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과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 대한 이상
그리스도
Hannah , 2009-03-13 , 조회수 (3413) , 추천 (0) , 스크랩 (0)

 

 

구속과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 대한 이상

 

오늘날 우리가 삼일 하나님에 대해, 구속에 대해,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 대해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의 계시대로 분명한 이해를 갖는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 어려움은 항상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과거에 받아 온 전통적인 가르침 때문이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받아 온 가르침들은 우리의 이상에 좌절이 되어 왔다.

구속에 대해

성취자

그리스도의 구속을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이러한 구속의 성취자를 알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성취자 곧 구속자를 안다면 그때 우리는 분명히 그분의 구속을 알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정죄 받으시고 하나님의 공의와 의로운 심판을 받아 죽음에 처해지신 바로 그 순간에 그분이 누구이셨는지를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삼일성에 대해서와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연구인 이른 바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를 위한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거기에서 죽으신 우리의 구속주는 모든 피조물의 머리요, 모든 피조물 가운데 먼저 나신 분이시며 또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셨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먼저 나신 자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의 머리가 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 가운데 먼저 나신 자가 되는 문제와 관련된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할당해 주신 분깃이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또한 그분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먼저 나신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우리는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 한편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관련된다는 것을 본다. 그분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표현이며 또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표현되신 분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과 관련되는데 그분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먼저 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 가운데 먼저 나신 분이시라는 것은 그분이 모든 피조물 중 첫번째 항목이라는 뜻이다. 아리우스(Arius)의 이단 때문에 골로새서 1장 15절의 이 요점을 헬라어의 문자적인 의미대로 받아들이는 성경 교사들이 많지 않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신성하지 않고, 그분이 하나님이 아니고 오히려 영원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어떤 것이라고 가르쳤는데 골로새서 1장 15절을 그의 이단적인 가르침의 근거로 삼았다. 역사에 따르면 아리우스는 그의 이단 때문에 정죄받고 쫓겨났으며 주후 325년 니케아 회의에 의해 추방되기까지 했다. 아리우스의 이러한 이단적인 가르침 때문에 니케아 회의 때부터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성경 교사들은 골로새서 1장 15절은 문자적인 번역에 따라 해석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리우스처럼 이단이라는 정죄를 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먼저 나신 자」라는 이 구(句)를 헬라어에 따라 주의 깊게 연구해 왔으며, 이것이 전적으로 정확한 번역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어떤 번역자들은 그 번역을 「모든 피조물 이전에 먼저 나신 자」라고 바꾸기까지 했다. 헬라어 학자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모든 헬라어 학생도 이런 번역이 전적으로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전치사 「가운데(of)」를 「이전에 (before)」라고 바꾼 것은 그리스도가 피조물과는 상관없는 어떤 것임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전치사 「가운데 (of)」를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가 피조물 중 하나라는 것을 가리킨다.

거기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어떤 교사들이 번역을 바꾸려고 하는 이유는, 만일 그리스도께서 피조물들 중 하나로 심지어 피조물 가운데 첫번째라고 말하면 그들이 정죄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 가운데 먼저 나신 분이라고 감히 말하지 못한다.

어떤 교사들은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 가운데 먼저 나신 분이시라는 것을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보다 앞서 계셨다는 것만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그분이 창조자이셨지 결코 피조물은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피조물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려 하지 않는다.

한 해설자는 헬라어에 따르면 이 구(句)가 「모든 피조물 가운데 먼저 나신 자」라고 번역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는 헬라어 전치사 「가운데(of)」라는 단어는 먼저 나신 분이 피조물의 많은 항목들 중 하나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비록 이것이 헬라어에 따른 의미인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는 계속해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피조물들 중 하나라고 말하기를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자신의 말은 모순된다. 그는 이 구절을 문자적인 의미대로 해석하기를 격려하지 않았다.

창조자와 피조물

1958년 이래로 나는 우리 그리스도가 창조자로서는 하나님이시요 피조물로서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분은 분명히 창조자이실 뿐만 아니라 피조물이시기도 하다고 선포하는 몇몇 저서를 출판하였다. 만일 여러분이 그분이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분명히 그분은 피조물이시다. 이상한 것은 이와 같다. 비록 많은 그리스도인 교사들이 그리스도께서 사람인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분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도록 격려하지 않는다. 어떻게 피조물이 아닌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한 해석은 비논리적이지만 많은 교사들은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라는 것을 감히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도세티스트(Docetists, 주후 70-170년)들의 이단 노선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도세티즘 주의자들은 그노시스주의(영지주의)를 뒤이어 「모든 것이 악하다」, 즉 우리 육신을 포함한 모든 물질적인 것마다 악하다고 말했다. 도세티즘 주의자들은 그리스도는 거룩하므로 그분은 결코 사물이나 물질적인 것이나 육신이 될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들의 이단적인 가르침은 그리스도는 실제의 사람이 아니고 사람으로서 그분은 단지 유령이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도세티즘의 가르침은 이단이었다.

사람으로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라는 진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도세티스트들로 만든다. 요한은 그의 첫번째 서신 4장에서 그런 사람들을 정죄했다.

그리스도는 사람, 곧 육신과 피부와 뼈와 피를 가진 전형적인 사람이다. 이 네 가지 항목들을 헤아려 본다면 여러분은 피부가 피조된 어떤 것이며 뼈와 육신과 피가 다 피조물에 속한 어떤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사람이시지만 그분은 피조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우스운 것이다. 이것은 교리적인 토론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진리를 주의할 필요가 있으며 사실들을 알 필요가 있다.

피조물과 인류의 구속자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구속은 사람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골로새서 1장은 먼저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 가운데 먼저 나신 분임을 말하며(15절), 후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피조된 것들이 하나님과 화목된다고 말한다(20절). 그리스도의 구속은 만유를 위한 것이다. 히브리서 2장 9절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할 뿐만 아니라 만유를 대신해서도 죽음을 맛보셨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리스도가 다만 사람이시고 모든 피조물 가운데 먼저 나신 분, 모든 피조물들의 첫째 항목이 아니시라면 어떻게 그분이 모든 피조물들을 위하여 구속을 성취하실 수 있겠는가? 그분이 사람을 위한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반드시 사람이 되셔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피조물들을 위한 구속을 이루시기 위해 그분은 반드시 피조물이어야 한다. 우리의 구속자는 모든 피조물을 구속하기 위하여 반드시 모든 피조물 가운데 첫번째 항목이셔야 한다. 그러므로 그분은 모든 피조물 중에 먼저 나신 분으로 첫번째 위치에 있다. 동일한 원칙으로 그분은 마지막 아담이시며, 모든 인류의 머리이신 분으로서 인류의 구속자가 될 자격이 있으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모든 피조물 가운데 먼저 나신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의 구속자가 될 자격이 있으시며, 모든 인류의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분은 인류의 구속자가 될 자격이 있다. 그러나 만일 그분이 다만 모든 피조물 중의 첫번째 항목이요 인류의 마지막 아담일 뿐이라면 비록 그분이 전적으로 구속자가 될 자격이 있다 할지라도 그분의 구속은 영원한 효능이 있을 수 없다. 만일 그분이 피조물들 중 한 항목일 뿐이라면 어떻게 한 항목이 모든 피조물들을 위하여 죽을 수 있겠는가? 그분이 한사람일 뿐이라면 어떻게 한 사람이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실 수 있겠는가?

그런 경우, 그분의 구속의 효능은 영원하지 않으며 지속적일 수 없다. 만일 그리스도의 구속이 모든 피조물 중 첫번째 항목과 인류의 마지막 아담에 의해 성취된 구속이었을 뿐이라면 그분의 구속은 영원히 영원토록 효능 있지는 않을 것이다. 피조물도 사람도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구속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 우리의 구속자는 반드시 몇 가지 추가적인 자격을 가지실 필요가 있다. 틀림없이 영원한 어떤 요소가 있어야 하며 이 요소는 틀림없이 하나님 자신이어야 한다. 우리의 구속자는 반드시 바로 하나님이셔야 한다.

우리의 구속자가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분은 모든 피조물의 첫번째 항목과 마지막 아담으로서, 즉 모든 인류의 머리로서 그리고 바로 하나님으로서 거기서 죽으셨다. 그분이 거기에서 이러한 세 가지 신분으로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의 구속은 영원한 구속이라 불리운다(히 9:12). 처음 두 신분은 그분으로 구속자가 될 자격이 있게 하며 마지막 신분은 그분의 구속이 영원하다는 것과 그것이 만유를 포함할 수 있으며 또한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을 보증해 준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는 확실하고도 영원한 구속을 성취할 자격이 있으시다.

요한이 우리를 정결케 하는 또는 우리를 구속하는 피가 예수의 피라고 말했을 때 그는 「그 아들(His Son)」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첨가했다(요일 1:7). 십자가에서 흘려진 피는 사람이신 예수의 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이기도 하다. 예수의 피는 실제적인 사람의 피이다. 사람의 피만이 사람을 구속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은 흘릴 피를 갖고 계시지 않지만 가령 그분이 흘릴 수 있는 피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 피는 사람을 구속할 자격이 없을 것이다. 사람은 사람의 피로 구속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는 완전히 사람을 구속할 자격이 있는 참 사람의 참된 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피가 사람의 피일 뿐이라면 그 피의 영원한 효능을 보증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요한 일서 1장 7절에서 사도 요한은 그분의 신성을 지적하기 위해 그분의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첨가하고 있다. 이 예수는 참 사람의 피를 흘리신 인자이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그분의 피의 효능을 보증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도 하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속하는 피를 흘리는 데 필요한 주님의 인성을 지칭하며, 그분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구속하는 피의 영원한 효능에 필요한 주님의 신성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 예수의 피는 이 피가 그 영원한 효능의 신성한 보증으로 하나님의 타락한 피조물들을 구속하기 위한 참 사람의 합당한 피임을 가리킨다. 그 효능은 공간적으로는 모든 것보다 뛰어나며 시간상으로는 영원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속자는 모든 피조물 중 첫번째 항목이시요, 인류의 마지막 아담이시며, 바로 하나님 자신이셨다. 이러한 진리는 신학에서 논쟁을 일으키는 많은 요점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는 논쟁을 관심하지 않고 진리를 관심한다.

그분의 구성 성분으로 사람의 본질과 신성한 본질을 가진 하나님-사람

우리는 십자가에서 못박히시고 그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이셨던 한 분의 존재의 본질들, 곧 구성 성분들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분이 사람의 본질과 신성한 본질로 조성된 분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아는데 이는 그분이 이 두 가지 본질들로 잉태되어 태어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신성한 본질과 사람의 본질이 연합되어 성령으로 잉태되셨으며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다. 그분은 사람이실 뿐만 아니라 본질상 인성과 신성을 다 지니셨는데 이는 그분이 이 두 가지 본질들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본질들이 그분의 조성이요, 그분의 내재적 존재이다.

주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셨을 때 그분은 신성한 본질과 사람의 본질을 소유하신 분으로서 침례를 받으셨다. 침례를 받았던 모든 다른 사람들은 다만 사람의 본질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침례를 받았다. 그러나 두 가지 본질을 가지고 침례를 받으셨던 예수라는 이름의 유일한 한 사람이 있었다.

주 예수님이 침례받으신 후 성령이 내려와 그분 위에 강림하셨다. 이 사실을 근거로 세린터스(Cerinthus)는 주 예수 자신이 성령을 소유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은 다만 사람이셨을 뿐이라는 큰 이단을 가르쳤다. 세린터스는 그의 이단론에서 땅에 계실 때의 사람 예수를 신성한 분인 그리스도와 분리시켰다. 그는 거룩한 비둘기가 신성한 그리스도의 상징이었으며 거룩한 비둘기 곧 성령이신 그리스도는 사람 예수께서 침례받으신 후 그 위에 강림하셨다고 가르쳤다. 그는 신성한 비둘기인 이 그리스도가 그때부터 삼 년 반 동안 예수와 함께 있었는데 예수께서 십자가로 가서 못박히셨을 때 신성한 비둘기는 예수를 떠났다고 가르쳤다. 다른 말로 하면 그의 이단론에서 세린터스는 그리스도께서 예수를 떠나셨다고 가르쳤다.

세린터스는 그의 이단론의 이 부분에 대한 근거로 두 구절을 사용했을런지도 모른다. 첫째, 마태복음 3장 16절은 성령이 예수께서 침례받으신 후에 그분 위에 강림하셨다고 말한다. 세린터스가 성령의 강림 이전에는 예수께 신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가르쳤던 것은 이 사실에 근거를 두었을 수도 있다. 그 다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정오 마지막 세 시간 끝에 그분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셨다(마 27:46). 세린터스가 거룩한 비둘기가 그분만을 남겨두고 십자가에 계신 사람 예수를 떠났다고 가르친 것은 이 구절에 근거했을 수도 있다.

세린터스는 이 요점에 있어서 옳을 수 있고 이 구절들에 대한 그의 해석에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더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주 예수 자신의 부르짖음대로라면 하나님이 사람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예수를 버리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서 누가 버림당하셨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분은 다만 인간의 본질을 가진 사람일 뿐이셨는가? 우리는 십자가에서 버림당하신 분이 침례받기 전에 이미 인간의 본질과 신성한 본질로 조성된 분이셨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분이 침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그분 위에 내려 오시기 전에 이분은 이미 신성하셨으며 신성한 본질로 조성되어 있었다. 이것은 중요한 요점이다. 그러므로 침례를 받으신 분은 사람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사람이셨다.

그러므로 우리 구속자가 우리 죄인들을 대신해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그분 안에는 사람의 본질이 있었다. 즉 그분은 첫번째 피조물로서, 모든 인류의 머리인 마지막 아담으로서 사람이셨다. 이 구속자 안에는 신성한 본질이 있는데 이는 그분이 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질에 있어서 그분은 피조물 중 첫번째 항목이셨으며 인류의 마지막 아담이었다. 신성한 본질에 있어서 그분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버리신 것은 또 다른 방면이다. 이것은 그분이 침례를 받으신 후 성령이 그분 위에 내리셨던 때와 동일하다. 성령이 그분 위에 내려온 것이 그분에게 아직 신성한 본질이 없었다는 것을 가리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분은 이미 신성한 본질로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침례를 받으시기 이전에 신성한 본질로 잉태되셨으며 신성한 본질로 태어나셨다. 동일한 원칙으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떠나셨다는 것이 그분이 결코 신성한 본질로 조성되지 않았었다는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이 요점들은 아주 복잡한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그것들이 여러분 모두에게 분명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삼일성의 순서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돌아가서 삼일성의 순서에 대한 더 전진된 요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일성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를 보았고, 아들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 영을 보았다. 삼일성에 있어서 첫번째는 아버지이고, 둘째는 아들이며, 셋째는 그 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다. 그러나 우리는 삼일성의 순서가 우리의 적용의 문제에 이르게 될 때 그 순서가 바뀐다는 것을 볼 필요가 있다.

계시록 1장에서 세번째는 두번째가 될 뿐 아니라(4-5절), 동일한 원칙이 다른 곳에서 적용되기도 했다. 에베소서 3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마음 속에 거처를 정하시도록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여기에서 그 영은 둘째를 언급함) 아버지께서 그들을 강건케 하시도록 아버지께 기도한다고 말한다. 그런 적용에 있어서 세번째는 두번째가 되는데 그것은 원칙상 계시록 1장과 같다. 더욱이 베드로 전서 1장 2절은 우리가 아버지에 의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그 영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선택된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다시 그 영은 두번째로 올라와 있다. 거기에다 삼일성의 순서도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에서 바뀌고 있는데 거기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을 말한다. 이 경우 우리에게 적용될 때의 순서는 둘째(그리스도)가 첫째가 되고 첫째는 둘째가 된다.

삼일성의 순서에 있어서 이러한 바뀜은 기능과 본질이 별개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기능에 있어서 삼일성은 본질에 있어서 그분의 순서와는 다른 순서로 언급된다. 거기에다 우리가 일곱 영의 문제에서 보았듯이 그 영은 본질상 하나이시지만 경륜상으로는 일곱이시다. 몇몇 초기 교사들은 이 원칙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들은 본질적인 삼일성과 경륜적인 삼일성 같은 용어들을 발명했다.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본질적이고도 경륜적인 심일성

본질적인 삼일성에 있어서 그 셋은 모두 변천이나 진보라고 부를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버지, 아들, 그 영은 모두 영원 안에 동시에 계셨으며 그들은 현재 여기 계시고 계속해서 동시에 영원토록 존재하신다. 이것은 그분의 본질에 따른 본질상의 삼일성, 신성한 삼일성이다.

그러나 경륜적인 삼일성에 있어서 먼저 아버지는 계획하셨고, 선택하셨으며 예정하셨다. 이러한 아버지의 계획을 따라 아들은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것을 성취하러 오셨다. 그 다음 아들의 성취 후에 그 영은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대로 아들이 성취하신 것을 적용하시러 오셨다. 여기 이러한 경로 안에는 변천이 있으며, 전진이 있다. 그러므로 삼일성의 본질에 따르면 그 셋은 같으며 변천이나 전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경륜 안에는 변천이나 진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세 단계들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경륜 둘 다와 관련된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구속자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그분에게는 두 가지 본질-사람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질-이 필요하다. 그러나 경륜적으로 말해서 그분이 구속을 성취하셨을 때 기능상의 영에 대한 몇 가지 문제들이 있었다. 구속자께서 침례를 받으신 후 성령이 그분 위에 경륜적으로 내려오셨다. 그러한 그 영의 내려오심은 기능상의 영, 기능 안에서의 영 혹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의 그 영이셨다. 그러나 그분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을 때 성령은 본질상의 성령이셨다. 이런 구분들은 우리의 이해를 위해서 중요하지만 우리가 그것들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구속자가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하나님은 본질적으로가 아닌 경륜적으로 그분을 떠나셨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는 그분의 잉태로부터, 그분의 출생을 거쳐, 인생, 죽음, 부활 및 영원을 통해 사람이신 예수 안에 계셨다. 그러나 그분이 사역을 시작하시기 위해 침례를 받으신 후에 하나님은 그분 위에 내려와 경륜적으로 그분께 기름을 부으셨다. 이 경륜적인 영은 삼 년 반 동안 항상 그분과 함께 계셨다. 그리고 히브리서 9장 14절에 따르면 그분은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다. 그분이 하나님의 눈에 죄가 되셨던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시간에 이 영은 본질적으로가 아니라 경륜적으로 그분을 떠나셨다. 그분이 사람과 모든 피조물을 구속할 자격을 갖고 또한 구속의 영원한 효능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본질적이고 경륜적인 방식에 의해서였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의 구속을 성취할 자격이 있으시며 그분의 구속의 영원하고도 지속적인 효과가 보증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우리의 이상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우리가 전통적인 가르침들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간단히 말하고자 한다. 우리에게는 한층 더 깊은 진리가 있는 이상이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층 더 깊은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피상적인 가르침들을 따를 수 없을 뿐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 대하여

우리의 구속의 이상에 대해 말하기는 쉽지 않으며 하나님의 구원의 이상에 대해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일단 여러분이 빛 비춤을 받아 이러한 이상을 보게 되면 여러분은 거의 미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계시된 완전한 구원과 비교해 볼 때, 만일 우리가 이 문제에 있어서 빛 비춤과 이상이 부족하다면 우리의 말함은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주제에 대해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말하는 것과 다소 흡사할 것이다.

구원의 확신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 대한 우리의 이상의 첫 단계에서 우리는 빛 비춤을 받아 구원의 확신을 보게 되었다. 우리는 미치게 되었다. 가는 곳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구원받은 것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묻곤했다. 우리는 특히 목사들, 장로들, 집사들, 혹은 여집사들에게 이런 질문들을 하기를 좋아했다. 그 당시 나는 다소 젊은 호랑이처럼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많이 알지도 못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나는 약 25세쯤의 청년이었는데 60세쯤 되는 목사에게 『당신은 구원받은 것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했다. 분명히 그는 마음이 상했고 어떻게 그렇게 젊은 사람이 감히 자기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해 했다. 사실상 그는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많은 사례들을 접했다.

한번은 내가 1933년에 백여 명의 학생과 간호사들이 있는 장로교 간호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말씀을 전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나이 든 한 목사가 유일하게 예배당 뒷편 모든 학생들 뒤에 앉아 있었고 나는 앞에 서서 구원의 확신을 전파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말하고 있는 동안 고개를 저으며 동의를 표하지 않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내가 말한 것을 듣고 기뻐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였다. 말씀을 전할 그 당시 나는 젊고 아주 담대했지만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오늘날 내가 구원의 확신을 전파한다면 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구원받았습니까?』라고 질문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상 여러분이 나에게 내가 구원 받았는지 안받았는지를 질문한다면,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냐고 물어 볼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구원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단계들

하나님의 구원은 단순하거나 간단히 요약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 말할 때 무엇을 뜻하는지 반드시 설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는 많은 단계들이 있다.

예를 들어, 빌립보서 1장에서 바울은 그가 감옥에 있다고 말했는데 그는 성도들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의 넘치는 공급이 그에게 구원이 될 것을 가리켰다(19절). 이것은 바울이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으며 그가 성도들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의 넘치는 공급에 의해 구원받게 되리라는 의미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을 때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특별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단계들을 완전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는 여러분에게 구원받았는지의 여부를 물어 보고 싶다. 그리고서 나는 여러분이 아내의 얼굴에 있는 불쾌한 표정으로부터 구원 받았는지, 여러분의 모든 걱정들로부터 구원받았는지를 물어 보겠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며, 단계적인 구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죄로부터 구원받는 것과 사탄의 약탈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환경상의 숨막히는 것들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또 다른 문제이며 하나님의 형벌로부터, 그분의 징계로부터 구원받는 것 역시 또 다른 문제이다.

더욱이 사람에게는 세 부분이 있으며 각 부분마다 타락되었다. 영, 혼, 몸이 있는 세 부분으로 된 사람으로서 여러분은 각 부분에서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여러분의 몸은 타락한 상태로부터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여러분의 혼과 여러분의 영도 마찬가지로 타락으로부터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타락이 주로 여러분에게 가져온 두 가지 것들은 죄와 사망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구원받기 위해 죄로부터 구원받을 필요가 있으며 사망으로부터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항목들로부터 구원받을 필요가 있는지? 여러분은 여러분이 구원받을 필요가 있는 모든 것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러분은 지옥과 불못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정죄로부터 구원받을 필요가 있으며 사탄의 약탈과 환경상의 어려움들로부터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여러분은 또한 하나님의 징벌, 그분의 징계로부터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받게 할 필요가 있으며, 여러분의 혼을 부패와 사망으로부터 구원받게 할 필요가 있고, 여러분의 영을 사망으로부터 구원받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항목들 외에도 우리가 아직 언급하지도 못한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된 보다 많은 것들이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하고 만유를 포함한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 대해 본 것을 설명하려고 할 때 여러분은 앞에 언급된 모든 요점들을 다루는 것이 필수적이다.

복합적인 구원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의 구원을 위한 복합적인 문제이다. 그것은 죄사함과 죄씻음, 칭의, 화목케 됨, 구속, 거듭남, 거룩하게 하심, 변화, 형상을 본받음 및 영화롭게 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복합된 항목들이 구원과 일치한다. 그러한 복합적인 구원은 우리를 하나님의 정죄로부터 그리고 아주 많은 소극적인 것들로부터 구원한다.

첫째, 이 복합적인 구원은 여러분의 영을 구원한다. 여러분의 영을 구원하는 것은 거듭남에 의한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시작 단계이다. 그리고 이 시작 단계로부터 하나님의 복합적인 구원은 계속하여 성화와 변화에 의해 여러분의 혼을 구원한다. 이어서 이 복합적인 구원은 계속하여 여러분을 더이상은 주님과 다르지 않게 만드는 형상을 본받음과 영화롭게 됨을 포함한 변형에 의해 여러분의 몸을 구원한다.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이상을 갖기 위해 이 모든 요점들을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


위트니스 리
[장로훈련(Ⅱ) 주의 회복의 이상, "구속과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 대한 이상",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