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속한 이상 - 몸에 대한 이상
교회
Hannah , 2009-03-13 , 조회수 (3425) , 추천 (0) , 스크랩 (0)

 

 

하늘에 속한 이상 - 몸에 대한 이상

 

성경 : 롬 12:1-2, 고전 12:12-27, 엡 4:16

 

기도 : 주여, 이 귀한 시간을 인해 당신께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는 주의 회복의 길을 배우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오 주여, 우리의 마음은 당신의 긍휼과 은혜로 인해 감사로 가득 찹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스러우며 여전히 옛본성 안에 있고 너무나 자아 안에 있다고 당신 앞에 머리 숙여 자백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얼마나 자기 추구적이고, 자신의 이익만 관심하고, 자기의 의로움과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는지요. 주여, 우리에게는 당신의 씻음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주여, 우리에게는 우리를 세울 선한 것이나 뛰어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여, 우리를 덮고 우리를 세우는 당신의 보혈이 있습니다. 주여, 당신의 비밀인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산 말씀을 주소서. 당신이 우리의 내적인 은혜로서 얼마나 필요한지요! 오 주여, 우리를 이끌어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우리를 이끌어 당신과 함께 가게 하시고, 당신과 하나 되어 당신의 살아 있는 몸으로서 건축되게 하소서.

 

주여, 너무나 많은 이탈시키고 좌절시키는 요소들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시고, 당신과 진실로 영 안에서 하나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자아로부터 구출하여 주소서. 주여, 우리의 약함을 당신이 아십니다. 우리는 당신의 도움을 위해 당신을 앙망합니다. 당신의 귀한 이름 안으로.

 


이 장에서 우리는 세번째 이상, 즉 몸에 대한 이상에 왔다. 그러나 이 이상을 보기 전에 그리스도의 이상과 교회의 이상에 관해 지난번에 다루었던 것을 다시 한 번 보기로 하자.

 

전통에서 이상으로 변함

 

우리는 주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봉사와 일과 사역은 전통적이고 종교적이고 천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이상에 속한 것임을 보았다. 제1장에서는 바울의 생애의 초반부의 봉사가 이상이 결여된 전통과 종교에 따른 것이었음을 보았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지만 구약의 의문(儀文)과 지식과 교훈과 규례들에 따라 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하늘에 속한 이상을 본 후로 그의 봉사와 일과 사역은 전통을 따르지 않고 이상을 따른 것으로 변하였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조상의 전통과 지식과 규례에 따라 섬기지 않고, 하늘에 속한 이상 곧 현재의 이상에 따라 섬겼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바울은 규례가 아닌 계시 곧 이상을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그는 어떤 것을 보러 갔었다. 그로 인해 그는 예루살렘에 갔다. 그의 서신들을 읽어 볼 때 바울은 이상들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이상에 사로잡힘

 

이 이상들 중 첫번째가 그리스도의 이상이다. 그리스도의 이상을 갖는 것은 그리스도가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시고,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의 중심이심을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영원한 의도의 중심이시다.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구속의 중심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하고자 계획하신 모든 것의 중심이시다.

 

그리스도는 만유 안에서 탁월한 위치를 가지셔야 한다. 그분은 모든 것의 으뜸이셔야 한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활과 사역과 교회 생활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행함의 본질과 실질이셔야 하며, 우리의 일과 봉사와 사역의 실제이셔야 한다. 우리의 사역은 그리스도로 가득 찬 그리스도의 사역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교회 생활의 내용과 표현이어야 한다. 교회는 오직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이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같은 이상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이상을 보기 위해 어느 기간 동안 진지하게 기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매일 주님께 다음과 같이 울부짖을 필요가 있다. 『주여, 당신 자신을 나에게 계시하여 주사 보게 하소서. 주여, 저는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보아야 합니다. 당신 자신에 관한 이상이 저에게 새겨져야 합니다.』

 

결국 수건과 같은 것이 제해지고 당신 속에 내적인 계시, 내적인 열림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바울의 경우처럼 「비늘 같은 것」(행 9:18)이 당신의 눈에서 떨어지고,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무엇인가를 알았지만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나에게 이상이 보인다!』 전에는 수건이 가렸지만 이제 그 수건은 제해지고 커텐은 걷혔다. 인간적인 말로는 이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다만 체험하는 문제이다.

 

당신은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 하나님께 속한 것들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본질이신 그리스도, 우리의 봉사의 실제이신 그리스도, 교회 생활의 내용과 표현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여러 메시지들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수건이 제해지고 그리스도의 이상을 볼 것이다. 일단 이 이상을 보면 당신은 사로잡힐 것이다.

 

그때부터 당신의 부담은 계속 그리스도를 다른 이들에게 사역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에 관해 말하면 내적인 기름부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면 말할수록 내적인 기름부음이 당신에게 더할 것이다. 당신은 이제 단순한 지식으로부터 떠나 그리스도 안에 「갇혀」졌다. 이제 당신은 눈이 열리고 그리스도의 이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갈망은 교회를 갖는 것이심

 

합당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이상뿐 아니라 교회의 이상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갈망은 교회를 갖는 것임을 보아야 한다. 성령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신 목적은 교회를 산출하기 위한 것임을 지적해 주실 것이다. 구속도 교회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이 교회를 위한 것이고, 모든 종류의 일과 사역도 교회를 위한 것이다. 복음 전파도 교회를 위한 것이고, 성도를 교화시키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교회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나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은 교회를 갖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로서 건축되기 위해 구원받았다. 우리는 이 이상을 보아야 한다. 당신이 정말로 주님께 진지하고 그분 편에 선다면 조만간 눈이 열려 이 우주에서 그분의 갈망은 교회를 갖는 것임을 볼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이차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는 것은 그릇된 관념과 오해로부터 당신을 구출할 뿐 아니라 당신의 봉사를 혁신시킬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의도는 복음이 전파되어 다른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는 것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주님을 추구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영적인 사람이 되도록 도움을 주는 것만도 아니며, 교회를 갖는 것임을 보게 될 것이다. 주님을 위한 일과 봉사에서 당신이 행하는 모든 것은 교회 건축을 위한 것이다. 당신이 어떠한 사람이든, 무엇을 하든 그것은 모두 교회를 위한 것이다.

 

사도 바울의 사역을 생각해 보라. 그가 이 이상의 길로 들어서고 혁신된 후 어떻게 했는가? 그가 한 모든 것은 교회를 위했다. 엄격히 말해서, 그는 소위 말하는 「자신의 일」을 갖지 않았다. 교회를 떠나서 바울은 아무 일도 갖지 않았다. 그의 어떠함과 그가 행한 모든 것은 교회를 위했다. 교회를 제하면 바울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당신 자신과 바울을 비교해 볼 것을 권한다. 당신이 교회 외에 많은 것을 갖고 있을까 염려된다. 몇 가지 선한 일을 갖고 있을 지 모르지만 이것들은 교회를 벗어난 일이다. 이것은 당신이 그릇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교회가 우리의 어떠함과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증명하는 참된 시험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다.

 

오늘날 교회의 실행성

 

교회는 「공중에 뜬」 어떤 것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이고 실행적인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신약에서 교회에 관한 가르침은 많지 않지만 교회의 실행성은 분명히 있다. 신약에서 교회는 실행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교회의 실행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것이고 장래의 어떤 것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분명히 보이는 것이다. 신약에서 보이지 않는 교회나 장래의 교회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 장래는 교회 시대가 아니라 왕국 시대이다. 교회를 차후의 것으로 연기하지 말라. 교회는 오늘 있어야 한다.

 

이 땅의 이생에서 교회가 없다면 언제 어디서 교회가 있을 것인가? 당신이 죽은 후에 교회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을 수 있는가? 교회 생활이 장래까지 연기된다면 장래의 이 교회 생활은 어디서 있을 것인가? 우리가 죽은 후 하늘로 가서 바울과 베드로와 함께 좋은 교회 집회를 가질 것이라고 말하는 성경 구절이나 단락을 보여 줄 수 있는가? 우리가 장래 하늘에서 소위 말하는 합당한 교회 생활, 즉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적인 교회 생활을 가질 것이라고 말하는 성경 구절이 있는가? 그러한 구절은 없다. 교회가 장래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왜 사람들이 오늘 이 땅에 있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며 참 교회는 소위 말하는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사상을 취하는가? 왜 사람들이 교회는 장래의 어떤 것이라는 가르침을 수용하는가? 우리 모두는 교회의 실행성에 관한 이상을 보아야 한다.

 

지방 교회를 세우기 위해 어려움을 일으키는 자들이 됨

 

또한 교회는 지방적이다. 교회가 지방적이기 때문에 당신이 있는 곳이 교회가 있을 올바른 곳이다. 교회는 당신이 있는 바로 그곳에 있어야 한다. 장소가 좋아 보일 수 있지만 만약 그 장소에 교회가 없다면 그곳은 지옥이다. 반대로 교회가 있는 곳은 어디든 천국이다.

 

이것은 창세기 28장의 야곱의 체험을 상기시켜 준다. 『그가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12절). 잠이 깨었을 때 야곱은,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17절)라고 하고, 그곳의 이름을 「하나님의 집」을 뜻하는 「벧엘」이라 불렀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집(딤전 3:15), 곧 벧엘이다. 교회, 곧 하나님의 집이 있는 곳이 하늘의 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적합한 유일한 장소는 교회가 있는 곳이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어디에 있든 교회가 있어야 한다. 교회에 관한 이 일에 있어서 우리는 어려움을 일으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교회를 산출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곤란케 해야 한다. 특정한 지방에 교회가 없다면 거기에 있는 사람들로 평안치 못하게 하라. 오히려 그 지방에 교회가 있도록 곤란을 끼치라. 우리는 우주에 선포해야 한다. 『이곳에 교회가 없다면 나는 거처가 없다. 나에게는 집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나는 어려움을 야기시킬 수 밖에 없다.』

 

나는 우리 모두가 바울처럼 어려움을 야기시키는 자가 되는 그 날이 오리라고 기대한다. 우리는 교회를 산출하기 위해 온 나라를 요동케 해야 한다.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소요가 있었다. 그들이 어떤 곳에 가기 전에 사람들은 평안했다. 그러나 이 소요케 하는 자들이 도착한 후에는 온 도성이 소동을 겪었다. 사도행전 17장 6절은,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라고 말한다. 천하를 소동케 하고 요동케 하여 교회를 세우고 건축하게 된다.

 

합일의 입장 위에 정착함

 

또 우리는 교회가 분명한 입장-합일의 입장-을 갖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합일의 입장이 아니라 유일한 합일의 입장이다. 오늘날 많은 종류의 합일이 있지만, 오직 하나의 합입만이 유일한 하나이고 다른 것들은 분파들이다. 우리는 이에 관한 분명한 이상을 가져야 한다.

 

당신이 이 합일의 입장에 정착한다면 당신의 그리스도인 생활은 정착할 것이라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입장에 관해 문제가 있다면 당신은 끊임없이 방황하고 그 어조(語調)를 계속 바꿀 것이다. 오늘은 이렇게, 내일은 저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안주하지 못하고 교회의 합일의 입장 위에 정착할 때까지 그 어조가 계속 바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며 실행적이고 지방적이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토록 많은 분파와 혼돈이 있지만 확고한 교회의 입지가 명확히 있는데, 곧 유일한 합일의 입장이다. 이러한 것들을 본다면 이 입장에 올 사람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에 관해 주의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당신 자신에 관하여, 이 입장에 있는 한 당신이 정착했음을 깨달을 것이다. 당신은 예루살렘에 돌아와 그곳에 정착한 이스라엘과 같을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 대한 이와 같은 이상을 보고 합일의 입장 위에 정착해야 한다.

 

교회의 이상과 몸의 이상의 차이점

 

그리스도의 이상과 교회의 이상을 본 후, 몸의 이상을 볼 필요가 있다. 교회의 이상과 몸의 이상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궁금할 것이다. 주님의 긍휼로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교회 입장에 돌아와 합당한 입장에 선 교회 생활을 현재 실행하고 있다. 우리는 합일의 입장을 인식하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여전히 몸의 인식이 필요하다.

우리는 몸의 지체들로서 함께 건축되고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이상을 보아야 한다. 교회 입장에 관한 인식에 이른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이 명확한 입장 위에서 몸으로서 건축되어야 한다. 신약에서 몸에 대해서 말하는 중요한 세 곳이 있는데, 곧 로마서 12장, 고린도 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이다.

 

세 가지 장애물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상을, 둘째로는 교회의 이상을, 셋째로는 몸의 이상을 볼 필요가 있다. 이들 각각의 이상에 관하여 특정한 장애물들도 있다.

 

그리스도의 대치물

 

전에는 그리스도의 이상을 보지 못했지만 이제는 이 이상을 본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이상을 보는 것을 가로막은 것이 무엇이었는가? 그 이상을 못 보도록 당신을 가로 막았고, 오늘 다른 이들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가? 그 대답은, 사람들은 갖가지 대치물 때문에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것들이 그리스도를 대치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이상을 보지 못하게 막고 있다.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지 않음

 

어떤 이들은 분파가 그리스도의 이상을 보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교리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경험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교회 입장으로 돌아오는 것과 관련한 대가 때문에 교회를, 특히 교회의 입장을 반대한다. 교회의 입장 문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상은, 그들이 이것을 이해하고 있지만 교회 입장 위에서 모이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음의 말처럼 변명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편협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사랑하며 또 넓은 마음을 소유하고 싶습니다. 나는 교회의 입장이라는 이상한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좋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대가를 피하려는 덮개이다. 사람들은 이것에 포함되는 희생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합당한 입장 위에 선 교회 생활을 실행하는 데 지불해야 할 대가의 문제에 있어서, 그들이 주님께 신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주님께서 알고 계시며 그들의 양심도 알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과 논쟁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니 형제님과 논쟁하러 왔을 때 그분은 미소를 지으며, 『나와 따져도 좋습니다. 그러나 당신 속에 나에게 동의하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오늘날 교회의 입장에 관해 우리와 논쟁하려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들 안에 이것에 관해 우리를 찬성하는 어떤 것이 있다. 그들의 양심은 그 희생, 곧 대가 때문에 가로막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오고 가는 것을 삼십여 년 동안 보아 왔다. 각 경우에서 그들은 지불해야 할 대가로 인해 좌절되었다.

 

자아

 

그리스도의 이상을 보는 것에 대한 장애물은 그리스도의 대치물들이며, 교회의 이상을 보는 것의 장애물은 그 대가이고, 몸의 이상을 보고 몸의 생활을 실행하는 것의 장애물은 자아이다. 그렇다. 우리는 합당한 교회 입장 위에 서서 교회 생활을 실행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건축되었는가? 서로서로 합당하게 연결되었는가? 서로 알맞게 맞춰졌는가?

 

우리는 함께 모이지만 건축되어 있지 않을 수 있다. 함께 모이지만 건축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의 이상이 필요하다. 이 이상은 자아의 대가를 요구한다. 몸 안에서 건축되려면 자아는 사라져야 한다. 이것이 (다음 장에서) 자아의 이상을 볼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자아는 몸의 문제이다.

 

교회를 반대하는 대적의 교묘함

 

일단 그리스도의 이상을 본다면 교회의 이상을 볼 자격이 있다. 그러나 교회에 이르러 당신은 희생이 있다는 것과 대가를 지불해야 함을 느낄 것이다.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이상으로 되돌아가서 다음과 같이 말하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시다. 우리는 교회에 관해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고, 그분의 어떠하심을 이야기하자.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자.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교회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종류의 말은 교묘하다. 합일의 입장 위에서 교회 생활을 실행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사탕 발림의 변명이다.

 

이 시점에서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살펴 보자. 베드로가 주 예수에 관해,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선포한 직후, 그분은 그에게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16, 18절). 이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교회를 위한 것임을 가리킨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우리가 지나치게 교회를 위하며 교회를 그리스도 위에 높인다고 하면서 우리를 비난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우리가 교회를 우상시 한다고 까지 말한다. 이러한 논쟁은 교묘하다. 오, 대적의 교묘함이여!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교회를 위해 죽으셨다(엡 5:25). 우리가 교회에 대해 너무 지나치다면 그리스도 그분이 너무 지나친 최초의 분이시다.

 

몸의 건축을 위해 자아를 잃어버림

 

교회의 이상을 보았다면 주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 몸을 보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몸 안에서 건축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다만 교회의 구성원일 뿐 아니라 몸의 지체이다. 몸을 위해 우리는 대가 뿐 아니라 자아를 잃어버려야 한다.

 

나는 합당한 입장 위에서 모이기 시작한지 삼십여 년 동안 이 일에 있어서 주님의 긍휼로 변하지 않았다고 간증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입장에 돌아온 후로 나는 주님의 긍휼로 몸을 인식하고 몸을 실행하기 시작했으며, 여전히 지금도 몸을 실행하고 있다. 나는 이 입장으로부터 이동하지 않았으며 이 입장 위에서 나의 위치를 바꾸지 않았다.

 

당신은 입장의 문제에서는 바뀌지 않지만 그 입장 위에서의 위치가 변했는지 모르겠다. 갖가지 재료들을 입장 위에, 즉 어떤 부지나 대지 위에 가져왔다고 가정해 보자. 이 모든 재료들이 이제 똑같은 입장 위에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건물 대지 위에 남아 있지만 그 위치가 바뀌어 있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합당한 교회 입장에 돌아와서 이 입장 위에서 교회 생활을 실행하고 있다. 아마도 「부드러운」 형제가 「딱딱한」 형제와 함께 놓여 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부드러운」 형제는 주님께 다음처럼 울부짖을 것이다. 『주여, 저는 이 형제와 함께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바꾸어 주십시오.』 이 형제는 입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입장 위의 위치를 바꾸고 싶어한다. 그는 입장 위에 남아 있지만 그 입장 위에서의 관계를 바꾸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교회 생활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들의 상황이다. 당신은 입장에 관해서는 바뀌지 않았지만 위치와 관계에 있어서는 자주 바뀌었을 것이다.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분파 속에서, 서로 다른 입장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들은 오늘 어떤 집단과 함께 모이고 있지만 내일은 다른 집단과 함께 모이기 시작할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서로 다른 입장 속에서 방황하지는 않지만 합당한 입장 위에서의 그들의 위치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에게 건축이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건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건축되면 집이나 집회소의 재료들이 그 위치를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위치를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위치에 고정되어 있고, 이곳 저곳으로 더 이상 방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건축되는 것이 왜 어려운가? 그 어려움은 자아이다. 자아가 선하든 나쁘든, 상냥하든 추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자아가 있는 한 건축은 없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들은 남을 지배하려는 자아가 있다. 이로 인해 그들은 교회를 위한 일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할 수 없다. 그들은 상황이 어떠하든 다른 사람을 지배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건축을 할 수 있는가? 그들이 건축되려면 자아는 파쇄되어야 한다. 문제는 그들의 강한 성격이 아니라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자아이다. 그들이 강한 것은 합당하지만 남을 지배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이들과 함께 건축되는 사람은, 매우 강하여도 다른 사람들과 합당하게 연결되고 끊임없이 교통을 유지하는 자들이다. 건물 안의 대리석 기둥은 강하지만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강하다. 그러나 지배하지 않는다. 몸 안에서 다른 이들과 건축된 강한 형제들이 이와 같다.

 

몸의 이상 아래서 파쇄됨

 

우리는 몸 안에서 건축되기 위해 자아에 관한 공과를 배울 필요가 있다. 자아의 문제를 고려해 볼 때 나는 당신의 자아가 폭로되도록 더 많은 은혜를 받기를 강권한다. 다른 이들과 건축되는 가운데서 가장 큰 문제는 자아이다. 어떤 형제 자매들은 다른 이들이 자기를 칭찬하거나 좋게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에게 사랑 안에서 솔직하고 진실되게 말하면 그들은 마음이 상하고 난처해 한다. 이는 그들이 자아 안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형제 자매들이 교회 입장 위에서 모이더라도 그 자아로 인해 함께 건축되기가 매우 어렵다.

 

당신은 몸의 이상을 보아야 한다. 이 이상은 당신을 파쇄할 것이다. 몸 안에서 건축되는 유일한 길은 파쇄되는 것이며 몸을 깨닫는 유일한 길도 파쇄되는 것이다.

 

 

건축되고 만족하고 파산됨

 

당신은 몸의 이상을 본 후에 정착할 뿐 아니라 건축될 것이다. 건축될 때 당신의 그리스도인 생활에 만족이 있을 것이다. 몸 안에서 건축될 때까지는 만족이 없을 것이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당신의 속의 느낌은 만족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건축되는 그때 당신은, 『주여, 제가 여기에 있으므로 인해 당신을 찬양합니다. 저는 건축되어 있고 이제 만족합니다. 저는 건축되었기 때문에 끝났습니다. 저는 다른 아무것도 위하지 않습니다. 이 건축에 의해 파산되었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많은 형제들이 건축되기를 두려워한다. 일단 건축되면 끝난다는 것, 곧 「파산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좋은 재료」로 보존되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일단 건축되면 「파산되고」 건축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건축되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다른 것에는 소용없다는 것을 뜻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문의 인방을 생각해 보라. 문의 인방을 만드는 데 사용된 재료는 「파산」되었다. 이제 그것은 인방 외에는 달리 쓸데가 없다. 마찬가지로 건축될 때 우리는 끝난다. 우리는 더 이상 「좋은 재료」 조각이 아니다. 우리는 건축의 일부이다. 이것이 오늘날 주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이다.

 

당신이 다음처럼 말할 수 있는 때가 와야 한다. 『주여, 저는 여기 건축 안에서 만족합니다. 이로 인해 저는 파산되었습니다. 나는 당신에 의해 파산되었습니다. 이제 건축의 한 부분이 되는 것 외에 더 이상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은 「파산되고」 끝났기 때문에 다른 이의 환영이나 찬양을 더 이상 받지 못할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더 이상 유용하지 못하고 그들도 당신을 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당신을 잊을지라도 주님은 당신을 기억할 것이다. 당신이 건축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은 당신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주님의 긍휼로 나의 입장과 위치를 바꾸지 않았고, 나의 동역자들을 바꾸지 않았다고 간증할 수 있다. 나는 건축되었기 때문에 끝났으며 다른 더 좋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몸의 이상이 나의 어조를 바꾸지 않도록 지켜 주었다. 이것은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로 인한 것이다.

 

함께 건축되어야 할 필요성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건축을 본 적이 있는가? 갖가지 종류의 기독교 모임과 집단들이 있지만 건축이 없다. 나는 지난 며칠 동안의 주님의 목표가 몸의 건축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 되신다는 것과 함께 모여 합당한 교회 생활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깨닫는 것만으로는 부적합하다. 우리는 몸의 지체들로서 함께 건축되어야 한다.

 

다른 이들과 건축되지 않는다면 교회 입장은 확고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건축 재료들이 특정한 건물 부지 위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재료들이 단순히 땅 위에 내버려져 있다면 누가 와서 가져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함께 건축되어 있다면 그 부지 위의 자기 위치에 견고히 있을 것이다. 전체 건물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그것들은 부지와 떼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 입장 위의 우리의 위치는 우리가 건물, 곧 몸 안으로 건축되지 않는 한 확고하지 않을 것이다.

 

몸의 건축을 위해 몸의 이상을 보고 자아를 부인함

 

몸의 건축의 장애물은 자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어떤 형제 자매들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조금 보고서 교회의 입장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다른 이들에게 한 번도 열지 않았다. 외적으로 그들은 장로들을 비평하지 않고 매우 친절해 보인다. 그러나 내적으로 그들은 비평적이다. 그들에게 있는 문제는 죄가 아니라 자아이다. 건축되려면 우리 자신을 열고 드러내고 파쇄되어져야 한다. 교통 가운데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그들과 건축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고 말해야 한다.

 

나는 이 나라에서 주님이 몸의 실제적인 표현을 갖기를 원하신다고 믿는다. 그분의 갈망은 우리가 단지 함께 모여 집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건축되는 것이다.

 

오, 우리에게는 몸의 이상이 얼마나 필요한지! 우리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주여, 몸의 이상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그리스도인이 되고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저는 몸 안에서 건축되어야 합니다. 저는 실제적인 방식으로 살아 있는 몸의 지체가 되어야 합니다. 몸 안에서 다른 이들과 교통을 가지고 연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교회를 갖는 것이며, 이 교회는 반드시 몸이어야 한다. 우리는 몸 안에서 건축되어야 하지만 이 건축의 장애물은 바로 우리 속에서 주님의 처리를 받아야 할 마지막 한 가지인 우리의 자아이다. 몸 안에서 건축되려면 자아는 정죄받고, 부인되고, 거절되고, 배척되어야 한다. 매일매일 자아는 모든 것에서 배척되어야 한다. 자아가 부인될 때 비로소 몸이 있고 참된 지체가 있다.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은 몸에 의해서이다. 그리스도가 표현되고 하나님의 대적이 패배당하는 것도 몸에 의해서이다. 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심지어 복음 전파도 몸과 비교할 수 없다. 어떤 것도 몸의 건축과 비교할 수 없다. 부디 몸의 이상을 보고 그 이상에 사로잡히기를 바란다.

 


위트니스 리
[하늘에 속한 이상, "하늘에 속한 이상 - 몸에 대한 이상",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