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님이 온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셨는가?
그리스도
Hannah , 2009-03-13 , 조회수 (5816) , 추천 (0) , 스크랩 (0)

 

주 예수님이 온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셨는가? 
 

 

요한일서 2장 2절은 “저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말한다.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 구절에서 언급된 ‘죄’라는 단어가 원문에는 없다. 만일 번역된 성경대로 본다면,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고 우리 죄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도 위하시는 것이 되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주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은 이미 다 구원을 받은 것이다. 헬라어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을 위하심이니”.


신약을 읽는 사람이 주 예수님의 속죄하심과 대신하심의 문제를 깨닫기 위해서는 첫째로, 우리와 우리의 죄, 죄인과 죄인의 죄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둘째로, 모든 사람과 많은 사람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며, 셋째로는 죄와 죄들의 구분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와 우리의 죄, 모든 사람과 많은 사람, 죄와 죄들은 서로 각각 다르고 차이가 있다. 성경에서는 수차 우리에게 주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번도 주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 적은 없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말한다. 바울은 결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지만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죽지는 않으셨다. 만일 주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면 당신이 그분을 믿든 안 믿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죄의 문제가 다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분 안으로 들어갈 때 당신은 그분의 대신하심을 얻게 되고 그분의 속죄함을 얻게 된다.

성경에서 주 예수님이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도 말하지만, 그때마다 성경은 그분이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 그저께 저녁 한 형제가 성경 한 구절로 나를 테스트했다. 그는 왜 히브리서에서는 주 예수님이 죄를 위해 자신을 드렸다고 말하느냐고 물었다. 히브리서 9장 28절 :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이것을 보았는가?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죄를 담당하신 것을 말할 때 모든 사람의 죄를 담당했다고 말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했다. 영어로 모든 사람은 ‘all’이고 많은 사람은 ‘the many’이다. 이어서 바울은 또 하나의 예를 들었다.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이것은 보혈로 사신 바 된 사람들이자 계시록 7장의 셀 수 없는 사람들로서 많은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들의 죄를 위하여 드리셨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성경 말씀에는 함부로 쓰여진 것이 하나도 없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셨다고 말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많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마태복음 26장 28절 말씀을 기억하라. 주 예수님은 잔을 가지시고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다. 여기서도 모든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많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만일 모든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셨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주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뿐이다. 이 말씀은 주 예수님의 죽으심이 공개적인 것으로서 다만 모든 사람이 그분의 죽음의 유익을 얻을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만일 오늘 이 자리에 구원받지 않은 분이 있다면, 주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하겠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주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당신이 원할 때 주 예수님의 죽음의 효능이 당신에게 임하고 당신의 분깃이 된다. 그러나 당신이 그분 안으로 들어와야 주님의 죽음의 효능이 당신의 것이 되고 당신의 소유가 된다. 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고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을 주의해야 한다.

또 두 구절을 읽어 보기로 하자. 로마서 5장 18절과 19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한 번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원문 참조).

 

이 두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여 주의 깊게 이 말씀을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두 구절이 신약 전체에서 가장 어려운 구절임을 인정할 것이다. 우리는 다음 용어들을 주의해야 한다. 첫째로 18절은 ‘모든 사람’을 말하고, 19절은 ‘많은 사람’을 말한다. 둘째로 헬라어에서는 18절에 ‘Eis’라는 단어가 있다. 영어로는 ‘to’ 혹은 ‘toward’라고 번역하며 ‘ … 에게’ 혹은 ‘ … 을 향해서’라는 뜻이다.

 

나 개인은 이것을 ‘에게’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비록 이 단어를 사용하면 중국어에서는 별로 안 좋은 문장이 되지만, 전체의 의미를 고려해서 추가해야 할 것 같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한다. “한 번의 범죄로 모든 사람에게 정죄가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의롭다 하심을 입어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이제 여기서 잠시 시간을 들여 주의를 기울여 보기로 하자. 18절은 ‘한 번’을 말하고 19절은 ‘한 사람’을 말한다. 한 번의 범죄는 아담의 범죄를 가리켜 말한다. 아담의 한 번의 범죄로 모든 사람에게 정죄가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한 번의 범죄가 모든 사람의 정죄받음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보았는가? 한 번으로 족하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한 번 돈을 벌 때 많은 것을 살 돈이 준비되는 것과 같다. 한 번의 범죄로 모든 사람에게 정죄가 이르렀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번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으로 모든 사람에게 의롭다 하심이 입혀졌고 생명에 이르게 하였다. 그러므로 ‘ … 에게’를 생략하는 것은 매우 합당하지 않다. 만일 ‘에게’라는 말이 없으면 한 번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으로 모든 사람이 다 의롭다 하심을 얻고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 된다. ‘에게’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준비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오늘 정부가 현금 교환을 위해 미리 준비하려고 많은 지폐를 중앙은행 창고에 인쇄해 둔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이 현금으로 바꾸려 한다 하더라도 준비된 것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18절에서 모든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19절은 이와 달리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많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 사람 곧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당신은 그 이유를 아는가?

 

내가 여러분에게 농담 같지만 솔직한 말을 하겠다. 육 년 전에 내가 처음으로 ‘많은 사람’과 ‘모든 사람’을 읽어 냈을 때 바울에 대해 약간의 염려를 가졌었다. 원문 성경을 찾아보면서 나는 만일 바울이 사용한 단어가 중국어 성경에서 사용한 단어와 같다면 문제가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 단어가 ‘모든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이기를 바라면서 기도했다. 다행히도 찾아본 결과 그 단어는 ‘많은 사람’으로 되어 있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인이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그렇게 큰 장애가 되지 않으나 그다음 말씀은 더욱 중요하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는 말은 모든 개개인이 다 구원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입었기 때문에 복음을 전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말 속에는 믿든 믿지 않든 영접하든 영접하지 않든 별 상관이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았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도 구원을 받은 것이 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역사로 인해 실지로 얻게 되는 그것은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여러분은 ‘많은 사람’과 ‘모든 사람’을 구분해야 한다.

동시에 여러분은 ‘우리’와 ‘우리의 죄’를 구분해야 한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 3절은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한다. ‘우리’를 위함은 예비이고 ‘우리의 죄’를 위함은 실지적인 것이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도 복음을 전할 수 있지만, 그는 다만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으시도록 보내셨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옳다. 그러나 오직 은혜를 입은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도록 보내셨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와 주 예수님과의 관계가 죄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은 친히 나무에 달려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여기에 분명한 구원이 있다. 죄인에 대하여 당신은 그에게, “주 예수님이 당신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 “주 예수님이 당신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내가 한 가지 간단한 비유를 들면 여러분은 금방 내 말을 깨달을 것이다. 가령 내가 어떤 사람에게 빚을 지고서 갚을 돈이 없는 것을 알고 심(沈) 형제님이 상당한 금액을 상해 은행의 나의 구좌 번호인 51번으로 입금시켰다고 하자. 그러고 나서 내게 “아무개 형제님, 내가 당신의 은행 구좌에 얼마의 금액을 입금시켰으니 그것으로 당신의 빚을 갚으십시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하자. 그는 자신을 희생하면서 나를 위해 돈을 준비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 빚이 갚아졌는가를 여러분에게 묻겠다. 지금 내 은행 구좌에 돈이 있기 때문에 빚을 갚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아직 빚을 갚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친히 은행에 가서 돈을 찾아 빚을 갚았을 때, 나는 심 형제님이 내 빚을 갚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죽음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것이다. 내가 주 예수님을 영접할 때 그분은 내 죄를 위하여 죽으신 분이 된다. 그러므로 형제여, 당신이 요한일서 2장 2절을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그 번역을 주의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을 위하심이라”. 보라, 그의 사도를 통해 성령이 사용하신 용어는 얼마나 정확한가! 주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는데, 이는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을 위한 것으로서 이 세상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분의 죽으심을 얻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여러분은 여기에 ‘죄’라는 단어를 추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점일획이라도 더하거나 덜할 수 없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죄와 죄들의 구분이다. 우리는 주 예수님이 온 세상 사람들의 죄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죄들은 우리의 모든 죄악과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이기 때문이다. 만일 주 예수님이 온 세상 사람들의 죄들을 위해 죽으셨다면, 모든 사람의 죄악이 일제히 다 제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믿든 믿지 않든 다 구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아주 조심스럽게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성경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한다고 말했을 뿐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여기의 죄는 단수로 되어 있다. 죄 문제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고 또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나가는 것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추상적으로 죄 문제를 처리한 것을 말한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죄는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죄는 추상적인 것이었다(롬 5:12). 오늘 주 예수님도 추상적으로 죄를 가져가시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분이 우리 낱낱의 죄악을 담당하셨다는 말이 아니다. 만일 그분이 우리 낱낱의 죄악을 담당하셨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구원받은 것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조금도 틀리지 않고 빈틈이 없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그분을 찬양하자.(워치만 니 전집 2집 8권 제 6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