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만니 형제님 조카 손녀의 간증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7:14)
1960년대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대륙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금 용광로의 불이었다. 나의 외조모님인 니자매님은 젊었을 때 연경대학을 졸업하여 평생토록 니형제님의 현숙한 내조자가 되었다. 외조부님(니 형제님)께서 투옥된 후 외조모님도 투옥되어 심문을 받았었고 출옥한 후에도 여전히 감시를 받았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외조부님으로 인해 그녀는 '반혁명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았다. 외조모님의 몸은 매우 좋지 못했고 아주 심한 고혈압에다, 고혈압으로 인한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시종 그녀는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을 앙망하며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1966년 여름 어느 날 그녀는 한 작은 방으로 끌려 들어가 한 무리의 홍의병들에 의해 밤낮으로 온갖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밖에 서 있던 우리들은 가죽띠로 몸을 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것은 마치 우리 마음을 치는 듯했다. 또 욕설을 퍼붓는 소리와 위협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우리는 외조모님이 입을 열어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을 듣지 못했다. 얼마 후 외조모님은 풀려났는데 그녀의 눈을 청색빵과 같이 불어 터졌고 몸의 여러 곳에도 상처가 나 있었다.
그 기간 동안 그녀는 여러 개의 안경이 깨졌고,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인격마저도 무시당했다. 수차 그녀는 사람들에게 희롱 당하며 길가로 끌려 다녔다. 그녀는 다른 두 노자매와 함께 강제로 두 손을 높이 들어 손에 신을 들고 머리에는 종이로 만든 뾰족 모자를 쓰고 가슴에는 명패를 달고 사람들에게 욕설과 능욕을 들으며 장시간 가만히 서 있는 벌을 받았다. 그 목적은 그녀들로 하여금 신앙을 포기하고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몇 시간 동안 그 세 자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홍의병들은 하다 못해 그들 하나 하나에게 '너희들은 그래도 너희 예수를 믿겠느냐?'라고 물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믿는다'라고 했다. 홍의병들은 그들에게 화를 내면서 땅에 있는 구두짝을 들어 그들의 몸과 머리에 던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 너희의 화강석같은 머리로 너희 하나님을 만나 보라'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모든 환난 중에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고 견고히 설 수 있도록 그녀들에게 힘을 주셨다. 그 일 후에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핍박을 말할 때 기쁨이 충만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치욕을 당하기에 합당한 사람들이라' 홍의병들은 모든 성경과 찬송가를 집 구석구석에서 찾아내어 가져갔다. 그러나 외조모님은 온갖 방법으로 몇 권을 감추어 두었다. 한 번은 어린애들이 지붕 위에서 놀다가 지붕 밑에 감추어 둔 성경 두 권이 발견되어 심문을 받았었다. 주님을 믿은 후 나는 큰 부엌 뒤에서 작은 성경 한 권을 발견하여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도 외조모님이 숨겨 놓은 것이었다.
성경이 매우 귀했던 시대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이 작은 성경은 나에게 너무나도 진귀한 것이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외조모님은 하루에 두 번씩이나 뒷골목을 청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외조모님은 감옥에 갇히지 않았지만 그녀는 감옥에 있는 죄수보다 더 비참하였고 치욕과 잔해를 받았다. 길가에 다니는 사람들과 어린아이들까지도 제멋대로 그를 때리고 그녀에게 침을 뱉을 수 있었다. 이는 그녀가 모든 사람이 미워하는 '반혁명분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비판하는 대모임이 마친 뒤 외조모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4:9). 성경은 벌써부터 나의 운명을 결정지어 놓았다"고 하셨다. 모든 핍박 중 그녀는 인신공격을 받은 자리에서 항상 묵묵히 쉬지 않고 기도했다.
시종 그는 주님을 의지하여 굳게 섰고 주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날이 거듭되고 해가 거듭될수록 그녀를 본 사람들은 그녀에게 '흰머리 노파야!'라고 외쳤다.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은색머리의 노파가 자신과 남편의 신앙을 위해 감시를 당하고 중노동을 하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좋은 간증이 되었다.
1970년 내가 농촌으로 강제노동을 하러 갈 무렵에 (그 때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다 농촌으로 내려가 농민이 되어야 했다) 외조모님은 나를 위해 매일 기도했다. 1971년 봄 내가 상해를 떠나기 전 외조모님은 눈물을 흘리면서 "주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보배로운 구주이시다. 어찌하든지 너는 주님을 굳건히 따라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농촌에 있는 동안 나는 주님의 놀라운 인도와 크나큰 은혜를 받았는데 나는 이것이 외조모님의 중보기도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1952년 외조부님(워치만 니)이 감금되기 전 그는 교회 일로 홍콩에 가신 적이 있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은 외조부님에게 대륙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분명했고 대륙으로 가서 형제 자매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리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이 그를 위해 정한 길 - 나의 앞길은 들림받는 것이 아니면 순교하는 길 - 에 대하여 매우 분명했다. 홍콩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그는 붙잡히고 상해의 제람교 감옥에 투옥되었다. 1967년 15년의 형기가 차자 정부는 그에게 신앙을 포기할 것을 공개적으로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외부 사람들에게 워치만 니가 신앙을 포기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이 그에게 또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주님은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 보배로우시다.
주님에 대한 충성 때문에 그는 '인간의 자유'를 포기하였다. 감옥에서 15년형을 마치고서 그는 기꺼이 주님을 위하여 죄수가 되려고 했다. 그때의 공개적인 태도 표명의 불사는 더 큰 핍박을 가져왔다. 이러므로 외조부님은 두 불량배 형사범과 함께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들의 임무는 니 형제님으로 하여금 신앙을 포기하게 하는데 있었다. 니 형제님을 더 심하게 학대할수록 그들은 더 큰 공을 세우게 되어 있었다.
옥중에 있는 어느 난우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외조부님의 솜으로 만든 조끼가 그들에게 의해 여러 조각으로 찢겨졌다고 한다. 외조부님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표명함으로서 더 많은 고통을 당했다. 외조부님의 형기가 차도 그들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들은 비밀리에 니형제님을 상해 근교에 있는 청포현 청동노계 농장으로 이감하였다. 이 기간 동안 외조모님은 외조부님을 한 번 볼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소식이 끊어져 수 개월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 후에 알게된 것은 외조부님이 더 고통스러운 장소인 안훼이의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백모령 노계농장으로 이감되었다는 것이었다.
1971년 11월 외조모님은 중풍으로 돌아가셨는데 이 일 전에 외조모님은 외조부님과 편지하도록 약속했었다. 한동안은 편지 연락조차도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그 당시 외조부님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외조모님은 중풍에 걸릴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정확히 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것 또한 세상에 있을 때 그녀가 주님께 구한 바였다. 그녀는 매우 심각한 고혈압으로 인한 심장병을 앓았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중풍으로 죽을 것을 알았으므로 그녀는 중풍이 발생한지 얼마 안되어서 빨리 주님께 갈 수 있기를 바랬다. 이렇게 될 때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장시간의 고통도 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외조모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 갈망을 이루어 주신 것으로 인해 감사드린다. 중풍으로 혼미케 될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시간은 정확히 삼일이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외조모님은 매우 평안했으며 아무 고통없이 주님께 가셨다. 외조모님이 돌아가신 후 우리는 외조부님에게 즉시 그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이는 외조부님의 심장이 매우 쇠약하므로 그 소식으로 인한 타격을 감당치 못할까 보류했던 것이다. 일 개월이 지난 후에야 외조부님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러나 외조모님의 병환이 위독해질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외조부님은 예감이 있으셨는지 편지에서 항상 외조모님의 건강을 물어 왔었다. 편지에서 외조부님은 일찍 감옥에서 나와서 외조모님과 함께 있으면서 병중에 있는 그녀를 섬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큰 이모 할머니(니 형제님 부인의 큰 언니)와 손녀들이 함께 1972년 안훼이로 외조부님을 만나러 갈 때 그의 심장병이 극히 악화된 것을 알았는데 외조모님의 별세는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왜냐하면 그 때 외조부님과의 왕래가 유일하게 끊어지지 않은 사람은 바로 외조모님이었기 때문이었다. 사후에 같은 방에 있던 한 난우의 말에 의하면 외조부님은 벌써부터 형기를 마치고 출감하여 외조모님과 함께 있을 갈망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외조모님의 건강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편지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내 형기는 내 아내의 생명과 경기를 하는 듯하다. 만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출감할 수 있다면 내가 그를 잘 섬기겠노라. 이는 그가 나로 인하여 너무 많은 고통을 당했기 때문이다"
외조부님은 투옥되기 전 교회 봉사를 위하여 전국각지로 바삐 다녔었다. 투옥된 후 순식간에 이십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다. 그 기간 동안 그들 부부가 함께 있었던 날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외조부님이 붙잡힌 후 그들은 사람들이 듣기를 좋아하는 많은 죄명들을 조작하여 그를 무고히 음해하였다. 당시 많은 형제자매들이 그들에게 속았다. 그러나 외조모님은 그를 제일 잘 알았기 때문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에 관해 그들이 말한 일들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주님을 위하여 그는 사람으로서는 받을 수 없는 치욕을 수없이 당했다. 제람교 감옥에 갇혔을 때 외조모님은 매월 한 번씩 소량의 음식과 일용품을 외조부님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청동 농장으로 이감된 후 외조모님이 그를 한 번 만나 보았지만 그 후로는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다. 외조모님의 별세로 인하여 외조부님은 매우 괴로워했다. 같은 감옥에 있던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는 수일 동안 애통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4월 20일 큰이모 할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외조부님은 "나의 기쁨을 여전히 지켰노라"고 말했다. 수 년간의 압박과 핍박도 그를 낙심케 하지 못했다. 이는 그가 앙망하는 분은 영원히 그를 낙심케 하지 아니하시는 우리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
1972년 6월 우리는 농장으로부터 외조부님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큰 이모할머니와 농장으로 달려 갔을 때 외조부님은 이미 화장되었고 그의 유해밖에 볼 수 없었다. 그의 한 난우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시 그의 심장병은 매우 심하게 발작하여 위독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사십리 밖에 있는 농장병원으로 그를 경운기에 실어서 농군들이 쓰는 모자 하나를 씌우고 끌고 갔다. 그것은 건강한 사람조차도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진동을 가장 피해야 할 심장병환자를 그렇게 데려갔다. 바로 이렇게 외조부님은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별세하시게 되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의 베개 밑에는 아주 떨리는 손으로 쓴 몇 줄의 글을 담은 쪽지가 있었다. 그 말씀은 이러하다.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한 이것은 우주 가운데 최대의 사실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죽노라. 니토생』
농장 간부가 이 쪽지를 우리에게 보여줄 때 나는 주님이 이 말씀을 내 마음에 기억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노계 농장간부는 그가 많은 노트에다 소위 '반공일기'를 썼다고 했다. 이것은 옥중에서 진리에 대해 그가 새롭게 얻은 빛이었다. 하나님이 특별히 그것들을 보존하시지 않고는 그 중요한 원고들은 옥중에서 나올 길이 없을 것 같다.
옥중에서 한 난우는 그의 여러 가지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는데 할아버지가 아직 세상에 있을 때 끊임없이 그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였고, 할아버지가 별세한 지 얼마 안되어 그가 구원을 받고 주님께로 돌아왔다고 말해주었다.
외조부님은 돌아가셨다. 그러나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여 피에 젖은 면류관을 가지고 주님께로 갔다. 하나님은 그의 마지막 소원인 살아서 아내와 함께 있는 소원은 이루어 주시지 않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더 좋은 것 - 그들이 주님 앞에서 함께 만나는 것 -을 예비하셨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히11:13)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였느니라"(히11:16)
그들은 많은 순교자들과 같이 세상을 떠났으나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부르신 한 무리의 이기는 자들이요, 이 세상에 있기에 합당치 않은 사람들이다. 지금 그들은 안식에 들어갔으나 그들의 기도와 열매는 계속 끊임없이 하나님께 열납되고 있고 끝이 없는 효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발자취는 더욱 우리로 하여금 충성스럽게 주님을 향하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있다.
워치만니 형제님 외손녀의 간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