어느 족속에 속해 있었는가? 사무엘은 레위 족속에 속한 것 같지만 사실상 에브라임 족속에 속해 있었다(삼상1:1-2). 사무엘은 아론의 집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께 헌신하고 분별되고 빌려 드림으로써 제사장이 되었다. 사무엘은 정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옆문을 통해 들어옴으로써 제사장이 되었다. 그는 임명이나 규정을 따라서가 아니라 민수기 6장의 보충을 따라서 제사장이 되었다.

 

사무엘은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사사였다. 그는 첫째로 제사장 직분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고 둘째로 왕의 직분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모든 사사들은 권위의 노선 안에 있었다. 이 모든 것 외에도 사무엘은 또한 선지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그 시대를 왕의 직분이 있는 왕국의 시대로 전환시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일이 이 한 사람에게 관계되었던가! 제사장 직분이 있고, 권위가 있고, 예언이 있고, 타락의 시대로부터 왕국의 시대로의 전환이 있었다.

 

사무엘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선택되었는가? 아니다. 그는 여호와에 의해서 지명되거나 임명되었는가? 아니다. 그 놀라운 사람은 바로 나실인의 원칙에 의하여 하나님의 행정으로 들어왔다. 사태가 비정상일 때 하나님은 자발적인 헌신의 옆문을 준비하셨다.

 

침례자 요한은 제사장의 아들이었으므로 규정과 임명에 의한 제사장이었지만 기이한 제사장으로서 기능을 발휘했다. 그는 출생을 따라서가 아니라 나실인의 원칙을 따라 움직였다. 사태가 타락되고 비정상일 때 출생과 규정과 임명에 의한 제사장들은 충분히 좋지 못하다. 그러므로 보충이 적용될 필요가 있다.

한가지를 물어 보겠다. 오늘날 우리는 정상적인 제사장 체계의 상황에서 살고 있는가? 의심할 것 없이 우리는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다. 결과적으로 임명이나 출생에 의한 제사장 체계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정문이 충분히 좋지 않으므로 옆문이 필요하다.

 

우리는 나면서부터 제사장들이요 왕들이라고 단순히 말하지 말라. 이것이 사실일지라도 오늘날의 상황은 비정상적이다. 주된 입구가 손상되었으므로 나실인의 원칙이 필요하다.

 

오늘날 대단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장들과 왕들로 태어난다. 그러나 그들은 제사장들과 왕들처럼 보이는가? 우리는 나실인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우리가 제사장들과 왕들로서 태어났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나실인의 입장에 서서 자신을 주님께 헌신하고 분별시켜야 한다. 우리가 제사장들과 왕들로 태어났다는 것을 아무리 많이 깨달았더라도 우리 자신을 기꺼이 주님께 분별시키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참된 제사장 체계 안에 있을 수 없다. 오늘날의 비정상적인 상황 아래에서 정문은 충분히 좋지 않다. 우리 자신을 주님께 분별시키기 위해 나실인의 원칙을 적용시킴으로써 옆문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실인의 사중 헌신

 

나실인의 헌신에는 네 가지가 아주 분명하게 언급된다. 첫째로 나실인은 포도에서 난 어떤 것도, 심지어는 껍질까지도 마시거나 먹어서는 안 된다. 예표론에서 포도주나 포도에 속한 것은 땅에 속한 기쁨이나 세상적인 즐거움을 상징한다. 우리가 제사장 직분을 실현하려면 땅에 속한 모든 기쁨으로부터 분별되어야 한다. 세상적인 즐거움으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은 이 나라(미국-역자 주)에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세상 즐거움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많은 유혹과 땅에 속한 기쁨과 세상적인 오락 때문에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참된 제사장 체계를 실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포도에 속한 것을 마시는 한 제사장 직분에 대해서는 망치는 것이다. 거듭남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들과 왕들로 거듭났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이 땅에 속한 즐거움의 포도에 의하여 망쳐졌다. 그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오늘날이 타락의 시대임을 깨달아야 한다. 제사장 체계의 위치에 서기 위해서는 포도에 속한 모든 것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지 않으면 안 된다. 주님의 회복은 땅에 속한 기쁨과 세상적인 즐거움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제사장 체계를 통해서만 우세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것에 동참할 때마다 우리는 끝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우리 속에서 그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주의 자녀일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더이상 제사장은 아닌 것이다. 오, 땅에 속한 기쁨과 세상적인 즐거움이 얼마나 제사장 체계를 망쳐왔던가!

 

어떤 사람은, 『땅에 속한 기쁨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묻지 말라. 다만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라. 당신이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당신에게 되묻겠다. 당신은 알고 있다. 당신은 결코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당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땅에 속한 어떤 기쁨과 세상적인 즐거움이 여러분을 제사장 체계로부터 막고 있는지 여러분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오늘날의 타락 아래서 주님에게는 절대적인 헌신, 즉 어떤 것도 보류하지 않는 헌신으로 길을 개척해 나갈 사람들이 필요하다.

 

나실인의 헌신의 두번째 항목은 그의 머리를 깎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제사장 체계에 있는 사람들은 특이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우리는 다소 특이하고 괴상해야 한다. 여러분을 특이하다고 말한다면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분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나는 아주 기쁘겠다.

 

나실인이 그의 머리를 자르는 것을 금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린도 전서 11장 14절에서 긴 머리는 남자에게 부끄러움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영광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다. 긴 머리는 여자에게는 영광이지만 남자에게는 부끄러움이다. 나실인은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부끄러움을 참아 내는 사람이다. 긴 머리를 갖는 것은 자기 영광으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는 죽음에 놓여졌다. 그러므로 자의식이나 자기 의나 자기 영광도 없다. 자기 영광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제사장 체계 안에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주님의 간증을 위하여, 그분의 목적을 위하여 수치를 참아야 한다.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부끄러움을 참는 자가 되라.

 

여러 번 몇몇 형제들은 나에게, 어떤 일들에 대해서 말하지도 말고 행하지도 말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가 나쁜 이름을 얻게 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악명을 갖기를 원한다. 어떤 형제들은 나를 분쟁의 야기자라고까지 부른다. 그런 고약한 말에 대하여 주님을 찬양한다. 우리는 좋거나 멋있으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 주 예수님은 이 땅에 계셨을 때 항상 좋기만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제사장이 되려면 수치를 참는 것을 배워야 한다.

 

히브리서 13장 13절은 우리에게, 영문 밖에 나가서 그분의 능욕을 짊어지라고 말한다. 이것은 주님의 수치를 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쁜 이름이나 악한 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만일 우리가 부끄러움을 감당할 만큼 충분히 담대하지 못하다면 제사장 직분 안에 있을 수 없다. 제사장이란 긴 머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 즉 자기 영광이 없는 사람이다. 참된 제사장이 되는 것은 다소 다른 사람들의 경멸을 받는 원인이 될 것이다. 특별히 이 나라에서는 그러하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즐거움과 영광을 추구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서는 세상으로부터의 분별과 자기 영광의 부인(否認)만 빼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말하면 그들은 화를 낸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영광을 부인하고 비난을 참음으로써 제사장 체계를 위한 참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나실인의 헌신에서의 세째 항목은 죽은 것에 의해서, 특별히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의 죽음에 의해 부정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천연적인 애정을 대표하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들은 우리를 죽게 만드는 도구일 수 있다. 아주 쉽게 죽이는 우리의 천연적인 애정으로부터 우리는 분리되어야 한다. 주님과 우리의 일은 주님과 우리의 일이다. 그것을 천연적인 애정에 속한 어떤 것과 관련시켜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게 관련된다면 우리는 즉시 죽게 된다.

 

왜 오늘날 제사장들과 왕으로 태어난 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기능을 잃고 있는가? 그것은 다만 이 세 가지, 땅에 속한 기쁨이나 오락, 자기 영광, 타고난 애정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참된 제사장 체계의 위치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이 모든 일들로부터 분리되도록 우리 자신을 자발적으로 주님께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우기 주님의 말씀은 영적인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분명하다. 민수기 6장 9절은 만일 어떤 사람이 갑자기 여러분 곁에서 죽으면 여러분은 부정하게 된다고 말한다. 누구든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그들에 의해서 죽게 된다면 모든 분별의 날들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천연적 애정을 이겨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느날 교회에서 우리 옆에 서 있던 한 형제가 갑자기 죽는다. 나는 그가 육체적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그로 인해 영향을 받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로 하여금 그의 사망을 당신에게 전하지 못하게 하라. 사탄은 바로 사망의 근원이다. 그래서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죽음을 퍼뜨리기를 좋아한다. 교회 생활 가운데 있는 많은 형제 자매들이 한두 명의 죽은 지체에 의해 약하게 된 일이 있다. 그런 영적 죽음의 악취를 느끼거나 냄새 맡을 때마다 우리는 달아나야 한다. 이것이 나실인의 헌신에 있어서의 네번째 항목이다.

 

여러분은 쓰레기통을 들여다보기를 좋아하는가? 어떤 사람의 집이 아무리 좋더라도 쓰레기통은 반드시 있는 법이다. 왕의 궁전에라도 쓰레기 통은 있다. 우주에도 역시 쓰레기통은 있다. 지옥은 바로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쓰레기를 담는 우주적인 쓰레기통이다.

 

어떤 지방 교회가 아주 놀랍다고 말하지 말라. 모든 지방 교회는 다 쓰레기통을 갖고 있다. 여러분이 내 집에 온다면 쓰레기통의 냄새를 맡고 즐기겠는가? 아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어떤 지방 교회에 갈 때 거실로 가지 않고 쓰레기통으로 간다. 좋은 것들을 맛보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훈련하지 않고 쓰레기통, 즉 잡담, 비평, 불평을 즐기는 데 자신을 훈련하고 있다. 마침내 우리는 약해진다. 이러한 소극적인 일들을 접촉할수록 우리는 기도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무감각해진다. 이런저런 일에 대한 수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약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갑자기 우리 옆에서 죽는다면 우리는 도망쳐야 한다. 그 죽은 지체들로부터 달아나라.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영도 죽게 될 것이다.

 

땅에 속한 즐거움, 자기 영광, 천연적인 애정, 다른 사람의 돌발적인 영적 죽음을 모두 정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사장 체계가 파괴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오늘날의 상황이 정상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오늘날의 상황이 정상이라면 나실인의 원칙이 적용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타락의 시대를 왕국의 시대로 바꿔놓은 사무엘처럼 우리는 나실인이 되기를 자원해야 한다. 구약 시대를 신약 시대로 바꾸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한 것은 침례자 요한 같은 나실인이었다. 이 마지막 날 이 시대를 또 다른 시대로 전환시킬 사람들이 또한 있을 것을 나는 믿는다.

 

오직 나실인들만이 주 예수를 다시 오시게 할 수 있다. 오늘날의 기독교에 의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지만, 땅에 속한 즐거움과 자기의 영광과 천연적인 애정과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갑작스런 영적 죽음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자신을 분리시키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때 그들은 이 타락의 시대를 왕국의 시대로 전환시킬 오늘날의 나실인들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님을 다시 모셔올 것이다.

 

우리는 나실인의 이 원칙을 주님께 가지고 가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제사장들과 왕들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오늘날의 타락 아래에서, 출생에 의한 이런 임명은 역사하지 않는다. 나실인의 규정인 옆문이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들을 주님께 빌려 드려야 한다.

 

그분의 행정을 위한 영적 인원의 부족 때문에 주님은 오늘날 매우 어려우시다. 주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를 빌어 가실 수 있도록 그분에게 우리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나실인의 규정만이 오늘날의 비상 사태에 대처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땅에 속한 모든 즐거움과 자기 영광과 천연적인 애정과 갑작스러운 영적 사망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신을 분리할 사람들을 부르고 계신다. 누가 개척자들이 되겠는가?

 


위트니스 리
[제사장 직분, "나실인의 원칙",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