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14장 1절의 "십사만 사천"의 숫자는?
계시록 14장 1절은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라고 말한다. 과거에 많은 교사들이 이 숫자가 문자적인 것이냐 아니면 상징적인 것이냐에 대해 논쟁을 했다. 혹자는 십사만 사천이란 숫자가 문자 그대로의 숫자가 아니라고 말했고, 혹자는 계시록 2장과 3장의 일곱 도시가 문자 그대로인 것과 마찬가지로 십사만 사천이란 숫자도 반드시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계시록 14장 1절의 십사만 사천은 계시록 7장 4절의 십사만 사천과 동일한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으면 동일한 사람이 아닌가 등에 대해 의문이 있어 왔다. 따라서 다음은 이러한 문제들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1. 계시록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46에서 발췌한 내용
십사만 사천이란 숫자는 의심할 것 없이 문자적인 숫자이긴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비록 그 숫자는 문자 그대로이지만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떤 원칙을 적용해 봄으로써 우리는 이 숫자의 영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십사만 사천은 12곱하기 12의 천 배이다. 열둘은 하나님의 영원한 행정에 있어서 완성의 수이다. 일백 사십 사(21:17)는 열둘에다 열둘을 곱한 것인데 완성 중의 완성, 즉 가장 완전한 방법 안에서의 궁극적인 완성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그것은 이 궁극적인 완성의 일천 배이다.
열둘이란 숫자는 6 더하기 6으로 된 것이 아니라 3 곱하기 4로 된 것이다. 나는 이것을 근거 없이 경솔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인 숫자 열둘은 3 곱하기 4로 이뤄진다. 새 예루살렘은 열둘의 성(城)-열두 기초, 열두 사도의 이름(21:14), 열두 문, 열두 천사,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21:12), 열두 진주(21:21), 열두 달, 열두 종류의 과실(22:2)-이다. 그 성벽의 높이는 일백 사십 사 규빗(열둘 곱하기 열둘, 21:17)이며 그 면적은 일만 이천 스다디온(열둘의 천 배, 21:16)이다. 모든 방면에서 새 예루살렘은 열둘의 성이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 있는 열둘이란 숫자가 3 곱하기 4로 이뤄졌다는 것을, 그 성이 사면에 각각 세 대문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알 수 있다(21:13). 의심할 여지없이 삼이란 숫자는 삼일 하나님을 상징한다. 21장과 22장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묘사는 삼일 하나님을 계시한다. 22장 1절에서 우리는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를 본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분 자신을 그 성 안으로 분배하시는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을 본다. 이것이 삼일 하나님이다. 성 자체는 넷이란 숫자로 상징된 하나님의 피조물을 대표한다(네 생물, 4:6). 새 예루살렘에서 그것은 셋 더하기 넷의 문제가 아니라 셋 곱하기 넷의 문제이다. 오늘날 우리의 숫자는 일곱 교회, 일곱 등대와 같이 일곱이다. 그러나 영원 안에서 우리의 숫자는 삼일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상징하는 열둘-셋 곱하기 넷-일 것이다. 그러므로 열둘이란 숫자는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상징한다. 얼마나 놀라운가! 이 연합은 하나님의 경륜의 완성, 즉 하나님의 경륜적인 행정의 완성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열둘이란 숫자는 그분의 경륜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행정에서의 완성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그것은 단지 숫자 열둘이 아니요, 열둘 곱하기 열둘의 천 배이다. 열둘 곱하기 열둘은 하나님의 경륜을 위한 하나님의 행정에서의 완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위한 하나님의 행정에서의 완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노래 중의 노래, 만주의 주, 왕 중의 왕과 같은 명칭들과 비슷하다. 열둘의 열두 배는 완성 중의 완성을 의미한다. 이 완성은 잠시적인 것이 아니요 영원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행정에서의 완성이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열둘 중의 열둘, 즉 완성 중의 완성이 되리라는 것을 온 우주에게 선포할 것이다. 우리가 새 예루살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경륜을 완수하기 위한 하나님의 행정에서의 완성일 것이다. 그런데 14장에서 우리는 열둘 곱하기 열둘의 천 배, 즉 완성 안에서의 완성의 천 배를 갖는다. 이것이 십사만 사천이란 숫자의 의미이다. 십사만 사천의 첫 열매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있는 믿는이들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우리보다 앞서간 수많은 위대한 교사들의 어깨 위에 서 있다. 그들로 인해 주님께 감사한다. 이 숫자의 의미에 관해 우리가 본 것은 그들의 이해를 기초로 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보여 주셨던 것보다 좀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비록 십사만 사천이란 숫자가 문자적인 것일지라도 그것은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살아 있는 모든 이기는 자들이 영원토륵 그분의 경륜을 완수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행정의 완성의 일부라는 것을 말해 준다. 살아 있는 이기는 자가 된다는 것은 커다란 문제이다. 처음 익은 열매가 되는 것은 영원토록 그분의 경륜을 완수하는 하나님의 행정의 완성을 위해 있는 것이다.
2. 워치만 니 전집, 제1집 제16권, 메시지 7에서 발췌한 내용
계시록 14장 1절의 십사만 사천은 과연 누구인가? 계시록 7장 14절의 십사만 사천과 동일한 사람들인가? 7장의 십사만 사천은 14장의 십사만 사천과 동일하지 않은 두 무리의 사람들인데,
(1) 7장 4절의 그 무리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된 사람들이며, 14장 1절의 무리들은 땅 위에서 구속받은 사람들이며,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받은 이들이다(4절).
(2) 7장 4절의 사람들과 14장 1절의 사람들이 받은 인이 동일하지 않은데 전자가 받은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이며 이것은 구약에서 사용된 명사이다. 후자가 받은 것은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으로(14:1) 이 이름은 교회의 이름과 관련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틀림없이 교회의 사람이다.
(3) 7장 4절의 사람은 하나님의 많은 종들이지만(3절), 14장 1절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14장 1절의 마지막에 ‘아버지’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4) 계시록 전체에서 매번 주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칭할 때는 다 교회와 연관될 때이며(1:6, 2:27, 3:5, 21) 이스라엘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없다.
(5) 14장 1절의 사람들은 어린양과 관련이 있다(그들은 어린양과 함께 서 있고 어린양의 이름을 가졌으며 어린양에게 속했다). 그러나 7장에서 주님은 다만 한 명의 천사로써 구약의 사자의 지위로 돌아가셨다.
(6) 14장 1절의 사람들이 부르는 것은 새 노래였지만(3절), 7장 4절의 사람들은 단지 옛 노래만을 부를 수 있었을 따름이다.
(7) 14장 1절의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몸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들이었지만(4절),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이렇게 행하면 저주를 받는다(출애굽기 23장 26절, 신명기 7장 14절, 사무엘상 2장 5절, 시편 113편 9절은 다 생육할 수 있는 것이 축복이며 그렇지 못할 때는 저주임을 가리킨다. 사사기 11장 38절에서 39절은 처녀로 죽는 것을 애통하게 여기는 것을 언급한다).