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 『주관적이지 않아야 함』
교회
Hannah , 2009-03-14 , 조회수 (3351) , 추천 (0) , 스크랩 (0)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 『주관적이지 않아야 함』

 

 

주관적인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 큰 어려움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는 사람이 주관적이면 사역을 잘해 나갈 수 없다.

 

그러면, 주관적인 것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관적이라는 것은 자기의 의견만을 고집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기도 전에 이미 의견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고 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의견만을 고수한다. 바로 이것을 주관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주관적인 것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고 바뀌기가 쉽지 않다. 처음부터 자신의 의견을 붙잡고서 계속 이 의견을 고수해 나가는 것을 주관적인 것이라고 한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도 전에,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이유를 표명하기도 전에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이 말씀하신 후에도,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후에도, 다른 사람이 이유를 밝힌 후에도 그의 이러한 선입관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주관적인 것이다.

 

주관적이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의 자아가 파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자아가 파쇄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상당히 강경한 주관이 있으며, 이 주관은 버리기가 쉽지 않고 고침받기가 쉽지 않다.

 

 

 

주관적인 것이 낳는 어려움은 무엇인가? 주관적인 것이 주는 손실은 무엇인가? 만일 한 형제나 자매가 주관적이라면, 그는 다른 사람의 말조차도 들을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줄 아는 것으로부터 주관적이지 않게 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오직 당신의 내면이 비워져 있어야만 주님의 말씀이 들어갈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말이 들어갈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주관적인 사람이라면, 당신에게는 많은 어려움이 있게 된다. 주님의 일을 하는 데에는 기본적인 요구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서 다른 사람의 사정이나 어려움을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었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없는 것은 주님의 사역자에게 있어서 하나의 큰 어려움이다. 남의 말을 들을 수 없는 가장 주된 원인은 바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당신의 내면에 쌓여 있는 것이 너무 많고, 당신이 깨뜨릴 수 없는 의견과 사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자신의 말만을 계속하게 되며, 자신의 사정으로만 꽉 차 있다. 따라서 어떤 형제나 자매가 당신에게 와서 그의 무거운 짐과 그의 사정을 당신 앞에 내려놓으려 할 때에, 당신은 반나절을 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고, 아주 오랜 시간을 듣고 있어도 파악해 내지 못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것이 주관적인 사람의 어려움이다.

 

 

 

주관적인 사람에게 또 하나의 어려움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것을 배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내면에는 어떠한 확신과 분명함이 있어서 모든 것이 다 분명하며, 그의 내면에는 어떠한 규정이 있어서 어떤 것도 다 그렇게 규정하며 그의 내면에는 어떠한 의견이 있어서 무엇에나 다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당신이 그에게 어떤 것을 조금이라도 배우게 하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역하러 나오고자 하는 젊은이에게 당신이 어떤 일을 조금 배우게 하려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약을 먹이는 것처럼 어려워서 그에게 억지로 넣어 주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는 의견으로 가득 차 있고, 주장과 방법으로 가득 차 있으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비록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이 때에 그에게 어떤 것을 가르치는 것은 그에게 약을 먹이는 것보다도 훨씬 어렵다.

 

만일 사람이 밥을 먹는 것조차도 넣어 주어야 한다면, 그가 일생 동안 밥을 얼마나 먹을 수 있겠는가? 당신은 어떤 형제를 만났을 때 마음속으로 그에게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형제여, 당신 같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배워야 한다면 일생 동안 얼마나 배울 수 있겠는가?』

 

주관적인 사람의 가장 큰 어려움과 손실은 바로 배울 수 없다는 데 있다. 당신이 그로 하여금 배우도록 할 때에는 항상 싸우는 것같이 하여 그를 쳐서 엎드러뜨려야 그가 조금 배우게 된다. 그러나 다음번에도 이와같이 해야 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큰 손실이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요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다른이들의 충고를 선뜻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는 주관적이지 말아야 한다. 형제 자매여, 우리가 손에 넣은 도움은 각 방면에서 온 것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당신은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한 달에 한 가지를 배우고, 육 개월에 한 가지를 배우고, 심지어 일년에 한 가지를 배운다면 당신은 일생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는가?

 

주관적인 사람은 갈수록 배우기가 더 어려우며 갈수록 더 주관적이 되어 간다. 이 주관적인 것은 실제로 너무도 큰 어려움이다.

 

주님의 사역자는 하나님의 길에서 마땅히 견고하고 정직하며 요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볼 때, 만일 그 자신의 의견과 견해와 그가 규정한 것이 그렇게 견고하여 요동하지 않는다면, 그가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너무도 적으며 일생에 있어서 그리 큰 쓸모가 없다.

 

우리는 한면으로 주님 앞에서 견고하여 요동하지 말아야 하지만, 또 한면에서는 주관적이어도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마땅히 주관적이지 않기를 배워야 하며 하나님께서 자유로이 움직이시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배우기가 쉽지 않다.

 

만일 당신이 주관적인지 주관적이지 않은지를 알고 싶다면, 단지 당신이 어떤 것을 배우는 데 있어서 빠른지 느린지, 그것을 배울 수 있는지 없는지, 영에 속한 일에 있어서 항상 배울 수 있는지 없는지, 많이 배울 수 있는지 없는지를 보기만 하면 된다. 배우는 데 있어서의 방해물은 바로 주관적인 것이다. 주관적인 것은 당신에게 영향을 주어서 당신으로 하여금 배우지 못하게 한다.

 

영적인 일에서 진보하는 데에는 하나의 기본적인 요구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여는 것이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께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열리고, 우리의 사상이 하나님께 열려야 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연다는 것은 주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영을 활짝 여는 것은 주관적이지 않은 것보다 더 깊어야 한다. 그러나 첫단계는 언제나 주관적이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주관적이면 하나님께로의 문이 닫혀 버린다. 주관적이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강경하지 않고 배울 수 있으며 하나님께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쉽게 인상을 받지 못한다. 그들로 하여금 어떤 인상을 받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채찍과 지팡이를 사용하셔야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쇠망치를 사용하여 그들을 치셔야만 한다. 하나님의 눈이 움직이면 즉시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는 공과를 배워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말과 노새 같아서 굴레나 채찍 없이는 깨닫지 못하는데, 이것이 바로 주관적인 것이다. 주관적인 사람은 배울 방법이 없다. 하나님이 그와 다투시며 그를 막다른 길로 인도하시고 큰 장애를 만나게 하셔도, 그는 여전히 다투기를 고집하여서 하나님 앞에 그가 마땅히 배워야만 할 공과를 단번에 복종하여 배울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부드럽지 않고 온순하지 않으며 아주 강팍하고 강경하다. 그들이 사역에 있어서 큰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는 그들이 일생동안 배운 공과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공급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큰 어려움일 뿐만 아니라 커다란 손실이다.

 

 

 

주관적인 사람에게 있는 또 하나의 어려움은 그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를 만질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줄도 모른다. 주관적인 사람은 모두 북극과 남극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답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 그가 인도함을 받기 위해서는 상당한 부드러움이 요구되며 말을 잘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마자 즉시 일을 시작하는 것은 조금도 주관적이지 않다. 민수기 22장에는 발람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발람의 마음이 재물의 이익에 기울어졌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고 반드시 가야 한다는 주관적인 관점을 낳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한 차례, 두 차례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실 때까지 기도하였다.

 

사람이 일단 자신의 규정을 정해 버리면 하나님의 뜻을 알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길 위로 걸어 가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뜻이 있는 길에서 많은 때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고 즉시 출발할 필요가 있음을 보아야 한다. 많은 경우에 당신이 모든 길을 예비하여 가고자 하였는데 주님이 즉시 멈추라고 하시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만일 주의 영이 당신이 가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면, 당신은 즉시 정지할 수 있는가? 주관적인 사람은 정지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배운 사람은 결코 주관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배운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라」하시면 즉시 갈 수 있고 「멈추라」하시면 즉시 멈출 수 있는 정도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이 두 마디가 아주 간단한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주관적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데도 가기가 쉽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멈추라 하시는데도 멈추기가 쉽지 않다. 이것이 바로 어려움이다.

 

주관적인 사람들은 얼마나 힘을 소모해야 자신들을 밀어서 움직이게 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면 또다시 그들을 멈추게 할 수가 없다. 하나님 앞에서 배움이 있는 사람은 이렇지 않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아주 부드러워서 하나님이 움직이라 하시면 움직이고 하나님이 움직이지 말라 하시면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만이 비로소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중한 채찍이 있어야만 비로소 움직인다. 그가 한 번 움직인 후에는 일평생 그를 멈추게 할 수 없으며, 그는 언제나 줄곧 이렇게 계속하기만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또다시 엄한 손으로 그를 치셔서 그로 하여금 멈추게 하실 수 있다. 그의 주관적인 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쉽게 알지 못하게 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기도 어렵게 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것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이것은 그가 결코 주관적이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만일 주관적인 사람이었다면 이삭을 제물로 드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거기에는 많은 말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본래 나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나는 아들을 얻을 생각도 없었고 이스마엘로 만족해 했었는데, 당신이 내게 아들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나와 사라는 조금도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모두 당신이 하신 일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시고서 어떻게 또 이삭을 드려 번제물로 삼으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형제 자매여! 만일 주관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이 이와 같은 도전을 받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이 요구를 거절하기 위해 무슨 이유든 만들어내고야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매우 단순했기 때문에 그에게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실 것을 굳게 믿었다. 그가 자기 아들을 제단 위에 놓고 칼을 빼내어 죽이려고 할 때에,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아들 대신 제물로 바칠 수양 한 마리를 예비하셨다(창 22:10, 13).

 

만일 아브라함이 주관적이었다면, 그는 어려움에 처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언제는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시고서 이번에는 저렇게 하라고 하시니 그 뜻을 참으로 모르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주관적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제단에 올라가기가 어려운데 일단 제단에 올라가서는 또한 거기서 내려오기가 어렵다. 제단에 올라가는 데에도 몇 년을 소비해야 했지만 일단 올라가서는 도무지 고집부리며 내려오려고 하지를 않는다.

 

주관적인 사람은 순종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뜻을 따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멈추라고 명령해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주관적인 사람은 결국 마지못해 하나님께 순종하지만 그 순종은 여전히 자신의 힘에 의지한 것이다. 당신이 그를 데리고 오려고 해도 그는 돌아올 수가 없다. 하나님의 뜻은 그가 철회하도록 하려는 것이지만, 그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로 하여금 다시 거두어들이게 하는 것이지만, 그 자신은 거두어들일 수 없다.

한 가지 매우 특별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만일 당신이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안에 두어서 하나님의 뜻은 바꾸면서 당신의 뜻은 바꿀 수 없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할 길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큰 어려움이다. 어떻게 하면 이 야생마를 온순한 말이 되게 할 수 있겠는가? 야생마는 탈 수가 없으며, 야생마를 훈련시키는 것 또한 상당히 어렵다.

 

야생마를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말을 탈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말에 껑충 뛰어 올라타고는 말이 뛰고 발악하게 하여 아주 지칠 정도로 달리게 할 때에야 비로소 말을 잡을 방법이 있게 된다. 말 등에 탄 사람의 유일한 방법은 말 등에서 내려오지 않는 것이다. 몇 십 리든 몇 백 리든 계속 달리게 하여 말이 이 주인에게는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야 말은 말을 잘 듣게 된다. 이러한 기수는 말들이 아주 정확하게 달리게 될 정도로 야생마를 훈련 시킬 수 있다.

 

가장 작은 원 한가운데에 기둥을 꼽아 놓고 끈으로 말을 기둥에 매어 두면, 말이 조금만 한쪽으로 치우쳐 달리거나 조금만 잡아 당겨도 끈은 끊어진다. 말이 조금만 달려 나가도 그 끈은 똑바르게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말들은 꼭 알맞게 달릴 줄 알며, 원을 따라서 몇 백 바퀴도 돌 수 있는데 그 반경은 아주 길다. 이 정도까지 달릴 수 있으면 문제가 없다. 이후로는 어느 때를 막론하고 이 말들이 작은 굴을 지나도록 해야 하며 또 큰 굴을 통과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말은 언제나 당신을 감히 거스르지 않게 된다.

 

형제 자매여, 주님이 우리 야생마들을 확실하게 훈련시키시는 것은 아주 큰 일이다. 주님은 마치 야생마를 훈련시키듯이 큰 힘을 들여서 우리로 그분께 순복하게 하신다. 훈련을 받은 야생마의 실패는 바로 그의 주관적인 것에 기인한다. 잘 훈련된 말은 위에 탄 사람이 조금만 움직여도 얼마를 달려야 할 지를 알고 달린다.

 

시편 32편 8절과 9절은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아주 의미 심장하다. 우리는 말이나 노새 같아서는 안 된다. 무지한 말이나 노새도 어느 단계까지는 훈련될 수 있어서 주님 뜻대로 움직일진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서 인도를 받을 때에 응당 길들인 말보다 훨씬 빨라야 한다.

 

말이 그렇게 훈련 될 수 있는데도 하나님은 오히려 말이나 노새를 무지하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말이나 노새는 주인이 그의 몸 위에서 최소한 한 번 때리거나 혹은 움직이거나 고삐를 잡아 멎게 해야만 주인의 뜻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눈을 바라보기만 해도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지만 무지한 노새와 말은 이것을 할 수가 없다. 다윗은 그의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의 눈으로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원문 참조).

 

주님의 눈이 한 번 움직이자 마자 그는 즉시 그 뜻을 알았다. 주의 손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주의 눈이 한 번 움직였을 뿐인데 그는 즉시 그 뜻을 안다. 우리는 특히 여기서 말하고 있는 눈을 주의해야 한다. 주관적인 사람은 여기에서 조금도 유용함이 없다. 형제 자매여, 결코 사람 됨됨이의 문제나 사람의 성격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지 말라. 만일 당신의 인격이 주관적이라면,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 객관적이 될 수 없다. 만일 당신의 일생이 모두 다 주관적이라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훈련된 말처럼 될 수 있다면 만족스럽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무지한 말이나 노새로서는 아직 충분치 않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눈이 어디를 바라보면 우리는 즉시 거기로 갈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르러야 한다. 주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안다면, 우리는 즉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주님이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신지를 안다면 우리는 즉시 멈추어야 한다. 사람이 만일 자신의 의견이나 견해나 주관적인 것을 가지고 있으면, 당신이 그로 하여금 주님 앞에서 주의 영을 기다리게 하여 언제든지 주님이 움직이라고 명하실 때 움직이고, 멈추라고 명하실 때 멈추게 하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많은 때에 주님이 당신에게 멈추라고 요구하시지만 당신은 멈출 수가 없고 멈출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 내면이 자아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자아를 바깥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준행할 때에도 반드시 자기 자아를 바깥에 두어야 하며, 주님이 가라 명하시면 가고 멈추라 명하시면 멈추어야 한다. 이 때 우리의 자아는 언제나 바깥에 있다.

 

주관적인 사람은 자아를 내면에 두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멈추라고 명하셔도 멈출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두 가지의 어려움이 있는데, 하나는 무엇을 시작할 때에 즉시 움직일 수 없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일을 계속해 나가고 있을 때에 즉시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큰 어려움이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주관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우리 몸에서 쉽게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아는 문제는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됨됨이의 어떠함에 달린 문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얘기해 준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코 이런 일은 없다. 오직 옳은 사람만이 옳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사람 됨됨이가 옳지 않으면 방법이 옳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당신이 어떤 류의 사람인가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아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에 방법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아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만일 사람이 옳지 않다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에 관하여 모든 것을 배웠을지라도 여전히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주관적이지 않은 사람,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은 사람, 자신의 주관적인 것이 파쇄된 사람, 자신의 의견이 없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눈을 한 번 움직이시기만 해도 즉시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순종하여 하나님에 의해 움직여지고 멈추어질 수 없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종이 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종은 어떤 환경 아래서도 능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자이다. 외적으로 아무리 심한 요구가 있고 아무리 심한 말을 듣더라도 그는 상관치 않는다. 그런 것들은 그를 방해하는 일이 될 수 없다. 하나님에 의해 쉽게 변화되고, 하나님에 의해 쉽게 멈춰지며, 하나님에 의해 쉽게 인도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역자에 대한 기본적인 요구이다. 오직 이렇게 될 때만이 사람들을 그분의 길로 이끌 수 있다.

 

 

 

주관적인 것에 관해서 우리가 좀더 말해 두어야 할 점은, 오직 하나님께 다룸을 받아서 주관적이지 않게 된 사람만이 주님에 의해 이끌려 다른 사람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관적인 사람에게 결코 다른 사람을 다루는 일을 맡기지 않으신다. 주관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게 할 수도 없다. 만일 주관적인 사람을 사역 가운데 놓아두고 그로 형제 자매들을 인도하게 한다면, 결과적으로 주님의 뜻은 아주 일부분이 되고 그 자신의 생각이 매우 많이 첨가될 것이다.

 

주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의 말을 듣게 만들려고 한다. 만일 어떤 사역자가 하나님에 의해 다른 사람이 그의 말을 듣게 하려는 의도가 없기까지 이끌리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쓸 수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다루심을 받고 파쇄되어서 결코 어떤 사람이든지 우리의 말만을 듣기를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개인의 생활이나 견해를 간섭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든 간섭하려 들어서는 안 되며 어떤 일이든지 간섭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반드시 이런 정도까지 하나님에 의해 인도되어야만이 하나님께 쓰임받아 하나님의 권위를 표현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의 권위가 그의 몸에 있는데도 오히려 그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또 이 하나님의 권위를 사용하여 하나님 백성 가운데의 대인이 되려 하거나 또는 선생이 되려 하거나 아버지가 되려 할 것이다.

 

우리 주님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마 20:25-26)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주장과 요구가 없고 사사로이 특별히 좋아하는 일이 없을 정도로 그분께 파쇄되지 않은 사람을 사용하실 수 없으며 그런 사람을 신뢰하실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그분의 양무리를 그의 손에 맡기신다면, 그는 양들을 모으기는 커녕 도리어 흩어지게 하기 쉽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그분의 양무리를 맡길 수 없으며 그들 손 안에 놓아두실 수 없다.

 

만일 사람이 자기 뜻대로 길을 가고자 한다면,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길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할 방법이 없다. 바울은 아주 부드러웠다. 그 자신이 독신이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동정의 몸을 지키는 것이 결혼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알았지만 종래 결혼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았다. 형제 자매여, 우리의 형제 바울이 얼마나 제한을 받았는가를 보라. 만일 바울이 주관적인 사람이고 그의 주관적인 것이 파쇄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그는 모든 형제 자매가 독신으로 동정을 지켜야 하고 모든 사람이 결혼하지 말아야 하며 결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주관적인 사람은 이렇게 하기가 쉽다. 그러나 여기 이 사람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옳다고 여긴 것을 지켰으며 또한 그가 지킨 것의 가치를 알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 외의 길을 가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이 육신의 고난을 면하기를 원하였지만 또한 다른 사람이 결혼하는 것을 찬성하였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강하였지만 한면에서는 아주 부드러웠다. 어떤 사람이 시집가고 장가드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말할 때에, 비록 바울은 독신자였지만 그는 시집가고 장가드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마귀의 가르침이라고 말하였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이러한 위치에 서기를 배워야 한다. 당신은 결코 당신 개인의 그러한 감정으로 인하여 하나의 진리를 지나치게 큰 위치로 밀어 놓아서는 안 되며, 또한 당신 개인의 느낌에 따라서 다른 사람의 입을 막아서도 안 된다. 당신의 느낌이 하나님의 진리를 좌우하지 않을 수 있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을 이끌어 주님을 따르게 하는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당신의 주관적인 것이 완전히 파쇄되어야 하는 것은 사역에 있어서 기본적인 조건이다. 당신의 주관적인 것이 그렇게 강한데도 하나님이 만일 그분의 사역을 당신에게 맡기신다면, 당신은 어느 정도까지 일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다. 당신이 멋대로 일하고 당신 마음대로 말한다면, 그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간섭하지 않기를 배워야만 하며 결코 우리의 주관적인 것으로 어떤 사람이나 일을 간섭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분이 사람에게 주신 자유 의지를 간섭하지 않으시고 존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놓여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염검을 사용하여 사람이 먹지 못하도록 막지는 않으셨다. 만일 창세기 3장의 화염검이 창세기 2장 안에 있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지키게 하셨더라면 사람은 영원히 범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쉽게 이렇게 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하지 않으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먹는다면, 그것은 당신의 일이다.

 

우리는 자신의 뜻으로 다른 사람을 제어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언제라도 당신은 다른 사람이 당신의 말에 복종하기를 원해서는 안 되며, 당신이 선포한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다른 사람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부담이 있어 형제 자매들에게 말하였는데, 그들이 만일 당신의 말을 순종하기를 즐겨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당신의 말을 철회할 수 있다. 절대로 당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지 않으셨으니 우리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을 배역하려 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허용하신다. 만일 사람이 당신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기를 배워야 하며 억지로 당신 말을 듣도록 요구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이 공과를 배웠다면, 당신은 자연스럽게 사람들로 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의 말을 듣도록 강요하지도 않고 우리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도 않으며 우리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고 억지로 요구하지도 않는다. 비록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능을 발견했을지라도 다른 사람이 우리의 기능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도 강요하지 않으셨듯이 우리 역시 어떤 사람에게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결코 주관적일 수 없으며 결코 어떤 사람에게든지 당신의 말을 듣도록 요구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조심스럽게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당신의 책임은 더욱더 커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한 번 잘못 말하면 당신의 책임은 실로 막중하다. 다른 사람이 당신의 말을 듣는다고 해서 당신이 기뻐하며 일이 끝났다고 여길 것이 아니다. 이 책임은 너무도 막중하며 이것은 너무도 큰 일이라는 것을 당신은 명심해야 한다.

 

만일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기꺼이 따르려고 하는데 오히려 당신의 길이 바르지 않고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 분명치 않다면 그것은 정말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 따라가는 소경만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두 소경이 모두 구덩이에 빠져 버리게 된다(눅 6:39). 좇아가는 사람만 넘어지고 인도하는 당신은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고 여기지 말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두 소경 모두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

 

쉽게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고, 쉽게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으며, 쉽게 다른 사람에게 이것은 이렇게 하고 저것은 저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해 줄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가르치는 사람이 이렇게 하면 배우는 사람도 이렇게 한다. 당신이 많은 사람의 교사가 되어서 그들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고 하면 결과적으로 두 사람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기꺼이 나의 말을 들으려고 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더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라고 말하기를 배워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백 이십 퍼센트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단지 칠팔십 퍼센트만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틀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엄중한 말을 쉽게 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엄중하지 못하며 자신만만해 할수록 우리는 굳게 설 수 없다.

 

물론 다른 사람이 당신의 말을 따르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이 당신의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기지 말라. 다른 사람이 당신의 말을 듣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사람들을 어느 정도까지 인도해야 하는가? 당신은 당신의 책임이 참으로 막중하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관적이지 않은 사람이 되기를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주관적인 것의 위험성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말에 순종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데 있다. 주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당신은 당신의 뜻이 다른 사람의 방향이 되기를 좋아하며, 당신의 의견이 다른 사람의 빛이 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의견이 다른 사람의 빛이 아니며 당신의 뜻이 다른 사람의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을 끌어 당신 앞서 가게 하지 않기를 배워야 하며, 다른 사람을 억압하여서 당신을 따르게 하지 않기를 배워야 하며 다른 사람을 억압하여서 하나님께 마지못해 순종하게 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형제 자매가 기꺼이 당신과 함께 걷고자 한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러나 형제 자매가 자기의 길을 선택할 때에는 그들로 선택하도록 내버려두라.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을 억지로 붙잡고 우리와 함께 가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가게 해야 하며 또한 오게 해야 한다. 하나님을 인식한 사람에게는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억지로 다른 사람을 강요하여 자신의 말을 듣고 따르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관적인 사람은 결코 이렇게 할 수 없다. 주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없으며 그 자신도 어떤 좋은 배움이 없다. 하나님도 사역에 있어서 결코 그를 신뢰하실 수가 없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미 모든 것을 스스로 정해 놓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찾아낼 수가 없다. 오직 부드러운 사람만이 하나님의 정하심을 찾아낼 수 있다.

 

얼마나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지 모른다. 주관적이지 않은 것을 배우지 못하고 자기의 의견과 자기 자신의 길만 있으며 자기의 뜻과 자기의 교리만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역이 놓여진다면, 교회는 즉시 분열 될 것이다. 교회가 나뉘고 갈라지는 것은 모두 사람의 주관적인 것 위에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개인의 일만을 할 수 있을 뿐 교회의 일은 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오직 개인의 봉사만을 알 수 있을 뿐 무엇이 몸의 봉사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껏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기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권위가 될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람의 권위 아래 순종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인도하도록 그들을 권위로 세우실 수 없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이 일을 특히 주의해야 한다. 젊은 형제가 함께 사역하러 나갈 때에 당신은 언제나 그를 한번 시험해 보아야 한다. 주관적인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 머리가 되려 하고, 또한 동시에 다른 사람의 머리도 되고자 하며, 항상 그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은 사람은 충성스럽지 않는 것도 아니고 말하지 않는 것도 아닌 어떤 상태가 있는데 그것은 그에게 충성이 있고 결코 다른 사람을 강요하려 하지 않으며 자기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한면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견고함을 얻지만, 다른 면으로는 결코 주관적이지 않고 자기의 주관적인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개개인 모두에게 하나님께 순복하거나 순복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일을 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 사람은 저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의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항상 다른 사람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기를 배워야 한다. 당신이 아주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선택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 항상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물어 보아야 한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시렵니까?』 사역을 할 때 우리는 그 길을 사람 앞에 놓고 각자가 길을 선택하게 해야 한다. 선택은 각 사람의 일이다. 어떤 일에 있어서든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선택하지 않기를 배우는 데에 힘을 다해야 한다.

 

 

 

주관적인 사람은 아주 사소한 일들에서 알아볼 수 있다. 주관적인 것은 일종의 성격과 습관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주관적인 것이 파쇄되는 공과를 배웠다면, 당신은 즉시 일상 생활의 크고 작은 많은 일들 속에서도 주관적인 것이 파쇄된 것을 분명히 볼 수가 있다. 주관적인 사람은 모든 일에서 주관적이다. 주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를 좋아하고, 의견을 내기를 좋아하며 사람들에게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고 명령하기를 좋아한다. 주관적인 사람은 어떤 일에서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안다.

 

젊은 사람이 주님을 섬기러 나올 때, 당신은 단지 몇 명의 형제를 그와 함께 두기만 해도 즉시 그가 주관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혼자 있을 때에는 당신이 그것을 알 수 없지만 그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에는 즉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주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어떤 음식은 좋아하고, 어떤 음식은 싫어하며, 어떤 옷은 입기 좋아하고 어떤 옷은 입기 싫어하며, 어떤 타입의 매트리스가 잠자기에 좋고 또 그렇지 않은지를 아주 부산하게 이야기하며, 이렇게 하는 것이 좋고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계속 주장한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단지 두 자매를 한 방에 같이 유숙시켜 보라. 그러면 어떤 자매가 주관적이고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다. 만일 두 자매가 똑같이 주관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면 머지않아 파탄에 이르고야 말 것이다. 한 자매만 주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그래도 함께 지낼 수 있지만, 두 사람이 똑같이 주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함께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지금 이후로 우리가 어떤 말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사역에 어려움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 사정이 생길 때에 우리는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만일 다른 사람이 우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억지로 우리의 의견을 그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상처를 받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아주 귀중한 의견을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쉽게 상처를 받는다. 이것이 주관적인 사람의 감정이다. 충성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많은 말을 여전히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남의 일에 상관하기 좋아하기 때문이거나 말하기를 좋아하기 때문만도 아니며 또한 온종일 부닥친 일마다 말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이 일에 있어서 반드시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만일 일에 부딪힐 때마다 가르침을 받지 않고 즉시 말해 버린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모든 사람의 선생으로 세우지 않으셨다. 어떤 사람은 습관적으로 말하고 습관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이것은 그가 주관적인 사람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 사람의 주관적인 성격이 부서지지 않는다면 결코 사역을 해나갈 수 없다.

 

주관적인 사람은 충성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충성된 사람은 다만 말해야 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다. 충성된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은 말하기를 좋아해서 말하는 것도 아니고 말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충성된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지 말에 대한 욕심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충성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거절당한다 해도 괴로워하지 않으며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주관적인 사람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주관적인 사람은 말하는데 욕심이 있어서 말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고 느낀다. 그는 어떤 일에 부딪히든지 즉시 말해 버리는 습관이 있다. 그는 말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 당신은 보았는가, 주관적인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은 그가 말하기를 좋아하고 의견 내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자신의 뜻이 많은 사람의 멍에가 되는데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의견에 순종케 하려고만 한다. 주관적인 사람은 자신의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무시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몹시 괴로워한다.

 

형제 자매여! 주관적인 사람과 충성된 사람은 전적으로 다르다. 우리에게는 충성된 사람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많은 때에 입을 열지 않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당신은 무엇이 충성이고 무엇이 주관적인 것인지를 반드시 분별해야만 한다. 주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일을 주관하길 좋아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말을 듣기를 좋아한다. 그는 많은 일에서 항상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는 이 일을, 그리고 저 사람에게는 저 일을 하도록 명령한다. 그는 자신의 방법이 첫째가는 방법이고, 가장 좋은 방법이며 자신의 길이 가장 정확한 길이어서 사람들은 모두 이 길로 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주관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와 다른 것을 견디지 못한다. 형제 자매여,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은 바로 주관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당신은 알아야 한다. 오직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다루심을 받고 당신의 주관적인 것을 처리받았을 때라야 비로소 당신은 큰 사람이 될 수 있다. 큰 사람 만이 자기와 같지 않은 사람을 참아낼 수 있다. 주관적인 사람은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해서 다른 사람이 그와 다른 것을 참아 낼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만일 기질이 똑같은 두 사람이 한 방 안에 놓여지게 되면 그 방에는 평강이 없다. 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하려는 의견이 있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또 다른 의견이 있어서 그 방은 다툼으로 가득하게 된다. 두 사람은 그 안에서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게 되고 거기에는 어려움만이 있게 된다.

 

때로 주관적인 사람은 모든 일들을 그의 손 안에 넣고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의 우두머리가 되려고 한다. 그래서 이 일은 이렇게 해야 하고 저 일은 저렇게 해야 된다는 규정이 그 속에 즉시 생기게 된다. 주관적인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간섭하기를 좋아하고 참견하기를 좋아하며 지배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이 바로 기본적인 어려움이다.

우리는 한 가지 일을 알아야만 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런 사람들에게 그분의 일을 맡기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주관적인 사람에게 그분의 일을 위임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 또한 이러한 사람을 쓰실 수가 없다. 우리는 주관적인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 그렇게 깊지 않은 것을 보아 왔다. 왜냐하면 그의 그러한 성격은 가르침을 받으려 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받으려 하지 않는 성격은 더이상 무엇을 배울 수가 없으며 또한 유용하지도 못하다.

 

주관적인 사람은 일을 간섭하고 주장을 내세우길 좋아한다. 사람이 주관적이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다. 그는 더이상 어떠한 것을 배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더이상 그에게 어떠한 것을 위탁하지 않으신다. 또한 그는 이미 그의 모든 힘을 그의 주관적인 부분에 다 소모해 버렸기 때문에 더이상 하나님의 일을 할 힘이 없다. 다른 사람의 일을 간섭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잊어버린다. 왜냐하면 그의 힘을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포도원을 지키는 사람은 그 자신의 포도원을 동시에 지킬 수 없다. 형제 자매여! 우리에게는 주관적으로 행할 한가한 시간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에 많은 사역과 책임과 일들을 맡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자질구레하고 중요치 않은 일들에 간섭할 틈이 없다. 우리는 힘과 시간을 들여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 바쁘다. 오직 하나님의 일을 버려두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책임을 포기한 사람만이 다른 많은 형제 자매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러 갈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다.

 

주관적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규정해 놓으신 사역을 저버리는 사람이며 자기의 일을 제쳐 두고 다른 사람의 일만을 간섭하는 사람이다. 만일 사역자가 자기의 일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만 간섭한다면, 그의 일은 반드시 형편없어 질 것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주관적인 사람은 주님의 사역을 잘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분의 사역을 위탁하실 수 없으며, 설령 그에게 위탁하신다 하더라도 그는 해낼 수 없다.

 

주관적인 사람을 주관적이지 않은 사람이 되게 하기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그의 그러한 주관적인 성질은 이미 양성(養成)된 것이기 때문에 그는 모든 면에 있어서 항상 주관적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그의 개인 생활과 다른 사람의 일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주관적이다. 사실, 주관적인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다. 그는 무슨 일이나 다 참견하려 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걸어갈 수가 없다.

 

무슨 일에 있어서나 그의 의견이 있고 견해가 있으며 그의 방법이 있다. 이것은 영적인 일에서의 아주 큰 고충이며 방해물이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간구해야 한다.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사 우리로 하여금 당신 앞에서 유순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유순하고 강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제 자매 앞에서도 유순하고 부드러우며 강팍하지 않게 하소서.』

 

바울은 바로 이러한 사람이었다. 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었다.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증거할 때 그의 말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었다. 그러나 고린도 형제들은 바울을 대할 때 그가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후 10:10)고 말했다. 바울은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증거에 대하여 결코 느슨하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말은 무게 있고 힘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을 대할 때에는 그는 유순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결코 그리 엄하지 않았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이것을 분별하기를 배워야 한다. 당신은 사역에 있어서는 엄하고 강해야 하지만 당신 자신은 결코 주관적이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 착한 뜻으로 복음을 전파할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하였고, 어떤 사람은 시기로 그리스도를 전파할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하였는데, 이는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였기 때문이었다(빌 1:15-18). 당신은 바울의 생애의 균형된 면을 보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와 한 길을 갈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며, 다른 사람이 우리와 다른 길을 갈지라도 그들이 형제 자매이므로 마음속에 조금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균형을 유지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간증에 있어서 충성스러워야 하며 사람 됨됨이에 있어서 조금도 주관적이어서는 안 된다. 충성된 자는 주관적이지 않는 반면에, 주관적인 사람은 반드시 충성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가 다르다는 것을 반드시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언급해 온 것을 요약해 보면, 주관적인 사람은 바로 파쇄되지 않은 자아이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여, 당신은 주님이 당신을 파쇄시켜 주시기를 하나님 앞에서 구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의 일에 있어서나 당신 자신의 일에 있어서 당신이 어떠한 주관적인 것도 가지지 못하도록 다스려 주시길 주님께 구해야 한다. 주님께서 당신을 온전히 쳐서 다스리셔야만 당신은 비로소 부드러운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정도는 주관적이게 된다.

 

 

사람이 엄하든 엄하지 않든 거기에는 항상 의견이 있고 방법이 있으며 항상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것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당신은 더이상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한 차례의 심한 다룸을 받아서 온전히 파쇄되어야 한다. 이럴 때만이 당신은 어떤 일을 당하든 간증에 있어서는 충성스러울 수 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이 당신의 말을 따르든 따르지 않든, 그것은 그들이 선택하게 해야 한다. 당신은 매번 말을 해서도 안 되고, 많은 사람의 스승이 되려 해서도 안 되며,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려 해서도 안 되며,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결정해 주거나 다른 사람이 할 일을 간섭해서도 안 되며, 다른 사람의 사역을 지배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형제 자매여, 우리는 사역에 있어서는 마땅히 강해야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부드럽고 유순하며 주관적이지 않기를 배워야만 한다.

 


워치만 니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주관적이지 않아야 함",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