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일은 옳은 것입니까?
믿는이들
Hannah , 2009-03-13 , 조회수 (3809) , 추천 (0) , 스크랩 (0)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일은 옳은 것입니까? 
 

 

질문: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일은 옳은 것입니까, 옳지 않은 것입니까?

답변 :


만약 옳다고 말한다면 두로의 제자들이 성령에 감동되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분명히 말하는데 성령이 틀린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옳지 않다고 말한다면 바울 안의 인도가 틀린 것인가(행 20:22-24)? 뿐만 아니라 아나니아도 주님으로부터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는 말씀을 얻었다(행 9:15, 25:26, 26:1-2). 사도행전 21장부터 28장까지는 모두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후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바울이 틀렸다면 그렇게 긴 여덟 장의 성경도 틀리게 된다. 그러나 제자들이 옳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성경의 분명한 말씀은 그들이 성령에 감동을 받은 것이며(21:4), 결코 혈기에서 나온 충동이 아님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자세하게 생각해 보기로 한다.

신약의 선지자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행 21:4).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행 21:10-11).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 14:3-4).
오늘 우리는 사역자의 첫 번째 요구 조건이 무엇인가를 보기로 하겠다. 우리가 이 문제를 보려면 반드시 처음부터 말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구약의 선지자를 보고 구약의 선지자의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구약의 선지자의 일

내가 기억하기로, 구약의 선지자의 일에는 세 항목이 있다. 첫째는 예언을 말하는 것으로, 곧 장래의 일을 미리 말해 내는 것이다. 많은 선지자들이 다 이러한 일을 했다. 둘째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어떤 선지자들은 예언을 말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한 가지 일, 곧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람에게로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그에게 알려 주는 일을 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지자와 제사장은 모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의 일을 했다. 구약의 때에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하나님 앞에 가서 경배할 수 없었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일은 반드시 제사장을 거쳐야 했다(대하 26:18). 제사장이 사람을 하나님과 나누었을 뿐 아니라 선지자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제사장은 사람이 하나님 편으로 가는 데 있어서의 중간 계급이고, 선지자는 하나님이 사람 편으로 오는 데 있어서의 중간 계급이었다.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사람에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모세오경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면 모세는 온 백성들에게 말하여 십계명을 그들에게 전해 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한 것이다. 셋째는, 구약의 선지자는 사람을 권면하고 안위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원칙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이것은 마치 오늘 아침 우리의 전파와 같다. 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여러분은 성결과 공의로 그분을 섬겨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이러한 것은 바로 구약의 선지자의 일이다. 그들은 예언을 말하고,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알려 주며, 또한 사람을 권면하고 안위하며 일반적인 원칙을 알려 준다.

신약의 선지자의 일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분명해야 할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 구약의 선지자는 세 가지 일을 했는데 신약의 선지자는 구약의 선지자만큼 많은 일을 하지 않는다. 신약의 선지자는 다만 구약의 선지자가 하는 첫 번째와 세 번째 일만 하고, 구약의 선지자가 하는 두 번째 일은 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이 일을 알지 못한다면, 비록 당신이 신약 안에 살고 있을지라도 실제적으로는 아직도 구약 안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신약의 선지자가 하는 것은 곧 구약의 선지자가 한두 번째 항목의 일을 취소한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가 한두 번째 항목은 사람들에게, 당신은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의 중요한 일이었지만 신약의 선지자는 이 일을 하지 않는다. 신약의 믿는 이가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선지자가 와서 대신할 필요가 없다. 신약의 믿는 이의 가장 큰 축복은 성령의 인도가 있는 것이다.

마치 히브리서 8장 11절이 말한,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와 같다. 당신에게 많은 자기 나라 사람(이웃 사람)과 형제가 있지만, 그들이 당신에게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해 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성령이 당신 안에 있고, 이 성령이 바로 당신의 선지자이기 때문이다. 구약에는 나단과 갓 등이 있고 많은 “나라 사람”들이 있었지만, 신약에서 우리는 이러한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

신약 안의 성령은 구약의 선지자의 이 항목의 일을 대치했다. 오늘날 교회 가운데 있는 선지자 중, 어떤 사람은 예언을 말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권면하고 안위할 수 있지만 당신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해 주는 개인적인 선지자는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당신에게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라고 명령한다면, 이 사람은 선지자가 아니라 무당이다. 아가보와 빌립의 네 딸은 모두가 선지자로 그들 또한 예언을 말했다(행 11:28, 21:8-11). 그러나 신약의 선지자의 주요한 일은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달하고, 하나님을 위해 말하는 것이다. 신약의 선지자는 예언을 하는 경우가 아주 적다. 신약의 선지자의 대부분의 일은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은 전일하게 선지자의 일을 말하는데, 3절은 신약의 선지자의 주요한 일이 사람을 세우고, 안위하고, 권면하는 것임을 분명히 말할 뿐 예언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예언은 부차적으로 하는 것으로 어떤 경우에는 할 수도 있지만 주된 일이 아님을 볼 수 있다.

개인의 일에 대해 선지자가 인도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신약이다. 신약에는 개인적인 선지자가 없다. 신약에서 각 사람은 모두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여러분에게는 선지자가 있는가?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선지자, 곧 그런 개인적인 선지자로 보는 것을 부끄럽게 느낀다. 사역자의 위험은 바로 너무 많은 선지자의 일을 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선지자가 이렇게 많으면 신약의 선지자의 정상적인 위치는 파괴된다. 신약의 교회는 지극히 영적인 사람을 개인적인 선지자로 채용하여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인도해 줄 필요가 없다. 그것은 성령의 일이지 선지자의 일이 아니다. 신약의 선지자의 주요한 일은 세우고, 안위하고, 권면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 하나님의 사역자가 해야 할 일이다.

사역자의 조건

사역자에게 최소한으로 있어야 할 조건은, 첫째 신약 안에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이 두 조건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만약 선지자가 없이는 당신이 형제들을 인도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알수도 없으며 더욱이 어떻게 교회를 도와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당신은 신약 아래 사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편지를 쓰고, 전보를 치고, 장거리 전화를 해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게 된다면, 이것은 선지자를 초청하는 것이며, 이것은 신약을 파괴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행전 21장을 알지 못한다. 나도 이전에는 알지 못했었다. 최근 이삼 개월 전에야 비로소 나는 우연한 기회에 분명해졌다. 바울이 두로에 있는 성도들의 간구에 답하지 않은 것은 성령의 느낌인가?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했지만, 그곳의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고했다. 바울은 왜 듣지 않았는가? 두로의 성도들이 틀리게 말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인가?

문제는 두로의 성도들이 말한 것이 옳은가 틀린가에 있지 않다. 문제는 두로의 성도들은 바울의 신약의 선지자가 되려 했고 그에게 개인의 길을 지시하려 했다. 이것은 신약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차라리 틀린 길을 걷고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더라도 신약의 믿는 이들로 그의 개인적인 선지자가 되지 못하게 했다. 그는 이웃 사람들로 그의 선지자가 되지 못하게 했는데, 이는 그가 신약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여기에서도 동일한 일을 한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보편적인 원칙의 일을 말할 수 있을 뿐 사람을 대신해서 개인의 길을 규정할 수 없다. 나는 형제들에게 반드시 순복해야 하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야 하며 헌신해야 한다는 등의 권면을 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원칙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 어느 형제에게, 모일(某日)아침 여섯 시에 어떤 곳에 가서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신약에 어긋난 것이다. 신약에서 우리는 사람의 권면을 들을 수 있지만 사람의 명령을 들을 수는 없다. 우리는 사람이 말한 원칙을 들을 수는 있지만 사람이 말한 세칙(細則)을 들을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는 신약의 성령의 축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 우리는 일을 할 때마다 반드시 성령이 안에서 먼저 역사하시는지, 주님의 사랑의 격려로 인해 이 일을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만약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면 당신은 사역자가 될 수 없다. 당신에게는 자격이 없는데, 이는 당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약의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개인적인 선지자가 되지 않음

신약에는 아주 보배로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둘째는 성령이 안에서 우리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것이다. 당신에게 만약 두 번째가 없다면, 당신은 유태인이요 낙오된 믿는 이인 것이다. 신약에서 성령이 믿는 이 안에 거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이다. 성령의 부어짐을 얻은 후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방언을 하고, 어떤 사람은 예언을 하며, 어떤 이는 계시를 얻는 일들이 많다. 만약 한 자매가 예언 혹은 계시를 얻었다면 당신은 그녀에게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예를 들어, 당신의 집에 어떤 일이 발생했다면 당신은 그녀에게 물으러 가서 그녀에게 계시가 있을 때 당신에게 알려 달라고 말해야 하는가?

당신이 만약 이렇게 한다면, 당신은 신약의 위치를 잃을 뿐 아니라 악한 영으로 하여금 들어와서 혼란하게 할 것이다. 구약에는 무녀(巫女)가 있는데, 무녀의 일은 선지자의 일과 원칙상 같은 것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알려 주며, 무녀는 악한 영의 뜻을 사람에게 알려 준다. 양자는 다 중간 계급인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무녀가 필요 없다면 이 사람은 분명 전문가일 것이다. 신약의 선지자에게는 이러한 중개의 일이 없고, 각 믿는 이들 모두가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왕래할 수 있다. 신약에서 무녀(巫女)가 있는 한,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 성령이 부어질 때 만약 각종 은사를 얻은 형제가 당신에게, 당신은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요 중간 계급이므로 당신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성령의 부어짐은 안에서의 성령의 인도를 대치할 수 없다. 그렇지 않는다면, 중간 계급이 산출되고 무녀가 산출되게 된다.

신약의 길

바울이 두로 성도들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신약의 완전한 권위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어떻게 되든지간에 그는 올라가야 한다. 바울은 두로 성도들이 말한 것이 성령의 감동이든 아니든 상관치 않았는데,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뜻 알기를 배우려 한 것이다. 이것은 신약 안에서는 결코 다른 사람이 당신의 길을 알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당신의 길을 알 수도 있지만 감히 당신을 인도하지 못한다. 내가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을 자신이 아는 것과 비교할 수 있지만, 나 자신은 주님 앞에서 또한 반드시 하나님에 대해 인식한 바가 있어야 하며,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의 뜻을 알아야 한다.

우리 자신은 선지자인데, 이는 성령이 선지자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 면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선지자가 되는 것을 거절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가정의 일, 가야 할 길, 해야 할 일, 그리고 생활상의 크고 작은 일을 마땅히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는 당신이 만져서는 안 된다. 당신은 다만 성경이 말하는 큰 원칙만을 그에게 알려 줄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내가 볼 때, 성경의 교훈은 이러합니다. 그러나 당신 안에 성령이 있으므로 당신은 반드시 스스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라고 답변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형제자매를 성령과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 만약 어떤 형제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가서 행한다면, 이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우리들은 가서 다른 사람의 개인적인 선지자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지 말아야 하며 많은 사람들의 스승이 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람을 세우고, 안위하고, 권면하며, 사람들에게 성경의 원칙을 주고, 사람들에게 그들 안에 성령이 거하고 계시므로 스스로 그분께 구할 수 있다고 말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약의 선지자의 주된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히 여기사 우리로 신약의 길에서 행하게 하시기를 원한다.(워치만 니 전집 제 2집 22권, 제 32장)

신약 시대에서는 각 사람 모두 직접 하나님을 인식해야 함

신약이란 무엇인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당신은 직접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께 구하여 물을 수 있으므로 옆에 있는 형제에게 무엇을 물을 필요가 없다.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으므로 다른 사람을 의지해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바꾸어 말하면, 옆 사람을 선지자로 삼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각 사람이 다 직접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나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어떤 일에 대해 중보 기도를 요청하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저렇게 하는 것이 좋을지를 묻는 편지를 얼마나 많이 받는지 모른다. 그들은 거기에서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니토셍을 선지자로 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서 구하며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니토셍이 하나님께 묻고 우리에게 말해 주면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형제자매들이여, 이것이 구약이며, 선지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형제들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아니다. 구약의 사람은 단지 형제의 말만 들었다. 신약의 그리스도인은 형제의 말을 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도 주의해야 한다. 나는 당신이 형제의 말도 듣지 말고 성경도 보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이외에도 성령의 인도가 추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모세와 엘리야는 다 사라졌다. 이제 당신에게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알려 줄 사람이 필요 없다. 당신은 자신 안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은 안에서 당신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 준다. 만일 성령의 인도가 없다면 선지자가 말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어떤 사람이 선지자인가? 나를 대신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이다.

예전에 나는 바울이 그때 왜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려고 했는지를 분명히 알지 못했다(행 21:4, 10-14). 많은 사람이 그를 막고 그로 가지 못하게 했으나, 그는 여전히 갔다. 그는 왜 가려고 했는가? 바울이 가야 신약의 원칙을 보존할 수 있었다는 것을 나는 오늘 알았다. 왜냐하면 신약에는 사람을 대신하는 선지자가 없기 때문이다! 형제자매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을 말할 수 있지만 바울에게 그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려 줄 필요가 없었다. 바울이 그 당시에 가야 하는지 가지 말아야 하는지를 바울 자신도 알았다. 그 사람들은 한 가지 일을 더했는데, 곧 바울을 대신해 선지자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간에 그는 가기로 계획하고 갔다. 만일 바울이 그들의 말을 듣고 가지 않았는데 이 단락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었다면, 그것은 큰일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를 희생하여 신약의 원칙을 보전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율법과 선지자는 이미 사라졌음을 알게 했다.

우리의 신앙에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율법과 선지자를 더할 수 없다. 주님 자신이 우리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마땅히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게 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자주 나에게 어떤 일에 대해 묻는데, 나는 항상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면 된다고 말한다. 모든 구원받은 사람은 다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아마도 당신의 생각과 느낌이 매우 혼란하고 생각이 복잡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성령의 인도를 듣지 못할지도 모른다. 만일 당신의 마음이 순수하다면 당신은 반드시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 5:8). 그러나 어쨌든 간에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얻을 수 있으므로, 다시 율법과 선지자를 더할 수 없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사 이 공과를 배우게 하시길 원한다. 먼저 성령으로부터 계시를 얻고, 그다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죽은 언약이 아니라 살아 있는 언약이다.(워치만 니 전집 제2집 23권,제 75장)

바울과 아가보(인도에 관해)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행 21:10-14).

하나님은 교회가 개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인도를 받을 책임을 지도록 결코 허락하지 않으신다. 아가보는 선지자이며 또한 아주 열심이 많은 자였다. 그러나 그는 젊고 체험이 없으므로 급하게 바울에 대한 인도를 나타내려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한 방면으로 사람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명한 인도가 필요함을 발견한다. 그러나 다른 한 방면으로 교회가 뒷받침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그리스도인 무리는 “우리가 교회이므로 당신은 반드시 우리에게 순종해야 한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선지자의 음성이 그 영에 앞서 사람에게 임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로마 천주교가 될 것이다. 소위 “교회”는 자주 이렇게 그의 권위를 사용한다.

성령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그분은 다른 사람에게 말함으로 그 사람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은 나를 소홀히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반드시 영 안에서의 간증을 통하여 동시에 나로 알게 하실 것이다. 성령은 나로 알게 하실 것이며, 나는 교회를 통하여 인도를 얻어야 한다. 이럴 뿐만 아니라 그 인도는 그분이 나에게 이미 주신 빛이나 과거에 받은 부분적인 인도와 반대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그분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성령은 나의 영으로 분명하게 하실 것이며, 나의 영은 교회가 하는 말에 대하여 반응을 갖게 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의 영 안에 확증하심이 있을 것이다. 성령은 항상 나로 교회를 통하여 인도를 받을 것인지의 여부를 알게 하실 것이다. 먼저 선지자가 나에게 와서 하나님이 내가 하기를 원하시는 바를 알려 주는 것은 구약 시대의 일이지 신약 시대의 일이 아니다. 만약 주님이 제자를 통하여 바울에게 인도를 주려고 하신다면, 그분은 바울의 마음이 그들의 말을 받을 수 있게 예비되도록 반드시 이 사실을 알려 주실 것이다. 이럴 때 바울은 반응을 보이고 순종할 것이다. 아가보의 행동은 하나님의 신약 가운데서의 인도 방식에 어긋난다. 결과적으로 바울은 이러한 제의를 따르지 않았다. 그 후로는 이러한 선지자에 대하여 다시는 들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도행전 28장 전체 가운데서 21장에서 28장까지 여덟 장을 사용하여 바울이 소위 잘못된 움직임을 취한 이후에 그가 무엇을 했는가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하나님의 뜻은 기본적으로 그가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선례가 될 수 있으므로, 그분은 바울이 가는 것을 허락하시고 이 일에 있어서 축복하셨다. 왜냐하면 바울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완전했기 때문이다. 선지자가 하나님이 먼저 바울에게도 동일한 일을 보여 주시기를 기다리지 않고 급히 개입한 것은 이 일이 발생하는 것을 재촉했다.(워치만 니 전집 제2집 26권,제 176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